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35화 (236/301)

235. 절체절명(絶體絶命)

하천웅은 멍한 표정으로 저만치 홀로 남은 수황을 바라보았다.

하기룡이 죽었다.

정말이지 그가 보인 신위가 허망할 정도로 간단하게 죽어 버렸다.

배다른 형제지만 그래도 같은 핏줄을 이은 형.

기분이 묘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독한 마음을 먹고 동귀어진을 각오했는데, 막상 눈앞에서 죽는 모습을 보니 설명하기 힘든 안타까움이 밀려든다.

형제애?

아니다. 그런 게 아니다.

뭐랄까?

그에게 남아 있던 감정들과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평생을 서로 증오하고 미워만 했던 시간들.

어째서 서로를 더 이해하지 못했을까 하는 후회들.

기억을 잃었기에 하천웅은 그 시간들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

원망 대신 이해를 할 순 없었던 걸까?

어째서 그는 증오에 찬 괴물이 되어 자신 앞에 나타나야만 했던 걸까?

아마 이런 감정이 밀려드는 것도 자신이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리라.

과거를 잊으니 현실이 객관적으로 보인다.

반성의 시간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지만, 증오와 분노에 사로잡혀 시간을 허비하지 않는다는 것은 나름의 장점인 것 같다.

그렇게 복잡한 속내를 갈무리하고 있는데, 수황이 몸을 돌리고 천천히 걸어왔다.

그는 수면을 마치 지면처럼 밟으며 다가왔다.

실제로 그가 내딛는 발아래는 그 순간 얼어붙으면서 굳어 버렸다.

엄청난 극음의 기운을 운기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저럴 수 없으리라.

물 위에서만큼은 수황을 당할 자가 하늘 아래 없다더니.

과연 틀린 말이 아니리라.

바자작……! 바자작……!

그렇게 강물을 새하얗게 얼려가며 다가온 수황이 판자 위에 다소곳하게 누워 있는 적비연을 냉랭한 시선으로 보았다.

“이자인가?”

“무슨…….”

하천웅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하자, 수황이 예의 그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말했다.

“이자가 벽력적가주인지 물었다.”

“그, 그렇소. 이분이 바로 벽력적가주요.”

“근래 강호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을 이제야 직접 보게 됐군. 어디에서나 알려졌지만, 정작 어디에서도 드러나지 않았던 자. 한데 기껏 만났더니 잠들어 있을 줄이야.”

수황이 혀를 차고는 아쉬운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하천웅이 수황에게 일렀다.

“당, 당신을 찾아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했소. 적 가주님은 잠시 의식을 잃었지만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소. 도와주시오!”

수황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저만치 다가오는 은황선을 보았다.

“적 가주와 대화를 나누지 못하는 게 아쉽긴 하지만 약속은 지킨다. 아직 공력이 남아 있다면 본좌의 배에 오르는 걸 허락하지.”

“고맙소! 그리고 아직 두 사람이 더 살아 있을 가능성이…….”

말을 뱉던 하천웅은 뒤를 보았다가 입을 척 벌리고 말았다.

어느새 수황은 거선을 향해 절반쯤 달려가고 있었다.

정말이지 수상비만큼은 그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놀라운 수준이었다.

* * *

적비연이 의식을 잃기 일 각 전.

파양현 인근 협곡에서는 수라지옥이 펼쳐지고 있었다.

살소공자는 난생 처음으로 공포심이라는 걸 느꼈다.

그는 언제나 포식자였다.

비영추에 연결된 은잠사를 통해 상대를 유린하는 감각은 온몸에 전율이 일어날 정도로 짜릿했다.

한 명의 목숨을 취할 때마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감각에 도취되면서 절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러다 보니 살소공자라는 별호마저 붙어 버렸다.

그런 잔혹한 심성을 가졌으면서 어찌 정파 무인이라 할 수 있냐고?

가끔 그렇게 따지는 멍청한 것들이 있다.

정파 무인이라면 늘 광명정대하고 바른 척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것들.

그럼 묻겠다.

나라를 위해 정치한다는 인간들이 정말 언제나 광명정대하고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가?

결코 아니다.

인간이란 결국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급급하게 되어 있다.

자신도 그럴 뿐이다.

어쩌다 익힌 무공이 명문정파의 무공이다.

무공과 사람 심성은 다른 법이다.

자신을 잔악무도하다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에게 살소공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공의 정사(正邪)를 구분하는 것은 살인 행위에 그럴싸한 명분을 들이대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이라고.

자신은 늘 명분에 따라 움직였다.

그 명분에 따르면 죽어 마땅한 자들을 죽인 것이다.

정의구현!

그로 인해 분명 웃는 자가 생기지 않겠나?

자신이 살행을 저지르면서도 웃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누군가를 대신해 정의를 구현했고, 또 그 누군가를 대신해 환희에 찬 미소를 짓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살인을 즐겼다.

잔악무도한 살인 행위 뒤에는 대의명분이라는 거창한 근거가 받쳐주고 있으니 망설일 이유도 없다.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상대를 죽일 때만큼은 스스로 살아 있음을 실감한다.

생동한다는 사실에 전율이 일어난다.

이러니 중독되지 않을 수가!

이러니 웃음이 터지지 않을 수가!

그런데…… 그런데……!

‘저건…… 아니잖아!’

살소공자 자휘겸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눈앞에 펼쳐지는 참상들.

붉은 기운을 온통 뿜어대는 흑천련주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무림맹 무인들을 일격에 하나씩 죽여가고 있었다.

“크하하하! 덤벼라! 덤벼! 불나방 같은 새끼들! 좋다, 좋아!”

포효에 가까운 광소가 마구 터져 나온다.

저 웃음은 천박하다!

대의명분도 없고, 살아 있음을 실감하기 위한 사유조차도 없다.

단순한 살행일 뿐!

저런 천박한 자에게 자신이 당하다니?

내상을 입고 속이 진탕이 되었다.

자꾸만 목구멍을 타고 올라오는 피는 멈출 줄을 모른다.

심지어 상대는 자신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다.

처음 몇 합은 자신만을 상대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저 되는 대로 검을 휘두른다.

마치 날아다니는 파리를 때려잡듯이 검을 휘두른다.

협곡을 가득 메우고 있던 흑궁단의 살의가 사라진 지는 오래다.

그들이 나설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다는 뜻이다.

‘흑천련주……!’

저자가 저리도 강했던가?

저자가 저리도 경박했던가?

그럼에도 자신이 흑천련주의 오초지적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분이 차오른다.

콰악!

두 자루의 비영추를 쥔 자휘겸이 번개처럼 몸을 날리며 손을 뿌렸다.

‘나는 포식자다!’

삐비이잉!

비영추가 두 줄기 달빛을 이끌며 빠르게 쇄도했다.

수많은 무인들이 뒤엉켜서 싸우고 있음에도, 비영추는 기가 막히게 그들을 지나쳐 곧장 흑천련주의 요혈을 노렸다.

찰나, 흑천련주의 눈빛이 번뜩이는가 싶더니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서렸다.

따다아앙!

그가 한 차례 흑천검을 휘젓자 매섭게 날아들던 비영추 두 자루가 속절없이 튕겨나갔다.

회심의 일격이 이번에도 빗나가자 살소공자는 흔들리는 동공으로 흑천련주를 보았다.

길이 없다.

광기에 찬 미소를 지으며 경박하게 검을 휘두르는 저 흑천련주를 이길 방도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다음 순간,

팟!

흑천련주가 이형환위의 신법을 펼쳐 살소공자 앞에 나타났다.

그가 한쪽 입매를 비틀며 말했다.

“너, 아직 살아 있었구나?”

그 말 한마디에 살소공자는 물론 무림맹 무인들조차 전의를 상실할 지경이었다.

무인들 중 누가 뭐래도 가장 돋보이는 실력을 가진 살소공자다.

한데 흑천련주는 그를 호적수로 생각하지도 않았다는 뜻이 아닌가?

한마디로 신경도 쓰지 않았던 거다.

마구 날아드는 부나방처럼 제 죽을 줄 모르고 달려드는 미물이나 마찬가지였던 거다.

피식.

살소공자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처음으로 지금까지 지은 미소와 반대되는 이유였다.

죽음을 예감한 것이다.

그리고 묘하게도 같은 이유로 그는 지금 살아 있음을 실감했다.

죽음까지 앞으로 한 걸음.

전신의 모든 감각이 깨어 있는 것만 같다.

피부를 스치는 바람, 코끝을 스치는 혈향, 고막을 찌르는 비명과 신음 소리, 시야를 가득 메운 죽음의 광경.

그 순간 모든 것이 느려졌다.

자신의 들숨과 날숨이 아득할 정도로 길게 느껴진다.

살소공자는 흑천련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마지막 기회가 있을까?

화살보다 빠르고, 절정고수도 눈으로 쫓기 힘들다는 비영추.

꽤나 가까운 거리라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서너 장은 떨어져 있지 않은가?

천운이 두 번 정도, 아니, 세 번 정도 따른다면 죽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은 길었으나, 스쳐 지나간 시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는다.

마침 혈천단 부단주가 허공을 가르며 흑천련주에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의 칼이 내뿜는 붉은 도기가 공기를 가르고, 흑천련주의 정수리마저 갈라 버릴 기세로 떨어지고 있다.

기회라면 지금.

살소공자의 오른쪽 입매가 살짝 비틀리는 것과 동시에 극한의 공력이 단전에서부터 뻗어나갔다.

그리고 손가락이 움찔 떨리는 그 순간,

슈각!

새하얀 빛이 눈앞에서 터졌다.

살소공자는 잠시간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이해하지 못했다.

어째서 자신의 오른손이 움직이다 만 것인지.

왜 흑천련주의 정수리가 쪼개지는 대신, 부단주의 목이 떨어지고 있는지.

그는 흑천련주가 빛살 같은 속도로 펼친 이기어검을 차마 보지 못한 것이다.

털썩!

데굴데굴……!

목이 떨어져 나간 부단주의 시신이 바닥에 떨어졌다.

곧이어 세상이 기울었다.

살소공자의 머리가 몸에서 미끄러지듯 분리되더니 이내 바닥을 툭 떨어졌다.

츄아아아아!

피를 분수처럼 내뿜은 그의 몸이 쿵 쓰러졌다.

살소공자의 잘린 머리가 피식 웃었다.

‘나, 죽었구나.’

그의 뇌가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이었다.

이제 협곡에 남은 수십 명의 무인들은 아연실색한 표정이 되어서는 흑천련주를 보았다.

애초에 수백이었던 무인들이 일 할대로 줄어든 것이다.

“단주님과 부단주님이…….”

“끄음……! 두 분을 따라 목숨을 던지자!”

누군가의 외침에 무림맹 무인들이 다시 기세를 끌어올렸다.

흑천련주의 몸을 차지한 극마가 히죽 웃었다.

“결연한 의지에 찬사를. 하나 그걸 정확히 개죽음이라고들 하지?”

“죽어라앗!”

“와라! 이 불나방드…… 흐으응…….”

호기롭게 외치던 흑천련주가 갑자기 앓는 소리를 내더니 픽 쓰러지는 것이 아닌가?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무림맹 무인들이었다.

“뭐, 뭐지?”

“갑자기 왜? 설마 이것도 함정?”

하지만 함정을 팔 이유가 어딨나?

어차피 무림맹 무인들이 전멸할 마당에.

그럼 도대체 흑천련주가 왜 쓰러진 것일까?

하긴. 이유를 알 게 뭔가?

어차피 이곳에서 죽기로 맹세하지 않았던가?

함정이라도 상관없다.

그저 지금 할 수 있는 걸 하다가 가면 그만이다!

“쳐, 쳐라앗!”

“와아아앗!”

수십 명의 무인들이 쓰러진 흑천련주를 향해 달려갔다.

그 순간,

쒸아아아아앙!

한 줄기 청명한 빛이 호선을 그리면서 달려들던 무인들을 베어냈다.

“컥!”

“아악!”

몇몇 무인들은 그 자리에서 몸이 양단되어 쓰러졌지만, 다수의 무인들은 아슬아슬한 차이로 멈춰 섰다.

그들이 놀란 표정으로 앞을 가로막은 여인을 보았다.

예홍이 표독스러운 눈길로 무인들을 쏘아보았다.

“누구든 이분을 건드린다면 지옥을 보게 될 것이다.”

“흥! 그 지옥에 네년도 끌고 가주마!”

누군가 일갈을 터뜨리며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는 뱉은 말을 이루지 못했다.

쉬이이잇!

예홍이 든 검이 춤을 추는가 싶더니 이내 그자의 목이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었다.

“또 지옥을 볼 사람 있나?”

그녀의 서슬 퍼런 경고에 죽음까지 각오했던 무인들조차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금방 전의를 되찾는 자가 있었다.

“쫄지 마라! 어차피 우린 이곳에 뼈를 묻는다!”

“그래,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저년도 저승길 동무로 삼아 무림맹의 저력을 일깨워…….”

악에 받쳐 소리치던 무인이 말을 마저 잇지 못했다.

싸늘한 표정으로 선 예홍 뒤로 새까만 화살 떼가 밤하늘을 덮으며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쒸쒸쒸쒸쒸에엑!

협곡에는 다시 한번 지옥도가 펼쳐졌다.

그렇게 무림맹 무인들이 비명횡사하고 있을 때, 예홍 뒤에서는 적비연이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

“끄음. 여긴…… 어떻게 된 거지? 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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