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 내가 돌아왔다
하기룡이 흠칫거리고는 적비연을 빤히 바라보았다.
“죽은 자가 아닌데 죽은 척을 하고 있었군. 도대체 왜? 그러고 보니 적 가주는 지금 흑천련 권역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 되는 모양이야.”
조곤조곤 말을 뱉고 있었지만, 하기룡의 전신에서는 숨 막힐 듯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한편 갑자기 눈을 뜬 적비연은 눈살을 잔뜩 찌푸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끄으음.”
정신이 바로 들지 않는다.
여기가 어디지?
적비연이 무심결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판?
나무 바닥 위로 사람들이 서 있다.
난간이 보이고 그 안쪽으로 무인들이 웅성거리면서 자신을 보고 있다.
그리고 바로 앞에는 무복을 입은 백발의 무인이 히죽 웃고 있다.
‘백발광인!’
그 와중에도 백발광인에 대한 경계심은 있었던 것일까?
적비연이 튕기듯이 일어나서 훌쩍 물러났다.
파밧!
“우어어!”
둘러싸고 있던 무인들이 놀란 표정으로 탄성을 터뜨렸다.
적비연이 반사적으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다가 멈칫거렸다.
잡히는 게 없다.
그제야 적비연은 자신의 몸이 바뀐 것을 깨달았다.
‘또 환생인가?’
그제야 의식을 잃기 직전의 상황이 떠올랐다.
흑천련주 태청강의 몸으로 협곡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함정에 빠진 무림맹 무인들이 허우적거리는 것을 지켜보면서 은하란과 담소를 나눴던 것 같다.
그런데 갑자기 두통이 오면서 심장이 아팠다.
뭐지? 독살인가?
그럴 리가.
자신은 만독불침지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독이 무소용이라는 뜻은 아니다.
대개의 독에 내성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혹여 내성이 없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빠른 시간 내에 중독으로 죽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 한다.
그럼 암살을 당했나?
아니다.
분명 극심한 두통을 먼저 느끼다가 서서히 의식을 잃어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적비연이 상황 파악에 여념이 없을 때,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던 단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가주님……?”
“……!”
귀에 익은 목소리에 적비연이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흠칫거렸다.
목소리는 분명 단휘였는데, 외모가 달랐던 탓이다.
“단휘?”
뒤늦게 단휘가 인피면구를 찢어냈다.
“아, 가주님! 가주님, 돌아오신 겁니까?”
단휘는 정말이지 눈물이라도 쏟아낼 것만 같은 심정이었다.
얼마 만에 만나보는 가주인가?
사실 그동안 그는 적비연과 내내 같이 있었지만, 생각보다 외형이 주는 느낌이 크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상, 운귀, 하천웅, 반철룡 그리고 투혈권왕까지.
그 모든 적비연을 겪었지만, 역시 지금의 모습이 가장 친숙하게 와 닿는다.
한편 적비연은 뒤늦게 상황 파악을 했다.
‘그렇군! 내 몸으로 돌아온 거구나!’
확신이 들자 그의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이 폭사했다.
후우우우웅!
갑자기 격렬하게 일어난 내공 때문에 장삼 자락이 부풀어 오르고, 주변으로 훈기가 훅 뻗어나갔다.
하기룡이 미간을 일그러뜨리고는 입을 열었다.
“대체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관 속에 들어가…….”
그는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적비연이 그대로 몸을 돌려서 배 난간으로 달려간 탓이다.
그러더니 난간을 훌쩍 뛰어넘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어엇!”
단휘와 묵검은 물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화들짝 놀랐다.
특히 관 속에 적비연이 들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하천웅이 비명처럼 외치며 난간으로 달려갔다.
“으아아아! 적 가주님! 어딜 가시는……!”
난간 밖으로 허리를 내민 하천웅은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
놀랍게도 적비연이 수면 위에 붕 떠 있는 것이 아닌가?
적비연은 그 상태로 달빛을 담은 강물을 유심히 보았다.
어둑했지만 얼굴이 비쳤다.
‘나다! 진짜 나다!’
발끝에서부터 손끝까지 찌르르 뇌류가 흐르는 듯하다.
드디어 몸을 되찾은 것이다!
‘천해경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변화가 생길 거라더니. 이런 거였군!’
적비연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 순간,
콰아앙!
주먹에서 기가 폭사하면서 폭음이 들렸다.
동시에 난간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던 무인들이 흠칫거리고는 우르르 멀어졌다.
적비연은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뭐지?’
그냥 가볍게 주먹을 쥔 것일 뿐인데 응축된 기가 폭발하는 것 같지 않던가?
갑판 위에서 묵검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주님! 괜찮으십니까?”
적비연이 몸을 돌리고는 허공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파바바밧!
순식간에 능공허도를 펼친 적비연이 갑판 위로 날듯이 이동했다.
타다닥!
“우오오오!”
무인들이 다시 찬탄을 터뜨렸다.
하천웅 역시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위대하고 강하신 적 가주님이구나! 엄청난 경공술이다!’
하지만 정작 적비연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공력 조절이 세밀하게 되지 않는 느낌이다.
이번에도 천천히 계단을 오르듯이 이동하려고 했다.
한데 마치 허공을 달려가는 것처럼 날아와서 겨우 갑판 위에 중심을 잡고 선 것이다.
반면 하기룡은 그런 적비연을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응시하면서 입술을 핥았다.
“적 가주. 아직 내 질문에 답을 하지 않은 것 같은데. 관 속에 들어간 것은 무슨 수작…….”
이번에도 하기룡은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적비연이 묵검과 단휘에게 다가간 것이다.
어느새 묵검도 인피면구를 벗어 던진 상태였다.
“본 가 상황은 어때?”
“현재 검영대가 여전히 장사를 철통같이 감시하고 있습니다. 본 가의 손발을 묶어두겠다는 속셈 같습니다.”
묵검의 대답에 이어 단휘가 나서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완전히 돌아오신 거예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럼 그쪽은……?”
그쪽이란, 흑천련주가 있을 파양현을 말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파양현은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갑자기 흑천련주가 쓰러졌으니 난리가 났을 법한데…….
가만.
‘극마?’
적비연이 불렀지만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어떠한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극마!’
역시나 마찬가지.
어쩐지 뭔가 허전하다 싶었는데 극마가 함께 이동하지 않았단 말인가?
그럼 설마 극마가 흑천련주의 신체를 차지한 건가?
한편 하기룡은 어금니를 뿌득 갈고는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감히 내 말을 두 번씩이나 무시해?’
그가 저벅저벅 걸어가서는 적비연의 어깨를 잡았다.
“이봐.”
찰나, 적비연이 가볍게 손을 쳐낸다는 것이,
파아아앙!
슈우우웃, 콰당탕탕!
포탄처럼 튕겨 나간 하기룡이 선실 벽을 부수면서 나동그라졌다.
적비연조차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이를 지켜보던 무인들이 저마다 입을 딱 벌린 채 꿈쩍도 못했다.
‘이거 아무래도 적응이 잘 안 되는데…….’
적비연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는 은하란이 극마에게 말했던 현상과 동일한 부분이었다.
새 옷을 처음 입었을 때 뭔가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
지금 적비연은 오랫동안 비워져 있던 자신의 육체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한 것이다.
콰다아앙!
마침 커다란 폭음과 함께 선실이 사방팔방으로 터져 나갔다.
무인들이 화들짝 놀라면서 돌아보니 하기룡이 허공에 부유한 채로 안광을 형형하게 뿌리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달빛을 받아 새하얗게 빛나는 머리카락은 한 올 한 올이 허공으로 솟아올라서 제멋대로 넘실거리고 있었다.
“적비연!”
하기룡이 씹어뱉듯이 그 이름을 중얼거리자, 적비연이 미간을 좁혔다.
“역시…… 넌 그쪽이었나?”
“뭣이?”
“백발광인의 성공 사례.”
그 말에 하기룡은 물론 단휘와 묵검도 움찔 떨면서 돌아보았다.
“가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설마 저자를 흑천련에서 만들어냈다는 겁니까?”
“아니. 흑천련이 아니라 오히려 무림맹 쪽이지.”
“예? 하지만 가후 총군사는 우리에게 하기룡을 비롯한 실종자들의 행방을 찾으라고 흑천련으로 보내지 않았습니까?”
단휘가 말에 적비연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기룡은 핑계였을 뿐이었어. 그저 백발광인들의 상태에 대해서 알고 싶었을 거야.”
“그런……!”
“백발광인이 어디에 잡혀 있으며, 어떤 상태에 처해 있는지.”
한편 하기룡은 턱을 살짝 치켜들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적비연. 너는 생각보다 많은 걸 아는 모양이구나.”
“뭐, 그렇지.”
“과연. 총군사께서 내게 벽력적가를 조사해 보라고 했을 때는 의미 없는 일이라 여겼는데. 이제 보니 역시 총군사의 뜻이 옳았군.”
“하나만 묻자.”
“……?”
“너 같은 놈이 몇이나 되냐?”
하기룡이 피식 웃었다.
“별게 다 궁금하군. 어차피 넌 여기서 죽을 텐데.”
후우우웅!
하기룡이 공력을 끌어 올리자 사방으로 뜨끈한 바람이 불어나갔다.
당장에라도 살수를 뻗어올 것만 같은 압력.
하천웅이 성큼 나서며 소리쳤다.
“형님! 더 이상의 만행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총군사의 뜻에 따라 오신 거라지만, 본 가는 어디까지나 무림맹과 협력하는 관계일 뿐 상하관계가 아님을 분명히…….”
쒸이이이잇!
창졸지간에 하기룡의 신형이 하천웅 앞에 나타나더니 그대로 검을 휘둘러왔다.
정말이지 눈 깜빡할 틈도 주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
하천웅은 그저 멍하니 자신의 목을 향해 떨어지는 검을 보기만 했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는 상황.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만 떠올랐다.
‘내가 정말 이런 괴물 같은 사람을 이겼다고?’
분명 주변 사람들에게 그리 들었다.
하기룡을 꺾었다고.
한데 오초지적은커녕 단 일 수도 받아낼 수 없을 만큼 강하지 않은가?
죽음이 목전에 닥친 그 순간 한 줄기 미풍이 부는가 싶더니 그림자 하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동시에 그림자는 하천웅의 옆구리에 차고 있던 검을 허락 없이 뽑아 들더니 날아드는 하기룡의 검을 쳐냈다.
따아아아앙!
불꽃과 함께 고막을 찢어 버릴 것만 같은 금속성이 짜랑짜랑 울렸다.
휘리리릭, 콰작!
하기룡의 검신을 쳐낸 하천웅의 검이 그대로 적비연의 손을 벗어나 배 난간을 부수며 강물에 빠져 버렸다.
‘칫!’
적비연이 내심 혀를 찼다.
역시 힘 조절이 되지 않은 탓이다.
의지와 몸이 따로 노는 기분.
그러는 사이 하기룡이 살기 머금은 안광을 뿌리며 그대로 검을 횡으로 베어 들어왔다.
“노오옴! 제법 재주를 부리는구나!”
쒸에에에엣!
천지를 양단할 듯 가로로 베어 들어오는 검.
상대의 검식이 느릿하게 보이는 상황 속에서 적비연이 얼른 손을 뻗어 하천웅을 쳐냈다.
퍼어엉!
장력에 얻어맞은 하천웅이 피를 토하면서 허공을 가로지르며 날아갔다.
“크억!”
얼핏 보면 적비연이 그를 공격한 것처럼 보였지만, 하기룡의 검에 베이지 않도록 구해준 것이었다.
하천웅은 날아가는 도중에 그것을 눈치채고는 적비연을 아련하게 보았다.
‘아아! 역시 위대하고 강하신 적 가주님……!’
들은 대로 그는 대단하지 않은가?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을 이렇게 구해주다니!
‘하지만 형님의 검로에 적 가주님이……!’
하천웅은 튕겨 나가는 와중에도 적비연이 걱정됐다.
자신을 쳐내고 적비연도 검로에서 벗어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기에.
그렇다고 적비연에게는 날아드는 검신을 막아낼 무기도 없었다.
적비연 역시 그것을 알고는 다른 손을 들어 올려 그대로 검신을 향해 내질러갔다.
부우우웃!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와 함께 적비연의 주먹이 시커멓게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쩌어어어엉!
검신과 주먹이 부딪쳤는데 금속성 소리가 울리면서 사방으로 강기가 폭풍처럼 불어나가는 것이 아닌가?
쿠파파파파파!
“크와앗!”
“우어억!”
주변의 무인들이 저마다 무기를 휘두르며 뜯겨져 날아가는 갑판의 파편을 막아냈다.
꾸구구웅……!
한 차례 일어난 강기의 파동 덕분에 배가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내질렀다.
적비연과 하기룡은 서로 두어 장 정도 거리를 두고 마주 섰다.
그들 사이로는 강기의 폭발로 인해 갑판이 처참하게 주저앉았고, 좌우 난간이 뭔가에 뜯어 먹힌 것처럼 부서져 있었다.
휘이이이잉!
강바림이 하기룡의 하얀 머리카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하기룡이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지었다.
“흑천투권공이라…… 명문정파로 알려진 벽력적가주가 언제 흑천련주의 제자라도 된 건가? 이거야말로 흥미롭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