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 차시환혼(借屍還魂)
배가 나루터를 떠난 지 반 시진 정도 지났을 때, 하천웅이 인피면구를 쓴 묵검에게 다가왔다.
“다행히 순조롭게 진행됐군요.”
“아직 마음을 놓을 순 없소. 무림맹은 우리가 상강을 건너지 않고 동정호 쪽으로 가는 걸 이상하게 여길 것이오.”
“걱정 마십시오. 그래서 일부러 여기저기에 떠들고 다녔습니다. 동정호에 잠깐 볼일이 있다고요. 조금 돌아가게 되지만 그 정도는 이해할 겁니다.”
“그럼 다행이긴 하지만…….”
묵검은 말끝을 흐렸다.
확실히 하천웅이 그런 소문을 미리 흘려서 그런지 무림맹은 딱히 배를 뒤쫓지 않았다.
“그나저나 동정호까지 가면 누굴 만날 수 있는 건지요? 사실 좀 의아하긴 합니다. 육로를 따라 이동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은데…….”
“모든 건 적 가주님의 명이오. 혹 따르기 싫다면 여기서…….”
“하하!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십니까? 그저 궁금해서 여쭤본 겁니다. 사실 최근 들어 수로채가 동정호까지 진출해서 설친다는 소문이 파다하지 않습니까? 괜히 수적들이라도 만났다간 우리의 지원 물자를 수탈당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이지요.”
묵검이 내심 웃었다.
동정호에서 만날 사람이 바로 그 수적들이라는 사실을 알면 하천웅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물론, 동정호까지 무사히 갈 수 있을지 어떨지 알 수도 없지만.
묵검이 여전히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자 하천웅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선실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단휘가 다가와 조용히 말했다.
“형님, 긴장 좀 푸세요.”
“긴장 안 해.”
“에이. 얼굴이 꼭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데요, 뭐.”
묵검이 눈썹을 성큼 치켜 올리고 노려보자 단휘가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뭐, 비유입니다, 비유.”
“가주님의 존체를 옮기는 중이다. 긴장이 전혀 안 된다면 거짓말이겠지.”
그러자 단휘가 어깨를 펴면서 씨익 웃었다.
“커흠. 참고로 적진을 내 집처럼 드나들면서 간자 노릇도 하고 사절단 임무까지 맡아 본 제 입장에서는 말이죠. 이번 임무는 아주 식은 죽 먹기입니다. 그러니 아무 걱정 마시고 저만 믿으십시오. 여기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후임이 있지 않습니까? 하. 하. 하.”
“임무에는 경중 따위가 없는 법. 어떤 임무가 되었든 가장 경계해야 할 건 변수라는 거야. 그러니 항시 방심하면 안 되는 법이지.”
“그 변수, 제가 많이 겪어봤다니까요. 그런데 이번 임무는 정말 간단하잖아요. 보세요. 여긴 정파 권역입니다. 게다가 만검세가가 직접 물자 수송을 하고 있고요. 그런데 어느 미친놈이 와서 시비를 걸겠습니까? 무림맹도 다 승인한 마당에. 게다가 벌써 망성(望城)을 지났잖아요. 이제 상음(湘陰)만 지나면 동정호니까 모든 게 다 완벽하다고요. 한마디로 변수는 발생하지 않는다는 거죠.”
“예측 가능한 변수가 변수라고 생각하느냐?”
“이런 참. 답답하시긴. 글쎄 진짜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우릴 막을 사람은 아무도…….”
단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멈춰라!”
마른하늘에 벼락이라도 치는 것처럼 고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 목소리에 담긴 내력이 어찌나 막강한지 고요히 흐르던 강물이 연신 파도를 일으키며 출렁거렸다.
“아무래도 그 미친놈이 나타난 것 같은데?”
“그럴 리가.”
묵검의 말에 단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선미로 달려갔다.
만검세가 무인 몇몇이 벌써 선미에 서서 두런거리며 난간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러나라.”
하천웅이 수하들을 물리며 선미로 다가섰다.
그의 곁으로 바짝 다가온 단휘와 묵검은 순간 두 눈을 부릅뜨고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저, 저, 저자는……!”
단휘가 말을 더듬거리자 묵검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다.
먼발치에서 비조선을 타고 빠르게 다가오는 남자.
놀랍게도 그는 하천웅의 이복형제인 하기룡이 아닌가?
‘이해할 수가 없군. 분명 가주님이 놈의 심장을 찔렀다고 했는데…….’
심장이 꿰뚫리고도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니, 살아 있는 것처럼 만들 수는 있겠지.
과거 마교에서 주술로 만든 강시라면 말이다.
하지만 강시는 저렇게 말을 하면서 돌아다닐 수가 없다.
‘인피면구를 쓴 다른 사람인가?’
만약 그렇다면 정말 훌륭한 솜씨가 아닌가?
현재 천상원에 사로잡힌 채 부지런히 인피면구를 만들어내는 다면선사 뺨 칠 수준이리라.
게다가 체격과 분위기 전부 똑같다.
‘역시 같은 인물로 생각하는 것이…….’
묵검과 단휘가 복잡한 생각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오히려 하천웅은 천진한 표정으로 심드렁하니 물었다.
“당신은 누군데 본 수송단을 막으려는 것이오?”
만검세가 무인들은 물론 비조선을 타고 오던 하기룡도 멍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기억을 잃었다더니…… 진짜인 모양이군.”
하천웅이 이맛살을 슬쩍 구기고는 묵검과 단휘를 돌아보았다.
“혹시 저자가 누군지 아시오?”
묵검은 현재 총관 진서국 모습을 하고 있었기에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대답했다.
“예, 가주님의 형님이신 하기룡 대협이십니다.”
“내 형님이라고? 저자가? 하지만 듣기로는 분명 형님이…….”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만…….”
묵검이 자신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곁눈질로 하기룡을 힐끔거렸다.
반면 하기룡은 묵검을 진서국인 줄 알고 소리쳤다.
“오랜만이오, 진 총관.”
묵검이 고개만 숙여 보이자 하기룡이 차갑게 웃었다.
이번에는 하천웅이 포권하며 소리쳤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형님. 제가 어느 시점부터 기억을 잃어 형님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호오. 기억을 잃었다곤 하나 뭔가 분위기가 달라졌구나.”
하기룡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확실히 하천웅은 어딘지 달라져 있었다.
죽음을 겪은 후로 지나치게 강해진 것도 이상했는데, 지금은 또 그때보다도 강해 보였다.
‘도대체 네놈은 무슨 기연을 얻었기에 그리도 강해진 거지? 하기야 상관없겠지. 이젠 아무래도.’
하기룡이 속내를 삼키며 소리쳤다.
“아우는 어딜 가는 길긴가?”
“파양호로 가는 중입니다.”
“파양호로? 하면 육로를 이용하지 않고 어째서 먼 길을 돌아가려는 것이냐?”
“짐이 많아서 배로 수송하는 게 편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물론 급조해서 지어낸 말이다.
하지만 그 말이 어느 정도 일리는 있었다.
실제로 서른 개가 넘는 관을 마차로 수송하기에는 그 무게가 상당해서 이동에 제약이 따랐다.
하지만 배를 통해 이동한다면 조금 돌아가더라도 시일이 비슷하게 걸릴 가능성이 컸다.
다만…….
“요즘 장강은 수로채로 시끄러운데 굳이 거길 지나가겠다?”
하기룡이 지적한 바로 이 점이 걸리는 부분이다.
그렇잖아도 장강대첩으로 수로채라면 이를 가는 무림맹으로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경로이리라.
하천웅이 아랑곳하지 않고 대꾸했다.
“형님 말씀이 일리는 있습니다만, 이미 결정된 사안입니다.”
“불가한다.”
하기룡이 불쑥 내뱉은 말에 무인들이 술렁거리며 서로를 보았다.
만검세가주는 하천웅이다.
한데 하기룡이 무슨 권한으로 불가한단 말인가?
이쯤 되자 하천웅도 슬슬 기분이 나빠졌다.
“죄송하지만, 본 가의 주인은 접니다. 형님께 허락을 맡을 이유가 없습니다.”
“아니, 너는 내 허락을 맡아야 한다.”
“도대체 무슨 논리로…….”
“나는 총군사님의 명으로 이곳에 온 것이다.”
“……!”
순간 선내가 다시 술렁거렸다.
묵검과 단휘도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하기룡이 그 반응을 즐기기라도 하듯 빙그레 미소 지으며 품에서 옥패를 꺼냈다.
그것은 총군사가 직접 그에게 전해준 증표였다.
그 증표를 보이는 순간, 하기룡의 말은 무림맹 총군사의 명과 같은 효과를 가진다.
“무림맹 총군사님의 뜻을 대신하여 명한다. 당장 수송을 멈춰라. 내가 직접 승선해서 물자를 다시 한번 확인하겠다.”
“형님, 이건 억지입니다. 이미 수송 물자는 장사에서 검영대주가 확인을…….”
“상관없다. 내 말을 거역한다는 것은 곧 무림맹을 등진다는 것과 같다.”
하천웅의 안색이 눈에 띄게 나빠졌다.
묵검이 얼른 작은 소리로 말했다.
“절대 승선시켜선 안 되오! 아실지 모르겠지만, 하 가주께서는 저자와 앙숙 관계로 지냈소. 저자는 오래전부터 하 가주를 제거하려고 칼을 벼르던 자요!”
“형님 말씀대로요. 저자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할지 알 수가 없소!”
단휘까지 가세하자 하천웅이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총군사님의 옥패를 들고 있지 않소?”
“바로 그게 문제라는 겁니다. 총군사는 우리 사절단에게 흑천련에서 하기룡의 행방을 찾으라고 했소. 한데 이젠 총군사 옥패를 들고 나타나다니. 정말 총군사의 지시인지도 의문스럽지만, 그렇다고 해도 역시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지 않소?”
충분히 일리 있는 말이었다.
기실 관 속에 들어 있는 적비연의 몸을 보호하는 차원이 아니더라도, 하기룡이 무슨 속셈으로 하천웅을 방해할지 알 수 없었다.
거기에 묵검이 쐐기를 박는 말을 꺼냈다.
“적 가주님께서는 파양호로 곧장 오라고 했소. 도중에 어떤 방해요소가 나타나더라도 흔들리지 말라 했소이다.”
하천웅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 발언은 꽤 효과가 있었다.
하천웅에게 적비연은 그 이름만으로도 거의 세뇌처럼 작용했기에.
하기룡이 포권하며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형님. 승선은 불가합니다. 파양호에서 뵙겠습니다. 속도를 올려라.”
“존명!”
그의 명에 가문의 무사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배가 더욱 빠르게 나아가기 시작하자, 가만히 지켜보던 하기룡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멈추라고 했다!”
그야말로 벽력같은 사자후.
고요했던 강물이 다시 출렁거렸다.
몇몇 무인들은 귀를 틀어막으며 주저앉았고, 선박이 물결에 휩쓸리듯 기우뚱거렸다.
묵검과 단휘 역시 내공을 끌어올리며 가까스로 청각을 보호했다.
‘무슨 내공이 이리도……!’
두 사람은 하기룡의 무공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천웅 역시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는 돌아보았다.
“정말로 제 형님이 맞소? 저런 막강한 자가 어째서 내게 밀린 건지…….”
“못 본 사이에 상당히 강해진 것 같소.”
하천웅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묵검과 단휘도 뭐라고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러는 사이 하기룡이 씨익 웃으며 공력을 실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말했다.
“네가 승선을 거절한다고 해서 내가 못 오르겠느냐?”
선내에 있던 사람들이 저마다 긴장을 다지며 마른침을 삼켰다.
하기룡과 만검세가의 선박은 아직 상당히 먼 거리.
하지만 그 거리를 뛰어넘는 강렬한 기감은 모두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묵검이 긴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사령검, 만약을 대비하라.”
그의 명에 만검세가 무인으로 위장하고 있던 사령검들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였다.
“하 공자!”
“가주님께 예를 갖추시오!”
남쪽 강줄기 끝에 배 한 척이 나타나더니 사자후가 연이어 터져 나오는 것이 아닌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배 한 척에는 대략 백여 명의 무인들이 타고 있었는데, 바로 만검세가 팔룡당과 만파당 소속 무인들이었다.
뱃머리에 서서 소리친 두 사람은 다름 아닌 팔룡당주 심원평과 만파당주 안철주였다.
그들은 박효양의 지시를 받고 급히 하천웅의 뒤를 쫓아온 것이었다.
박효양으로서는 하기룡이 갑자기 나타난 게 아무래도 신경 쓰였던 것이다.
이미 하천웅을 가주로 모시는 상황에서 하기룡의 등장은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었기에.
그들이 탄 배는 하기룡을 앞지르더니 멀어져가는 하천웅을 가로막으며 멈췄다.
난간으로 다가선 심원평이 포권을 취했다.
“하 공자께서는 저희들과 함께 가장으로 돌아가시지요. 가주님은 현재 무림맹을 지원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나시는 중입니다. 부디 방해하지…….”
“누가 방해한단 말인가? 방해는 오히려 그대들이 하고 있다만?”
“하 공자!”
“심 당주, 안 당주. 잠시 안 본 사이에 많이 변했군. 그대들은 내게 충성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이, 이미 지난 일을 어째서…….”
“훗. 지난 일이라. 뭐, 그렇지. 어쨌든 비켜라. 다 쓸어버리기 전에.”
하기룡이 내뱉는 말에서 한기가 풀풀 휘날렸다.
* * *
파양분타에 도착한 적비연이 미간을 좁히고는 은하란을 보았다.
“그럼 이제 확실해 내 본신을 되찾게 된다는 건가?”
“네, 가주님이 흑천련주의 몸으로 깨어난 직후 곧바로 장사로 서신을 보낸 것도 그런 이유죠.”
“지금쯤 수송을 시작했겠군.”
“그렇죠. 수송 과정에 특별한 문제만 생기지 않는다면 무사히 본신을 되찾으실 수 있을 거예요.”
“나는 그럼 또 죽어야 하는 건가? 이 몸으로는 죽기도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자살도 안 될 테고.”
“글쎄요. 천해경의 경지로 들어선다면 또 다른 방법이 생길지도 알 수 없죠. 어쩌면 신통의 경지에 다다를 수도 있을 테니까요.”
적비연이 주먹을 꾹 말아 쥐고는 입매를 올렸다.
“홍! 내가 드디어 내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됐다는구나!”
“축하드립니다, 가주님.”
예홍이 부드럽게 웃음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은하란도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저도 기대되는군요. 당신이 얼마나 대단해질지. 강호를 구할 수 있는 자의 힘이란 어느 정도일지.’
하지만 예홍의 속내는 사뭇 달랐다.
‘다 틀렸네. 그 멍청한 단휘가 가주님의 존체를 제대로 수송할 리가 없잖아. 망했다, 망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