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 내가 돌아왔다
“가주님!”
예홍이 얼른 적비연의 어깨를 짚었다.
다음 순간, 적비연이 손을 한 차례 휘젓자 예홍의 몸이 추풍낙엽처럼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파앙! 쿠당탕탕!
한참이나 굴러간 예홍이 신음을 삼키고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가주님 대체 왜……?”
“가주님이 아니에요!”
은하란이 날카롭게 소리치자, 예홍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확실히 적비연에게서 느껴지는 기도는 지금까지와 사뭇 달랐다.
원래도 거칠고 패도적인 면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크큭! 크하하하하!”
적비연이 순간 고개를 꺾어 들더니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협곡이 다시 균열이 가면서 일부가 허물어져 내렸다.
바위가 떨어지자 그 아래에서 아득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예홍이 미간을 좁히고는 물었다.
“너는……?”
적비연이 고개를 스윽 돌리더니 히죽 웃었다.
“계집, 본좌는 극마라고 한다.”
“……!”
예홍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가주님은 어떻게 된 거지?”
“그걸 나한테 물어서 어쩌자는 거냐?”
“너는 가주님을 주인으로 모셔야 하는……!”
쉬이이이잇!
순간 적비연, 아니, 극마의 신형이 바람처럼 날아들더니 불쑥 손을 뻗었다.
순식간에 턱과 목이 잡힌 예홍이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어찌나 힘이 센지 제대로 저항도 하기 어려웠다.
극마가 무형의 기운을 뿜어내 예홍의 전신을 옭아맨 탓이다.
“큭! 커윽!”
“계집, 뚫린 주둥이라고 함부로 놀리다간, 머리도 뚫릴 수 있다는 걸 알아야지.”
“그 손 놔!”
이번에는 극마의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극마가 예홍을 치켜든 채로 고개만 돌리고 물었다.
“훗, 왜? 네년이 날 소멸시키기라도 하려고? 하지만 육신을 가진 내가 네년 뜻대로 고분고분 소멸당할 것 같나? 그렇지 않아도 내 언젠간 네년을 끝내…….”
“후회할 텐데.”
“뭐?”
“운 좋게 잠깐 육신을 차지했다고 한들, 계속 그 몸에 머무를 수 있다고 생각해?”
“머물지 않으면?”
“이미 겪었다고 들었는데. 가주님이 다른 신체를 얻어서 깨어나면 넌 결국 거기로 소환되게 되어 있어. 그럼 그때 소멸해 버릴 수 있지.”
“크하하하! 그렇다면 그 전에 네년을 죽여 버리면 되겠구나!”
“내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다른 사람이 널 소멸시키겠지. 설마 아직도 널 소멸시킬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
“너처럼 위험한 자가 가주님과 함께 머무는데 내가 안전장치를 만들어두지 않았을까?”
“누구냐? 그 방법을 아는 자가.”
극마가 씹어뱉듯 말했지만, 은하란은 냉소만 지었다.
“그걸 말할 정도로 내가 바보 같아?”
결국 극마가 예홍을 뿌리치듯 던져 버리고는 돌아섰다.
“뭐, 장난 좀 친 거야.”
“질 나쁜 장난이네.”
“나도 감정이 있으니까.”
“그 감정 잘 다스리는 게 좋을 거야. 소멸당하고 싶지 않다면.”
“너!”
극마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은하란을 노려보았다.
은하란은 그 시선을 피하지 않고 담담히 받아냈다.
결국 극마가 혀를 차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말대로 적비연이 다른 몸으로 깨어나면, 곧 소환될 가능성이 컸다.
아직까지 자신이 천상련주의 몸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적비연이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는 뜻이리라.
지난번 반철룡의 몸으로 깨어났을 때처럼.
“쳇, 좋다 말았군.”
그래도 적비연이 천해경의 경지에 올라서 뭔가 변화가 생긴 게 아닐까 기대했건만.
은하란이 협곡 아래를 내려다보며 턱짓을 했다.
“그렇게 몸이 근질거리면 좀 놀다 오든지.”
“뭐? 정말이냐? 그래도 되는 거냐?”
“안 될 것도 없으니까.”
“크하하하! 좋아! 그럼 어디 한 번 간만에 살풀이 좀 해볼까?”
입이 귀에 걸린 극마가 협곡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훌쩍 뛰어내렸다.
누가 나서서 말릴 겨를도 없었다.
뒤늦게 예홍이 낭떠러지로 다가와 아래를 보며 물었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갑자기 저 미친놈이 설쳐서 작전에 차질이 생기면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다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가 눈치챌지도 몰라요.”
“눈치를 챈다는 건 무슨 말씀이신지.”
“뭔가 이상해요. 흑천련주의 몸이 상한 것도 아닌데, 가주님의 혼이 빠져나간 상황이에요. 아무래도 가주님의 본신에 문제가 생긴 것 같아요.”
“가주님에게 문제가 생기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모르겠어요. 어쩌면…….”
은하란이 잠깐 숨을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가주님이 본신으로 깨어나도 극마가 소환되지 않을 수도 있어요.”
“예? 육체를 가진 극마는 소멸이 안 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쉿.”
“아, 죄송합니다.”
“그래서 그걸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일부러 내려 보낸 거예요.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려고. 만약 가주님의 본체에 문제가 없다면, 혼은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커요.”
“어째섭니까?”
“가주님의 본체는 지금 완전히 깨끗하게 비워진 새 그릇과 같은 상태예요. 누군가 사용하던 그릇과는 다르죠. 우리가 새 옷을 입으면 어딘지 어색한 것과 마찬가지예요. 완전한 혼연일체를 위해서 최소한 한 번 정도는 영혼이 빠져나올 가능성이 커요.”
“아, 그럼 그때 극마는 다시 육신을 잃게 되는 거군요.”
“맞아요. 다만…….”
“다만?”
예홍이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물었다.
은하란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괜한 걱정을 애기해 봐야 부정적인 예홍에게 좋을 게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예홍은 속으로 생각했다.
‘그게 더 불안하단 말입니다!’
은하란은 그녀대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만에 하나 가주님이 불안정한 본체로 깨어나서 무슨 일이라도 당하면…….’
영원히 소멸되는 건 오히려 적비연 쪽이 될 수 있으리라.
“아니야, 절대 그럴 일은 없겠지.”
은하란이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타이르듯 중얼거리자, 예홍은 핼쑥한 표정으로 내심 소리쳤다.
‘그러니까 그게 더 불안하다고!’
한편 협곡 사이에 고립된 무림맹 무인들은 진퇴양난에 빠져 비명과 함께 허우적거렸다.
“정신 바짝 차려라! 자리에서 이탈하지 말고 최대한 버티면 지원이…… 크아악!”
“헉, 내 옆자리가 비었다! 누가 좀…… 아악!”
사상자가 속출하자 무림맹 무인들은 전열이 완전히 붕괴되고 말았다.
염천단주(炎天團主) 장무혁(壯武奕)은 어금니를 빠득 갈고는 옆을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언제나 냉소를 잃지 않는 살소공자 자휘겸이 적의 심장에 비영추를 박아 넣고 있었다.
쒸이이잇, 탁!
은잠사에 연결된 비영추를 끌어당겨 낚아챈 살소공자가 싸늘한 눈초리로 주변을 훑었다.
한 번 웃을 때마다 하나의 죽음을 취한다는 살소공자.
하지만 지금만큼은 그도 웃음기를 지웠다.
장무혁이 자신에게 달려들던 무인의 목을 베어내고는 욕지거리를 뱉어냈다.
“젠장! 이런 허술한 함정에 빠질 줄이야!”
살소공자가 피식 웃었다.
하나의 목숨을 취하기 위한 웃음이 아니다.
장무혁의 한탄이 정말 웃겨서 웃은 것이다.
허술한 함정?
물론 표면적으로 보면 그렇게 보인다.
양쪽으로 깎아지른 듯한 암벽.
이런 협곡 사이라면 응당 적을 뒤쫓지 말아야 한다.
매복이 있을 확률도 높거니와 머릿수가 훨씬 많은 무림맹 입장에서 좁은 지형으로 들어가서 좋을 게 없었다.
하지만 모든 상황이 흑천련 무인을 쫓아서 들어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일말의 가능성조차 제기하지 못하도록.
어떠한 의심도 없이 들어설 수밖에 없도록.
만통지다.
그가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만든 것이다.
마치 무림맹 무인들은 집단 최면에라도 빠진 것처럼 협곡으로 들어섰다.
이전의 싸움이 바로 이 협곡 싸움을 위한 초석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숲에 빠진 자는 숲의 형상을 볼 수 없는 법이다.
나무밖에 볼 수 없다.
혈천단과 염천단은 숲에 빠져 있었다.
‘이런 허술한 함정에 빠지도록 만든 만통지가 대단하긴 대단하군.’
살소공자는 진심으로 감탄을 품었다.
여기서 무사귀환할 확률은 얼마나 될까?
일 할은 될까?
십중팔구는 죽으리라.
살소공자가 웃음을 잃은 채 비영추를 휘두르며 살풀이를 하는 가운데, 뒤에 있던 장무혁이 버럭 소리쳤다.
그는 또 한 명의 적을 일도양단하고 있었다.
“혈천단주! 본 단이 여길 완전히 봉쇄하겠소! 그러니 우리 뒤로 물러나 퇴각하시오!”
“그리하면 귀단은 전멸을 면치 못할…….”
“어중간하게 찔끔씩 살아남을 바엔 혈천단이 무사한 게 본 맹을 위해서도 좋을 일! 본 단이 희생하겠소!”
살소공자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의외였다.
염천단보다는 혈천단의 위상이 더 높은 건 사실이었다.
실전에서도 훨씬 많은 공적을 세웠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희생을 자처하다니.
물론, 자휘겸으로서는 고마운 일이다.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다.
“알겠습니다. 퇴각 후 지원을 불러올 테니 최대한 버티시길.”
“후후. 그때쯤까지 우리가 얼마나 버틸지 모르겠소.”
“단주님의 용단에 경의를.”
“클클. 다 좋은데 거 말투 좀 다시 만날 땐 바꿔……!”
퍽!
자휘겸의 눈동자가 커졌다.
한참 말을 뱉어내던 장무혁의 머리가 통째로 뜯겨 날아가면서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의 이마에는 철시가 박혀 있었다.
‘궁귀 조신우!’
흑천사왕 중 한 사람이 여기 있단 말인가!
살소공자가 고개를 홱 돌리는 순간,
쒸에에에엑!
한 자루의 거뭇한 철시가 공간을 가르며 날아들었다.
“헛!”
삐이이잉!
자휘겸이 발끝으로 바닥을 찍어 차는 것과 동시에 비영추를 날렸다.
따아아앙!
비영추와 철시가 부딪치면서 기파가 사방으로 폭사했다.
콰콰콰아앙!
“아아악!”
“크악!”
무림맹 무인 상당수가 기파에 튕기면서 암벽에 부딪쳐 쓰러졌다.
“칫!”
살소공자가 혀를 차고는 어두운 암벽 위를 보았다.
궁귀 조신우가 활을 쐈다.
그 말은 그가 이끄는 흑궁단이 이곳에 와 있다는 뜻.
하긴 모처럼 대어가 어망에 걸려들었으니 낚시꾼들이 달라붙는 건 당연한 일.
“음……?”
그런데 이상하다.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졌다.
전방에서 도검이 뒤섞여 울리는 소리가 잠잠하게 잦아들었다.
머리 위에서 짓누를 듯 느껴지던 살기도 씻은 듯 사라졌다.
금방이라도 화살비가 쏟아져 내릴 것 같더니.
어떻게 된 일인가?
갑자기 어망이 느슨해진 느낌이다.
아니다.
분명 전체적으로 조여 오는 느낌은 느슨해졌는데, 전방에서 강렬한 압박감이 전해진다.
누군가?
누가 이리도 강렬하다 못해 살벌한 존재감을 과시하는가?
살소공자 자휘겸은 눈살을 찌푸리고 전방을 보았다.
흑천련 무인들이 좌우로 갈라서며 누군가에게 길을 터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천천히 걸어오는 한 남자.
뚜벅뚜벅.
달빛에 그의 얼굴이 비친다.
“……!”
자휘겸의 표정이 흔들렸다.
환한 달빛 아래에 섬뜩한 기운을 내뿜으며 선 사내.
그는 흑천련주 태청강이었다.
그가 유독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히죽 웃었다.
“너, 살소공자였던가? 모쪼록 날 기쁘게 해주길 바란다.”
* * *
갑판에 있던 무인들이 저마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들켰다!
적비연의 몸이 완전히 노출됐다.
묵검과 단휘, 사령검과 하천웅은 당장에라도 출수할 수 있도록 내력을 끌어 올렸다.
하기룡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적비연의 몸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이건 적 가주가 아닌가? 관 속에 들어 있었으니 시신인가?”
바로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가만히 누워 있던 적비연이 두 눈을 번쩍 뜨는 게 아닌가?
단휘가 턱이 빠져라 입을 벌렸다.
“가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