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 악몽의 재현
고엽풍의 눈동자가 해일처럼 흔들렸다.
전신에 소름이 돋아났다.
도대체 어느 틈에!
흑천련주가 나타났다!
흑천련주가 마을을 약탈하러 나타났다!
아니다.
흑천련주가 그런 짓을 직접 나서서 할 리가 없지 않나?
당했다.
적들이 파놓은 함정에 보기 좋게 걸려들었다.
너무 성급했다.
최대한 빨리 공을 세우고 가후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었다.
싸우는 자만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고!
기다림은 아무 결과도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하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결과는 또 하나의 패배로 기록되리라.
젠장! 어째서 이리도 간단히!
무엇보다 이 마을 주민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초절정 후단에 이른 자신도 기도를 감지해 내지 못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차아앙!
고엽풍이 검을 뽑아 들고는 나직이 으르렁거렸다.
“흑천련주.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소.”
“그럼 어떻게 볼 줄 알았나?”
“좀 더 고상한 만남을 기대했지.”
“고상한 만남이라. 무인에게 전장은 고상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인가?”
“그런 말뜻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아실 텐데.”
피식.
적비연이 손을 젓고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투로 말했다.
“어떤 만남을 기대했든 상관없지. 날 만나는 날이 그대의 제삿날이 될 테니.”
까드득.
고엽풍이 움찔거리고는 어금니를 갈았다.
하지만 그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했다.
흑천련주에게서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기운.
그건 자신의 무위를 아득하게 초월하는 것이었다.
도저히 이길 수 없다.
싸움을 하기도 전에 마음에서 완패를 당했다.
무인으로서는 치욕스러운 일이지만, 고엽풍은 그마저도 느끼지 못했다.
그만큼 흑천련주의 무위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으니까.
이거야말로 어른과 아이 수준의 차이가 아닌가?
흑천사왕 중에서도 첫 손가락에 꼽히는 자.
사파 무인들에게 무신이라고 불리는 자.
그를 얕잡아 보진 않았다.
하지만 허명성세도 분명 있으리라 생각했다.
소문이란 부풀려지기 마련이니까.
한데 이게 뭔가?
소문이 부풀려져?
허튼 소리!
소문은 오히려 축소됐다.
흑천련주, 그는 오히려 소문보다 더 대단하지 않은가?
꿀꺽!
고엽풍이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마치 뱀 앞에서 얼어붙은 개구리가 된 심정.
적비연이 쏘아내는 무형지기에 완전히 사로잡힌 것이다.
저벅. 저벅.
적비연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고엽풍의 본능이 경고했다.
당장 움직이라고!
지금이라도 몸을 날려 죽기 살기로 도망쳐야 한다고!
하지만 이성은 또 다른 명령을 내린다.
검을 들어 싸우라고! 수하들이 지켜보고 있다고!
하지만 그는 이러한 경고를 다 무시했다.
대신 입에서 엉뚱한 소리가 나왔다.
“하, 하나 물어봅시다.”
“무엇인가?”
“마을 사람들…… 어찌 기도를 감쪽같이 숨겼소? 이 정도로 완벽하게 기도를 숨기려면 특별한 영단이라도 복용해야 할 터인데.”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죽어가는 마당에 겨우 그게 궁금했던 건가?”
고엽풍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우스웠다.
이 와중에 그런 게 궁금하다는 것이.
아마도 모든 걸 포기한 마음이었기 때문이리라.
실제로 궁금하기도 했고.
이 많은 사람들이 초절정에 이른 자신마저 감쪽같이 숨길 정도로 기도를 감추려면 영단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려면 적어도 천상원처럼 훌륭한 영단 제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어야…….
‘설마?’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벽력적가가 정말로 흑천련과 손을 잡았을 리가.
벽력적가가 흑천련과 내통한다는 것은 무림맹 수뇌인사들이 만들어낸 여론이었다.
벽력적가가 갑자기 유명세를 타며 성장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낸 소문.
한데…….
그게 소문이 아니란 말인가?
그 생각을 마치 읽기라도 한 듯 적비연이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왠지 해답을 찾은 듯한 표정이군.”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그러게 왜 그리 그들을 궁지로 몰았나? 아무 죄도 짓지 않았는데. 그깟 정치 놀음을 하느라 유능한 아군을 적으로 돌리다니. 쯧쯧.”
“말도 안 돼…… 도대체 왜 그들이…….”
고엽풍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데, 적비연 곁으로 월희마녀가 다가왔다.
“사부님, 이자는 제가 맡고 싶습니다.”
“흐음. 쉽지는 않을 거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
적비연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예린은 고엽풍과 실력을 정당하게 겨뤄보고 싶은 거다.
무인으로서 누구나 가질 만한 호승심.
다만 고엽풍의 입장에서는 이 상황이 수치스럽기 짝이 없었다.
연배만 따져도 사예린과 자신은 한참이나 차이나지 않던가?
그런데 이래서야 마치 먹이를 앞에 두고 누가 먹을지 정해달라고 떼쓰는 것 같지 않은가?
마침내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조심해라.”
“감사합니다, 사부님.”
사예린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고엽풍 앞으로 나섰다.
“오래전부터 무림오절이신 선배님의 명성을 듣고 흠모해 왔어요.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사예린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까지 지으며 말했다.
어딘지 모를 요기가 느껴지는 미소.
고엽풍은 뺨을 살짝 떨다가 이내 차갑게 웃었다.
“훗. 이 싸움에 정말 자네 사부가 끼어들지 않는다고 약속하는가?”
“물론입니다. 설혹 제가 위험해지더라도 사부님은 개입하시지 않을 거예요.”
“과연. 자신이 내뱉은 말은 지킨다는 거군.”
고엽풍은 일부러 적비연을 띄워주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적비연이 개입하는 것을 막고 싶었기에.
그렇다면 죽음을 앞두고 사예린 정도는 저승길 동무로 삼을 수도 있지 않겠나?
월희마녀를 꺾는 것만 해도 아주 헛된 죽음은 아니리라.
고엽풍은 검을 쥐고는 주변을 슬쩍 둘러보았다.
곳곳에서 싸움이 벌어지며 비명이 차오르고 있었다.
짐짓 치열해 보이는 듯했지만,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
정예로 꾸려진 광성대가 맥을 추리지 못하다니.
그만큼 마을 주민들을 믿은 탓도 있을 것이고, 흑천련 역시 나름의 정예를 추렸다는 뜻도 될 터다.
하기야 월희마녀도 모자라 괴독자가 인피면구를 뒤집어쓰고 촌장 행세를 하고 있었으니 말 다한 것 아닌가?
하지만 이대로 끝나진 않으리라.
여기서 자신이 허무하게 죽으면 총군사의 기세만 더 살려주는 꼴이 된다.
무림맹은 주저해선 안 된다.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자신이 희생되더라도 월희마녀 하나쯤은 제물로 삼아야 하지 않겠나?
고엽풍이 천천히 기수식을 취하고는 월희마녀를 노려보았다.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길 바라네.”
“물론이죠.”
사예린이 고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흑월아를 펼쳐 잡았다.
사라라랑.
검은빛의 흑월아가 부채처럼 펼쳐지면서 섬뜩한 예기를 머금었다.
적비연은 팔짱을 낀 채 묵묵히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고엽풍과 사예린 사이에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이 어느 순간 뚝 끊어지더니,
파앗!
팟!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몸을 날렸다.
쉬리리리링!
흑월아 다섯 자루가 각기 춤을 추며 고엽풍을 향해 날아들었고, 고엽풍의 검에서 강기가 발출하며 사예린의 신형으로 짓쳐들었다.
쉬쉬이이잇!
따다다다앙!
검과 비도가 부딪치며 쇳소리를 연신 울린다.
사예린의 비도술은 극에 다다라 있었고, 고엽풍의 검술 역시 부족함이 없었다.
두 사람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팽팽하게 맞서 싸웠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전장이라는 사실도 잊고 멍하니 넋을 놓고 구경할 정도였다.
초절정의 비무.
현란하고 살벌하면서도 아름답기까지 하다.
인간의 한계에 다다른 자들끼리의 싸움.
이런 싸움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무인들에게는 큰 깨달음이 있을 수 있다.
어느새 적비연 곁으로 예홍이 다가왔다.
“대단하군요. 저 두 사람.”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홍의 말대로다.
자신은 기연을 얻어 강해졌다지만, 저 두 사람은 오로지 본신의 노력으로만 저 경지를 이루지 않았던가?
세상은 넓고 고수는 많다더니.
만약 자신이 은하란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저들만큼이나 경지를 이룰 수 있었을까?
무공 천재라고 자부하며 살아온 날들이 부끄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비무는 꽤 길게 이어졌다.
싸늘한 겨울 날씨임에도 고엽풍과 사예린의 이마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두 사람 모두 잠깐씩 거리를 둘 때면 거칠게 호흡하며 기도를 다듬었다.
턱 끝에 맺힌 땀이 뚝뚝 떨어졌다.
그야말로 한 치 앞도 알기 힘든 팽팽한 격전.
‘사예린이 그사이 깨달음을 얻었던 모양이구나.’
애초에 사예린은 고엽풍보다 한두 수 아래 실력이었다.
한데 투혈권왕의 죽음을 겪은 후로 그녀의 심신에 변화가 있었던 것이리라.
하지만 그래도 경험의 차이는 무시할 수 없는 법.
시간이 흐를수록 사예린은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예홍이 미간을 좁혔다.
“계속 지켜봐도 괜찮을까요?”
“일단은.”
“이대로면…… 위험할 것 같습니다.”
적비연이 피식 웃었다.
예홍이 흑천련 이 공녀의 편을 들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러고 보면 참 인생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변화는 엉뚱한 곳에서 시작됐다.
“크아아악! 피, 피햇!”
“으아악! 웬 놈들이냐!”
갑자기 마을 한쪽에서 비명이 솟구치면서 난잡한 고함 소리가 이어졌다.
오로지 고엽풍과 사예린에게만 집중하고 있던 두 사람은 얼른 고개를 들고 마을 어귀 쪽을 돌아보았다.
“강하다!”
적비연이 눈썹을 찌푸리는 순간,
팟!
웬 인영이 마을 중심의 전각 위에 거짓말처럼 나타난 게 아닌가?
백발을 휘날리는 머리카락.
붉은 눈동자.
단발머리의 여인!
그녀가 뿌리는 존재감이 어찌나 강맹한지 정신없이 격투를 벌이던 고엽풍과 사예린마저 훌쩍 떨어지며 고개를 돌렸다.
고엽풍이 미간을 팍 구기고는 적비연을 노려보았다.
“흑천련주! 설마 정당한 비무를 방해할 생각이오?”
하지만 적비연이 싸늘한 표정으로 반박했다.
“본 련의 아이가 아니다.”
“하면 대체 누구…….”
“본좌도 모른다.”
적비연이 전각 위에 꼿꼿하게 선 여인을 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단발의 여인이 백발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그녀가 붉은 눈동자로 한곳을 가만히 응시했다.
희미한 미소.
적비연은 그 눈길을 따라가다가 옆에서 가늘게 떨고 있는 예홍을 발견했다.
“홍……?”
하지만 예홍은 옆에서 부른 소리도 듣지 못한 듯 퀭한 눈길로 단발 여인을 응시했다.
“어, 어떻게……! 어떻게 네가……!”
단발 여인이 고개를 살짝 기울이다가 입을 열었다.
“맞네. 맞았어. 몰라보게 달라졌네, 홍 언니?”
그녀의 목소리에 모든 이의 시선이 이젠 예홍에게 향했다.
고엽풍이 노발대발 소리쳤다.
“련주, 이러고도 모르쇠할 거요! 저 백발 여인이 지금 저자를 보고…… 가만, 자네는 설마 벽력가의…….”
하지만 고엽풍은 말을 마저 이을 수 없었다.
슈걱!
한 줄기 바람에 이은 파육음.
어느새 귀신처럼 날아든 백발 여인이 고엽풍을 지나 서 있었다.
“시끄럽다고. 늙은이.”
“어……?”
피츗, 츄아아아!
고엽풍은 마지막까지 자신이 어떻게 당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순식간에 목이 떨어진 그가 피를 분수처럼 터뜨리며 바닥에 쿵 쓰러졌다.
모두가 충격에 휩싸인 가운데 백발 소녀가 예홍을 보며 싱긋 웃었다.
“오랜만이야, 언니. 잘 지냈어?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