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 절체절명(絶體絶命)
츄아아아!
물보라가 일어나면서 하천웅이 적비연을 들쳐 메고는 수면 위로 튀어 올랐다.
털썩!
그가 물에 뜬 판자에 적비연을 눕혀두고는 소리쳤다.
“적 가주님! 정신 차리십시오!”
하천웅이 연이어 적비연의 뺨을 후려쳤다.
하지만 적비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한계를 초월할 정도로 강맹한 기도를 뿜어내던 사람이 갑자기 시체라도 된 것 같지 않은가?
“적 가주님!”
하천웅이 어깨를 흔들며 다시 소리쳤다.
그러는 사이 묵검과 단휘도 수상비를 펼쳐 단숨에 달려왔다.
“가주님!”
“괜찮으십니까?”
묵검이 얼른 한쪽 무릎을 꿇고 적비연의 맥을 짚었다.
단휘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묵검을 보았다.
“형님? 가주님은……?”
“맥은 정상이다. 의식만 없을 뿐.”
“그럼 혹시……?”
“그래, 그때와 같다.”
“하아.”
단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어딘지 복잡했다.
일단 적비연이 죽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갑자기 이대로 혼이 날아가 버렸으니 허무감이 밀려오고 걱정도 된다.
이게 지금 정상적인 상황인지 아닌지도 가늠이 되지 않으니.
더구나 지금은…….
“무슨 개수작이지?”
저렇게 두 눈 시퍼렇게 뜨고는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맹수가 앞에서 으르렁거리고 있지 않은가?
하기룡은 안광을 형형하게 빛내며 쓰러진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묵검과 단휘가 자연스럽게 적비연을 등지고 섰다.
두 사람이 기도를 끌어 올리며 하기룡을 경계했다.
그럼에도 하기룡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믿을 수 없는 신위로 자신을 놀라게 만든 적비연이 아니던가?
정말이지 적비연이 이토록 강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한데 갑자기 의식을 잃었다고?
치명상을 입은 것도 아니고, 공력이 완전히 고갈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막대한 공력 손실과 치명상을 입은 건 자신이다.
상황이 그렇다 보니 이건 또 다른 함정이 아닐까 의심이 생긴다.
한편 하천웅은 의식을 잃은 적비연을 등에 업고 멀찍이 물러났고, 묵검과 단휘가 냉랭한 시선으로 하기룡을 응시했다.
“계속할 생각인가?”
“뭐?”
“이쯤에서 기회를 줄 테니 그만 돌아가는 게 어떤가?”
묵검의 말에 하기룡의 표정이 흠칫거리더니 이내 조소로 물들었다.
이것 봐라?
다 이겨가는 싸움에서 갑자기 아량을 베푼다고?
하면 정말 적비연에게 이상이 생겼다는 뜻이 아닌가?
물론, 완전히 확신할 순 없다.
지금도 저들이 무슨 함정을 파놓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그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싸움을 계속 이어간다면 분명 자신이 불리하다.
그런데 갑자기 이런 이상한 행동을 할 필요가 있을까?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의구심은 이제 확신으로 바뀌어갔다.
‘그렇군. 적 가주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모르겠지만, 분명 탈이 난 거다. 어쩌면 애초에 그가 관 속에 들어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일지도 모르겠구나.’
반면 하기룡의 눈빛이 점점 바뀌는 것을 눈치챈 묵검과 단휘가 서서히 공력을 끌어 올렸다.
그러는 사이 하천웅은 적비연을 등에 업은 채 수상비를 펼쳐 가장 멀리 떨어진 판자 위로 이동했다.
그 후로는 공력을 운용해서 판자를 타고 물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갔다.
“안 되지. 날 이렇게 약 올려놓고 꽁무니를 말면 안 되는 거야.”
“기어이 끝까지…….”
파앗!
묵검은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어떻게든 최대한 길게 대화를 이끌어 시간을 벌고자 했지만, 하기룡은 이미 승부를 보겠다고 마음먹은 상황.
츄아아아아!
하기룡이 수상비를 펼치면서 달려가자 물보라가 양쪽으로 일어나면서 꼬리처럼 이어졌다.
‘헛! 강하다!’
묵검이 두 눈을 부릅떴다.
분명 내상을 입었을 텐데도 달려드는 하기룡의 기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형님! 뒤를 받치겠습니다!”
“부탁하마!”
단휘가 묵검 뒤로 돌아가 명문혈에 양손을 뻗어 공력을 운기했다.
동시에 묵검이 검을 들어 올리고는 화살처럼 날아드는 하기룡에게 일검을 내리쳤다.
“흐아아아압!”
쩌어어어엉!
두 자루의 검이 부딪치면서 사방으로 기풍이 불어나갔다.
콰파파파파!
파도나 다름없는 거친 파문이 세 사람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마구 뻗어갔다.
물이 튀어 오르고 기풍이 몸부림치니 하늘에서 비바람을 뿌려대는 것만 같았다.
세 사람의 몸이 물에 흠뻑 젖었다.
구우우우우!
하기룡의 검과 검을 맞댄 묵검은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두 자루의 검을 맞부딪친 채 꿈쩍도 하지 않는 상황.
이제 세 사람은 공력대결로 접어든 것이다.
단휘가 명문혈을 받치고 공력을 주입하는데도 하기룡을 당해내기가 어려웠다.
키긱……! 키이이익!
검과 검이 서로 밀고 당기면서 마찰했다.
그때마다 불꽃이 튀어 올랐다.
묵검은 어찌나 이를 세게 깨물었는지 잇몸에서 피가 흘러나올 지경이었다.
반면 하기룡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가 순간 조소를 짓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제법이군.”
찰나지간,
카차앙!
묵검과 단휘가 두 눈을 부릅떴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분명 팽팽한 기 싸움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하기룡은 그걸 훨씬 넘어서서 기를 운용했다.
그 결과 묵검의 검신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동시에 묵검이 입고 있던 상의가 터져 나갔다.
“크아악!”
첨벙! 첨벙!
그대로 튕겨 나간 묵검과 단휘가 강물에 빠졌다.
츄아아아!
두 사람이 얼른 물에서 솟구쳐 나와서는 다시 판자 위에 올라섰다.
“헉, 헉, 헉……!”
“후우, 후우!”
묵검과 단휘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두 사람의 표정에 낭패감이 서렸다.
하기룡은 괴물이었다.
적비연의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 실감됐다.
이런 괴물을 상대로 가주님은 그렇게 압도적인 무위를 보였단 말인가?
공력을 쏟아부은 탓에 다리가 후들거린다.
이래서야 하기룡 앞을 막아선 의미가 없다.
하기룡이 피식 웃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뭔지 아나?”
“……?”
“내가 너희들에겐 별로 관심이 없다는 거야. 난 오로지 적 가주만 죽여도 만족하거든. 다행이지 않나?”
묵검과 단휘가 흠칫거리고는 서로를 보았다.
두 사람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막는다!’
결의에 찬 두 사람이 하기룡을 보며 마지막 남은 한 줌 공력을 쥐어짰다.
하지만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파앙!
하기룡이 판자를 박차는 순간 그가 수면 위를 새처럼 내달려갔다.
“막앗!”
묵검이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단휘도 달려들었지만, 추풍낙엽이 따로 없었다.
파파앙!
하기룡이 한 차례 손을 휘젓는 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종잇장처럼 가볍게 날아가 버렸다.
츄아아아아아!
하기룡은 그대로 물보라를 길게 이끌며 상강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얼마나 갔을까?
정말이지 제삼자가 보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리라.
그 어떤 무인이 이처럼 오랫동안 수상비를 펼칠 수 있을까?
마치 물위가 아니라 평지를 달리는 것 같지 않은가?
하기룡이 경신술을 펼치는 데에는 강물의 부력만으로도 차고 넘치는 듯했다.
마침 저만치 판자를 배처럼 타고 나아가는 하천웅이 보였다.
하천웅은 등 뒤에서 다가서는 어마어마한 기척에 화들짝 놀라서는 돌아보았다.
“저, 저럴 수가!”
어둠 속에서 귀신처럼 치달려오는 하기룡!
그 모습에 모골이 송연해질 지경이었다.
“적 가주님! 제발 정신 좀 차려보십시오!”
하천웅이 간곡한 표정으로 외쳤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의 자신은 하기룡의 적수가 못 된다는 것을.
내상을 입고 먼 길을 수상비까지 펼쳐 달려온 하기룡이지만, 아마 그의 일수도 받아내기 버거우리라.
그만큼 자신도 공력을 소모했기에.
만약 자신이 공력을 전혀 소모하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하기룡은 해볼 만한 상대였을 거다.
그 와중에도 하기룡은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던 하천웅이 결심을 굳힌 듯 적비연을 판자에 반듯하게 눕혔다.
“적 가주님. 당신이 내 은인이라고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길, 내가 당신을 존경했다더군요. 오늘 뵙고 확실히 알았습니다. 당신은 내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는 분이라는 것을.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내 목숨을 버려서라도 당신을 지켜 드리겠습니다!”
후우우웅!
말을 마친 하천웅이 기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할 수만 있다면 선천지기까지 사용해서 하기룡을 막을 심산이었다.
‘절대로 지나가지 못하게 하겠다! 최악의 경우에는 동귀어진도 각오하리라!’
그의 두 눈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마침내 하기룡이 오십 장 이내로 다가왔을 때였다.
“흐아아아앗!”
하천웅이 기합성을 내지르며 양손으로 검을 굳게 움켜잡았다.
그렇게 모든 신경을 하기룡에게만 집중하고 있는데,
“음?”
일순 하기룡의 기도가 흐트러지는 것이 아닌가?
멀리서도 심장을 꿰뚫어 버릴 것만 같던 날카로운 기도가 갑자기 흔들리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무섭게 달려오던 속도가 눈에 띄게 확 줄어들었다.
‘뭐지?’
그제야 하천웅은 소름 끼칠 정도로 강맹한 기운이 등 뒤에서도 느껴진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휙 돌아보자 먼발치에 거짓말처럼 나타난 거선이 보였다.
‘저, 저건……?’
은황선이다!
수황이 타고 있다는 은황선!
놀라운 건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거선에서부터 무언가 수면 아래로 빠르게 쏘아져 오고 있었다.
츄우우우우!
고요하던 강물이 연신 출렁인다.
시커먼 강물 아래로 은빛 물보라가 빠르게 지나쳤다.
하천웅은 그 물보라를 쫓아 고개를 휙 돌렸다.
물속에서 일어난 새하얀 물보라는 곧장 하기룡을 노리고 있었다.
“흐아아앗!”
하기룡이 기합성을 터뜨리면서 검을 거꾸로 쥐고는 강물을 내리찍었다.
쩌카아앙!
강물에서 금속성이 울리다니?
동시에 물보라가 사방으로 튀었다.
한데 튀어 오른 물보라가 마치 날카로운 칼날처럼 삐죽삐죽 굳어버리는 게 아닌가?
극음의 기운이 뻗어 나가 강물을 그대로 얼려 버린 듯했다.
하천웅이 넋을 놓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데 옆으로 그림자가 휙 지나쳐 갔다.
“헛! 저, 저자는……?”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남자.
은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고고하게 날듯이 이동하는 사람.
본 기억은 없지만 그가 장강의 수귀들을 이끄는 수황이라는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유구한 수로채의 역사상 전무후무한 초고수!
물 위에서만큼은 무림맹주도 일대일에선 당해낼 수 없다는 그 수황!
순식간에 하기룡 근처까지 이동한 수황이 손을 한 차례 휙 저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촤촤촤촤촤아악!
강물이 갑자기 얼음처럼 굳어 버리더니 하기룡의 전신을 파고들었다.
푸푸푸푸푸우욱!
“커억!”
하기룡은 갑자기 나타난 이 방해꾼을 보며 이를 뿌득 갈았다.
공력 소모가 심하지만 않았어도.
내상을 입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허무하게 당하지는 않았으리라.
수십 자루의 얼음 창이 그의 전신 요혈을 꿰뚫어 버린 상태.
피가 흘러내리면서 얼음 창을 붉게 물들였다.
“네놈은…… 분명 장강의…… 물귀신……! 어째서 상강까지……!”
“기다리던 객이 오지 않아서 마중 나왔다.”
수황이 중저음의 목소리로 나직이 대꾸했다.
휘이이잉.
달빛 머금은 바람이 그의 은빛 머리카락을 거칠게 휘날렸다.
수황이 차갑게 조소를 짓고는 펼친 손을 쥐었다.
다음 순간 하기룡의 전신을 뚫고 있던 얼음 창들이 일순 물보라를 일으키며 터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츄아아악!
하기룡의 몸 역시 터져 나가면서 한순간에 인육 파편으로 변해 버렸다.
붉게 물들어가는 상강을 내려다보며 수황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물 위에서는 조심했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