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 열쇠
흑천련 내원에서도 북쪽 후원.
그곳에는 죽은 이의 혼을 기리는 사당이 있었고, 그 옆으로 크고 작은 비석들이 세워져 있다.
흑천련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자들, 혹은 공을 세우고 명을 달리한 무인들을 기리는 곳.
빽빽하게 세워진 비석 중에서도 제일 가장자리에 위치한 곳.
이제 막 만들어진 비석 앞에 한 여인이 교교한 달빛을 받으며 오도카니 서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보면 그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기에 누구라도 넋을 놓을 지경이었다.
백옥의 피부에 닿는 달빛은 녹아내리듯 그녀의 몸을 타고 미끄러졌다.
마치 여인이 온몸으로 받아낸 달빛을 주변으로 마구 뿌려대는 것만 같달까?
달빛이 저리도 어울리는 여인이 세상에 또 있을까?
화용월태(花容月態)의 자태를 뿜어내는 그녀는 바로 월희마녀 사예린이었다.
언제나 차가운 표정과 알 수 없는 말투 때문에 빙월마녀(氷月魔女)라는 별호로도 불리는 그녀.
하지만 지금 그녀의 표정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여인일 뿐이었다.
스륵.
허물어지듯이 주저앉은 그녀가 앞에 놓인 비석을 가녀린 손으로 쓰다듬었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을 어루만지듯.
하나 그녀의 눈빛은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그리움을 한가득 담았다.
“진천.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아. 네가 없다는 게.”
담담하게 말을 뱉는 그녀의 목소리가 후원에 조용히 울렸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고 싶은 말이 한가득인데.
막상 투혈권왕을 기리는 비석 앞에 앉으니 할 말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저 보고 싶고, 또 보고 싶을 뿐.
그냥 한마디라도 해줬으면.
단 한 번이라도 목소리만 들려줬으면.
아무 말이나 좋으니까.
아니, 말이 아니어도 좋다.
그냥 웃는 소리만 들려줘도 좋겠다.
투혈권왕이 호탕하게 웃는 소리.
그게 언제였더라?
진심으로 기분이 좋아서 웃는 소리를 들었던 것이.
늘 악에 받쳐 살아온 것만 같다.
그 언젠가 파락호들과 맞서 싸우고 둘만 남았을 때, 진천은 자신이 손을 잡으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앞으로 자주 웃자고.
힘들수록 더 자주 웃자고.
웃는 모습을 보면 힘이 난다고.
사예린은 조금 놀랐다.
그 기억을 한동안 잊고 있었다는 게.
곁에 있을 땐 몰랐는데, 다시는 볼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나니까 그 소중함이 사무치도록 마음에 와 닿는다.
그립다.
투혈권왕의 목소리가. 그의 웃음이.
하지만 이젠 만질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
그와의 기억은 영원히 자신의 마음속에 봉인되리라.
결국 참고 참았던 눈물이 다시 뺨을 타고 흐른다.
달빛을 품은 눈물이 백옥 같은 피부를 타고 흘러내리다가 턱 끝에서 뚝뚝 떨어진다.
사예린은 울었다.
앙금처럼 남았다가 자신의 마음에 상처를 줄 수도 있는 감정들을 그 눈물에 모두 녹여 흘려보냈다.
그렇게 한참이나 감정을 쏟아냈더니 가슴이 텅 비어 버린 듯했다.
그래도 한결 가벼워졌다.
가슴 속에 담은 수많은 가시들이 눈물을 타고 빠져나간 것만 같았다.
소매로 눈가를 훔친 사예린이 비석을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아……!
누군가 그 모습을 보았다면 그 자리에 주저앉았으리라.
평소 왠지 모를 음침함 때문에 사당의 후원은 인적도 드문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홀로 앉은 월태의 미녀가 박꽃처럼 하얀 미소를 그려내고 있지 않은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슬픈 미소.
심장을 녹여 버릴 만큼 가슴 저미는 미소가 저곳에 있지 않은가?
턱 끝에 맺혔던 달빛 눈물이 마지막으로 똑 떨어졌다.
가슴속에 담아두었던 수많은 말들은 눈물에 녹여냈다.
이젠 미소로 답할 차례.
“진천. 웃을게. 네가 지켜보며 더 힘이 될 수 있도록. 나, 더 웃을게.”
사예린.
그녀가 웃었다.
다른 이에게는 한 번도 보이지 않은 순수한 미소로.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단단한 결의가 담긴 미소로 웃었다.
* * *
늦은 밤까지 추모제를 지내고는 흑천련 수뇌인사들이 다시 흑천궁에 모였다.
너무나 많은 피해를 입었고, 여전한 슬픔에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고 있었지만 당면한 문제가 시급했다.
무림맹은 곧 남창지부를 칠 것이고, 남창이 무너지면 흑천련은 전세를 돌이키기 어려울 수 있다.
한마디로 슬픔에만 잠겨 있을 시간이 없다.
그리고 태청강의 몸을 갖게 된 적비연은 흑천련을 정비함과 동시에 또 다른 작업도 진행해야 했다.
바로 벽력적가와 협력하는 것.
“해서 본좌를 도와준 벽력적가와는 상호 협력하여 무림맹에 맞서기로 했다.”
“벽력적가에서 온 예홍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적비연의 말끝에 예홍이 한 걸음 나서서 포권하자 수뇌인사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으로 보아 그리 탐탁지는 않은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지금껏 정도문파와 흑천련이 힘을 합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게다가 벽력적가라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림맹을 대표해서 본 련에 왔던 자들이 아닌가?
게다가 저 예홍이라는 자는 간자 역할까지 했다.
평소라면 분명 기를 쓰고 반대했으리라.
아무리 련주의 판단이라지만 장로회부터 시작해 당주들과 각주들이 격한 반응을 보였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이번엔 모두 침묵했다.
마음에 안 들지만 받아들이겠다는 분위기다.
그럴 수밖에.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은 죄인이니까.
투혈권왕을 사지로 몰아넣는 데 동조하거나 방조했고, 반역을 꾀한 대공자와 오 공자에게 공개적인 지지를 보냈다.
만약 련주가 규율에 따라 수뇌인사들을 모두 숙청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지경이다.
하나 그랬다간 모두에게 손해가 막심하다.
그런 만큼 련주가 된 적비연도 이들의 잘못을 실수로 치부하고 눈감아 주었다.
‘뭐, 일단 이들의 힘이 필요하니까.’
사정이 이렇다 보니 누구 하나 적비연의 말을 반박할 수 없었다.
무림맹 소속이었던 벽력적가?
그게 어떻단 말인가?
자신들은 반역을 저질렀는데.
게다가 벽력적가는 오히려 련주를 구해준 은인이 아니던가?
이런 사정 때문에 뜻하지 않게 적비연의 계책은 수월하게 진행됐다.
적비연이 기세를 몰아 말을 이어갔다.
“벽력적가는 현재 무림맹에서도 견제를 받고 있소. 하여 본 련과 입장이 별반 다르지 않지. 다만, 이 사안은 극비로 해두어야 할 것이오. 벽력적가의 소재지가 무림맹 권역인 만큼.”
“명심하겠습니다.”
수뇌부가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적비연은 힐끔 시선을 돌려 사예린을 보았다.
사예린 역시 담담하게 모든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히려 그녀는 잘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다.
투혈권왕이 벽력적가주를 위해 싸운다고 말했으니, 그녀로서는 굳이 련주와 반목할 필요가 없게 된 셈이리라.
‘자, 그럼 제일 급한 문제로 넘어가볼까?’
적비연이 눈짓을 하자 흑귀대주가 성큼성큼 걸어 나와 커다란 종이를 펼쳐서 바닥에 깔았다.
그것은 무림전도였다.
이제는 전쟁에 대해 이야기할 차례.
적비연이 교패를 돌아보았다.
“전황은 어찌 돌아가고 있나?”
“남창지부에서 격전에 대비하고 있으나 상황이 좋지만은 않습니다. 애초에 대공자가 남창지부로 향했어야 했지만 이곳에 머무는 바람에 전세가 상당히 불리해졌습니다.”
마지막 말을 뱉을 때는 교패가 면목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역시 혼란을 수습해야 한다는 명목으로 대공자를 계속 붙잡아둔 셈이었으니까.
물론, 그가 붙잡든 말든 대공자는 결국 연리하의 말에 따라 이곳에 남았을 테지만.
“안휘성 쪽은?”
“금채지부가 뚫려서 안경지부까지 밀고 내려오고 있습니다. 황산으로 떠난 삼 공자에게 곧장 안경으로 가라고 전서를 보낸 상태입니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장로 중 한 명이 의견을 냈다.
“놈들이 안경까지 뚫고 장강을 넘는다면 이곳 절강성까지는 시간문제입니다. 남창은 그래도 아직 시간이 있으니 핵심인력을 급파해서 먼저 안휘성 쪽을 확실히 막는 게 어떤지요? 안휘성 쪽을 격파한 다음 그 기세로 남하해서 파양지부에서 합류하면 좋을 듯합니다.”
그의 말에 다른 수뇌인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묵묵히 듣고만 있던 만통지가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혀를 찼다.
“쯧쯧. 그건 아니 될 말이지.”
모두의 시선이 만통지에게 향했다.
적비연이 그를 돌아보고 물었다.
“하면 다른 방안이 있소?”
“안휘성 쪽은 신경 쓸 것이 없소. 어차피 가후는 남창을 삼키고 그곳에서 전력을 재정비할 거요. 안휘성 쪽은 그저 눈속임일 뿐.”
“눈속임?”
“흑천련의 전력을 분산시킬 목적으로 움직였을 뿐이란 말이외다.”
너무나 당연하게 말하자 의견을 냈던 장로가 조금 언짢은 표정으로 소리를 높였다.
“그리 확신하는 이유가 무엇이오?”
만통지가 성큼 걸음을 옮기더니 전도 한쪽 부분을 지팡이로 툭툭 쳤다.
“이게 있잖소?”
“장강……?”
“투혈권왕이 수로채와 교섭한 사실은 이제 천하가 알고 있소. 가후가 빠진 전력이 안경을 차지한들, 이곳을 무사히 건널 수 있겠소?”
“으음…….”
“이미 장강대첩을 한 번 겪은 상황에서 굳이 무리수를 둘 필요가 있겠소? 말이 나온 김에 가후는 왜 굳이 무림맹을 장사에서 결집시켜 출발했을까?”
이에 생각에 잠겼던 적비연이 대답했다.
“서안에서 중경을 지나 장사로 들어가면 수로채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로군.”
“바로 그거지. 결국 저들의 진짜 핵심 인력은 여기서 오고 있소.”
탁탁!
만통지가 지팡이를 들어 남창을 콕콕 찔렀다.
장내가 조용해졌다.
그들은 외부인에 불과한 만통지가 잠깐 상황을 전해 듣고 이처럼 빠르게 전세를 파악하는 재능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과연 하늘이 내린 지자라는 말이 헛된 건 아니구나.’
사예린도 은근히 놀라면서 물었다.
“그럼 본 련은 어떻게 해야 하죠? 남창으로 전력을 보내야 할까요?”
“아니지. 아니지. 그럼 너무 늦어. 오히려 남창에 남은 무인들도 적당히 싸우다가 후퇴해서 여기 파양(鄱陽)으로 결집하는 게 좋지. 여기서도 파양지부로 전력을 보내서 보충해 주고.”
파양은 중원 최대 담수호인 파양호(鄱陽湖)를 사이에 두고 남창과 마주 보는 곳이었다.
파양호가 워낙 전력 요충지인 만큼 남창과 파양 모두 흑천련 지부가 있었다.
명조를 건국한 주원장도 파양호 대전에서 승리를 취하면서 강남 일대를 통일하는 계기가 되지 않았던가?
사예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빛내며 물었다.
“하면 만통지 어르신께서 보실 때, 이번 전쟁을 해결하기 위한 열쇠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이길 방법을 물은 게 아니다.
아무리 모르는 것이 없다는 만통지라도 겨우 이 정도의 정보로 다짜고짜 이길 방법을 물어보면 할 말이 없으리라.
대신 가장 중요한 핵심을 물었다.
그가 간파한 핵심이 무엇일까 궁금했기에.
한데 만통지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백발광인.”
“네?”
사예린은 물론 수뇌인사들이 모두 술렁거렸다.
백발광인은 이미 본단에서 한바탕 난리를 치고 대부분 제거되지 않았던가?
이미 대다수가 죽거나 달아났다.
그런데 갑자기 만통지가 그들에 대해 말을 꺼낼 줄은 몰랐다.
모두가 쳐다보는 가운데 만통지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중에서도 연리하 같은 자가 핵심 열쇠가 되겠지.”
“연리하…….”
“다들 보았겠지만, 그는 순수하게 수련을 통해 강해진 자가 아닐세. 만들어진 존재라고 할 수 있지. 모두들 짐작하겠지만 그는 백발광인들의 성공 사례일세.”
“……!”
“모든 성공이 그렇듯 최초 한 번이 어려운 법. 그 다음부터는 수월하지.”
“……!”
“만약 연리하 같은 강자가 한 명이 아니라 둘 이상이라면? 아니, 다섯? 열? 어쩌면 수십 명이라면?”
꿀꺽……!
장내의 무인들이 모두 마른침을 삼키고는 대경실색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지 않은가?
흑천사왕이 협공을 하는 것으로 연리하를 간신히 물리쳤다.
그러고도 흑천사왕은 한 명이 죽어 흑천삼왕이 되어 버렸다.
한데 그런 괴물이 수십이라니?
한쪽에서 이야기를 듣던 예홍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고는 중얼거렸다.
“다 끝났네. 다 끝났어.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