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 절체절명(絶體絶命)
흑천투권공.
흑천련주가 독자 개발한 사공.
워낙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가장 큰 특징이라면 시전자의 주먹이 검게 물드는 것.
그리고 대성했을 시에는 금강불괴에 가까울 정도로 신체가 단단해진다는 점이다.
적비연이 지금 사용한 무공이 딱 그랬다.
귀동냥으로 무림 이야기 좀 엿들은 자라면, 어린아이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다.
하기룡의 지적에 갑판 위의 무인들이 술렁거렸다.
확실히 이상하지 않은가?
명문정파의 수장이 어째서 흑천련주의 절공을 익혔단 말인가?
사람들이 흔들리는 눈으로 적비연을 보았다.
물론 그럼에도 여전히 강직한 표정으로 적비연을 내심 두둔하는 자들도 있었다.
묵검과 단휘가 그랬고, 만검세가주인 하천웅이 그랬다.
특히 하천웅은 세뇌라도 당한 사람처럼 적비연에 대해 무조건 호의적이었다.
어쩌면 적비연이 그의 몸을 거쳐 가면서 하천웅의 무의식이 친근감을 느끼는 건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가주가 이러니 만검세가 무인들도 호기심만 품을 뿐 딱히 적비연을 경계하지는 않았다.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내가 무슨 무공을 익히든 그게 중요한가? 그리 따지면 네가 익힌 무공의 근원은 뭐지?”
“난 본 가의 무공을 사용한다.”
“그래, 검식은 그렇게 보이네. 하지만 공력의 성질이 좀 다른 것 같은데. 정순하면서도 어딘지 이질적인 기운. 그건 분명 흑천련 지하에 갇혀 있던 백발광인들과 닮았군. 과연 네가 얻은 그 공력이 정당한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자부할 수 있나?”
적비연의 차분한 대꾸에 하기룡이 뺨을 씰룩였다.
“적 가주. 너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이냐?”
“왜? 그것도 중요한가?”
“하긴. 별로 중요하진 않지. 어차피 넌 이 자리에서 죽을 테니까!”
파앙!
하기룡이 바닥을 차고 도약하자 갑판이 다시 뜯겨 날아갔다.
그가 이형환위의 신법을 펼쳐 순식간에 적비연 앞에 도달했다.
쉿!
까앙!
바람 가르는 소리와 동시에 금속성이 터졌고, 불꽃이 터졌다.
그다음부터는 허공 여기저기에서 연신 금속성과 불꽃만 터졌다.
기울어져 가는 갑판에서 중심을 잡고 선 무인들 모두 일류 이상이었음에도, 두 사람의 전투를 눈으로 쫓기가 어려웠다.
그나마 하천웅과 묵검, 단휘 정도만 두 사람의 싸움을 간신히 지켜볼 뿐이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비연에게는 이 모든 과정이 매우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허공에서 몸을 비트는 적비연은 머리카락 한 올 차이로 코앞을 스치는 검신을 보았다.
서걱!
적비연을 지나친 검강이 그대로 나무 기둥을 베어낸다.
꾸구우우웅!
배가 앓는 소리를 낸다.
돛을 단 기둥이 넘어간다.
파밧!
적비연이 허공을 박차고는 이동했다.
벽력활보.
본신으로 펼치는 벽력활보는 정말이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다.
마치 구파일방의 경공 중에서도 정점이라 불리는 곤륜파의 운룡대팔식(雲龍大八式)을 보는 느낌이랄까?
어지간한 고수들은 일대일의 싸움에서 몸을 허공에 띄우지 않는 경우가 많다.
허공에 뜬 상태에서만큼은 운신이 자유롭지 않기 때문이다.
눈앞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가 번쩍번쩍 나타나는 이형환위의 경신법이더라도 디딜 땅이 있거나, 반동을 줄만한 마찰 면이 있어야 한다.
한데 이를 넘어서는 경신법이 바로 곤륜파의 운룡대팔식이었다.
허공에서 여덟 번까지 자유롭게 방향을 비틀 수 있다는 신공.
벽력활보는 그 운룡대팔식을 닮았다.
아니, 운룡대팔식보다 훨씬 빠르다.
그러다 보니 하기룡도 내심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과연, 흑천련 권역을 자유롭게 나다닐 만한 자격이 되는구나!’
그러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의구심이 떠나지 않았다
흑천련 권역을 자유롭게 돌아다닌다던 자가 어째서 차시환혼(借屍還魂)의 계를 사용했단 말인가?
말 그대로 주검을 빌려 혼을 되돌린다는 계책.
하나 이렇게 뛰어난 경신법을 소유하고 있다면 굳이 번거롭게 관 속으로 들어갈 게 아니라, 스스로 감시망을 따돌릴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적비연이 순간적으로 짓쳐들며 주먹을 뻗어왔다.
정말이지 움직이는 속도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수준이었다.
‘칫!’
하기룡이 재빨리 검을 사선으로 그어내렸다.
만 개의 검이 하나로 합쳐진 듯 강렬한 강기가 일어났다.
만검세가의 절기인 만검합일의 변초였다.
적비연은 왼쪽 어깨를 향해 떨어지는 검강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건 막아내기 어렵겠어.’
흑천투권공이 아무리 금강불괴의 수준이라지만, 작정하고 후려친 저 검을 정면으로 받아낸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물론 막아내기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내상을 입을 가능성이 높다.
재수 없으면 뼈도 부러질 수 있다.
이에 적비연이 왼쪽 어깨를 뒤로 빼면서 몸을 뒤틀었다.
정말이지 간발의 차이로 검강이 자신의 어깨를 얕게 베어내며 갑판으로 떨어져 내렸다.
꽈과과아앙!
천둥치는 소리와 함께 갑판이 깊고도 길게 찢어졌다.
동시에 적비연이 튕기듯 멀어지면서 난간에 부딪쳤다.
콰당!
원래 갑판을 디디며 멈춰 서야 했지만 여전히 몸에 적응되지 못한 탓이다.
“가주님!”
“괜찮으십니까?”
지켜보던 단휘와 묵검, 하천웅이 동시에 소리쳤다.
적비연이 몸을 털고 일어나서는 목을 꺾었다.
어려운 싸움이다.
몸에 완전히 적응만 하더라도 충분히 해볼 만한데, 지금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허우적거리는 꼴이다.
마치 꿈에서 싸우는 기분이랄까?
“나룻배를 내려 일단 벗어나도록.”
적비연이 이르자, 퍼뜩 정신을 차린 하천웅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리쳤다.
“다들 들었지? 어서 배를 내려 탈출하라!”
“가, 가주님은…….”
“난 이곳에 남아 적 가주를 돕겠다!”
“위험합니다!”
“어차피 적 가주님이 당하면 우리도 끝이야!”
하천웅의 대꾸에 무인들이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애초에 하천웅과 하기룡은 서로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던 사이지 않던가?
한데 적비연을 돕고 있다는 사실까지 들켰으니 하기룡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저희도……!”
“너희들은 방해만 될 뿐이야! 어서 가라! 가서 도움을…….”
말을 뱉던 하천웅이 멈칫거렸다.
누구에게 도움을 청한단 말인가?
그가 망설이는 걸 본 묵검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말했다.
“수로채가 동정호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요. 수로채에게 도움을 구하면 될 거요.”
“다들 들었지? 동정호에서 수로…… 응? 수로채? 수로채가 돕는다고 했소?”
말을 뱉던 하천웅이 기겁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우리는 분명 무림맹을 돕기 위해 파양호로 가던 중 아니었던가?
한데 수로채가 도울 거라고?
수로채라면 무림맹과 원수를 진 상황인데?
머릿속이 복잡한 가운데 적비연이 하천웅을 힐끔거리고는 입을 열었다.
“이봐, 하 가주.”
“예? 예! 적 가주님!”
과거의 하천웅이었다면 적비연에게 존대를 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
하지만 그는 적비연을 은인이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나를 믿나?”
“믿습니다!”
“그럼 묵검이 말한 대로 해.”
“알, 알겠습니다! 들었나? 모두들 동정호로 가서 수로채에게 도움을 청하도록!”
“존명!”
만검세가 무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소리치며 작은 배를 띄우고는 뛰어내렸다.
꾸구구구웅……!
무인들이 내린 배는 다시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내며 강물에 천천히 빠져 들어갔다.
“후후. 소용없는 짓을 하는군. 너도 죽이고, 저놈들도 모두 도륙해 주마.”
파앗!
다시 하기룡이 귀신처럼 날아들었다.
적비연이 소리쳤다.
“묵검, 단휘! 좌우! 하 가주는 내 뒤를 받치도록!”
“존명!”
묵검과 단휘가 동시에 대답했고, 하천웅도 얼떨결에 대답했다.
“존…… 명!”
쩌엉! 쩡! 쩡!
연신 금속성이 상강을 뒤흔들었다.
격동을 견디지 못한 배가 천천히 무너져갔다.
콰지지직! 파사사삭!
애꿎은 배만 박살 나고 있었다.
하기룡은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모처럼 차고 넘치는 힘을 얻었다.
총군사는 자신을 다시 태어나게 만들어주었다.
한데…… 한데…….
‘어째서 통하지 않는 것이냐! 이놈에게만은!’
공력을 극한으로 끌어 올려 절초를 쏟아붓고 있다.
그럼에도 번번이 막히거나 배만 때리고 있다.
거기에 날파리처럼 엉겨 붙는 묵검과 단휘, 하천웅은 귀찮기 짝이 없다.
귀찮은 녀석들부터 정리할라 치면 어김없이 적비연이 급소를 노려오니 환장할 노릇이다.
‘젠장할 것들!’
얼마나 싸웠을까?
달이 꽤나 기울었다.
투파파파팡!
어느 순간, 그가 돌개바람처럼 회오리치며 물러나자, 주변으로 강기가 폭사하면서 선박을 산산조각 냈다.
그 바람에 삼분지 일 정도 떠 있던 배가 완전히 박살 나버렸다.
첨벙! 첨벙!
여기저기 날아간 파편이 강물에 빠지는 소리가 연이어 들린다.
사뿐. 사뿐!
적비연과 묵검, 하천웅과 단휘가 저마다 물에 뜬 판자 위에 서서 중심을 잡았다.
지루하게 이어지는 싸움이 답답하기는 적비연 쪽도 마찬가지였다.
한데 묵검은 그 순간 이 싸움에 왜 진전이 없는지 깨달았다.
판자 위에서 중심을 잡는 적비연의 모습이 어딘지 이상했다.
왠지 금방이라도 넘어질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
‘아직 적응을 완전히 못하신 거로군.’
꽤 오랫동안 반듯하게 누워만 있던 육체였다.
갑자기 혼이 들어와 움직이려니 어색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럼에도 적비연의 무위는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적응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도 하기룡을 매섭게 몰아붙였으니까.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하기룡은 필패하리라.
한편 적비연은 하기룡의 찢어진 옷자락 사이로 보이는 상처를 보며 나직이 말을 던졌다.
“너, 내장역위증(內臟逆位症)이었냐?”
하기룡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반면 적비연은 그제야 알았다는 듯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하기룡은 자신에게 심장이 꿰뚫렸었다.
지금도 왼쪽 심장어림에 선명한 관통상이 보이지 않은가?
그럼에도 멀쩡하게 움직인다.
역시 내장역위증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아주 드문 확률로 내장의 기관이 정상인과 반대로 배치된 사람.
만약 신의 아상으로서 쌓은 의술 지식이 없었다면 지금쯤 귀신을 보는 기분이었으리라.
하기룡이 피식 웃었다.
“그게 중요한가?”
적비연이 입매를 비틀었다.
“중요하지. 두 번은 살아날 수 없게 만들어야 하니까.”
하기룡이 흠칫거리는 사이,
“각자 위치로!”
적비연이 소리를 지르는 것과 동시에 강물에 뜬 파편을 발로 찼다.
투아앙!
그의 신형이 포탄처럼 날아갔다.
쒜에에엑!
“어림없는 짓!”
하기룡이 일갈을 내지르면서 모든 공력을 집중해 적비연을 향해 맞부딪쳐갔다.
그 순간, 좌우에서 묵검과 단휘가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여기도 있다!”
“날파리 같은 새끼들!”
적비연을 향해 쏘아져 가던 하기룡이 돌개바람처럼 회전하며 창공으로 솟구쳤다.
그 바람에 강줄기가 용오름 하듯 신형을 따라 솟구쳐 올랐다.
츄아아아앙!
묵검과 단휘가 물기둥을 베어내고는 서로 지나쳤다.
촤아아아아!
하늘에서 비처럼 떨어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적비연이 그대로 상승경공을 펼쳤다.
‘고작 이따위 수작으로 날 이길 성 싶으……!’
하기룡이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다가 흠칫거렸다.
‘하천웅!’
어느새 밤하늘로 뛰어오른 하천웅이 만검세가의 절초인 유성만검(流星萬劍) 초식을 펼치며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쑤아아아앙!
위에서는 하천웅이, 아래에서는 적비연이 동시에 달려드는 상황!
“흐아아아앗!”
하기룡이 기합성을 터뜨리면서 적비연의 검을 막아냈다.
쩌어어엉!
동시에 호신강기를 극한으로 펼쳐 하천웅의 일검도 막았다.
따아아앙!
두 사람의 합격을 받은 하기룡이 신음을 터뜨리며 튕겨져 나갔다.
“크윽!”
첨벙!
강물에 빠진 그가 잠시 후 물고기처럼 튀어 오르더니 너른 판자 위에 엎어졌다.
“쿨럭! 쿠웨엑!”
내상을 입은 탓에 탁혈이 토해졌다.
그는 지금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일이!’
천하에 적수가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고작 네 명의 협공으로 이렇게 무너진단 말인가?
생각보다 적비연이 너무 강했다.
한편 적비연은 마지막 마무리를 위해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뭐, 적응 훈련으로 삼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그럼 이쯤에서 끝을…… 흐으응.”
“으잉?”
단휘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적비연이 말을 뱉다 말고 갑자기 축 늘어지더니 강물로 추락하는 것이 아닌가?
첨벙!
묵검과 단휘가 깜짝 놀라서 입을 딱 벌린 가운데, 가장 가까이에 있던 하천웅이 기겁을 하고는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으아아앗! 적 가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