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30화 (231/301)

230. 들켰다

저벅저벅.

하기룡이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주위를 에워싸고 있던 무인들이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하천웅과 묵검 그리고 단휘와 사령검도 마찬가지.

초절정의 영역에 오른 자들이 넷이나 된다.

이만하면 어지간한 지방 방파 하나는 흔적도 없이 지울 수도 있으리라.

그럼에도 지금 하기룡 한 명을 어찌하지 못해 뒷걸음질을 치고 있다.

그런데도 수치심이나 자괴감은 들지 않는다.

지금 눈앞에 서 있는 하기룡은 천군만마보다도 두려운 존재였으니까.

살이 따갑도록 느껴지는 기감.

여차하면 그 기감이 자신의 목을 옥죄어 죽일 수도 있다는 기분이 든다.

하기룡이 이렇게 강한 자였나?

묵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백발광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때문에 지금 하기룡의 모습이 그저 낯설고 의아할 뿐이었다.

한데 단휘는 달랐다.

그는 이미 흑천련에서 간자로 지내는 동안 백발광인의 신위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설마…… 하기룡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킨 단휘가 묵검에게 전음을 보냈다.

[백발광인입니다.]

[백발광인?]

[예, 일전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흑천련에서 악랄한 짓을 꾸미는 것 같은데 그게 백발광인을 만드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요. 가주님도 그 부분을 염두에 두셨고요.]

[그럼 하기룡이 지금껏 흑천련에 사로잡혀 있다가 백발광인이 되어서 나타났단 말인가?]

[백발광인처럼 미치광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다는 말은 그 실험에 성공한 사례가 아니겠습니까?]

그럴싸한 추측이었다.

물론 단휘의 추측은 기본 전제가 잘못되어 있었다.

하기룡을 이렇게 만든 건 흑천련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껏 장사에 머물러 있던 그는 그러한 내막을 알 수가 없었다.

[짐작컨대 지금 하기룡은 당시의 백발광인…… 그러니까 냉혼신검 설규보다 더 강한 것 같습니다. 그자의 기운과 일맥상통한 느낌도 나고요.]

[하지만 이상하군.]

[뭐가 말입니까?]

[흑천련의 실험이 통한 것이라면 하기룡의 몸에서는 사기가 느껴져야 할 게 아니겠나?]

[아……!]

그러고 보니 그렇다.

하기룡이 이처럼 강해지는데 흑천련의 도움을 받은 것이라면, 분명 사기가 느껴져야 했다.

실제로 백발광인에게서도 미약한 사기가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이는 흑천련에서 온갖 사술까지 동원하여 설규를 치료하고자 했기에 몸에 남았던 기운이었다.

그런데 하기룡은 애초에 흑천련과 연이 없으니 사기가 느껴질 리가 만무했다.

오히려 정순한 기운의 끝을 달리고 있달까?

다만 강제로 만들어진 신선의 경지.

이른바 보패인간이 되어 버린 그였기에 일반적인 정기와는 분명 차이가 있었다.

뚜벅뚜벅.

묵검과 단휘가 바쁘게 전음을 주고받는 사이 하기룡은 갑판에 가지런히 놓인 관을 향해 다가갔다.

비어 있는 관과 병장기나 잡동사니가 담겨 있는 관이 아무렇게나 섞여 있었다.

“형님! 이게 무슨 무례입니까? 계속 이러신다면…….”

하천웅이 한 걸음 나서서 말을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하기룡이 손을 들어 그의 말을 제지했기 때문이다.

매우 단순한 동작이었다.

하지만 그 행위만으로도 하천웅은 저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함부로 나섰다간 위험할 수도 있다는 본능이 그를 멈추게 한 것이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그만큼 하기룡은 강한 위압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하천웅이 주먹을 꾹 말아쥐고는 하기룡을 응시했다.

묵검과 단휘도 마찬가지.

[경거망동하지 마라. 어쩌면 가주님의 존체를 들키지 않을 수도 있으니.]

[예, 형님]

단휘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오른손은 검파에 실었다.

무턱대고 달려들진 않겠지만, 하기룡이 적비연의 몸을 확인하게 된다면 어떻게든 나서야 할 것이기에.

그러는 사이 하기룡은 차분히 발걸음을 옮기며 관을 세세히 살폈다.

놀랍게도 그가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리면, 관속에 담겨 있던 병장기들이 한꺼번에 붕 떠올라서 바닥을 드러냈다.

정말이지 입이 딱 벌어질 만큼 엄청난 신위!

능공섭물의 수법으로 병장기 하나를 허공에 띄우는 것도 대단한 경지다.

한데 무수한 병장기를 한꺼번에 띄우다니?

그 무게만 해도 엄청날 터인데.

터더더덩! 텡강!

허공으로 솟아올랐던 병장기가 그대로 떨어지면서 관 속에 다시 담겼다.

“형님, 어쩌자고 이러십니까? 왜 멀쩡한 지원 물품들을 들춰내시는 겁니까?”

하천웅이 다시 말했지만, 하기룡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자신을 방해하면 언제든 죽일 거라는 듯 강렬한 살기만 드러냈다.

묵검과 단휘는 두 눈에 힘을 주었다.

저벅저벅…….

이제 적비연의 몸이 들어있는 관이 바로 옆이었다.

이번에도 하기룡은 능공섭물의 수법으로 관에 담겨 있던 잡동사니를 허공으로 띄워 올려 바닥까지 확인했다.

[바로 옆에 가주님의 존체가 있습니다!]

[알고 있어.]

묵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파를 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저벅저벅…….

마침내 적비연이 들어있는 이중 바닥 구조로 만들어진 관.

하기룡이 손을 들어 올리자, 관에 담긴 병장기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바닥을 살핀 하기룡이 잠시 눈살을 찌푸린다.

묵검과 단휘는 숨을 죽였다.

여차하면 발검할 생각이다.

마침내 허공으로 띄운 병장기가 다시 관으로 떨어졌다.

묵검과 단휘가 그제야 안도의 숨을 가만히 내쉬었다.

하기룡이 의심스럽지만, 지금은 그와 부딪쳐서 좋을 상황이 아니다.

당장 쏟아져 내릴 소나기는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적비연의 몸을 담은 관 때문에 대부분의 관을 두꺼운 바닥으로 만들었다.

혹시라도 하기룡처럼 모든 관을 바닥까지 파헤쳐볼까 해서 신경을 쓴 것이다.

만약 적비연이 들어있는 관만 바닥이 두껍다고 느껴졌다면 대번 이상한 낌새를 챘으리라.

물론, 모든 관의 바닥 두께가 똑같진 않다.

아주 미묘하게 차이를 두었다.

그래서 바닥의 두께에 대해 둔감해지도록 노린 것이다.

분명 그럴진대…….

[왜죠? 왜 저기 멈춰 서 꿈쩍도 하지 않는 거죠?]

단휘가 긴장한 표정으로 전음을 흘렸다.

묵검도 다시 검파를 쥐어갔다.

[모르겠다.]

하기룡이 지금까지와는 달리 하필 적비연이 들어 있는 관 앞에 멈춰 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더불어 하천웅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게 반각이 되도록 움직이지 않던 하기룡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기룡이 그 다음 관을 확인하자 세 사람은 다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관 두 개를 더 확인할 때였다.

갑자기 하기룡이 몸을 틀더니 역시 적비연이 들어 있는 관 앞에 섰다.

묵검과 단휘가 두 눈에 힘을 주었다.

[하아, 미치겠네. 도대체 왜 저기서만 저런답니까?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아무래도 눈치를 챈 것 같다.]

[예? 어떻게요?]

단휘의 물음에 묵검은 답하지 못했다.

하기룡이 피식 웃으며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재미있네.”

“……!”

“확실히 관을 감쪽같이 잘 짰어. 바닥의 두께가 모두 조금씩 달라서 큰 문제 없이 넘길 뻔했지. 실제로 병장기처럼 무겁고 날카로운 물건은 바닥이 단단하고 두꺼워야 할 테니까. 반대로 단환이나 영약 같은 건 바닥이 두꺼울 필요가 없었을 테고. 그럴싸하다. 누가 생각해낸 건지 모르겠지만 칭찬한다.”

물론 그 생각을 해낸 건 이 자리에 없는 천상원주 은하란이었다.

“만약 이것들만 확인한다면 나는 눈치를 채지 못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결코 숨길 수 없는 게 있지.”

“형님,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하기룡이 하천웅을 돌아보고는 입매를 틀었다.

“그건 바로 사람의 기운이다. 바닥의 깊이를 저마다 다르게 설계해서 눈을 속일 수는 있었겠지만, 사람의 기운만큼은 숨길 수 없는 거거든.”

하천웅, 그리고 묵검과 단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단휘가 묵검에게 전음으로 물었다.

[형님! 저자가 그럼 가주님의 기운을 느꼈단 말입니까? 전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그게 아니다. 놈이 말하는 건 가주님의 기운이 아니라, 우리 기운을 말하는 거다.]

[우리 기운…… 아!]

단휘는 팔뚝을 타고 소름이 돋아났다.

하기룡이 관을 지나칠 때마다 자신들이 뿜어냈던 기운.

그 미약한 차이를 하기룡은 감지해냈단 말이 아닌가?

실제로 그랬다.

하기룡은 적비연이 들어 있는 관 앞에 멈췄을 때, 이 세 사람의 기도가 미약하게나마 변하는 것을 감지했다.

그건 분명 긴장에서 오는 변화였다.

혹시나 해서 일부러 거길 지나쳐 다른 곳을 살폈는데 의심은 확신이 됐다.

“형님,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오해인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예?”

하기룡이 대답 대신 손을 한 차례 휘저었다.

콰콰앙!

그러자 한 차례 폭음이 일어나면서 관 하나가 산산조각 터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창졸지간에 일어난 일에 갑판 무인들 모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관에 담겨 있던 병장기가 허공으로 튀어오르면서 사방으로 비산했고, 무인들이 얼른 몸을 물리며 피하느라 혼비백산했다.

그러는 사이 묵검과 단휘의 눈에는 허공에 솟아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지는 적비연의 몸이 또렷하게 보였다.

터덩! 텅!

아수라장이 된 갑판 가운데에 떨어지며 주룩 미끄러진 몸!

하천웅, 묵검, 단휘가 두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다.

[형님, 가주님이!]

[나도 봤다!]

대답을 마친 묵검이 제일 먼저 검을 뽑아들었다.

이어서 하천웅과 단휘도 동시에 검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하기료오옹!”

그러거나 말거나 하기룡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적비연의 몸을 보고 말했다.

“까꿍.”

* * *

협곡 아래를 내려다보는 적비연은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승리군.”

옆에 있던 은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만통지는 대단하군요.”

두 사람이 내려다보는 협곡 아래에서는 무림맹 무인들의 비명이 연신 솟구쳐 올라오고 있었다.

무림맹은 남창까지 어렵지 않게 집어 삼켰다.

하지만 적비연이 만통지와 함께 파양현으로 온 이후부터는 전세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야말로 백전백승!

이 짧은 기간 동안 무림맹은 파양분타를 치기 위해서 여섯 번이나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여섯 번 모두 대패였다.

지금도 만통지가 파 놓은 함정에 빠진 무림맹 무인들이 아우성을 치며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적어도 이 강호를 젊은 무인들의 정기나 빨아먹는 놈들에게 넘길 수는 없지.”

“동감이에요. 그나저나 몸은 좀 어떠세요? 벽을 넘어섰다고 들었습니다만.”

“확실히 이전과는 다르오.”

“그럼 내려가서 시험이라도 해보지시 그러세요? 뭐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왠지 지금의 가주님이라면 전신(戰神)이 되어 싸우실 것 같은데요.”

하지만 적비연은 고개를 저었다.

“전신은 무슨…… 그건 그냥 일방적인 학살일 테지. 그런 취미는 없소. 가능하다면 최소한의 희생으로 이 전쟁을 승리하는 게 목표일 뿐.”

“그렇군요. 다행이에요.”

“뭐가……?”

“가주님이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어서.”

은하란이 희미하게 웃었다.

적비연이 담담하게 말했다.

“어쩌면 내가 신의 아상의 몸으로 환생했던 것이 도움이 되었던 건지도 모르겠소. 사람을 살려야 한다는 그의 사상이 내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 헉!”

적비연이 갑자기 가슴을 움켜쥐면서 눈을 부릅떴다.

은하란이 미간을 곱게 찡그리며 물었다.

“가주님……?”

“끄읍……!”

적비연은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예홍이 얼른 다가갔다.

“가주님! 괜찮십니까?”

“갑자기…… 머리가……!”

처음에는 중단전이 짓눌릴 듯 아프더니, 이젠 머리가 깨질 것만 같다.

그러길 잠시,

“끄아아아압!”

적비연이 무릎을 꿇더니 허리를 꺾으며 포효했다.

엄청난 사자후에 협곡의 무인들마저 멈칫거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우르르르릉!

협곡의 바위들이 부서져 내렸다.

“헉, 헉, 헉……!”

적비연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예홍이 얼른 적비연의 어깨를 잡으려는데,

탁!

적비연이 그 손길을 차갑게 뿌리치는 게 아닌가?

다음 순간 적비연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몸을 일으켜 세웠다.

“가주님……?”

예홍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를 불렀다.

적비연의 눈동자가 핏빛처럼 붉게 물들어있었다.

입매를 비틀어 올린 그가 손을 쥐었다 펴면서 중얼거렸다.

“오오, 이거다. 이거야. 크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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