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38화 (239/301)

238. 속고 속이고

“사혈곡이라…… 하긴 이제 정리할 때가 됐군. 자네가 처리한다면 문제가 없겠지.”

“믿고 맡겨주십시오.”

가후가 허리를 숙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허위청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확실히 이야기를 잘 꾸민다면 전 강호가 움직일 만하겠군. 그럼 수고하게.”

허위청이 나가자 가후는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를 묵묵히 내려다보다가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만통지라…….’

확실히 그의 암계는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다행이다.

명문정파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게 바로 명분이 아니던가?

만통지는 자신에게 명분을 만들어줄 것이다.

한참이나 창가에 서서 싸늘한 바람을 맞고 있을 때였다.

문득 회의실의 촛불이 살짝 흔들렸다.

일부러 낸 인기척.

가후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허공을 향해 물었다.

“어찌 되었는가?”

“하기룡이 죽었습니다.”

어두운 허공에서 목소리가 답했다.

“하기룡이?”

가후의 표정이 흔들렸다.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하기룡이 죽다니.

그는 보패인간이었다.

시간이 짧았지만 그래도 초절정 극에 다다라 천해경을 넘보는 경지로 만들었다.

한데 그런 그가 죽었다고?

대체 누구에게? 어쩌다가?

그 의문에 대한 대답이라도 하듯 목소리가 이어졌다.

“만검세가에서 벽력적가를 도왔습니다. 묵검 호위와 단휘 대주, 그리고 사령검이 장사를 벗어났습니다.”

“만검세가주가…….”

가후의 표정이 슬쩍 일그러졌다.

최근 만검세가주의 행보가 심상찮다고 느끼긴 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맞서면서까지 벽력적가를 도울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물론 벽력적가 무인 몇 명이 장사를 벗어났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다.

고작 열 명도 안 될 인원이 뭘 어떻게 하겠는가?

다만 문제는 벽력적가를 조사하러 간 하기룡이 죽었단 것이다.

왠지 모를 찜찜한 기분에 벽력적가를 조사하라고 그를 파견한 것인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이야.

하긴, 모든 계획이 예상대로만 흘러갈 수는 없는 법이니.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하기룡이 벽력적가주와 겨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확실하진 않습니다.”

“벽력적가주와 겨뤄?”

“예, 만검세가의 낙오자 한 명을 찾아 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신뢰도가 낮습니다. 무엇보다 목격자가 횡설수설하는 상황이라.”

“말도 안 되는 소리. 벽력적가주라면 지금 흑천련 권역에서…….”

말을 내뱉던 가후가 흠칫거렸다.

‘정말 벽력적가주가 흑천련 권역에 있는 것인가?’

최근 그를 본 사람이 있었던가?

신뢰할 만한 정보가 단 하나도 없다.

정말 벽력적가주가 그곳에 있었단 말인가?

그래서 만검세가가 그를 도와준 것이고?

하지만 왜?

무림맹에 대항하기 위해서 정말 사파와 손을 잡았다?

아무래도 이상하다.

그렇다면 왜 벽력적가주는 흑천련 권역에 있다는 소문을 흘린 걸까?

“그래서 지금 만검세가주는?”

“수황과 접촉한 상황입니다.”

“수황이라.”

이제야 이해가 된다.

하기룡의 죽음이.

수황이라면 충분히 하기룡을 죽일 수도 있으리라.

더구나 물 위에서라면.

‘이거 참.’

일이 묘하게 흘러가지 않는가?

수황이 만검세가와 벽력적가를 돕는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목적지는?”

“낙오자의 말에 의하면 파양호라고 합니다.”

“결국 이곳으로 온단 말이군.”

“보패인을 보낼까요?”

가후가 손을 저었다.

“됐다. 어차피 만나게 될 일. 지금은 벽력적가주가 중요한 게 아니다. 대사를 앞두고 있으니 보패인을 함부로 남용해서는 안 돼.”

“알겠습니다.”

“림주께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때를 기다리시겠다고 하셨습니다.”

대답을 마친 목소리는 이내 기척을 감췄다.

가후가 다시 고개를 들고 밤하늘에 뜬 무수한 별무리를 바라보았다.

“벽력적가주…… 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 * *

“여기 있다!”

아궁이 아래를 들여다보던 무사가 소리치자, 소녀가 비명을 꽥 질렀다.

“꺄악! 살, 살려주세요!”

“누가 죽인다더냐? 클클.”

“제, 제발……!”

“얌전히 따라오너라! 극락을 보여줄 테니!”

무사가 소녀를 잡아끌고 나오자 마당으로 다른 무사가 들어왔다.

그는 흑천련 귀검단주 평태운이었다.

“용케도 찾았군.”

“아궁이 아래에 숨어 있지 뭡니까?”

귀검단원의 대답에 평태운은 울고 있는 소녀에게 차갑게 일렀다.

“별일 아닌 걸로 서럽게도 우는구나. 얌전히 우릴 따르면 무사할 것이다.”

“네, 네…….”

소녀가 간신히 울음을 삼키자, 평태운이 턱짓으로 끌고 가라는 명을 내렸다.

“오늘은 꽤 쏠쏠하네요. 이 정도는 소득이 있어야 지친 무사들의 사기를 올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흐흐.”

“아직 사냥이 끝나지 않았다. 해이해지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대주님. 그런데 다음은 어디죠?”

“대당향(大塘鄕)이다.”

“아, 그 마을에선 계집 구경 좀 할 수 있을까요? 흐흐.”

“꿈 깨라. 거긴 우리가 아니라 월희마녀께서 직접 가신다.”

“쩝, 아쉽군요.”

귀검단원이 입맛을 다시며 걸음을 옮겼다.

평태운이 피식 웃고는 민가를 한 차례 훑어보았다.

순간 그의 눈빛이 싸늘해지더니 민가의 지붕 위를 빤히 노려보았다.

얼마나 시선을 두었을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자 평태운이 이내 시선을 거두고는 걸음을 돌렸다.

“피곤하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가 멀어져가자, 조금 전까지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던 민가의 지붕에서 한 인영이 스윽 몸을 일으켰다.

그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평태운의 뒷모습을 쏘아보았다.

‘간악한 사파 무리들!’

주먹을 불끈 쥔 그가 어디론가 날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 * *

“민가를 습격해서 납치를 일삼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보고를 올리는 사람은 귀검단이 마을을 습격해서 사람들을 납치하는 걸 목격한 그자였다.

고엽풍의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흥! 이 개잡놈들이 그럴 줄 알았다! 마을을 약탈하다니. 뭐? 익힌 무공만 다를 뿐, 민초를 괴롭히진 않는다고! 개가 똥을 끊지! 역시 다 개소리였다! 뿌리가 썩었는데 어찌 그 열매마저 썩지 않겠는가!”

“놈들이 다음 마을로 대당향을 지목했습니다.”

“확실한가?”

“확실합니다. 월희마녀가 직접 그곳에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월희마녀라. 잘됐군! 우리가 먼저 그곳으로 간다!”

“현재 흑천련이 민가를 습격하면서 사람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혹여 우리가 먼저 도착하면 주민들이 오해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상황을 잘 설명해야지. 우리가 민초들과 섞여 있다가 놈들이 나타나면 급습을 하는 거다.”

“과연. 그 방법이라면 방심하고 나타난 적들을 일망타진할 수도 있겠습니다!”

사내의 말에 고엽풍이 입매를 치켜 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명심해라. 전장에서는 싸우는 자가 이길 기회도 가진다. 몸을 사리기만 해서는 승리를 취하지 못하는 법.”

신중론을 펼치는 수뇌 인사들에 대한 은근한 불만을 드러낸 것이다.

그가 별동대를 둘러보았다.

“광성대원(光星隊員)으로 뽑힌 너희들은 정예 중에서도 정예다. 그리고 무림오절인 나 고엽풍이 너희들과 함께 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의 협의를 보여주도록 하자!”

“존명!”

고엽풍이 이끄는 별동대인 광성대가 하늘이 떨쳐 울리도록 대답했다.

* * *

대당향은 제법 너른 연못을 끼고 있는 마을이었다.

대략 오십 호 정도의 민가가 모여 촌락을 이루고 있었는데, 나이든 사람들이 많은 곳이었다.

주민들은 갑자기 나타난 백여 명의 광성대를 보고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서로 눈치를 살피며 한참을 두런거리더니 촌장으로 보이는 늙수레한 사내가 고엽풍에게 다가왔다.

“나리, 마을 주민이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요. 혹, 무슨 일인지 알려주실 수 있으신지요?”

“걱정 마시오. 우리는 무림맹에서 온 무인들이오. 당신들을 지켜주기 위해서 왔소.”

“저, 저희들을 지켜주신다굽쇼?”

“그렇소.”

고엽풍이 한껏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대략의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그제야 촌장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읍했다.

“아이고, 감사합니다요. 정말 감사합니다요.”

“인사는 일이 끝난 후에 하시오. 그러니 여러분은 우리에게 잘 협조해서 평상시처럼 행동하면 되오.”

“알겠습니다요. 소인들은 그저 나리들만 믿겠습니다요.”

촌장이 연신 허리를 숙이며 물러갔다.

광성대주가 고엽풍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일이 잘 풀릴 것 같군요.”

“방심하지 마라. 놈들은 우리가 있는 줄 모르겠지만, 그래도 상대는 월희마녀다.”

“명심하겠습니다.”

고엽풍의 지시로 광성대원들이 뿔뿔이 흩어져서는 마을 주민들과 섞여들었다.

마을 주민들은 이미 촌장의 안내를 받았던 터라 묵묵히 자신들이 할 일을 했다.

밭을 매는 사내들, 우물에서 물을 긷는 아낙, 땔감을 정리하고 울타리를 손질하는 사내들.

평소와 다름없는 풍경.

‘다들 잘 협조해 주고 있군.’

고엽풍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어딘지 모를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광성대주가 다가왔다.

“모든 대원들이 주민들과 섞였습니다. 상당수는 주민들 인근에 은신했고, 몇몇은 주민으로 위장했습니다.”

“수고했네. 그런데…….”

“예, 말씀하십시오.”

“뭔가 좀 이상하지 않나?”

“예? 무슨 말씀이신지……?”

“흐음. 콕 짚을 순 없지만 뭔가 이상하단 말이지. 묘하게 위화감이 든단 말이야.”

광성대주가 미간을 좁히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평화롭기 짝이 없는 마을 풍경이다.

광성대주는 잘 모르겠다는 듯 뒤통수를 긁적였다.

고엽풍은 기감을 활짝 펼쳤지만 특별히 이상한 건 느낄 수 없었다.

때마침 수하 하나가 날듯이 달려와 보고했다.

“나타났습니다! 월희마녀입니다!”

“머릿수는?”

고엽풍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쳐 물었다.

“오십여 명입니다!”

“됐어!”

고엽풍의 입매가 치켜 올라갔다.

이곳 주민이 별로 많지 않기에 딱 그 정도일 거라고 짐작하던 터였다.

혹여나 너무 많은 무인들이 오면 일이 어려워질 수 있었다.

머릿수만 따져도 광성대가 두 배 이상이다.

“다들 침착하게 기도를 가다듬어라! 놈들은 분명 마을 중심으로 들어올 것이다. 포위하는 형국으로 범위를 좁혀 오도록!”

“존명!”

그의 명이 떨어지고 나서 무림맹 무인들의 은밀한 움직임이 일어났다.

스스슷! 사삿!

잠시 후 고엽풍의 예측대로 사예린은 흑혈당주 주천랑을 비롯해 수하 오십 명을 거느리고 마을 중심부까지 들어왔다.

사예린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좌우를 훑어보았다.

“분위기가 이상하군요.”

“무엇이 이상한지요?”

옆에 선 주천랑이 조심스레 물었다.

“당주께서는 예사롭지 않은 기운이 느껴지지 않나요?”

“……!”

말뜻을 알아챈 주천랑이 검을 뽑아들고는 주변을 의식했다.

차아앙!

“웬 놈들이냐?”

주천랑의 외침에 마을 주민들 사이에 섞여 있던 고엽풍이 기다렸다는 듯이 나섰다.

“크하하하! 제법이구나, 월희마녀! 노부가 진즉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감히 민가를 습격해서 약탈하다니! 노부가 간악한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겠다!”

“무림오절 고엽풍 선배시군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사예린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답했다.

고엽풍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날 알아보는군.”

“당연하지요. 선배님의 명성은 익히 들었답니다.”

“후후. 입 바른 소리로 살아날 궁리를 하려나 본데 어림없지. 노부는 이 자리에서 지난 협곡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자 한다.”

사예린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마을 주민으로 위장하고 계셨던 겁니까?”

“비겁하다고 말하고 싶은가? 하나 이것은 하나의 전술일 뿐. 속은 너희들이 아둔한 것이겠지.”

“물론입니다. 속은 쪽이 아둔하지요.”

“그래, 속은 쪽이…… 음? 너 지금 무슨…….”

고엽풍이 눈살을 슬쩍 구기고는 흔들리는 눈으로 주변을 훑어보았다.

분위기가 달라졌다!

지금껏 어수룩한 표정을 짓고 있던 마을 사람들의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분명 기도는 그대로인데?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느껴지던 위화감!

아, 그거였나?

‘제길! 어쩐지! 이 마을에는 아이가 하나도 없어!’

그랬다.

마을에 어린아이가 없다!

왜 그 간단한 차이를 이제야 느낀 것일까?

마을 사람들의 기도가 너무 순순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때 갑자기 마을 한쪽에서 비명이 솟구쳐 올랐다.

이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에서 마구 비명이 튀어나왔다.

이윽고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

“무슨 일이냐!”

고엽풍이 당황해서 소리치자, 부상을 입은 광성대주가 헐레벌떡 달려와 외쳤다.

“궁주님! 속았습니다! 이놈들은 마을 주민이 아니……!”

쒸에에엑!

허공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자마자 고엽풍이 재빨리 몸을 날려 검을 휘둘렀다.

따앙!

비수 한 자루가 그의 검을 맞고 튕겨나갔다.

“당신은……?”

고엽풍이 놀란 표정으로 되묻는데, 촌장이 히죽 웃었다.

동시에 그의 뺨이 불룩불룩 움직이더니 살갗을 찢으며 시커먼 벌레 한 마리가 기어 나오는 게 아닌가?

그 엽기적인 모습에 고엽풍과 광성대주가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촌장이 찢어진 살갗을 벗겨내자 인피면구가 완전히 떨어져 나가면서 흉측한 외모가 훤히 드러났다.

고엽풍이 눈을 부릅뜨고 말을 더듬었다.

“네, 네놈은…… 괴독자!”

찰나,

후우우웅!

한 줄기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바로 옆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속은 쪽이 아둔한 것 맞지?”

“헛!”

깜짝 놀란 고엽풍이 튕기듯이 물러났다.

어느 틈에 나타난 것인지 바로 앞에는 흑천련주가 서 있는 게 아닌가?

흑천련주 즉, 적비연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의 아둔함을 탓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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