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 살아가는 것
“두 번은 말하기 싫지만 옛정을 생각해서 한 번 더 기회를 주지. 비켜라. 그러지 않으면 전부 쓸어버리겠다.”
하기룡이 담담하게 내뱉은 말에 심원평과 안철주의 낯빛이 눈에 띄게 굳었다.
박효양으로부터 조심하라는 말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막무가내일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심원평이 대검을 검집째로 들어 바닥에 쿵 찍으며 소리쳤다.
“하 공자! 이 무슨 무례요? 아무리 우리가 한때 의기투합한 적이 있다곤 하나 어디까지나 본 가를 위한 협약이었소! 한데 이미 모든 게 정리되고 자리를 잡은 상황에 굳이 가주님을 방해…….”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군. 만검세가주? 그딴 건 관심도 없으니까 알아서들 하라고. 난 단지 저 표물을 확인하겠다는 거야.”
“가주께서 불가하다고 하지 않소!”
옆에 있던 안철주도 쌍검을 뽑아 들고는 소리쳤다.
“아무리 무림맹일지라도 이런 법은 없소! 본 가에는 본 가의 규율이 있는 법이오! 권고도 아닌 명령조라니!”
하기룡이 피식 웃었다.
“역시 두 번의 기회 따위는 소용없다니까. 보통 한 번 말해서 안 듣는 것들은 몇 번을 해도 마찬가지더라고.”
“그 무, 무슨 무례한……!”
“닥쳐라. 두 번의 기회를 모두 날린 건 너희들이다.”
스르르릉.
하기룡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이에 격분한 심원평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 공자! 끝까지 예로써 대해주려고 했더니 도가 지나치구나! 그대가 우리를 전부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글쎄, 직접 겪어봐.”
말을 마친 하기룡이 순간 몸을 휙 날렸다.
팟! 팟!
그가 물을 박차면서 수상비를 펼쳤다.
순식간에 커다란 배 위로 올라선 하기룡이 당황하는 무인들을 스윽 훑어보았다.
“다들 오랜만이군. 내 손으로 너희들을 죽이고 싶진 않았는데 말이야.”
사실 절반은 거짓말이다.
이들이 하천웅을 가주라고 부를 때부터 이미 그는 살심을 품었다.
심원평이 대검을 앞세우며 이를 갈았다.
“하 공자! 끝까지 이렇게 나오겠다는 건가?”
“정녕 우리와 손을 섞겠다는 건가?”
안철주도 쌍검을 들고 기수식을 취하며 으르렁거렸다.
자연히 다른 수하들도 일제히 검을 뽑아들고는 하기룡을 겨눴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하지만 이들은 망설이고 있었다.
그래도 한때 만검세가주를 꿈꾸었던 하기룡이 아닌가?
그는 만검세가의 자랑이기도 했다.
그를 보면서 자부심을 느낀 적도 있었다.
만검세가에는 하기룡이 있노라고 소리치며 다닌 적도 있었다.
물론, 하천웅이 급부상하면서 결과적으로는 하기룡이 밀려났지만.
그래도 한때 한배를 탔던 사이.
하기룡이 차갑게 웃었다.
“한때 우린 한배를 탔지. 그땐 그게 너희들에게 행운이었을 테지만, 지금 나와 한배를 탄 건 대단한 불행이 되겠군.”
“하기룡!”
마침내 심원평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하기룡을 이름으로 불렀다.
찰나, 하기룡의 눈빛이 매서워지더니 눈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지는 게 아닌가?
이형환위의 신법을 보인 하기룡이 순식간에 심원평 앞으로 다가서더니 검을 횡으로 그었다.
서걱!
갑판의 모든 무인들이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단 일검!
사람이 어떻게 이리도 빠를 수 있단 말인가?
충격과 공포가 가시기도 전에 심원평의 목이 갑판을 굴렀고, 피를 뿌리는 몸이 쿵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이, 이럴 수가! 뭣들 하느냐! 놈을 쳐라!”
“존명!”
팔룡당과 만파당 무인들이 일제히 대답하며 갑판을 차고 달려갔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들은 본능적으로 멈칫거리고 말았다.
츠츠츠츠츳……!
“저, 저건 또 뭐야?”
“머, 머리카락이 하얗게……?”
무인들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하기룡의 머리카락이 점점 길어지는가 싶더니 눈부실 정도로 새하얗게 변하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전신에서 풍겨져 나오는 강맹한 기운!
하기룡이 형형한 안광을 뿜어내며 씨익 웃었다.
“최선을 다해야 할 거다.”
파아앗!
다음 순간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 * *
따다다앙!
매섭게 날아드는 흑침을 연이어 튕겨낸 적비연이 뒤로 훌쩍 물러나면서 호흡을 골랐다.
그는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교패를 보았다.
“오랜만이군.”
“꼬박 이 년 만이지요.”
교패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두 사람은 지금 파양분타 후원에서 대련을 하는 중이었다.
실제로 교패는 이따금씩 흑천련주와 대련을 하곤 했다.
언제나 흑천련주가 먼저 제안을 했고, 교패는 이를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한데 이번엔 교패가 먼저 적비연을 찾아오더니 다짜고짜 대련을 하고 싶다고 청한 것이다.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냐고 물었지만, 적비연은 내심 그 속셈을 유추할 수 있었다.
아마도 확인하고 싶은 것이리라.
자신이 알고 있는 흑천련주가 틀림없는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마공까지 익히셨더군요.”
“그리 됐네. 내가 자네한테 모든 무공을 다 보여줄 필요는 없지 않나?”
“그렇지요.”
“그게 서운했던가?”
“그럴 리가요. 그저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진작 알았더라면 저도 권왕에게 그토록 모질게 대하진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아, 물론 책임을 회피하는 건 아닙니다.”
“잘 알고 있네.”
적비연이 나직하게 웃었다.
동시에 그가 바닥을 차고는 무섭게 쏘아져 나갔다.
교패가 말한 그 마공 중 구천혈마검의 제일초식인 구천일관시였다.
쒸아아아앙!
따다다다다다앙!
흑침 여덟 개가 연이어 날아들면서 검첨을 때렸다.
가느다란 검첨을 그보다 더 가는 침을 던져 정확히 때려낸다는 것은 가히 신기에 가까운 경지였다.
하나 적비연의 검세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촤아아악!
흑천검이 교패의 옷자락을 찢으며 지나쳤다.
파라라라!
교패가 몸을 팽이처럼 회전하면서 적비연의 몸 구석구석으로 바늘을 내질러갔다.
따다다다당!
하지만 흑천투권공으로 인해 피부가 돌처럼 딱딱해진 적비연은 모든 바늘을 그대로 튕겨냈다.
대신 검파를 끌어당기면서 검두로 교패의 안면을 정확히 가격했다.
빠악!
“컥!”
교패의 신형이 그대로 허공을 가로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콰당탕!
얼른 몸을 추스르고 일어나려던 교패는 멈칫하고 말았다.
어느새 자신의 곁으로 바짝 다가선 적비연을 본 것이다.
‘어느 틈에…….’
적비연은 검을 겨누지도 않았다.
하지만 교패는 알 수 있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단 일수에 자신의 명이 끝날 수 있다는 것을.
피식.
그가 쓴 미소를 짓고는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역시 련주님이십니다. 저의 패배입니다.”
“당연한 것을.”
“더 강해지셨군요. 공교롭게도 이번 역시 죽음을 겪으신 후로.”
말을 꺼내는 교패의 눈이 반짝 빛을 뿜었다.
바로 이 부분이 항상 걸린다.
흑룡대주, 투혈권왕 그리고 련주.
이 모두가 죽음을 겪은 후로 거짓말처럼 강해졌다.
과연 우연일까?
우연이 반복되면 필연이라 하였다.
교패의 깊어진 눈동자를 보며 적비연이 쓴웃음을 지었다.
“나를 의심하는가?”
교패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렇게 대놓고 물어올 줄은 몰랐으니까.
“눈치채셨습니까?”
“자네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아는 자가 있는가?”
“그렇군요.”
교패가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이젠 정말 모르겠다.
련주가 진짜 자신이 아는 그인지.
“련주님은 어떤 강호를 꿈꾸십니까?”
“글쎄. 내가 꿈꾸는 강호라…….”
갑자기 받은 질문이라 적비연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아니, 잠시 생각한다고 머물러 있었던 것 같은데 시간은 꽤나 흘러갔다.
교패는 기다렸다.
서산에서 기웃거리던 해는 이제 몸을 사리고 붉은 노을만 퍼트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적비연은 계속 생각했다.
사실 흑천련주가 꿈꾸는 강호는 단순했다.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
그 정점에 서는 것.
오래전 적비연이 꿈꾸던 강호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한데 이젠 좀 달라졌다.
수많은 경험을 거듭하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실제로 적비연이 산 인생은 얼마 되지 않지만, 무수한 기억을 흡수한 덕분에 수백 년을 산 것만 같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서 느낀 건…….
‘아……!’
순간 어떤 깨달음이 뇌리를 훅 스치고 지나갔다.
이 깨달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원래 깊은 깨달음일수록 말로 표현하기가 어려운 법.
하지만 적비연은 뭔가 자신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종잇장이 뒤집히는 것에 비유할 수 있었다.
그간 생각해 왔던 것들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것.
“련주님……?”
기다리다 못한 교패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제야 적비연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해가 완전히 저물어 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었다.
적비연이 희미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내가 꿈꾸는 강호는…… 누구나 꿈을 안고 살아가는 강호다.”
“예?”
“지금은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겠군.”
교패는 어리둥절하면서도 그 말에 심오한 의미가 있음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
련주가 변한 것이다.
한참이나 련주를 바라보던 교패가 피식 실소를 흘렸다.
‘모두가 꿈을 안고 살아가는 강호라…….’
너무 이상적이라서 잘 와 닿지 않는다.
아마도 련주가 말하는 오의를 자신이 깨우치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적비연은 교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물었다.
“자네는 어떤 강호를 꿈꾸는가?”
“위선을 징벌하는 것. 정도인들이 내세우는 역겨운 명분을 철저하게 힘으로 짓밟는 것에서 출발했지요.”
“그 뜻은 여전한가?”
“크게 달라지진 않은 것 같습니다.”
적비연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교패가 빤히 응시하며 물었다.
“제가 당신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련주라는 호칭에서 당신으로 바뀌었다.
그것만으로도 교패의 마음 깊은 곳에 미묘한 파문이 일어났다는 뜻이리라.
적비연이 깊어진 눈빛으로 교패를 마주 보았다.
‘마치 우주를 담은 듯하구나.’
절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만큼 적비연의 눈동자는 깊고 맑았다.
마침내 적비연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 음성은 어쩐지 영혼마저 울리는 듯했다.
“그대가 사람을 쫓는다면 믿지 말고, 뜻을 좇는다면 나를 믿어라.”
“……!”
담담하게 내뱉은 말.
하지만 그 말은 교패의 심중에 큰 울림을 주었다.
물론, 거기에는 적비연의 이능인 공천지권위 영향도 있었다.
사람인가? 뜻인가?
그러고 보니 자신은 지금껏 무얼 쫓았던가?
갑자기 놓치고 있던 깨달음이 밀려오는 것만 같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갑자기 허공에 헛발질을 하는 기분이 든다.
한참 후에야 교패가 포권을 취했다.
“뜻하지 않게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뜻에 동참하겠습니다.”
적비연이 희미한 웃음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교패가 던진 질문은 적비연에게도 큰 울림이 있었다.
환생을 거듭하면서 느낀 바가 있다면, 죽는 건 쉽다는 거다.
정말 너무 쉬웠다.
사람들은 말한다.
죽을힘을 다해 싸우라고.
죽을 각오로 싸우라고.
하지만 그건 잘못됐다.
죽는 건 언제든 할 수 있다. 결코 어려운 게 아니다.
정말 어려운 것은 바로 살아남는 것이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악착같이 버티고 이겨내서 살아가는 것!
자신을 안전하게 지켜가며 싸운다는 건 얼마나 숭고하고 어려운 일인가?
적비연이 주먹을 꾹 말아 쥐고는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밤하늘에서 쏟아지는 별을 보며 다짐했다.
어떻게든 이 강호에서 살아남겠다고.
모두가 꿈을 안고 살아가는 강호.
그렇다.
여기에서 핵심은 ‘꿈을 안고’가 아닌, 바로 ‘살아가는’이다.
깨달음의 끝이 이리도 단순할 줄이야.
그때 후원으로 무인 하나가 뛰어와 보고했다.
“놈들이 협곡으로 진입했습니다!”
“곧 가도록 하지.”
말을 뱉은 적비연은 문득 단전에서 뜨끈한 공력이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마침내 초절정의 벽을 깨고 천해경 초입으로 들어서는 신호였다.
* * *
하천웅은 입을 딱 벌린 채 꿈쩍도 하지 못했다.
묵검과 단휘도 마찬가지.
세 사람은 석상처럼 굳은 채로 눈만 끔뻑였다.
“어, 어떻게……?”
하천웅이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선미 난간.
거기에는 전신이 피에 젖은 하기룡이 새하얀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늘어뜨리고는 우두커니 서 있었다.
대체 어떤 경신법을 사용해서 여기까지 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근방에 배가 보이지도 않는다.
설마하니 하늘을 날아서 왔을 리는 없을 테고.
수상비를 펼쳤나?
이 먼 거리를?
그러자면 도대체 하기룡의 공력이 얼마나 심후하다는 건가?
아니, 그 전에 하기룡을 막아섰던 두 당주는 어찌 되었단 말인가?
의문이 꼬리를 문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기룡은 씨익 입매를 비틀고는 손을 한 차례 휘저었다.
퍼퍼퍼엉!
일순 강렬한 기풍이 일어나면서 관 덮개가 뜯겨져 날아갔다.
그야말로 놀라운 수법이었다.
관은 그대로 두고 사슬에 묶여 있는 덮개만 뜯겨 날아가다니.
모두가 경악한 가운데 하기룡의 목소리가 담담하게 날아들었다.
“그러게 물건 좀 보자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