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 새로운 하늘을 열 수 있도록
만통지는 흑천련 장원이 내려다보이는 삼 층 난간에서 뒷짐을 진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이따금씩 긴 한숨을 내쉬었는데, 그 숨결에는 사무치는 회환이 서려 있는 듯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십니까?”
불쑥 들려온 목소리에 만통지가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으며 걸어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적비연이었다.
만통지가 피식 웃었다.
“새 옷이 잘 어울리는군.”
물론 정말 입는 옷을 두고 한 말이 아니다.
그는 태청강의 진짜 신분이 적비연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애초에 적비연을 처음 보자마자 눈치를 챘던 자가 아니던가?
적비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렇습니까?”
“자네를 보면 얼마나 많은 경험을 거쳐 여기까지 온 건지 대충이나마 짐작이 가네. 고생이 많았겠구먼.”
별생각 없이 툭 던진 말 같다.
한데 적비연은 그 마지막 한마디에 괜히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만통지가 난간에 팔꿈치를 올려두며 하늘을 보았다.
“한 아이가 있었네. 그 아이를 처음 보았을 때의 눈빛을 잊지 못하네. 절망이 내려앉은 마을에 그 아이의 두 눈만큼은 무서우리만큼 빛나고 있었지. 총명한 아이였네. 하지만 운이 없었지. 악랄한 마두에게 온 가족이 몰살당했거든.”
“…….”
“아이의 어미는 밭을 갈다가 사지육신이 갈기갈기 찢어져 죽었고, 아비는 불에 타서 숯검정이 되어 형체도 알아볼 수 없었지. 어린 여동생은 겁간을 당한 후 목이 잘렸네. 아이의 가족뿐만 아니라 마을 주민들 모두 처참하게 죽었지.”
“도대체 누가, 왜 그런 짓을 했단 말입니까?”
“그 마을에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무공비서가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돌았거든. 어쩌면 자네도 들은 기억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무공비서라…….”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그 반대인가?
사실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무공비서가 어디어디에 숨어 있다는 소문은 강호에 끊이질 않는다.
한 해가 멀다 하고, 아니, 하루가 멀다 하고 그런 소문이 떠도니까.
하지만 대다수는 헛소문이거나 누군가 고의적으로 퍼뜨린 가짜 정보다.
적비연이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소문은 너무 많습니다. 하루도 끊이질 않는 곳이 바로 강호지요.”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그런 소문이 떠돌고 있으리라.
만통지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테지. 하나 그 당시에는 꽤나 신빙성이 있었나 보더군. 그러니 그만한 일이 벌어졌을 테지.”
“그럼 정말 절세의 무공비서가 있었던 겁니까?”
“클클. 그게 좀 애매하군.”
“애매하다는 건…….”
“일단 하던 얘기를 마저 하자면, 그 마을을 덮친 무인들은 마을 사람들이 무공비서를 숨기고 있다고 판단했네. 해서 마을 사람들이 무공비서를 내놓을 때까지 한 사람씩 본보기로 죽였던 게야. 아주 잔인한 방법으로.”
“그런 미친 것들이……!”
적비연이 저도 모르게 주먹을 콱 말아 쥐고는 욕지거리를 뱉었다.
지금 만통지가 갑자기 왜 이런 뜬금없는 얘기를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묘하게 빠져들고 있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집 안에 있는 서책을 모두 가져와서 내밀었네. 그들로서는 무인들이 당최 뭘 찾는 건지도 몰랐을 걸세. 그러다가 마침내 발견한 게야.”
“찾았단 말씀입니까?”
적비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틀림없이 헛소문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강호엔 그런 비극이 허다하니까.
그런데 정말 절세 무공비서가 있었다니?
만통지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찾았지.”
“그럼 마을 사람들은 살 수 있었겠군요.”
“클클.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그럼 설마…….”
“당연히 마을 사람들을 모두 죽였네. 그들이 무공비서를 가져갔다는 걸 숨겨야 할 게 아닌가? 그 멸겁 속에서 기적적으로 한 아이만 살아남은 게지. 워낙 총명한 아이였거든.”
“이런 비열한……! 도대체 그놈들이 누굽니까?”
만통지가 한차례 깊은숨을 내쉬더니 적비연을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마침내 그의 입에서 무거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칠혈방일세.”
“……!”
적비연의 두 눈이 커졌다.
칠혈방.
칠 년 전, 기록적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날, 산사태로 인해 멸문된 방파.
하지만 귀문회가 건네준 정보에 의하면 이미 그 전에 냉혼신검 설규에 의해 방주를 비롯한 수뇌인사가 몰살당했다던 곳.
적비연이 아직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상황에서 만통지의 말이 이어졌다.
“칠혈방은 어느 날 갑자기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지. 그리고 단기간에 사파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방파로 거듭났네. 흑천련에도 꽤나 영향력을 발휘하던 곳으로 알고 있네만.”
“그럼 칠혈방이 갑자기 성장한 계기가 그때 얻은 무공비서 때문이란 겁니까?”
“그렇지. 다만 절세의 무공비서는 아니었던 게지. 훌륭한 것이긴 하나 세상이 놀랄 정도는 아닌. 그래도 칠혈방을 사파에서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위상을 높이는 데에는 분명 일조했을 테고.”
“그래서 애매하다고 하신 거군요.”
만통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제 대략의 이야기를 알겠는가?”
“유추하면…… 칠혈방에 일어난 멸겁은 냉혼신검 설규가 일으켰고, 칠혈방이 오래전 한 마을을 몰살시킨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는 뜻이겠지요. 그리고 그 중심에는 그 소년이 있다는 거고.”
“잘 이해했군.”
만통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그 아이를 내가 거두어 가르쳤다네.”
“아……!”
이제야 이해가 된다.
어째서 만통지가 이번 일에 자신에게도 책임감을 느낀다고 한 것인지.
“설마…… 그 아이가 가후입니까?”
“아닐세. 적어도 가후보다는 똑똑할 걸세.”
적비연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가후만으로도 벅찬데 그보다 더 똑똑하다고?
만통지가 수염을 쓸며 말했다.
“총기가 있어 거두었으나, 그 아이의 마음에 남은 증오심이 너무 컸어. 결국 어느 날 곁을 떠났지. 칠혈방이 멸문당했을 때, 그것으로 끝났다고 생각했건만.”
“사파인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번졌다는 말이군요.”
“그럴 테지.”
“그렇다고 자책만 하고 계실 일이 아닙니다. 당장 무림맹이 남창을 공격해올 테니 대비책을 세워야지요.”
“그래야지. 전서응은 보냈는가?”
“만리응(萬里鷹)을 보냈습니다.”
만리응은 흑천련이 데리고 있는 전서응으로 하루에 일만 리를 날아간다는 영물이었다.
“적당히 상대하다가 최소한의 손실로 파양호까지 퇴각하라 지시했습니다.”
“그렇군. 한데 자네가 원하는 건 뭔가?”
“예?”
“진짜 흑천련주도 아니면서 어째서 이리 나서는 겐가?”
잠깐 머뭇거린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그러고 보니 이젠 자신이 정말 흑천련주가 된 것만 같다.
밤하늘을 올려다본 그가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물론 본 가의 몰락을 막기 위해섭니다. 이대로 무림맹이 천하를 일통하면 제일 먼저 눈엣가시인 본 가를 제거하려고 할 겁니다.”
“그리고?”
“환생을 거듭하면서 느낀 게 한 가지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저마다의 사정이 있다는 것. 타인의 사정을 잘 모른 채 함부로 재단하거나 흉을 보아서는 안 되겠더군요. 어쩌면 절대선도 절대악도 없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륜을 저버린 실험을 강행한다고 생각했던 흑천련은 오히려 피해자들을 치료하고 있었고, 그들을 힐난하던 무림맹은 반대로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 있지요.”
적비연이 만통지를 돌아보았다.
“무림맹은 지금 오로지 욕망과 증오심으로 살육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수많은 젊은 무인들이 정기를 잃고 스러져갔다는 걸 알아 버렸는데, 이 자리에 있는 제가 방관만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잃어버린 수많은 사연들과 사정들이 너무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자네와 아무 상관도 없지 않은가?”
“명색이 명문정파라면, 협의를 중시하고 정의를 실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본 가가 추구하는 이상이다……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셨죠.”
“흐음. 협의와 정의라.”
“지금 무림맹은 일그러진 욕망으로 뒤틀려 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제가 그걸 바로잡을 생각을 한 건 아닙니다. 오로지 제 자신의 안위와 본 가의 안전만 생각했지요. 하지만 이젠 다른 게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군요.”
적비연이 가만히 흑천련 장원을 내려다보았다.
무림 정점은 아니지만, 사파의 정점에 올랐다.
한데 생각했던 것과 다른 기분이 든다.
이 정도 위치까지 오르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에서 홀로 소외된 것만 같은 기분은 왜일까?
-의미가 없기 때문이지.
옆에 부유한 극마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정점에 올라봤던 그였기에 적비연의 기분을 십분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팔짱을 낀 채 달빛에 물든 서호 전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아도 추구하는 이상이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거다.
‘그래서 넌 추구하는 이상이 뭐지?’
-잊어버렸다.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만 지금은 단 한 가지. 내 육신을 가지는 거다.
‘소박하군.’
-원래 꿈은 소박하게 시작하는 법이야.
적비연이 피식 웃고는 만통지를 돌아보았다.
“어쨌든 그런 이유로 무림맹을 막을 생각입니다. 무림일통? 거기까진 이제 모르겠습니다. 다만 무림맹의 뒤틀린 사고방식을 뜯어고쳐야겠다는 생각뿐입니다.”
“사람들은 말하지. 명문정파가 악한 행동을 하면, 말도 안 된다고. 그런 멍청한 생각 때문에 정도인들은 더욱 약은 행동을 하는 게야. 원래 양지에 있는 것들이 뒤를 캐면 캘수록 구린 법이거든. 자고로 세상에서 제일 큰 도둑이 바로 권력 가진 자들인데 말이야.”
“그러니 도와주십시오. 제가 무림맹을 깨부수고 다시 새로운 하늘을 열 수 있도록.”
“과연 그 세상에는 부조리가 없을까?”
“모를 일이지요. 하지만 당장 이 부조리에 저항은 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조금씩 나아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만통지가 하늘을 보고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자네에게 한 번…… 속아보겠네.”
“감사합니다. 내일은 일찍 파양호로 떠나야 하니 그만 쉬십시오.”
적비연이 고개를 숙이고는 물러갔다.
홀로 남은 만통지가 수염을 쓸었다.
“새 하늘을 연다라. 과연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
그 눈빛이 깊어졌다.
* * *
벽력적가 가주전.
만검세가주 하천웅이 가주전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마침 가주전에 먼저 모여 있던 묵검과 단휘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를 맞이했다.
“오셨소? 하 가주.”
“어서 오시지요.”
하천웅이 포권을 취하며 답례했다.
“그간 잘 지내셨는지요?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다고요?”
“그렇소.”
묵검이 고개를 끄덕이자 하천웅이 가슴을 펴고는 말했다.
“무엇이든 말씀하시지요! 적 가주님을 돕는 일이라면 물불가리지 않고 나설 겁니다.”
묵검과 단휘가 서로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정말이지 만검세가의 하천웅에게 이런 도움을 받는 날이 올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고맙소. 다름이 아니라 우리는 이제 적 가주님의 부름을 받아 파양으로 떠나려고 하오. 하지만 아시다시피 이곳 경계가 너무 삼엄하여 하 가주가 도와주었으면 하오.”
“그렇군요! 파양이라면…… 아! 무림맹이 남창으로 향했다고 들었습니다. 혹, 정사대전을 대비하기 위해서인지요?”
“그럴 지도 모르겠소.”
묵검이 두루뭉술하게 대답했다.
하천웅이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렇군요! 하면, 제가 두 분을 무림맹 무인들이 모르게 장사를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우면 되겠습니까?”
“그렇소.”
“오오, 감동입니다. 무림맹이 귀가를 핍박하는 와중에도 흑천련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 이리 은밀하게 움직이시다니.”
묵검과 단휘가 서로를 보며 쓴웃음을 깨물었다.
“다만 우리가 옮겨야 할 물건이 있소.”
“그게 무엇인지요?”
하천웅의 물음에 묵검이 단휘에게 눈짓을 했다.
단휘가 방 한쪽으로 걸어가서 주렴을 열어젖혔다.
촤라라락!
주렴 너머의 물건을 확인한 하천웅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것은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