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혼의 사슬을 걸고
흑천련의 파양현 분타가 시끌벅적했다.
모처럼 대승이다.
최근 무림맹의 거침없는 공세로 계속해서 밀리기만 하다가 드디어 제대로 된 반격에 성공한 것이다.
협곡에 들어섰던 혈천단과 염천단은 전멸했다.
무림맹으로서도 꽤나 심각한 타격을 입었으리라.
승전보가 울리자 곳곳에 몸을 사리고 있던 사파 무인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늘 음지에서 활동하는 것이 익숙한 사파 무인들이다.
때문에 무림맹이 거침없이 밀고 들어올 때는 모두들 겁을 먹고 몸을 사렸다.
하지만 협곡의 대승이 알려지자 흑도 무인들은 희망을 보았다.
만통지의 합류로 전세가 역전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희망이 생겼으니 숨을 필요가 없다.
당장에라도 힘을 보태어 무림맹을 몰아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도 그동안 흑천련이 중원의 동쪽을 장악하는 바람에 흑도 무인들도 어깨를 펴고 거리를 활보하지 않았던가?
만약 정도천하가 된다면?
사공을 익힌 자들은 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야 하리라.
그 굴욕의 시간을 다시 받아들일 자신이 없다.
숨고 피하고 도망 다니는 건 이제 지긋지긋하다.
기회가 왔을 때, 희망이 생겼을 때를 놓치지 않으리라.
만통지가 돕지 않는가?
이참에 아예 사도천하를 이루리라!
그러다 보니 강동지역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던 흑도 무리들이 대거 응집하기 시작했다.
한편 적비연은 임시 거처로 마련된 련주실에서 수뇌인사들을 만나고 있었다.
“련주님, 지난번에는 위험했습니다. 물론 련주님의 무위야 의심할 나위가 없습니다만, 그래도 정해진 작전이 있는데 갑자기 나서시면 수하들이 혼란을 겪습니다.”
흑궁단주 조신우였다.
말투는 정중했지만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는 않았다.
수하들을 핑계대고 있었지만 사실상 련주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다.
흑천사왕 중 한 사람이자 최정예 조직인 흑궁단의 수장으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발언이기도 했다.
적비연이 쓴웃음을 깨물었다.
“미안하군. 다음엔 내 주의를 하도록 하지.”
“혹, 속하의 발언에 심기가 불편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자네 진심을 내가 모르지 않아. 다음에는 자중하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련주님.”
“또 다른 사안은 없는가?”
적비연의 말에 사예린이 나섰다.
“안휘성으로 갔던 셋째가 이곳으로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무림맹의 전력이 남창으로 집결하는 만큼 셋째 사제도 이곳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잘했군.”
적비연은 대답하면서도 내심 만통지에 대한 감탄을 금치 못했다.
모든 전황이 만통지의 예견대로 흘러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무림맹은 아무래도 이곳 파양호 인근에서 결판을 지을 속셈인 모양이었다.
만통지가 둥근 탁자에 크게 펼쳐진 지도를 내려다보며 수염을 쓸었다.
“한동안은 파양호 인근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될 걸세.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야.”
“그래도 만통지 어르신께서 본 련의 책사로 계시니 아주 든든합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조신우가 추켜세우자 만통지도 싫지는 않은지 헤실헤실 웃으며 답했다.
“당연히 내가 살피는 전투는 승리할 걸세. 하나 모든 전투를 내가 예측하긴 힘들어. 나도 한낱 인간일 뿐이니. 예측이라는 건 언제든 빗나갈 수 있겠지.”
마지막 말을 뱉으면서는 만통지의 시선이 적비연에게 물끄러미 향했다.
이번 전투에서 적비연에게 갑자기 사정이 생겼던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적비연이 짐짓 멋쩍은 표정으로 서둘러 회의를 정리했다.
“그럼 일단 다들 쉬도록 하지.”
수뇌인사들이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가자 련주실에는 이제 예홍과 은하란, 그리고 만통지만이 남았다.
은하란이 곧바로 적비연에게 물었다.
“하기룡이 살아 있었다니. 심지어 보패인간으로 만들어졌다니 놀랍네요. 한데 죽이진 못하셨다고 했죠?”
“싸움이 한창 진행되던 중에 갑자기 지독한 졸음이 쏟아지더군. 그대로 의식을 잃은 것 같아.”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하자 예홍이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장례를 준비할까요?”
“응? 갑자기 무슨 장례?”
“시신은 수몰되어서 찾지 못하겠지만, 장례는 지내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도 단휘와 묵검은 본 가의 무사이고 하천웅 가주도 가주님을 위해 희생했…….”
“헐. 벌써 결론이 그렇게 간 거냐?”
“제가 부정적이어서가 아닙니다. 이번엔 정말 위험하니까요.”
예홍의 말에 은하란도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하기룡이 정말 보패인간이 되었다면, 남은 자들이 그와 싸워서 이기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필 싸움을 매듭짓지 못하고 혼이 이쪽으로 소환될 게 뭐란 말인가?
하지만 은하란은 차분한 목소리로 예홍을 달랬다.
“분명 그쪽 상황이 위험했던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다행히 문제는 없는 것 같아요.”
“그걸 어떻게 아시죠?”
예홍의 물음에 적비연도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한데 대답은 듣고만 있던 만통지에게서 흘러나왔다.
“이런 답답한. 자네 가주를 보면 알잖은가? 여기서 이렇게 버젓이 회의를 하고 있잖은가? 본신이 잘못되기라도 했더라면, 아마 자네 가주는 지금쯤 저승 강을 건너고 있었겠지.”
“아…….”
그제야 예홍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통지의 말대로다.
적비연의 혼이 아직 흑천련주의 몸에 머물고 있지 않은가?
그 말은 본신에 이상이 없다는 뜻.
다시 말해 하기룡이 적비연의 본체를 훼손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벌써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적비연은 아무런 징후도 느끼지 못했다.
만약 다시 본체에 이상이 생겼더라면 또 한 번 영혼이 본신으로 소환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결국 본체가 안전하게 보호되고 있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어떻게 그 상황에서…….”
“당연히 보패인간을 상대할 수 있을 만한 누군가 나타난 것이겠지. 그리고 그 누군가는…….”
“수황 무자강이겠죠.”
“아! 그렇군요.”
예홍이 아무리 부정적인 성격이라지만, 이번만큼은 안도할 수 있었다.
수황 무자강.
강호에서 무림맹주, 흑천련주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인물.
하나 물 위에서만큼은 그 둘을 동시에 상대해도 될 만큼 강하다는 자.
별호에 ‘황(皇)’ 자가 들어가는 몇 안 되는 인물.
그라면 보패인간도 능히 상대할 수 있으리라.
게다가 하기룡은 적비연을 상대로 손을 섞은 직후가 아닌가?
내상을 어느 정도 입은 상태라고 했다.
그럼 수황이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으리라.
“그렇다면 이제 가주님의 존체가 도착하기만 기다리면 되겠군요!”
수황이 물 위에서 보호한다.
게다가 그곳에서 물길은 이곳 파양현까지 이어진다.
누가 감히 물 위에서 수황을 건드리겠는가?
물론, 적들이 작정하고 보패인간을 한가득 보내 버린다면, 아무리 수황이라도 당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들은 보패인간을 비장의 수로 여기는 듯하다.
겨우 벽력적가주를 죽이고자 그런 무리한 행위를 할 필요가 없으리라.
한데 만통지와 은하란의 표정이 썩 밝지만은 않았다.
그건 적비연도 마찬가지.
적비연은 표정이 어둡다기보단 뭔가 골몰히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아니면 혹시 극마라는 존재와 심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중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세 사람을 훑어본 예홍이 불길한 예감을 떠올리며 넌지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아직도 문제가 남아 있습니까?”
그러자 만통지와 은하란이 동시에 대답했다.
“네, 큰 문제가 남아 있죠.”
“꽤 골 아픈 문제가 남아 있지.”
예홍이 미간을 구겼다.
두 사람이 이렇게까지 말할 정도면 정말 심각한 문제이리라.
지금껏 두 사람은 자신의 부정적인 성격을 잘 알기에 최대한 밝고 희망적인 부분만 얘기해 왔다.
한데 무슨 문제이기에 이렇게 겁을 주나?
예홍이 세상 무너질 것 같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큰 문제라니…… 설마 가주님이 이대로 돌아가시는 건 아니죠?”
은하란과 만통지가 동시에 서로를 보았다.
묘한 긴장감에 예홍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번에도 두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럴지도.”
“그럴 수도.”
“헉!”
예홍은 헛바람을 집어삼키는 것과 동시에 그 자리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엇! 홍, 정신 차려!”
적비연이 얼른 그녀를 떠받치고는 소리쳤다.
두 사람의 암담한 반응에 예홍이 의식마저 잃어버린 것이다.
적비연이 만통지와 은하란을 보며 타박했다.
“안 그래도 예 대주 성격 뻔히 알면서 뭘 그리 겁을 줍니까?”
“단순히 겁준 게 아니잖아요? 이번에 가주님도 느낀 바가 있으실 텐데요.”
“암, 제대로 느꼈을 테지.”
은하란의 말끝에 만통지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적비연이 입을 다물고는 침음을 흘렸다.
그는 두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극마.
그를 믿을 수 없다는 뜻이다.
-흥! 잠깐 들떠서 실수 좀 했을 뿐이다. 까다롭긴.
극마가 팔짱을 끼고 투덜거렸지만 그를 볼 수 있는 은하란은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실수가 아닐 텐데요?”
-계집. 네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당신은 기회만 되면 몸을 차지하려고 혈안이죠. 하물며 완벽한 그릇으로 다듬어진 가주님의 본체라면…….
-글쎄! 관심 없다니까!
극마가 버럭 소리쳤다.
하지만 이번엔 적비연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고 있소. 극마와 한 번은 부딪쳐야 한다는 것을.”
-뭐? 주인도 날 못 믿는단 말이냐?
“극마. 이제 그만 솔직해져. 내가 잠시 떠나 있는 동안 너는 미친개처럼 뛰어다녔어. 그런데 내가 널 믿으라고?”
적비연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적비연은 본신을 되찾아서 활동해 봤다.
은하란의 말대로 자신의 본신은 완벽에 가까운 그릇으로 다듬어져 있었다.
스스로가 그렇게 느낄진대, 육신을 가지고 싶어 혈안이 되어 있는 극마라면 당연히 욕심을 낼 것이다.
자신이 차지할 수도 있는 최고의 육신을 눈앞에 두고 얌전히 염불이나 외고 있을 극마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주종관계가 절대 깰 수 없는 맹약으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분위기가 침잠해지자 극마가 미간을 팍 구겼다.
-뭐야? 그래서 날 소멸시키겠다는 거냐? 이거 너무한 것 아냐? 기껏 주인으로 인정했는데, 이젠 토사구팽이라는 거냐?
극마가 성을 냈지만, 은하란과 만통지는 침중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적비연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순간 극마는 분위기가 묘하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챘다.
가만, 그러고 보니 소멸시키려면 지금이라도 하면 되지 않는가?
이들은 도대체 뭘 고민하는가?
설마…….
한 가지 가설이 극마의 뇌리를 스쳤다.
극마의 입매가 치켜 올라갔다.
-그렇군. 너희들, 날 소멸시킬 수 없는 거군!
은하란이 침묵했다.
무언의 긍정.
-크하하하하! 그런 거였나? 그런 거였어!
극마가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한참이나 웃던 극마가 싸늘해진 표정으로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언제부터였나? 날 소멸시킬 수 없게 된 것이?
이번에도 대답은 없다.
극마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적비연이 말했다.
“아마 내가 흑천련주의 몸을 차지했을 때겠지. 그때쯤엔 네 존재가 굳이 필요 없다고 여겼을 테니까. 내 육신의 그릇은 완성이 되었고, 내 경지도 한 걸음만 남겨두고 있었으니.”
은하란이 흠칫거린 표정으로 보았다.
정확했다.
적비연이 흑천련주의 몸을 빌려 깨어났을 때, 은하란은 곧바로 극마를 소멸시키려고 했다.
하지만 통하지 않았다.
극마가 적비연과 함께 지내면서 의외로 혼이 서로 강하게 얽혀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둘이 자주 일체화를 진행했기 때문에 그런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극마를 함부로 소멸시키려다간 적비연마저 덩달아 소멸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극마를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적비연이 그를 꺾어야만 했다.
한데 둘이 같은 육신에 머물고 있을 때는 싸움이 불가능하다.
결국 적비연의 본신을 되찾을 때, 극마는 최상의 육신을 차지하기 위해 격투를 벌일 것이다.
이때 운이 나쁘면 적비연이 질 수도 있다.
그 말은 곧 극마가 적비연의 육신을 영원히 차지하게 되고, 적비연은 태청강의 육신에 머물거나 죽게 되리라.
은하란은 극마가 있는 곳에서 이런 이야기를 모두 하기 싫었다.
하지만 어차피 알게 되리라.
또한 반드시 일어날 일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모든 걸 공개하고 운명을 건 한판 승부를 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은하란이 각오를 다진 표정으로 한 걸음 나섰다.
“그래서 두 분에게 제안을 드릴까 해요.”
“제안이라면?”
이번엔 만통지가 한쪽 탁자로 걸어가서는 검갑(劍匣)을 열어보였다.
그 안에는 시커먼 검이 두 자루 들어 있었다.
단검이라기에는 조금 긴, 한 자가 약간 넘는 길이의 검이었는데, 딱 보기에도 요기가 풀풀 휘날리는 검이었다.
만통지가 돌아서며 말했다.
“귀식검(鬼式劍)이라는 걸세. 남만의 무녀들이 잡귀를 쫓거나 계약을 맺을 때 사용하지. 이걸로 ‘혼의 사슬’을 걸고 비무를 하는 걸세.”
-혼의 사슬? 정확히 무슨 뜻이야? 그게?
극마가 투덜거리듯 묻자, 그 목소리를 듣기라도 한 것인지 만통지가 말을 뱉어냈다.
“이 검으로 승부를 내면, 패자는 승자의 영원한 노예가 되는 거지.”
-호오? 그 말인 즉슨, 내가 그걸로 이 녀석을 이기면, 이 녀석이 내 노예가 될 수도 있다는 건가?
어느새 극마의 호칭이 ‘주인’에서 ‘이 녀석’으로 바뀌어 있었다.
은하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무조건 승자는 패자의 주인이 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