220. 무신의 환생
흑천궁 앞마당에 다시 무인들이 모였다.
무너진 담장, 부서진 지붕, 떨어져 나간 창문…….
정말이지 한차례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것만 같은 전경이었지만, 흑천궁 앞에 도열한 무인들의 기도는 평소보다 훨씬 단단했다.
원래 비가 온 뒤에 땅이 굳는다지 않던가?
투혈권왕이 찾아와 한바탕 난리를 칠 때는 정신이 없었지만, 모든 상황이 종료되자 무인들은 다시 예전의 흑천련 기세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포박된 채로 무릎 꿇은 반역자들.
사예린과 권왕계의 호신위들이었다.
그들 외에도 월희계와 권왕계 소속의 무인들은 아래쪽 내원에도 대거 끌려 나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사예린은 표독스러운 눈길로 계단 위에 선 이자권을 노려보았다.
“더 이상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죽여라!”
“마음이 아프구나.”
이자권이 어딘지 슬픈 눈길로 대꾸했다.
그 표정은 진심을 담은 듯 보였다.
하지만 사예린은 차갑게 힐난했다.
“개소리! 네놈의 그 가면을 진작 벗겨 버렸어야 하는 거였는데! 너는 배신자다!”
“배신이라. 네가 따르겠다던 권왕은 마공까지 손을 댔다. 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가? 여기 있는 모두가 목격한 진실이다.”
“어떤 무공을 익혔든 마음이 돌아선 자는 너야.”
사예린의 눈빛은 야차와 같았다.
그 어떤 말로도 그녀를 설득할 수 없을 듯했다.
그녀의 눈빛이 조금이나마 부드러워질 때는 심원 담장에 내걸린 투혈권왕의 수급을 바라볼 때뿐이었다.
그때만큼은 그녀의 눈빛이 처연해지면서 모든 것을 잃은 표정이었다.
아니, 그 반대로 모든 것을 포용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쨌거나 이자권은 그 모습을 보는 게 괴로웠다.
자신에게는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눈빛.
마음을 주지 않는다면 힘으로라도 빼앗으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힘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이자권이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자, 연리하가 슬쩍 나섰다.
“련주님, 시간을 끌 수 없는 일입니다. 어느 쪽이든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지금 무림맹이 본 련을 치는 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말투는 정중했지만, 이자권은 그것이 재촉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느 쪽이든 결단을 내리라 했지만, 참수하라는 명령이나 다름없다는 것도.
그럼에도 이자권은 한 번 더 사예린에게 물었다.
“끝까지 내게 맞설 생각인가?”
“흥. 하늘 아래 너와 내가 같이 숨 쉴 수는 없다.”
살기가 풀풀 휘날리는 목소리.
저 아름다운 얼굴로 저토록 독한 말을 내뱉을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연리하가 얕은 한숨을 내쉬고는 교패에게 물었다.
“반역자는 내부 규율에 따라 어찌 처리하는 것이 옳은지요?”
교패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유 불문하고 즉결 참형이오.”
이제 모든 무인들의 시선이 이자권에게 향했다.
특히 연리하의 눈빛은 강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어서 죽여라. 이 답답한 허수아비야!’
속으로 외치는 소리가 이자권의 귀에 들리는 듯했다.
부회주 진회균마저 나섰다.
“련주님. 쉽지 않은 결정인 건 이해합니다만, 무릇 지도자는 신상필벌이 분명해야 합니다. 옛정을 생각해서 규율을 무시하신다면, 필시 이를 악용하는 자가 나타나 후환이 생길 터. 용단을 내리시길 바랍니다.”
이자권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장원이 쥐죽은 듯 고요했다.
바람 부는 소리만 들린다.
마침내 이자권의 입이 떨어졌다.
“무림맹이 본 련을 침공한 상황에 너희들은 힘을 보태기는커녕 반역을 도모해 혼란을 가중시켰다. 힘을 합쳐 적과 맞서 싸워도 모자랄 판에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켰으니 그 죄는 엄중히 추궁해야 마땅할 것. 반역에 참가한 자들은 모두 참형에 처하고, 특히 책임이 큰 이 공녀와 권왕전의 호신위들은 수급을 정문에 효시해서 만인의 본보기가 되게 하라!”
“존명!”
혈랑대가 일제히 대답하더니 각각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사예린과 호신위들 앞에 서서 검을 뽑아 들었다.
차아앙!
창공을 가리킨 검신이 태양의 뜨거운 기운을 품었다.
* * *
“하아암!”
흑천련 외문 수문장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옆에 있던 젊은 수문무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찌 이리 태연하십니까?”
“뭐가? 태연하지 않을 건 또 뭔데?”
수문장이 한쪽 눈썹을 성큼 치켜 올리며 쏘아붙이듯 물었다.
수문무사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쯤 심원에서는 반역자들 판결이 진행되고 있을 거예요.”
“그런데?”
“걱정 안 되세요? 이러다가 본 련이 무림맹에게 패망하면…….”
수문무사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겠다는 듯 목소리를 흐렸다.
수문장이 피식 웃었다.
“내란이 있었지만 비교적 빨리 정리가 됐잖냐? 뭐, 월희계와 권왕계가 갑자기 몰락해서 전력에서 이탈한 게 아쉽긴 하지만. 본 련이 그리 쉽게 무너지진 않을 거다. 걱정 마라. 그런 걱정은 네가 아니라 위에서 하는 거다.”
“그럼 전 무슨 걱정하면 됩니까?”
“자고로 우리 같은 수문무사는 그저 내 앞에 무지막지 강한 놈이 나타나지 않길 바라는 걸로 충분…….”
말을 꺼내던 수문장이 흠칫거리고는 장창을 움켜쥐었다.
그의 태도가 갑자기 변한 것을 깨달은 수문무사도 얼른 전방을 보고는 표정을 굳혔다.
“수문장님, 저 사람들…….”
“여기로 오고 있군.”
서호에서 흑천련 정문으로 오는 길은 외길이다.
그 외길을 따라 묵묵히 걸어오는 두 사람.
두 사람 모두 죽립을 눌러썼는데 풍겨 나오는 기운이 범상치가 않다.
조금 전 수문장이 말했던 유일한 걱정거리가 현실이 된 것이다.
“제길, 강한 자들이네.”
누굴까?
저토록 강한 기도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자들이.
점점 다가올수록 그들의 강맹한 기운이 느껴진다.
마침내 지척에 다다랐을 때, 수문장이 호기롭게 나서며 소리쳤다.
“멈추시오! 소속과 신분을 밝히시오!”
하지만 죽립인들은 멈추지 않았다.
대신 더 가까이 다가와서는 공력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비켜라.”
그 목소리에는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 있었다.
마치 목소리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누, 누구……?”
“본 련의 주인이다.”
마침내 죽립인 중 한 명이 검지로 죽립을 스윽 밀어 올렸다.
강렬한 인상의 중년 사내.
그는 바로 흑천련주 태청강이었다.
비록 중년의 외모를 가졌지만 그의 실제 나이는 예순이 훌쩍 넘었다.
다만 안타깝게도 수문장은 흑천련주의 얼굴을 알지 못했다.
평소 가까이에서 볼 기회도 거의 없었을 뿐더러, 흑천련주는 면사로 얼굴을 가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주, 주인이라니…… 대체……!”
하지만 수문장은 그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죽립인이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갈수록 자신도 모르게 옆으로 주춤거리며 물러날 뿐이었다.
죽립인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흑천강신기의 영향 탓이다.
그렇게 수문장과 수문무사 사이로 태청강의 모습을 한 적비연이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갔다.
* * *
‘진천, 곧 너의 뒤를 따라갈게.’
사예린이 처연한 표정으로 심원 담장에 내걸린 투혈권왕의 수급을 보았다.
그녀의 눈자위가 촉촉하게 젖어 들어갔다.
시퍼런 칼날이 당장에라도 떨어질 것처럼 예기를 뿌려댔지만, 두려움이나 분노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언제나 함께 해왔던 투혈권왕 진천과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했다는 상실감이 더 컸다.
“참(斬)!”
슬픔이 가득한 그녀의 얼굴 위로 마침내 칼날이 공기를 가르며 떨어져 내렸다.
칼을 휘두르는 혈랑대주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현재 흑천련의 주인은 이자권이었고, 그는 주인의 말을 충실히 따를 뿐이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날아든 한 줄기 빛이 그가 내려친 검면을 때리는 게 아닌가?
따아아앙!
그 힘이 어찌나 강한지 혈랑대주는 손에서 검을 놓치고 말았다.
휘리리리릭! 푹!
부르르르……!
허공을 가르면서 날아간 검이 이자권의 뺨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흑천궁 기둥에 깊숙이 박혔다.
“……!”
순간 장내에 정적이 찾아들었다.
잠깐의 호흡이 지나고 혈랑대주가 휙 돌아서며 소리쳤다.
“누구냐!”
차차차차차앙!
심원에 모여 있던 무인들이 일제히 도검을 뽑아들며 기도를 끌어올렸다.
처처처처처척!
동시에 좌우로 나눠선 철기대도 가운데로 몰려들면서 장창을 앞세웠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곳.
심원 정문 사이로 두 사람이 자박자박 걸어 들어왔다.
이자권이 이맛살을 구기고는 물었다.
“어디에서 오신 고인이시오?”
조금 전 그가 보인 신위는 분명 상당한 수준이었다.
섣불리 나섰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 있었기에 그는 최대한 예의를 차렸다.
한편으로는 사예린의 죽음을 잠시나마 미룬 것에 안도하기도 했다.
비록 힘으로라도 쟁취하고 싶은 아름다움이었지만 진심으로 그녀를 좋아한 것도 사실이었기에.
죽립을 눌러쓴 적비연이 앞을 막아선 무인들을 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비켜라.”
“……!”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한 목소리.
무인들은 심후한 공력이 담긴 목소리에 움찔거리며 놀랐지만 쉽게 물러나지도 않았다.
한편 눈치 빠른 몇몇 무인들은 죽립인의 목소리에서 익숙한 느낌을 가졌다.
그들의 동공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물론 이자권을 비롯한 수뇌인사들도 마찬가지.
‘이, 이 목소린……!’
이자권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반사적으로 연리하를 휙 돌아보았다.
연리하 역시 충격을 받은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는 내심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럴 리가. 분명 내 손에…….’
연리하가 두 눈에 힘을 주고는 죽립을 눌러쓴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적비연이 한 걸음을 내디뎠다.
“어어어……!”
곳곳에서 신음 같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놀랍게도 적비연이 능공허도를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한 걸음 한 걸음 마치 투명한 계단을 밟고 올라가듯 허공으로 상승했다.
정말이지 수 갑자의 내공이 쌓이지 않고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마침내 심원의 허공 복판까지 이동한 적비연이 발아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실망이구나. 이젠 네 사부도 알아보지 못하느냐?”
“……!”
그 순간 무인들의 머릿속에서는 장원 복판에 혜성이라도 떨어진 것만 같은 충격이 전해졌다.
“사, 사, 사부님?”
이자권이 두려움 가득한 표정으로 더듬거리자, 연리하가 발끈하며 나섰다.
“정신 차리십시오! 지금 저자는 감히 돌아가신 사부님을……!”
“닥쳐라! 연리하! 네놈이 나를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겠느냐!”
말을 마친 적비연이 눌러쓰고 있던 죽립을 휙 던져 버렸다.
연리하는 자신을 향해 암기처럼 날아드는 죽립을 단숨에 쳐냈다.
퍼억!
그의 손에 죽립이 조각조각 부서지면서 흩어졌다.
장원에 모인 무인들은 저마다 고개를 꺾어들고 입을 딱 벌렸다.
죽립의 그늘에 가려졌던 얼굴이 만천하에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은 그들이 아는 흑천련주 태청강이 틀림없었다.
“그, 그럴 수가. 이럴 리가 없다! 도대체 네놈은 누구냐? 사부님은 분명 돌아가셨다! 그러고 보니 네놈이 사부님의 시신을 갈취하고 인피면구를 덮어 쓴 것이로구나!”
연리하가 바락바락 소리치자 다른 수뇌인사들과 무인들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가능한 추측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들은 연리하의 추측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후우우우웅!
허공에 뜬 적비연에게서 강렬한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기 때문이다.
“이, 이건…… 흑천강신기!”
적비연 주위로 검은 기운이 넘실거렸다.
부정할 수 없는 흑천강신기.
적비연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이래도 할 말이 있느냐?”
“어, 어, 어떻게……?”
“연리하. 네놈은 날 배신하고 반역을 저질렀다. 그것도 모자라 사형제를 죽였다.”
적비연의 손가락이 담장에 효시된 투혈권왕의 수급으로 향했다.
연리하는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 거짓말이다! 저자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사부님일 리가 없습니다! 저는 분명히 봤습니다! 사부님의 몸을 관통한 상처를!”
“혹시 이것 말이더냐?”
촤아아악!
적비연이 입고 있던 상의를 찢어내자 탄탄한 상체가 훤히 드러났다.
과연 복부에는 한 뼘 정도 되는 상처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연리하의 표정이 격하게 흔들렸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이 입힌 상처조차 몰라볼 그가 아니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분명 죽었어야 할 련주가 어째서 저토록 멀쩡하게…… 아니, 더 강해져서 나타난단 말인가!
머릿속이 혼란한 가운데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연리하. 너는 본좌를 죽이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