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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무적-222화 (223/301)

222. 하얀 악마

이자권이 죽을 때만 해도 흑천련 무인들은 생각했다.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절대 놀라지 않으리라.

인생을 살면서 놀라야 할 모든 일을 요 며칠간 다 겪었다고.

그런데 또 놀랐다.

연리하가 백발광인들과 흡사한 모습으로 변한 것도 모자라 이처럼 강맹한 기운을 내뿜다니.

연리하의 몸에서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는 기도만으로 전신이 따끔따끔할 정도다.

적비연도 놀라긴 마찬가지.

설마 연리하가 백발광인들과 관련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마디로 연리하는 흑천련주마저 속이고 다섯 번째 제자로 들어왔다는 거다.

아니, 어쩌면 순서가 바뀐 건지도 모르겠다.

제자가 된 다음에 저 신비로운 힘을 얻은 건지도.

워낙 밖으로만 싸돌아다닌 녀석이 아니던가?

하면 연리하는 무림맹과 한통속이라는 건가?

연리하마저 가후의 안배라면?

아니, 어쩌면 무림맹이 아닌 제삼의 세력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연리하는 지금 흑천련의 적이다.

적비연이 허공에서 스르르 내려왔다.

마치 강림하듯이 내려선 그를 위해서 무인들이 좌우로 벌어지며 공간을 내주었다.

적비연이 착 가라앉은 눈으로 연리하를 응시했다.

“한 가지는 분명하지. 네가 죽으면 그걸로 끝이라는 것.”

“에이, 사부님도 참. 내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으니까 그러죠.”

“그럼 어디 한 번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자꾸나.”

적비연이 말을 내뱉고는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방심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긴장했다.

확실히 연리하가 뿜어내는 기도는 범상치 않았다.

태청강의 몸을 얻었을 때, 적비연은 세상에서 무서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

무신이라 불리던 태청강이 아니던가?

흑천사왕 중에서도 단연 으뜸인 태청강의 몸이었다.

전신에서 힘이 넘쳐흘렀다.

세상에 이런 기운을 가진 사람도 있구나 싶었다.

그런데 거기에 지금까지 쌓아온 기운마저 더해지니 구름 위라도 거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이건 또 다른 벽을 보는 느낌이군.’

연리하에게서 뿜어지는 기도가 만만치 않다.

아무리 못해도 자신과 비슷한 수준은 될 것 같다.

‘이게 가후의 작품이라면…….’

도대체 무림맹은 지금 무슨 짓을 꾸미고 있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사람을 저렇게 인위적으로 만드는 게 가능하다고?

오래전 마교에서는 악랄한 대법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일시적으로 강하게 만드는 주술을 많이 이용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과 같은 방법이다.

대개 죽기 직전에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그마저도 사용했다가 주화입마에 걸리면 효과를 발휘하지도 못한 채 미쳐 버리는.

그런데 연리하는 평온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다.

연리하가 부드러운 눈길을 던졌다.

“사부님. 아마 저와 손을 섞고 나면 뿌듯하실 거예요. 청출어람을 느끼실 테니까요. 그래도 제가 직접 죽이고 싶진 않았는데…… 어쩔 수 없네요.”

“잔말이 많다. 실력이나 보여라.”

“정 원하시는 거라면.”

파앙!

말을 마친 연리하의 신형이 일순 사라졌다.

이형환위!

다음 순간 연리하가 씨익 웃는 얼굴로 적비연 코앞에 나타났다.

움직임이 벼락처럼 빠르다.

따아아앙!

연리하의 검과 적비연의 흑천검이 맞부딪치면서 기파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크헙!”

주변 무인들이 신음을 삼키면서 추풍낙엽처럼 날아갔다.

검을 맞댄 적비연과 연리하.

두 사람은 동시에 놀랐다.

‘이 정도라고?’

상대가 예상보다 강해서 놀란 건 연리하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알던 련주는 무신이라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이 정도로 강하진 않았다.

초절정 팔 단에서 구 단을 넘어가는 수준이었다.

한데 지금은 초절정의 극에 달한 것 같지 않은가?

‘이거 재미있네. 분명 뒤에서 찌를 때만 해도 이 정도 수준은 아니었는데.’

만약 흑천련주가 이런 수준이었다면 그때의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을 터다.

아니, 그래서 살아서 돌아온 건가?

모르겠다.

어쨌거나 지금 흑천련주는 자신이 알던 그 사부가 아니다.

파앙!

두 사람이 동시에 공력을 발출하면서 반대편으로 튕겼다.

콰가가각!

대리석에 깊은 발자국을 새기면서 두 사람이 멈춰 섰다.

그들이 내뿜는 기운과 갈려 나간 대리석 바닥의 잔해로 주변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 바람에 적비연과 연리하가 귀신처럼 스르르 모습을 감췄다.

적비연이 육합전성으로 말했다.

“흑궁단을 제외하고 모두 물러나라.”

“존명!”

우렁찬 대답과 함께 일단의 무리가 빠른 속도로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암회색 빛의 안개 속에서 연리하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울렸다.

그 역시 어디에서 소리가 울리는지 모를 육합전성이었다.

“하하하! 이 와중에 수하들을 살리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뭉클해서 눈물이 다 나네요.”

“틀렸다. 네놈을 죽이는 데 걸리적거리는 걸 치운 셈이지.”

“이야, 우리 사부님이 말발도 센 줄 몰랐습니다.”

“아직 네가 모르는 것 천지지. 하나씩 알려주마.”

“기대되는군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한쪽에서 안개가 일렁 움직였다.

다음 순간,

꽈아앙!

암회색 안개가 흩어지면서 합을 이룬 두 사람의 모습이 아주 잠깐 드러났다.

하지만 그마저도 흑천강신기가 뿜어낸 어둠 속에 금방 묻혔다.

콰가가각!

키기기긱!

두 자루의 검이 서로 마찰을 일으키며 이따금씩 불똥이 튀었다.

쩡! 쩌정!

어둠 속에서 연신 금속성이 터져 나온다.

아니, 금속성이라기에는 너무나 큰 폭음이다.

벽력이 내려치고 천둥이 연방 울리는 것만 같다.

지축이 뒤흔들리고 무너졌던 전각은 시름시름 앓듯이 더 허물어지고 있다.

그렇게 몇 합을 겨뤘을까?

심원을 에워싼 흑궁단과 아직 자리를 뜨지 않은 교패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어둠 속을 응시했다.

흑천사왕 중 한 명인 교패는 초절정 후단에 이른 고수인 만큼 둘의 움직임을 희미하게나마 볼 수 있었다.

흑궁단도 마찬가지.

주무기가 궁인 만큼 안력이 여느 무인들보다 훨씬 뛰어난 자들이다.

다만 적비연과 연리하가 너무 빠를 때는 간간이 움직임을 놓칠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 용호상박(龍虎相搏).

사람의 싸움이라고 볼 수 없는 광경이 아닌가?

검이 한 번 부딪치면 고막이 찢어나갈 것만 같았고, 강기가 주변으로 날아들면 포탄이 터진 것처럼 충격이 가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적비연의 전음이 흑궁단주 조신우에게 날아들었다.

[조 단주! 쏴!]

[존명!]

조신우는 토를 달지 않았다.

이대로 어둠을 향해 화살을 쏘게 되면 련주마저 위험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구의 명인가?

흑천련주가 직접 내린 명이다.

한 번 내린 명은 일절 반문 없이 따른다.

흑궁단주는 공력을 최대한 끌어 올려 시위를 당겼다.

그가 시위를 놓게 되는 순간 흑궁단원 전원이 시위를 놓을 것이다.

명을 내릴 필요도 없다.

시커먼 철시가 반짝 윤기를 발하는 순간,

패애애애앵!

조신우의 손에서 시위가 떠나갔다.

쒜에에에에엑!

빛줄기를 꼬리처럼 달고 날아가는 철시!

뒤이어,

패패패패패패애앵!

흑궁단이 시위를 놓는 소리가 천둥처럼 울린다.

쒜쒜쒜쒜에에엑!

벼락을 품은 것 같은 철시가 사방에서 어둠 속으로 날아간다.

어둠 속에서 싸우던 적비연은 시활안을 발동했다.

주변의 모든 감각이 느려졌다.

쒸이이이……!

어둠을 가르며 날아드는 철시.

강기가 맺힌 게 선명하게 보인다.

확실히 모든 움직임이 이전보다도 더욱 느려졌다.

태청강의 공력과 경험치를 흡수하면서 시활안 능력도 더욱 상승한 것이다.

갑자기 쏟아지는 철시는 연리하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분명 위협적이다.

그럼에도 흑궁단에 명한 이유는 한 가지.

놀랍게도 연리하가 조금 더 강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어쩌면 연리하는 초절정의 벽을 깨고 천해경의 경지에 이르렀는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변수를 이용해야 한다.

급작스러운 환경의 변화는 강자에게 더 불리할 수밖에 없다.

가만 놔두면 강자가 이길 것이 뻔하니까.

그리고 자신에게는 시활안이 있지 않은가?

무려 흑천사왕 중 일인인 조신우가 쏜 화살이다.

강기를 머금은 철시는 정확히 연리하의 뒤통수를 노리며 날아들었다.

이대로라면 철시는 그대로 연리하의 후정혈(後頂穴)을 뚫어 미간으로 튀어나올 터였다.

하지만 연리하는 철시가 삼 척 이내로 다가오자 고개를 비틀었다.

콰파파파팟!

강기를 머금은 철시가 연리하의 왼쪽 귓불을 찢으며 그대로 적비연의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적비연은 혀를 차면서 그대로 흑천검을 내질렀다.

구천일관시!

검붉은 강기가 일어나면서 그대로 연리하의 복부를 파고든다.

하지만 연리하는 생각보다 훨씬 민첩했다.

기합성과 같은 코웃음을 터뜨리더니 몸을 빠르게 회전하는 것이 아닌가?

파바바바밧!

구천일관시가 연리하의 옷자락만 찢어내고는 허공을 뚫었다.

찰나 사방에서는 철시가 폭우처럼 쏟아져 내렸다.

타타타타타아앙!

구천일관시가 철시 몇 자루를 튕겨낸다.

동시에 호신강기를 일으킨 적비연이 구천혼선결을 펼치자 쏟아지던 철시가 일제히 연리하를 향해 튕겨 날아간다.

연리하도 가만히 있진 않았다.

그 역시 왼손으로 태극권을 펼치듯 휘두르더니 자신에게 날아들던 철시들을 기공으로 제압해서 적비연에게 쏘는 것이 아닌가?

투타타타타앙!

기를 잔뜩 실은 화살 떼가 서로에게 날아들면서 마구 부딪쳤다.

몇몇 화살은 적비연에게 정면으로 날아들었다.

허리를 젖히자 화살 한 대가 아랫배를 살짝 스치고는 날아가 흑천궁 기둥을 박살 낸다.

콰아아앙!

그걸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두 번째, 세 번째 화살이 공간을 파고들 듯이 날아든다.

따아아앙!

흑천검이 화살 한 대를 튕겨내고 다시 이어진 화살은 어깨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지나간다.

콰다아앙!

바닥에 꽂힌 화살이 대리석을 산산조각 내는 소리가 울린다.

그러는 사이,

패애애애앵!

쒜에에에엑!

조신우가 두 번째 철시를 날렸다.

이어서 흑궁단 전체가 두 번째 화살을 재우자마자 시위를 놓았다.

패패패패패애앵!

쒜쒜쒜쒜쒜에엑!

공간을 가르는 화살만으로도 천지가 격동하는 듯하다.

적비연은 다시 시활안을 펼쳐 이어질 싸움에 대비했다.

한편 다른 무인들의 눈에는 이들의 싸움이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한 무더기 날아간 철시들을 순식간에 기공으로 제압해 상대에게 날려 보내다니.

그저 두 사람이 화살 무더기를 서로에게 마구 쏘아내며 주고받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콰콰콰콰콰콰아앙!

자연히 두 사람이 선 주변은 화살밭으로 변했고, 대리석 바닥과 전각 등이 산산조각날 수밖에 없었다.

심원에서 울리는 무지막지한 소음으로 서호 전체가 떨렸다.

마침내 심원 정문이 벌컥 열리더니 내원 총책인 곡불한이 달려왔다.

그는 앞서 련주가 나타났을 때 홀린 듯이 길을 터주었다가 심원에서 소란이 일어나자 서둘러 올라온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 역시 심원 복판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싸움에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이, 이게 대체 어찌 된……!”

“곡 당주 오셨소?”

“교 선생!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지금 련주께서는 누구와 싸우고 계시는 거요?”

“연 공자요. 그가 본 련을 배신했소.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우리 편이 아니었을 지도 모르겠고.”

“연 공자라니……? 대체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설마 연리하 공자를 말씀하시는…….”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소! 지금 형세가 백중지세이니 우리가 힘을 보탭시다!”

“알겠소!”

교패와 곡불한이 공력을 끌어 올렸다.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이더니 동시에 연리하를 향해 몸을 날렸다.

파파앗!

그렇게 두 사람마저 어둠으로 들어갔을 때, 조신우가 활을 거두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연리하. 대체 어느 수준이기에 내 궁을……!’

사람들은 조신우를 궁귀라고 불렀다.

무림맹에 신궁 축일공이 있다면, 흑천련에는 궁귀 조신우가 있었다.

궁에 소질 있다는 파천신군보다도 뛰어났고, 그를 가르친 유형백도 조신우에게는 비교할 수 없었다.

물론, 연리하가 다른 화살처럼 조신우의 철시마저 튕겨내진 못했다.

하지만 전부 피해냈다.

저 혼란한 어둠 속에서도.

“하지만…… 이젠 그것도 끝이겠군.”

흑천사왕이 한자리에 모였다.

흑천련주 태청강과 교 선생, 궁귀 조신우와 곡불한.

이 네 사람이 힘을 합치면 하늘도 무너뜨린다는 말이 있다.

꽈아아악……!

조신우가 다시 시위를 팽팽하게 잡아당겼다.

한편, 연리하는 어둠 속으로 뛰어든 교패와 곡불한을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흑천사왕이라. 이건 좀 어렵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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