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 각자의 허상
-만약 비무를 하지 않는다면?
극마의 말에 은하란이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럼 둘 중 한 명이 가주님의 본신을 차지하게 될 테고, 다른 한 명은 련주의 몸에 남게 되겠죠.”
-이러나저러나 결국 싸우게 될 거란 말이군.
은하란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한 소리다.
최상의 육신이 눈앞에 있는데 극마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분명히 싸운다.
보도나 명검을 눈앞에 두고도 살육전이 벌어지는 곳이 무림이다.
하물며 영혼이 안착할 육신을 되찾는 일이다.
적비연은 당연히 본신을 찾으려고 할 테고, 극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려고 하지 않으리라.
“그러니까 이왕 피할 수 없는 싸움이라면 혼의 사슬을 걸고 싸우라는 거죠.”
-혼의 사슬이라. 확실히 나쁘진 않군.
귀식검이 아니라 진검을 사용한다면,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이 나리라.
그 경우 상대를 꺾는다고 해도 육신을 차지하면 끝이다.
하지만 귀식검으로 혼의 사슬을 걸고 비무를 하게 된다면, 육신을 차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상대를 노예로 부릴 수도 있다.
-클클클. 나야 손해 볼 게 없으니 얼마든지 받아들이지.
“뭐, 그렇잖아도 한 번은 짚고 넘겨야 할 문제였으니까.”
적비연도 담담하게 대꾸했다.
지켜보던 만통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갑의 덮개를 덮었다.
“보아하니 대충 이야기가 끝난 것 같군. 그럼 귀식검은 그때까지 내가 잘 보관해 놓도록 하겠네.”
“부탁드릴게요.”
은하란이 가볍게 말을 건네고는 돌아섰다.
“그럼 전 이제 부적을 써서 전서로 보낼 거예요. 제가 따로 조치를 취하기 전에는 두 분 중 누구도 가주님의 본체에 혼이 스며들 수 없도록 할 생각이죠.”
적비연과 극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의식을 잃었던 예홍이 가까스로 눈을 떴다.
“으음…….”
“정신이 드느냐?”
만통지가 피식 웃으며 예홍을 보고 물었다.
예홍이 멋쩍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정말 가주님이 위험한 건지요?”
“위험하겠지.”
“그럼 막아야죠!”
“때론 타인이 개입할 수 없는 문제도 있는 법이다.”
“그럼 어떻게 하죠? 그냥 지켜만 보는 겁니까? 가주님이 위험할 수도 있는데?”
“믿어야지.”
“……!”
“걱정하는 마음은 잘 알겠다. 하지만 그 마음보다는 믿어주는 마음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법이지. 네 주군을 믿어라.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가장 어려운 것이기도 하고.”
“겨우 믿어주는 것이라니…….”
예홍은 주먹을 꾹 말아 쥐고는 적비연을 슬쩍 돌아보았다.
적비연이 미소로 답했지만, 그녀의 표정에는 더욱 그늘이 졌다.
믿음이란 얼마나 허무한 단어인가?
믿음은 언제나 진실과 별개다.
과연 믿음이 정말 힘을 발휘할까?
예홍은 내심 고개를 저었다.
한때는 그 믿음의 기적을 바란 적도 있었다.
사혈곡에서 악착같이 살아갈 때.
언젠간 그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란 믿음으로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리고 자신을 철석같이 믿었던 동료와 동생들.
그래, 한때는 그들의 믿음이 힘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은 늘 시험의 연속이었다.
믿음은 배신으로 되갚아주어야만 했다.
서로 죽고 죽여야만 했던 지옥.
믿음이란 결국 허상이라는 것을 가장 빨리 깨우친 자가 살아남는 곳이었다.
그때 처음 깨달았다.
동료의 믿음이, 동생들의 믿음이 힘이 아니라 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어깨에 올려진 그 짐을 벗어던지고 싶었다.
더 이상 믿음을 배신으로 답하기도 싫었다.
그래서 그녀는 목숨을 걸고 그곳을 탈출했다.
그런데 그 지독한 믿음을 가지라고?
그게 최선이라고?
과연 자신의 믿음이 적비연에게 짐이 안 되리라 확신할 수 있을까?
“가주님…….”
예홍의 입이 어렵게 열렸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믿음을 보일 순 없었다.
“부디 조심하세요.”
“걱정 마.”
적비연은 웃음으로 답하며 예홍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려 주었다.
* * *
무림맹이 발칵 뒤집혔다.
혈천단과 염천단의 전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총군사 가후의 지휘 아래 무림맹은 지금껏 승승장구해 왔다.
남창까지 거침없이 진군해 오면서 피해는 최소화했다.
그런데 만통지가 파양현에 도착하고 나서 모든 게 바뀌었다.
무림맹에서도 한 손에 꼽히는 조직인 혈천단이 전멸하다니!
살소공자의 죽음은 무림인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남창의 회의실에 수뇌부들이 모였다.
하지만 누구도 총군사 가후에게 불만을 토로하진 못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지금 남창에 머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는 것을 알기에.
비록 마지막 전투에서 대패하긴 했으나, 아직은 총군사의 입김이 살아 있었다.
무림오절 중 한 사람인 염능파가 좌중의 무거운 분위기를 깨려는 듯 조금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구파일방을 비롯한 명문정파 장문인들이 핵심 전력을 이끌고 남창으로 오겠다는 서신을 속속 보내오고 있습니다. 이미 출정한 문파도 꽤 되는 것 같습니다. 이대로라면 거의 모든 문파가 남창으로 집결할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이번 협곡 전투에서 본 맹이 큰 피해를 입었지만, 정도 세력의 결집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자 무림오절 중 한 사람이자 묵성궁주인 고엽풍이 혀를 차며 말했다.
“그렇다고 이번 패배를 마냥 감쌀 수는 없소. 혈천단과 염천단이 전멸했소. 자칫 본 맹 무사들의 사기가 급전직하(急轉直下)할 것이 염려되오.”
고엽풍은 내심 총군사의 실책을 지적한 것이다.
가후가 쓴웃음을 입에 물고는 대답했다.
“모든 게 저의 불찰입니다. 좀 더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자 묵묵히 지켜만 보던 무림맹주 허위청이 손을 한 차례 휘젓고는 말했다.
“그만들 합시다. 승패는 병가지상사라고 하지 않소? 총군사도 신이 아닌 이상 실수는 할 수 있는 법. 지금 중요한 것은 앞으로의 대책이오. 흑천련에서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소. 이에 본 맹이 어떤 식으로 대응하면 좋을지 의견을 내보시오.”
맹주의 말에 좌중이 수군거렸다.
확실히 흑천련의 움직임은 예상과 달랐다.
협곡 전투의 승리를 발판 삼아 거침없이 몰아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흑천련은 조용했다.
마치 쳐들어올 적만 막으면 된다는 듯이.
물론, 이곳이 평소 때의 접경지라면 그럴 만하다고 여길 것이다.
하지만 남창까지 밀린 흑천련이 자존심 회복에 나서지 않는다는 것은 의외였다.
의협당주 노상국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혹시 흑천련도 피해가 큰 게 아닐는지요?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본 맹이 이곳까지 밀고 들어오는 동안, 흑천련 본 단에서는 반역까지 일어났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서 비록 최근 협곡 전투에서는 대승을 거뒀지만, 그들 입장에서는 겨우 한숨 돌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일리 있는 지적이었다.
사실 무림맹 수뇌인사들조차도 흑천련 본 단에서 백발광인들의 난리를 아는 자는 극히 드물었다.
단지 혼란한 시기를 틈타 흑천련 내부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났다는 정도로만 파악하고 있었다.
염능파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덮어놓고 공격을 감행했다간 저들의 노림수에 빠질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급할 때일수록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돌다리도 두드려 보아야 합니다. 우린 이미 정예단을 둘이나 잃었습니다.”
“하지만 마냥 기다리다간 저들이 결집하고 말 겁니다. 이번 협곡 전투로 사기가 오른 사파 무리들이 파양현으로 결집하고 있다는 소식도 못 들었습니까?”
“흐음. 장로회주님은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고엽풍의 반박에 염능파가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한쪽에서 묵묵히 이야기만 듣던 무림오절 중 한 사람인 편무량이 지그시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서두르면 본 맹이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네. 오히려 우린 명문정파들이 남창에 도착할 때까지 방어를 견고히 하면서 시간을 끄는 게 좋을 걸세. 사파 무리들이 결집을 해봐야 중원 전역에서 모여들 명문 정파의 인원을 넘어서진 못할 터.”
그의 말에 좌중의 무인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확실히 중원 전역에서 강호명숙들이 남창으로 모인다면 그 기세는 대단할 것이다.
조금만 참으면 무림고수들이 바글바글 모여들 텐데,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편무량이 이번엔 총군사 가후를 돌아보았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저 역시 회주님과 같습니다. 하지만 무작정 시간을 끄는 것도 자칫 본 맹 무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릴 수도 있겠지요.”
“내 말이 바로 그거요!”
고엽풍이 맞장구를 치자, 가후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해서, 고 궁주님께서 일부 정예들로 구성된 별동대를 이끌어주시는 건 어떨지요?”
“별동대를?”
“예, 파양호 인근을 수색하시면서 수상해보이거나, 적의 움직임이 파악되면 사전에 차단해 주시는 임무입니다. 사실 이러한 임무를 고 궁주님께 맡기는 것 자체가 실례입니다만, 말씀하셨다시피 본 맹은 두 정예단을 잃으면서 사기가 많이 떨어져 있습니다. 무림오절이신 고 궁주님이 아니라면 별동대라고 할지라도 내심 불안감을 떨칠 수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가후의 입바른 소리에 고엽풍의 입이 넌지시 찢어졌다.
그렇잖아도 손이 근질근질하던 고엽풍이었다.
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소. 내가 맡겠소. 단, 놈들이 미심쩍은 움직임이 보인다면 선조치, 후보고하겠소. 괜찮으시겠소?”
“물론입니다. 고 궁주님이라면 전적으로 믿습니다.”
그제야 고엽풍의 표정도 온화해졌다.
“알겠소, 믿고 맡겨주시오.”
“감사합니다. 최고 정예들로 선별해 별동대를 구성하겠습니다.”
“하하하! 적당히 구성해 주시오. 본 맹의 고수들을 모두 내가 거느릴 수도 없으니.”
가후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사실 무림오절이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무림맹 내에서만 다섯 손가락에 꼽힐 뿐이었다.
전 무림을 상대로 다섯 손가락이 아니다.
그런 만큼 흑천사왕에 견줄 수는 없다.
그럼에도 그 별호가 주는 착각이라는 게 있었다.
그래서인지 고엽풍은 흑천사왕이라도 자신의 손에 걸리기만 하면 당장 요절을 내줄 수 있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어쨌거나 회의가 대략 마무리되자 수뇌부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회의실에 총군사 가후와 무림맹주만 남았다.
맹주 허위청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이번엔 고 궁주인가?”
“그를 믿지 못하십니까?”
가후가 부드럽게 웃으며 묻자, 허위청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강하지.”
“하면 잘된 일 아닙니까?”
“하지만 다혈질인 그가 만통지의 암계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
“맹주님.”
가후가 부르자 허위청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알고 있네. 때론 대의를 위해 작은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 하나 고 궁주가 정말 작은가?”
“전 무림에 비하면 작고 작습니다.”
“그렇겠지. 전 무림에 비한다면.”
“전 무림이 들고 일어나야 사도의 뿌리를 뽑을 수 있습니다.”
“흐음.”
“그리고 전 무림이 들고 일어나려면 이야기가 중요합니다.”
허위청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자네 뜻을.”
“제 뜻을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드네.”
“……?”
“자네는 생각보다 꽤나 무서운 사람이라는 것 말일세.”
“저는 그저 맹주님을 보필할 뿐입니다.”
“알고 있지. 그럼에도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하네. 내가 자네를 잘 이끌고 있는지.”
“맹주님은 절 이끌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그저…….”
“내 뜻을 따를 뿐.”
“그렇습니다.”
허위청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렸다.
“나는 이만 가보지. 더 있을 텐가?”
“예, 향후 대책에 대해 좀 더 고민해봐야겠습니다.”
“그래, 너무 무리하진 말게. 아, 천림은 언제 사용할 생각인가?”
“최후의 최후까지 아낄 생각입니다.”
“그렇군. 하긴 비장의 수는 쉽게 꺼내는 것이 아니니까. 하지만 이젠 수뇌인사들에게 천림의 존재를 알려도 괜찮지 않겠나?”
“비밀은 공유될수록 의미가 없지요.”
“그것도 그렇군. 자네 뜻이 그렇다면야.”
허위청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모르고 있었다.
실상 가후가 그의 뜻을 따른다고 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그가 가후의 뜻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가랑비에 옷 젖듯이 천천히 그를 장악해 가고 있었음을.
허위청이 걸음을 떼기 전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이번 이야기의 조연은 누군가?”
가후가 빙그레 웃었다.
“이 기회에 사혈곡을 깔끔하게 정리할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