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 차시환혼(借屍還魂)
만검세가가 분주해졌다.
하천웅은 장사로 돌아온 후 만검세가를 정비하는 데 힘을 쏟았다.
처음의 우려와 달리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만검세가주로서 기틀을 잡고 자신의 환경에 잘 적응해 갔다.
기억을 잃은 것 때문에 기반을 다지기에 불리한 점이 많을 것이라고 여겼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서 많은 이들의 두터운 신망을 얻고 있었다.
이복형인 하기룡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지만 그에 대해서 별로 분노하는 기색도 없었다.
오히려 기억도 나지 않는 하기룡에 대해서 이해하는 입장까지 보여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아무튼 그런 와중에 자신이 은인이라고 여겼다는 적 가주가 서신을 보내왔다고 하니 발 벗고 나서려고 하는 그였다.
“제가 여러분들의 그 숭고한 뜻을 왜 모르겠습니까? 어떻게 해서든 파양호로 가서 흑천련을 섬멸하는 데 앞장서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응, 전혀 아니야.’
단휘는 속에서 치밀고 올라오는 대답을 꾹 누른 채 고개만 끄덕였다.
하천웅이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제가 어떻게든 방법을 강구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안전하게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해서, 그 방법에 대해서는 대략이나마 이쪽에서 구상해둔 게 있긴 하오.”
묵검의 말에 하천웅이 반색했다.
“오! 그렇습니까? 어떤 방법인지요?”
“본 가는 현재 운신이 자유롭지 못하지만, 만검세가는 다르오. 한때 본 가와 척을 지기도 했던 만검세가가 무림맹을 돕기 위해 파양으로 떠난다고 하면 모두가 수긍하지 않겠소?”
“그렇겠지요.”
“그래서 말인데…….”
묵검이 대략의 계책에 대해서 설명하자 하천웅이 무릎을 탁 치고는 반색했다.
“과연 그럴듯한 방법이십니다! 그렇잖아도 적 가장을 감시하는 시선이 철통같아서 어찌해야 하나 걱정했는데, 그 방법이라면 어찌 해결될 듯하군요.”
“그럼 부탁드리겠소.”
“염려 마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런데…… 대체 저 관 속에는 뭐가 들어 있는 겁니까?”
“본 가에서 내려오는 신물이오.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소.”
“아, 제가 결례를. 잘 알겠습니다.”
하천웅은 그 길로 만검세가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무림맹에 통보하길 파양호에서 치러질 정사대전에 대비하여 만검세가가 물자를 지원하겠다고 알렸다.
물론 무림맹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이에 하천웅은 모든 물자를 관속에다가 담았는데, 이를 본 무림맹 검영대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죽은 명부천의 뒤를 이어 새로 검영대주로 부임한 임영식(林榮植)이라는 인물이었다.
“하 가주께서는 왜 병장기와 군자금을 관 속에다가 집어넣는 거요?”
“혹시나 파양호로 가던 중 불상사가 일어날 것을 대비하기 위함이오. 이렇게 관 속에 담아두면 도적 떼가 나타나더라도 그저 시체를 담아둔 관이겠거니 생각하지 않겠소? 그게 아니더라도 빈 관을 이송하는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그래서 군데군데 비어 있는 관도 섞어두었소.”
“과연 그런 이유였군. 나름 괜찮은 방법이오.”
“별말씀을. 그리고 이왕 이리 된 것 벽력적가에도 연락해서 같은 방식으로 물자를 보태라고 했소.”
“벽력적가에도?”
임영식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그렇소. 본 가가 이렇게 나서서 돕는데, 벽력적가가 팔짱만 끼고 구경만 하는 건 아닌 것 같소. 그래서 물자라도 지원받을 생각이오.”
“흐음. 하지만 벽력적가는 현재 무림맹의 감시를 받는 중이오. 아직은 그들의 혐의가 완전히 풀린 게 아니라…….”
“알고 있소. 그래서 물자만 지원받을 생각이오. 아시다시피 벽력적가는 천상원을 건립하면서 단숨에 강호 제일의 부자가 됐소. 그들의 재력을 활용하지 못하면 너무 아깝지 않겠소?”
“하긴 그건 그렇소.”
하천웅이 싱긋 웃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지원금을 받아낸다면 그간 감시하느라 고생한 우리 검영대주께도 개인적인 사례를 드리고 싶소만.”
임영식의 표정이 흠칫거렸다.
바보가 아닌 이상 하천웅이 하는 말뜻을 못 알아챌 리가 없었다.
그가 상기되는 표정을 겨우 숨기며 말했다.
“하지만 그들이 무림맹을 위해 돈을 쓰려고 하겠소?”
이쯤 되면 다 넘어온 거다.
하천웅이 내심 조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오. 그들이 정말로 흑천련과 내통한 것인지, 어떤 것인지 모르지만. 어느 쪽이든 협조할 수밖에 없을 거요. 내통하지 않았다면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내통한 게 사실이라면 들키지 않기 위해서라도.”
“과연 그렇군요. 좋소. 병력이 아닌 물자만 지원받는 것이라면야.”
“잘 생각하셨소. 그들의 재력은 분명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될 거요.”
하천웅이 미소 지었다.
다음 날, 하천웅과 임영식은 벽력적가를 찾아갔다.
하천웅의 말대로 벽력적가에서는 관을 스무 개 정도 짜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 가주께서 말씀하신 대로 물자를 관 속에 넣어두었소. 부디 정사대전에 보탬이 되길 바라겠소.”
묵검이 포권하며 말하자, 임영식이 피식 웃고는 관을 훑어보았다.
하천웅을 비롯한 몇몇 무인들이 마른 침을 삼키고는 그의 행동을 살폈다.
중요한 순간에 임영식이 어떤 돌발 행동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돈을 밝히긴 하지만, 동시에 치밀한 성격이기도 했다.
스무 개의 관을 살피던 임영식이 묵검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관을 열어보시오.”
“……!”
묵검이 눈살을 구겼다.
“지금 우릴 못 믿는 거요?”
“신뢰의 문제라기보단 절차의 문제라고 합시다.”
묵검과 하천웅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임영식이 미간을 구겼다.
“뭐 하시오? 내 말 못 들었소?”
“흐음. 유감이군. 본 가가 그렇게나 신뢰를 잃었다는 것이.”
묵검이 냉랭하게 말을 뱉고는 가까운 곳의 관 세 개를 열어보였다.
두 개는 비어 있었고, 하나에는 은화가 담겨 있었다.
“이 정도면 되겠소?”
“아니지. 전부 열어보시오.”
임영식이 고개를 저었다.
이쯤 되자 하천웅이 슬그머니 나섰다.
“임 대주. 의심이 지나치면 결례가 되지 않겠소?”
“하 가주. 나는 의심해서가 아니라 그저 절차를 지키려는 것이오.”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겠소?”
“죄송하오. 하지만 나도 맡은 바 임무가 있는 것 아니겠소?”
“흐음.”
하천웅이 침음을 흘리자, 묵검이 임영식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본 가는 오늘의 치욕을 언젠가 따질 것이외다.”
“그러시든지.”
임영식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팔짱을 꼈다.
묵검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턱짓을 하자 옆에 선 단휘가 모든 관의 덮개를 열었다.
정확히 열 개의 관은 비어 있었고, 나머지 열 개의 관에는 은자, 병장기, 구급약 등이 담겨 있었다.
그제야 임영식이 포권을 취했다.
“결례가 많았소. 하지만 귀가에서는 내 입장도 이해해 주시길 바라오.”
묵검은 대답 대신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사실 여기서 임영식은 조금 더 꼼꼼하게 살폈어야 했다.
총 스무 개의 관 중, 병장기가 담긴 관은 이중바닥 구조로 되어 있었다.
그 아래에 적비연의 몸이 있었기에.
하지만 그는 묵검이 드러내는 불쾌감과 하천웅의 체면을 생각하느라 그렇게까지 살피지는 않았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는 지금 관심이 다른 곳에 가 있었다.
하천웅이 암시한 수고비.
벌써부터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 이런 절차는 그야말로 형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애초에 묵검과 하천웅이 이런 부분을 노린 것이기도 했다.
하천웅이 손뼉을 짝 마주쳤다.
“자자, 이제 관을 옮깁시다. 영신과 진 총관은 적가 사람들을 좀 도와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가주님.”
“예, 가주님.”
하천웅을 호위하는 영신과 총관 진서국이 깍듯하게 대답하고는 일을 거들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하천웅이 임영식의 손을 잡아 끌었다.
“고생하셨소. 덕분에 물자를 넉넉하게 실어 다녀올 수 있겠소.”
“하하. 맹을 위한 일인데 당연히 협조해야지 않겠소?”
은밀한 구석으로 이동한 임영식이 연신 주변을 살폈다.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
하천웅이 품에서 금화가 든 주머니를 꺼내 임영식의 손에 쥐어주었다.
제법 두둑한 주머니를 받은 임영식의 입이 길게 찢어졌다.
“뭘, 이런 걸 다…….”
“하하. 명 대주님이 상부에 잘 좀 얘기해주십시오. 물자 수송에 본 가가 힘을 많이 썼다고…….”
“하하! 이를 말이오? 기실 벽력적가가 한 게 뭐가 있소? 이 모든 걸 생각해낸 게 바로 귀가 아니오? 나만 믿으시오. 내 윗사람들에게 잘 말씀드리겠소.”
임영식이 호언장담하며 돈 주머니를 품에 챙겨 넣었다.
마차에 관을 모두 옮겨 싣고 나니 거창한 표국 행렬을 보는 것만 같았다.
마침내 모든 준비를 끝낸 하천웅은 진서국과 영신을 데리고 여정에 나섰다.
인근 상강에 도착한 그들은 배에 물자를 옮겨 싣기 시작했다.
하천웅이 관을 지고 옮기는 영신에게 다가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우리가 상강을 건너지 않고 강줄기를 따라 이동하는 걸 알면 무림맹이 이상하게 여길 겁니다. 그러니 그들이 오기 전에 얼른 출발합시다.”
누군가 들었다면 고개를 갸웃거렸으이라.
하천웅이 어째서 호신위에게 존대를 하는가?
한데 영신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알고 있소. 최대한 서두를 거요. 어쨌든 동정호까지만 가도 안심할 수 있으니 혹시 도중에 발각되어도 멈춰 서는 안 될 거요.”
그 목소리는 분명 묵검이었다.
사실 하천웅이 임영식에게 금화 주머니를 전해주는 사이, 묵검과 단휘 그리고 영신과 진서국이 서로의 인피면구를 써서 위장을 한 것이었다.
굳이 다른 사람을 두고 영신과 진서국을 고른 이유가 바로 체격이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가주전을 지키는 사령검들도 만검세가에서 온 무인들과 신분을 바꿨다.
그렇게 대략 서른 개가 넘는 관을 모두 옮겨 실은 배가 상강의 나루터를 떠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시각, 만검세가는 뜻밖의 인물이 방문하면서 발칵 뒤집히고 있었다.
* * *
“어, 어, 어떻게……?”
만검세가 만리전주 박효양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연신 끔뻑였다.
손등으로 눈자위를 세게 비벼보았지만 잘못 본 것이 아니다.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은 하기룡이 틀림없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그가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오다니!
하기룡이 싱긋 웃으며 물었다.
“만리전주, 오랜만이오.”
“하, 하…… 공자……!”
“하 공자라…….”
하기룡이 피식 웃었다.
원래대로라면 자신을 소가주라고 불렀어야 했다.
아버지가 죽고 나서는 자신을 가주라고 불렀어야 했고.
하지만 자신이 없는 사이 동생 하천웅이 만검세가의 주인이 되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서 그런 호칭을 들으니 쓴웃음이 지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런 기색을 눈치챈 것인지 박효양이 입을 꾹 다물었다.
원래 그는 하기룡을 절대적으로 밀어주던 자였다.
하지만 만대균이 죽고 상황이 급변하면서 하천웅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죽은 줄만 알았던 하기룡이 다시 눈앞에 나타나다니!
“동생은 어디에 있소? 오랜만에 얼굴 좀 보고 싶군.”
“아…… 가, 가주님은 지금 여기에 안 계시오.”
“가주라…… 훗. 그 녀석이 가주가 됐딴 말이지.”
“하 공자…….”
“아, 따지자는 건 아니오. 그저 대견해서 중얼거린 말이오.”
그럴 리가.
하천웅과 하기룡이 앙숙 관계라는 걸 장사에서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하물며 만검세가에서 헛기침 좀 하는 박효양이라면 당연히 빈말이라는 걸 안다.
한참이 지나서야 박효양이 정신을 차리고는 안위를 물었다.
“대체 그간 어디에 계셨던 거요? 우린 공자가 죽은 줄로만 알았소.”
“뭐,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이렇게 살아 돌아왔소.”
“다, 다행이오. 천만 다행이오.”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고는 꽤나 곤란한 얼굴 같은데.”
“그, 그럴 리가 있겠소?”
“하하하! 농이오. 그나저나 동생은 그럼 어디에 갔소?”
“정사대전에 물자를 지원하기 위해 떠났소이다.”
“정사대전에 지원을 하겠다고? 그런 얘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아, 얼마 전에 결정된 사안이었소.”
“흐음. 그렇군. 그나저나 하나 물어봅시다.”
“말씀하시오.”
“녀석이 벽력적가주를 은인처럼 섬긴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이오? 그럴 리가 없을 것 같은데.”
“끄음. 그, 그건…….”
“설마 사실이오?”
“가주님이 흑천련에 잠입했을 때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셨소. 그때 벽력적가주가 큰 도움을 준 것으로 알고 있소.”
“그래서…… 사실이란 말인가?”
하기룡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긴.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도 있으니 불가능도 아니리라.
박효양이 말을 덧붙였다.
“무림맹은 적가를 견제하고 있소. 하나 본 가는 적가와 화친을 맺고 평화롭게 지내는 중이오. 사실 이번에도 벽력적가로부터 물자를 좀 넘겨받아 함께 이송…….”
“잠깐. 벽력적가가 물자를 넘겨줬다고?”
“그렇소만.”
“벽력적가가 무림맹을 위해서 물자 지원을 했단 말이오?”
“그렇소. 왜 그러시오?”
하기룡이 대답 대신 미간을 구기고는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지 않은가?
지금 벽력적가라면 무림맹에 불만이 팽배해 있을 시기다.
아무 잘못도 없이 감시까지 받고 행동에 제약이 생겼으니까.
한데 무림맹을 위해 물자를 지원했다고?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그 멍청한 녀석이 당한 건가? 아니, 어쩌면 웅아 그 녀석도 한 패거리란 건가?’
어쨌든 확인은 해봐야 할 일.
하기룡이 고개를 번쩍 들고 물었다.
“떠난 지 얼마나 됐소?”
“뭐가…….”
“그 녀석이 물자 지원에 나선 게 언제냐고!”
“오, 오늘이오. 지금쯤 상강을 건너고 있을 거요.”
팟!
“어어?”
박효양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느새 하기룡은 까마득한 점이 되어 멀어져가고 있었다.
“끄음. 왠지 불안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