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 하얀 악마
흑천련 무인들의 머릿속에 천둥이 울렸다.
이게 다 무슨 소린가?
연리하가 련주님을 죽이려 했다니?
그렇다면 저 관통상은 백발광인에게 당한 게 아니라 정말 연 공자가 찌른 것인가?
하면 죽어 버린 투혈권왕의 말이 전부 사실인가?
이제 장원의 모든 무인들은 연리하를 돌아보았다.
시선을 느낀 연리하가 눈자위를 떨며 물었다.
“왜, 왜 그렇게들 보십니까? 설마 저자의 말을 믿는 건 아니지요? 련주님! 어서 저자를 공격하라 명하십시오!”
하지만 이자권은 지금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였다.
그는 너무나 큰 충격으로 귀가 멍멍했다.
연리하가 자신을 향해 뭐라고 소리를 지르는지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어떻게 련주님이……? 도대체 연리하, 너는 무슨 짓을 한 거냐?’
방황하던 초점이 연리하의 두 눈과 딱 마주치자 그제야 고함을 내지르는 연리하의 목소리가 날아와 박혔다.
“련주님! 저자는 가짜가 분명합니다!”
“끄음.”
이자권이 침음을 흘리고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가짜라니.
흑천강신기를 눈앞에서 보고도 가짜라니?
흑천강신기는 태청강의 독문무공이다.
비급서조차 만들어놓지 않은.
즉, 태청강 본인이 아니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심공이란 말이다.
연리하가 다시 소리쳤다.
“련주님! 어서……!”
“연 공자!”
마침 버럭 소리친 사람은 교패였다.
그 역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표정.
그가 한 걸음 나서며 매섭게 쏘아 붙였다.
“우릴 바보로 아시오? 저분은 분명 련주님이시오!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알아듣게 설명해 주시오! 정말 공자가 련주님을 공격했소?”
“나도 궁금하군!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자네가 직접 흑천검을 받으며 유언을 들었다고 하지 않았나? 설마 전부 거짓이었나!”
보다 못한 진회균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연리하 앞에서 삿대질을 했다.
당황한 연리하가 주춤 물러났다.
“진정하십쇼. 부 회주님. 생각해 보십시오. 저런 관통상을 당한 사람이 어찌 저리 단기간에 멀쩡한 모습으로 살아 돌아올 수 있겠습니까? 가짜가 틀림없습니다!”
듣고 보니 그것도 그렇다.
진회균이 침음을 흘리며 턱을 괴자, 이번엔 정문 쪽에서 낭랑한 여인의 목소리가 솟구쳐 올랐다.
“저분은 분명 흑천련주님이십니다.”
모두의 시선이 다시 그쪽으로 돌아갔다.
죽립을 머리 뒤로 넘긴 여인은 바로 예홍이었다.
“당신은……?”
권왕계와 월희계의 무인 몇몇이 그녀를 알아보았다.
일전에 벽력적가에서 서로를 본 적이 있었기에.
예홍이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정식으로 인사하지요. 저는 벽력적가의 진천대주 예홍입니다. 저는 가주님의 지시로 흑천련과 교섭하기 위해 오던 중 귀련에 전란이 일어난 것을 목격하고 부득불 개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중상을 입은 흑천련주님을 본 가의 천상원주께 모셔갔고, 다행히 치료를 마치고 지금 귀환하신 겁니다.”
다시 장내가 술렁거렸다.
천상원주에게 데려갔다고 하니 예홍의 말에서 신빙성이 느껴진 것이다.
천상원이 어딘가?
최근까지만 해도 강호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종합 의원이 아니던가?
한데 그 책임자인 천상원주가 중상 입은 련주를 돌봐준 것이라면 이 상황이 어느 정도 납득이 된다.
게다가 련주가 실제로 얼마나 큰 부상을 입은 것인지 목격한 사람은 연리하밖에 없지 않던가?
진회균이 예홍을 보고 소리쳐 물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혹시 련주님을 해친 자가 누군지 보셨소?”
“봤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다시 한번 장내가 술렁거렸다.
진회균이 자못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흉수가…… 누구요?”
예홍은 천천히 손가락을 들어 한 사람을 가리켰다.
모든 이의 시선이 그녀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을 따라 이동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연리하가 당황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무, 무슨 소리를! 여러분! 설마 정말 저자의 말을 믿습니까? 저자는 벽력적가의 무인입니다! 저는……!”
“저자가 흑천련주님 등 뒤에서 칼을 찔렀죠.”
웅성웅성!
적비연은 나설 것도 없었다.
그는 이미 허공에 떠 있는 것만으로도 그 존재감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진회균이 눈썹을 역팔자로 그리며 돌아섰다.
“연 공자! 이러고도 더 할 말이 있으신가! 정녕 자네가 련주님을 배신한 것인가!”
“아니라니까요! 대사형! 아니, 련주님! 뭐라고 말씀 좀 해주십시오! 제가 정말 그랬다면 왜 흑천검을 대사형께 넘겼겠습니까? 제가 차지하려고 했겠죠. 안 그렇습니까?”
연리하의 시선이 이자권에게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자권은 한마디도 할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부님이 앞에 떡하니 계신데 자신이 뭐라고 말할 수 있겠나?
연리하를 감싸고 싶어도 마땅히 꺼낼 말이 없다.
이자권마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진회균이 더욱 목소리를 높였다.
“연 공자! 지금 자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기나 하……!”
“아이참, 더럽게 종알거리네. 후우.”
“뭐, 뭣이?”
진회균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는 연리하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연리하가 차가운 조소를 지은 채 귀를 후볐다.
“늙은 구렁이야. 내가 아니라잖아. 아니, 왜 내 말보다 저년 말을 더 믿는 거야? 짜증 나게.”
갑자기 돌변한 태도에 진회균은 입을 딱 벌린 채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했다.
“이, 이런…… 미친……!”
“다 된 밥에 이게 뭐 하는 짓이야? 그냥 대충 넘어가면 안 돼?”
“이노오오옴! 네놈이 정……!”
슈걱!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허공을 가른 연리하의 수도(手刀).
장내의 무인들 모두 눈을 화등잔만 하게 부릅떴다.
툭, 데굴데굴……!
츄아아아아!
거짓말처럼 잘려 나간 진회균의 목이 바닥에 나뒹굴고, 머리를 잃은 몸통은 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더니 쿵 소리와 함께 넘어갔다.
연리하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이자권을 돌아보더니 씩 웃었다.
“아이참, 그러게 왜 멀뚱거리고 보고만 있어요? 일이 골치 아프게 됐잖아요. 이 정도는 변호를 해줘야 할 것 아냐. 도대체 제대로 하는 게 뭐예요?”
이제 장내의 무인들은 저마다 입을 딱 벌린 채 꿈쩍도 하지 못했다.
연리하의 맹랑한 태도에 교패마저 사고가 정지되는 듯했다.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교패가 미간을 팍 구겼다.
“뭣들 하느냐! 연 공자를 포박하라!”
그의 명이 떨어지자 흑귀대와 철기대가 일제히 방향을 틀었다.
동시에 흑궁대가 담벼락과 지붕마다 날아올라서는 활시위를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연리하는 어느새 이자권 곁으로 다가섰다.
그가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뭐 해요? 진짜 보고만 있을 겁니까?”
“너, 너는 대체 어쩌려고……!”
“아, 정말! 대사형. 자꾸 이러실 거예요? 진짜 죽고 싶어요?”
흠칫.
이자권이 몸을 떨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다, 다들 무기를 거둬라. 사제는 잘못이…… 없다.”
새로 부임한 련주의 입에서 반대되는 명령이 떨어지자 무인들은 이제 어쩔 줄을 몰랐다.
흑천련이 세워진 이래 오늘처럼 혼란스러운 날도 없었다.
여전히 허공에 부유한 적비연은 아예 팔짱을 낀 채 돌아가는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교패가 다시 소리쳤다.
“대공자!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방금 연 공자가 부회주님에게 한 짓을 보고도……!”
“교 선생!”
이자권이 짜증 섞인 표정으로 버럭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지붕과 창문이 다르르 떨렸다.
교패가 바라보는 가운데 이자권이 뚝뚝 끊어지는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대공자라. 당신도. 내가. 련주로 보이지 않는 거요?”
이자권이 흑천검을 들어 교패를 가리켰다.
그제야 연리하가 만족스러운 듯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들 보았지? 흑천검을 들고 있는 건 바로 여기 계신 련주님이시다! 저기 가짜는 믿지 마라!”
이쯤 되자 적비연도 나서지 않을 수가 없었다.
“본좌를 앞에 두고도 그깟 흑천검 때문에 머릿속이 어지럽단 말인가? 자권, 네놈이 막내에게 어떤 약점을 잡힌 건지 모르겠으나, 그깟 목숨이 아까워 본좌를 배신하겠다는 것인가?”
웅혼한 목소리가 뇌리 가득 울린다.
아, 틀림없다.
하늘에 떠서 위엄을 땅에 뿌려대는 그는 틀림없는 련주 태청강이었다.
“머릿속이 좀 더 맑아지게 해주마.”
말을 마친 적비연이 손을 뻗자, 이자권의 손에 들려 있던 흑천검이 휙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능공섭물의 수법으로 흑천검을 낚아챈 적비연이 안광을 뿌리며 말을 뱉었다.
“자, 이제 흑천검이 내 손에 들어왔다. 이번엔 뭐라 할 건가? 자권!”
이렇게 되자 장내 무인들의 모든 살기가 이자권과 연리하를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연리하가 빙그레 웃으며 속삭였다.
“어떻게 하시겠어요? 명예롭게 죽겠어요? 아니면 비굴하게 살겠어요?”
“너는 대체…….”
“살던 대로 살아요. 아시겠지만 난 강해요. 비록 우리 둘뿐이지만, 발악이라도 하면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을 지도 모르죠. 하지만 죽음을 선택하겠다면 이 자리에서 바로 끝내 드리죠.”
이자권은 전율했다.
어쩌다가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젊은 시절의 패기와 꿈은 다 어디로 흘러갔을까?
어쩌다가 이런 녀석의 꼭두각시가 되어 죽음을 두려워하는 비겁자가 되었나?
하지만 관성이란 무서운 법이다.
이미 틀렸다고 생각하면서도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연리하의 목소리가 섬뜩하기만 하다.
그를 거역하기가 어렵다.
이제 선택해야 한다.
마지막까지 비굴하게 살아남을 것인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사부님의 뜻을 받들어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다.
죽어도 명예롭지는 못하다.
이 사달을 벌이고서 명예를 바란다면 과욕이다.
명예를 회복할 방법은 이제 없다.
그렇다면…….
’잠깐!
연리하가 바로 옆에 있지 않은가?
손만 뻗어도 닿을 거리!
이 정도의 지근거리라면 죽일 수도 있지 않을까?
찰나 스쳐 지나간 생각에 이자권의 가슴이 모처럼 뛰었다.
단 일수에 연리하를 죽일 수 있다면, 자신의 몸에 심어진 흑살고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손만 뻗어도 된다.
손만 뻗어도…….
“……사형? 대사형!”
순간 귀를 찌를 듯 들려온 소리에 이자권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이런 순간에. 맹하게 있지 말고 뭐라도 하란…….”
시끄럽다.
내가 그리 우습게 보인단 말이더냐!
네놈은 끝까지 나를 사형 취급조차 안 한단 말이더냐!
이자권은 나불거리는 연리하의 입술을 보면서 뱃속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연리하의 잔소리가 완전한 적막에 묻혀 버렸을 때, 그의 손이 움직였다.
타앗, 쉬이이이익!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본능처럼 날아간 이자권의 손은 연리하의 목을 뚫었다.
아니, 뚫었어야 했다.
피츗!
하지만 그의 손은 가느다란 선혈만을 남기고 허공을 찌르고 말았다.
모든 이가 눈을 부릅뜬 그 순간, 뒤로 살짝 물러섰던 연리하가 싸늘하게 웃었다.
“이래서 믿을 새끼 하나 없다니까.”
순간 연리하가 공력을 끌어올리자 장삼 자락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후우우웅!
찰나, 이자권의 몸이 흠칫 떨렸다.
곧이어 이자권은 지독한 복통을 느끼며 그 자리에 고꾸라졌다.
“크으으읍!”
조금 전 공력을 일으킨 순간, 연리하가 지니고 있던 흑살고가 죽은 것이리라.
그 바람에 이자권에게 심어진 흑살고도 반응한 것이다.
“쿠웨에에엑!”
바닥에 엎드려 피를 한 움큼 토한 이자권이 끔찍한 비명을 내질렀다.
갑자기 일어난 현상에 무인들이 저마다 눈을 휘둥그레 떴다.
더 이상 놀랄 일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계속해서 경악할 일만 벌어지고 있으니 정신을 차리기도 힘들었다.
“끄아아아악!”
모두가 놀라서 지켜보는 가운데 이자권은 전신을 기괴하게 비틀어갔다.
우둑……! 뚜두둑!
마침내 목이 완전히 돌아간 이자권은 온몸이 시커멓게 말라비틀어져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천하를 오시하겠다며 꿈꾸던 흑천련 대공자의 마지막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허무한 죽음이었다.
“흑살고……!”
교패가 신음처럼 중얼거리고는 연리하를 쏘아보았다.
연리하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좀 짜증 나네. 거의 다 된 밥이었는데. 사부님,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그리 빨리 회복했어요? 분명 뒈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적비연이 입매를 비틀었다.
“궁금하면 너도 뒈져 봐.”
“에이, 그건 싫어요. 아프잖아요.”
말을 마친 연리하가 일순간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츠츠츠츠츳!
새카맣게 윤기가 흐르던 그의 머리카락이 일순 새하얗게 탈색되는 것이 아닌가?
“저, 저, 저건……!”
무인들이 저마다 경악했다.
연리하의 머리카락은 어느새 광인들과 똑같은 색을 보이고 있었다.
연리하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궁금하네. 이번에 뒈져도 또 살아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