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 보패인간(寶貝人間)
누구 하나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연리하 같은 괴물이 더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분위기는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사실 몇몇 무인들은 이를 예상하긴 했다.
다만 자신들의 예측이 제발 틀리길 바라는 마음에 입 밖으로 내는 것조차 꺼렸을 뿐.
한데 만통지가 그 부분을 딱 짚어낸 것이다.
사예린이 조금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수십…… 이나 될까요?”
“알 수 없는 일이지. 하나 단 한 명은 아니라고 생각하네.”
“그렇게 생각하시는 근거는요?”
“허 참, 당연한 것 아닌가? 흑천련이 확보한 백발광인만 해도 그 수가 수십 아니었나? 그렇다면 상당히 많은 자들을 데리고 실험했다는 증거잖은가? 실패의 수도 그리 많은데 성공을 했다면 과연 거기서 멈췄을까?”
너무나 지당한 말이기에 사예린은 할 말이 없었다.
대신 련주를 비롯한 수뇌인사들에게 은근히 불만이 생겨났다.
투혈권왕은 애초에 백발광인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품지 않았던가?
차라리 처음부터 백발광인을 만든 자들이 본 련이 아니라 무림맹이라고 말해주었더라면?
그럼 많은 무인들이 이번 일이 터졌을 때 덜 당황하지 않았을까?
사예린은 그 생각을 가감 없이 표출했다.
“사부님, 어째서 이 중대한 사실을 극비로 하셨는지요? 만약 진작 알고 있었더라면 더 대응하기 쉬웠을지도 모르는데요.”
“흐음.”
적비연이 침음을 흘렸다.
기실 적비연도 그게 궁금하긴 했었다.
그래서 투혈권왕의 몸으로 활동할 때 백발광인들에 대해 조사를 했던 것이고.
한데 이제 태청강의 입장이 되니 모든 이유를 알게 됐다.
그리고 타아를 공감하기 때문일까?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는 것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한 대답도 만통지가 대신 나섰다.
“그야 당연히 혼란과 분열을 막기 위해서였을 테지.”
“혼란과 분열이라고요?”
만통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어쨌건 련주와 수뇌인사들은 고민을 했을 터. 백발광인을 잘 치료해서 아군의 전력으로 삼을 수만 있다면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지 않겠는가?”
그러자 몇몇 무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이미 백발광인들의 무력을 직접 실감했기에.
하지만 몇몇 무인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반박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그래 봐야 백발광인은 대다수가 정도인들이었소. 애초에 그들은 우리와 적대관계에 있던 자들인데 치료를 해준다고 한들 아군이 될 리가 없지 않겠소?”
“일리 있는 말이외다. 하나 짐승이 아닌 인간이라면 은혜를 모르진 않을 터. 더구나 명분과 협의를 따지는 정도인이라면 본 련에 보은하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지 않겠소?”
“흥! 보은 심리가 과연 증오심보다 더할까?”
순식간에 장내에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이를 가만히 지켜보던 만통지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사예린을 보았다.
“이것이 바로 이유였겠지.”
“아……!
사예린은 물론 흥분해서 떠들던 무인들도 탄식을 터뜨렸다.
지금 잠깐 이야기가 나온 것만으로 이미 의견이 분분하지 않았던가?
이런 분열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흑천련은 애초에 극소수의 수뇌인사들만 회의해서 결정을 내린 것이리라.
결과적으로 득이 되었든, 실이 되었든 당장의 분열과 혼란을 막을 수 있을 테니.
적비연이 침묵을 깨고는 만통지를 보았다.
“만통지께서 보기에 연리하 같은 자들이 얼마나 될 것 같소?”
“글쎄올시다. 적어도 열 명 이상은 되지 않을까 싶소.”
장내 무인들이 웅성거렸다.
이왕이면 손에 꼽히길 바랐건만.
적비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물었다.
“이유는?”
“연리하라는 그 아이가 이곳에서 싸울 때 거리낌이 없었소. 마치 나 하나쯤이야 죽어도 상관없다는 듯 거침없었지. 실제로 팔을 하나 잃었음에도 아쉬운 기색도 없었고.”
“그러니 그런 정도의 강자가 더 있을 것이다?”
“뭐, 그런 셈이오. 또 다른 이유는…….”
“……?”
만통지가 돌연 몸을 돌리더니 어디론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곳에는 요당의 직속 정보기관인 집천각(輯千閣) 소속 좌군사가 상자를 앞에 두고 서 있었다.
만통지가 ‘끙’ 소리를 내면서 상자 안에 가득 담긴 서류를 들고 융단 가운데로 걸어 왔다.
펄럭!
그가 서류더미를 내려놓자 종이 낱장들이 어지럽게 흩어지면서 바닥에 뿌려졌다.
“당신들이 추모하는 동안 나는 집천각에서 정보를 좀 살펴보았소. 물론 련주께 허락을 구한 것이니 오해는 하지 말고.”
“그래서 알아낸 것이 있습니까?”
교패가 정중히 묻자 만통지가 턱짓으로 서류더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림맹이 이 년마다 한 번씩 각 지방의 중소문파에게 막대한 금액을 지출한 사실이 드러났소. 한데 이상한 것은 도저히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상당한 액수였는데도. 그래서 더 집중적으로 살펴보니, 대체로 위로금이거나 임무를 성공시킨 수당이었소.”
“갑자기 그건 왜…….”
“들어보시오. 해서 내가 그 시기의 무림맹이 어떤 임무를 했는지도 찾아봤지. 한데 딱히 이렇다 할 임무가 없더군. 있다고 해도 그만한 액수를 지불할 만큼 대단한 일이 아니었지. 뭔가 이상하지 않소? 그리고 또 하나. 항상 거금을 지불하던 해에는 천하용봉대회가 있었지.”
“아……!”
교패가 탄성을 터뜨렸다.
그가 얼른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요당 군사가 죽기 전에 글귀를 남겼습니다.”
“글귀? 무슨 글귀?”
“천하용봉!”
교패의 말에 만통지가 콧잔등을 씰룩이다가 버럭 소리쳤다.
“에라이! 그걸 진작 말해야지! 왜 이제 말하는 건가! 하여튼 무식하면 손발이 고생이라더니! 내 일찌감치 그 말을 들었더라면 이런 개고생을 하지 않았을 게 아닌가!”
만통지의 호통에 교패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고, 다른 무인들은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교패가 누군가?
그래도 천하사대지자라고 불리지 않던가?
한데 그런 교패에게 무식하다니?
적비연이 정신을 수습하고는 만통지에게 물었다.
“하면 만통지께서 파악한 바에 의하면 연리하 같은 인물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소. 무림맹은 천하용봉대회를 이 년마다 여는 것이오.”
“아아.”
무인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만통지가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시오. 천하용봉대회를 이 년마다 연다니. 너무 자주 여는 것 같지 않소? 이름난 후기지수가 이 년마다 한 번씩 배출된단 말이외다. 한데 지금 기억하는 후기지수 있소? 이미 배출된 후기지수 중에서 련주의 뇌리에 각인된 후기지수 말이오. 누가 있소?”
적비연이 미간을 구겼다.
확실히 잘 기억나지 않는다.
물론 억지로 기억을 되새겨 보면 그 당시마다 이름을 떨친 후기지수는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명성은 그때 이후로 곧 잊혀졌다.
만통지가 말을 이었다.
“십이용봉이 이 년마다 한 번씩 배출되오. 하면 십 년만 지나도 육십 명이오. 한데 그 많은 인재들이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지조차 모르고 있소.”
“그야 무림맹에서 극비 임무에 투입하니까…….”
“바로 그게 문제지!”
예홍의 말에 만통지가 손뼉을 짝 치며 말했다.
“극비 임무. 아무도 모르는 특별한 임무. 그 대가로 각 문파에는 거금이 지불되고. 한데, 이 자료들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면 십이용봉을 제외한 다른 무인들에게도 극비 임무라는 명목으로 거금이 지불되었소.”
“그럼 설마 극비임무라는 게 연리하 같은 강자를 만드는 실험에 지원하는 거란 말인가요?”
“아마도.”
만통지의 목소리가 무겁게 떨어졌다.
장내는 충격에 휩싸였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만통지가 융단을 밟고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연리하는 무공이 천해경에 다다라 있었소. 그 어린 나이에 결코 이를 수 없는 경지. 즉, 인위적으로 혹은 기연으로 얻은 경지라는 말이오.”
“그게 가능한가요?”
예홍이 불쑥 끼어들었다.
“매우 어렵지만 불가능하다고 단정할 수도 없지. 법보(法寶)라고 들어보았나? 달리 말하면 보패(寶貝)라고도 하지.”
“혹시 신선들이 사용하는 도구를 말씀하시는 건지요?”
“그렇네. 오랜 기간 상당량의 정기를 흡수한 물건이 신성력을 지니면서 보패로 거듭나게 되지.”
대개의 전설적인 신병이기가 그런 식으로 탄생한다.
정기를 받으면 정도 무림의 신물이 되고, 요기를 받으면 사마외도의 신물이 된다.
만약 그것이 물건이 아니라 생명을 가진 동물이라면?
영물(靈物)이 되고 신수(神獸)가 된다.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 거죠?”
“그걸 사람에게 적용하면 어떻겠나?”
“그게 가능하다고요? 말하자면 이야기 속에나 나올 보패인간을 만든다는 거잖아요?”
실제로 보패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건 아니다.
봉신연의(封神演義)가 그렇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전설이고, 이야기가 아닌가?
예홍이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만통지가 표정을 굳히고 되물었다.
“하면 내가 묻지. 그게 절대 불가능한가? 자네의 모든 걸 걸고 장담할 수 있나?”
“그런…….”
“아직도 무림인을 본 적 없는 자들은 무인이 이야기 속에서나 존재하는 초인으로 알고 있네.”
“아무리 그래도 사람은 그리 오랫동안 정기를 축적할 만큼 살 수도 없어요. 단기간에 만들어야 한다고요. 그만한 정기를 단기간에 흡수할 만한…….”
말을 토해내던 예홍이 흠칫거리고는 만통지를 보았다.
만통지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 수십 년간 이어져 온 천하용봉대회. 혈기왕성한 정기가 이 년마다 중원 각지에서 왕창 모이지. 그것도 천하에서 내로라는 젊은 무인들로만.”
“……!”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을 테지. 하지만 이젠 완성이 된 게야. 너무 나이 들어서도 안 되고, 너무 어려서도 안 되는 게야. 그게 천하용봉대회만 이 년마다 한 번씩 여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오로지 후기지수만을 대상으로 하는!”
“하, 하지만 후기지수를 그렇게 희생하기 싫은 문파도 분명…….”
“희생이라고만 할 수도 없을 터. 게다가 중소규모의 문파가 무림맹으로부터 거액을 받고 실세를 확장할 수 있는 계기를 삼을 수 있다면?”
“설마…… 무림의 정도 문파가 그런 비열한…… 사람 장사를 한단 말인가요?”
“명분은 챙겼네. 무림맹 소속이 되어 극비 임무에 헌신한다는. 그리고 그 대가를 아주 넉넉하게 지불한다는. 뭔가 꺼림칙해도 명분이 세워졌으니 눈만 잠시 감으면 될 일이 아니겠나?”
예홍은 충격으로 말을 이을 수 없었다.
반박할 수가 없다.
자신이 아는 정도 문파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지만…… 과연?
사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가장 충격을 받은 사람은 바로 여전히 신분을 숨기고 있는 현청과 임송화였다.
결과적으로 사문에서 자신들을 무림맹에 팔았다는 셈이 되는 게 아닌가?
그럴 리가 없다고 부인하고 싶지만, 만통지의 말에 설득력이 있다.
특히 무림맹을 위한 특임이라면, 사문이 깊이 따질 것도 없이 오히려 자랑스러워할지도 모를 일이 아닌가?
게다가 거금을 받는다.
과연 사문은 그 거금을 뿌리치고 끝까지 후기지수를 데려오려고 했을까?
만약 그랬다면 지금 두 사람은 이곳에 있지도 않으리라.
현청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이번 용봉대회에서 십이용봉에 올랐던 무인들은 사절단의 임무를 받아서 본 련에 오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말씀하신 보패인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현청의 표정은 단호했다.
만통지의 말대로라면 자신도 보패인간이 되거나, 보패인간을 만드는 데 희생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전혀 다른 임무를 맡아서 지금 이곳에 존재하는 게 아닌가?
만통지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지. 이번에는 십이용봉으로 발탁된 자들이 분명 지금까지와 달리 눈에 드러나는 임무를 부여받았지. 그렇다는 건 결국…….”
“보패인간을 이미 그 전에 완성했다는 뜻이군요. 충분히 확보도 했다는 뜻이겠고.”
적비연이 만통지의 말을 받아서 이었다.
장내가 다시 한번 술렁였다.
무인을 강제로 신선의 경지로 만들다니!
마침내 만통지의 목소리가 장내에 카랑카랑 울렸다.
“그렇소. 보패무인. 그 인원이 얼마나 될지는 정확히 모르나, 무림맹이 그들을 풀어 버리는 순간 이 전란의 결과는 흑천련의 멸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소.”
* * *
가후는 가만히 서서 어둑한 통로를 응시했다.
자박자박.
통로 안쪽에서부터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마침내 한 남자가 통로에서 나와 가후와 마주 섰다.
긴 백발을 늘어뜨린 남자.
달빛이 남자의 입가에 머문 미소를 비추었다.
가후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기분은 좀 어떤가? 하기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