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 그날처럼 눈이 내리고
적비연이 뺨을 씰룩였다.
어딘지 낯설면서도 최근 들어 익숙해진 기운.
모순된 말이지만,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다.
‘이 여자…… 보패인인가?’
적비연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예홍을 돌아보았다.
예홍은 여전히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표정이었다.
서로 아는 사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홍. 아는 여자냐?”
“…….”
“홍!”
“아, 죄송합니다. 그게…….”
그제야 예홍이 흠칫거리고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런 예홍을 보며 묘령의 여인이 생글거리며 물었다.
“언니는 내가 반갑지도 않나 봐? 하긴. 그럴 것 같으면 우릴 남겨두고 떠나지도 않았겠지만.”
“나, 난…… 나는…….”
예홍의 눈동자에서 격랑이 일었다.
적비연은 그런 예홍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백발 여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보패인과 비슷한 기운을 풍긴다.
정순하면서도 어딘지 깔끔하지 못한 기운.
그런데 하기룡이나 연리하에게서 느껴지던 것처럼 완전무결하지 않다.
‘혹시 미완성 보패인인가?’
눈동자가 붉고 어딘지 초점이 안 맞는 느낌도 든다.
저런 눈빛은 일종의 섭혼술에 당한 자들이 보이게 마련이다.
백발 여인이 싱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마워, 언니. 언니 덕분에 나 이렇게 살아남았어.”
“정, 정아…….”
“그래도 내 이름은 기억하네? 언니가 그렇게 우릴 버리고 간 걸 고마워해야 할지. 원망해야 할지 모르겠어.”
“정아, 나는…….”
“만약 언니가 우릴 버리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백발 여인이 곰곰이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역시 그럼 난 언니 손에 죽었겠지?”
“……!”
“언니는 가차 없었으니까. 늘 말했잖아. 짓밟아야 살아남는 거라고. 언젠간 언니가 우리를 전부 죽이게 될 거라고.”
“…….”
“그래서 헷갈려. 언니가 우릴 버리고 떠난 걸 고마워해야 할지. 원망해야 할지. 언니는 뭐가 답이라고 생각해?”
말을 마친 여인이 성큼 다가섰다.
예홍이 움찔거리고는 뒤로 물러났다.
그 모습을 본 백발 여인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어머, 설마 겁먹은 거야? 내가 언니를 죽이기라도 할까 봐?”
“정아.”
“아! 죽이긴 죽여야 하는구나? 언니가 그랬잖아? 다시 볼 땐 내가 언니를 죽일 수 있어야 할 거라고.”
“그땐…….”
예홍이 입을 열자, 백발 여인이 손을 들어 올리고는 제지했다.
대신 박꽃처럼 하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 이제 할 수 있어. 언니를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해졌거든.”
스스윽!
순간 백발 여인의 신형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예홍 앞에 나타났다.
예홍의 동공이 커지는 순간,
뚜카앙!
금속성이 울리면서 백발 여인이 훌쩍 튕겨나갔다.
어느새 적비연이 예홍의 앞을 막아서며 흑천검을 뽑아 든 것이다.
날렵하게 물러선 백발 여인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적비연을 보았다.
“호오? 당신은…… 흑천련주?”
하지만 적비연은 대답 대신 등 뒤에 선 예홍을 향해 말했다.
“홍. 정신 차려라. 저 여자는 보패인이다.”
“정아가 보패인……?”
예홍이 중얼거리는데, 마을 중심을 에워싸듯 젊은 무인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했다.
대략 스무 명 정도였는데, 하나같이 백발에 붉은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그들을 둘러본 예홍이 말을 더듬었다.
“너, 너희들……!”
충격에 휩싸인 예홍의 표정과 달리 백발의 젊은 무인들은 시종 무감하고 싸늘한 표정이었다.
그들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숨이 막힐 정도로 강렬했다.
곧이어 여기저기에서 부상을 입은 무인들이 마을 중심으로 몰려들었다.
“련주님! 놈들에게 지원군이……!”
“궁주님! 놈들이 더 있었습……!”
앞다투어 소리치던 무인들이 순간 할 말을 잃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들을 가장 놀라게 한 광경은 바로 고엽풍이 목이 잘려 나간 채 쓰러져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묘하게도 백발의 무인들이 흑천련주와도 기 싸움을 하고 있다는 게 걸렸다.
적비연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모두들 물러나라.”
조용히 뇌까리듯 뱉은 음성이었지만, 공력이 담겨 있어서인지 모두의 귀에 또렷하게 박혀들었다.
그러자 정이라 불린 백발 여인이 피식 웃었다.
“누구 마음대로? 여기서 당신들은 모두……!”
말을 이어가던 정은 순간 헛바람을 삼키고는 적비연을 보았다.
적비연의 전신에서 무형지기가 뻗어 나와 그녀를 친친 얽어매고 있었다.
시종 담담하던 그녀의 표정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절대강자!
천해경을 앞둔 자신조차도 감당이 안 될 만큼 강하다.
흑천련주가 이렇게 강한 자였나?
저벅……!
적비연이 한 걸음 나섰다.
단 한 걸음이었지만, 그 움직임이 주는 울림은 컸다.
백발의 무인들이 저마다 흠칫거리며 경계 태세를 갖췄다.
그런데 적비연 뒤에서 예홍이 불쑥 끼어들었다.
“련주님.”
“……?”
“저에게…… 맡겨주십시오.”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냐.”
“부탁드립니다.”
예홍이 고집을 부리며 성큼 나섰다.
적비연의 눈빛에 이채가 서렸다.
지금껏 예홍이 자신의 말을 거역한 적이 있던가?
예홍을 돌아보니 어느새 그녀의 표정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모종의 결심을 굳힌 것이리라.
적비연이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
“감사합니다.”
“단, 다른 자들은 내가 나설 것이다.”
예홍도 그것마저 말리진 못했다.
그녀는 백발 무인들을 대표해서 나타난 정에게만 집중했다.
정이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물었다.
“언니가 날 상대하겠다고?”
“오래전 있었던 일에 대해 사과하는 의미에서.”
예홍이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정이 피식 웃었다.
“재미있네. 그럼 그 사과 받아볼까? 그 전에…… 뭣들 하니? 쓸어 버려.”
정의 입에서 차가운 명령이 떨어졌다.
순간 백발 무인들이 살기를 일으키며 정사 무인을 가리지 않고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크아악! 놈, 놈들을 죽여라!”
“백발부터 상대한다! 저놈들부터…… 으악!”
정신없는 삼파전이 일어났다.
정사의 구분이 무의미했다.
백발 무인들과 정파 무인들, 그리고 흑천련 무인들이 어지럽게 뒤섞이면서 난잡하게 싸웠다.
하지만 이 역시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
그중에서도 수장을 잃은 정파 무인들은 빠르게 그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다음은 흑천련 무인들.
하지만 적비연이 본격적으로 전투에 개입하기 시작하자, 전세가 급변했다.
그가 이형환위의 신법으로 여기저기 번쩍번쩍 나타날 때마다 빛줄기가 벼락처럼 꽂혔고, 어김없이 백발 무인들이 비명과 함께 튕겨 나갔다.
천해경을 앞둔 백발 무인들이었지만, 이미 천해지경에 이른 적비연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백발 무인 중 하나가 소리쳤다.
“흑천련주부터!”
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백발 무인들이 합격진을 구사하면서 적비연을 중심으로 에워싸기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여유를 되찾은 흑천련과 무림맹 무인들은 다시 서로를 향해 사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고엽풍의 사망으로 인해 무림맹 무인들은 전의를 상실해서 달아나기 바빴다.
“놈들을 쫓아!”
월희마녀 사예린은 도망가는 정파 무인들을 악착같이 쫓으며 처리했다.
정말이지 죽고 죽이는 전장이 따로 없는 상황.
한편 아수라장이 된 현장에서 예홍은 정을 빤히 바라보았다.
피비린내를 머금은 싸늘한 공기가 뺨에 부딪쳤다.
“그들이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니?”
예홍의 질문에 정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깔깔거렸다.
“뭐야? 이제 와서 생각해 주는 척이야? 정말 왜 이럴까? 어울리지 않게!”
파앙!
순간 정이 바닥을 차고는 쏜살같이 날아갔다.
쩌어엉!
고막을 찢어 버릴 듯한 금속성이 울리면서 예홍의 신형이 그대로 튕겨 나가 담장을 부수며 나뒹굴었다.
콰당탕탕!
쿠르르!
민가의 안마당까지 굴러간 그녀가 비틀거리며 섰다.
하지만 정은 예홍이 대응할 틈조차 주지 않으려는 듯 신형을 하늘로 띄웠다.
곧이어 그녀가 강맹한 기운을 일으키며 예홍을 압살해 버릴 듯 떨어져 내렸다.
슈아아아악!
“헛!”
예홍이 헛바람을 삼키고는 몸을 날렸다.
정면으로 막으려다간 십중팔구 목숨을 잃으리라.
꽈자자자자앙!
마침내 정이 떨어지면서 민가 한 채가 통째로 갈라졌다.
지붕이 주저앉았고, 벽이 갈라졌으며 땅바닥에 밭고랑 같은 강기의 흔적이 새겨졌다.
정말이지 그곳에 사람이 서 있었다간 형체도 알아보지 못했으리라.
정이 예홍을 돌아보고는 생글 웃었다.
“쥐새끼처럼 잘도 피하네?”
“후욱, 후욱……!”
거칠게 몰아쉬는 숨결에 따라 하얀 입김이 훅훅 뿜어져 나왔다.
정이 뿜어내는 살의 때문에 피부가 따가울 지경이다.
오한이 든 것처럼 전신이 춥다.
그래, 그날도 이만큼이나 추운 날이었다.
진눈깨비가 흩날리던 날.
예홍은 사혈곡을 나섰다.
목숨을 던질 각오로.
어차피 그곳에 머물러 봐야 매일같이 목숨을 던져야 했으니까.
저벅…… 저벅……!
정이 예홍을 향해 걸어왔다.
“뭐 해? 언니. 덤벼야지. 그러다가 내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고 끝나 버릴걸?”
예홍은 정을 보며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많이 변해 버렸다.
사혈곡 무인들이 선을 죽였을 때, 그 시신 앞에서 가장 구슬프게 울었던 아이.
그 아이가 지금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 냉랭한 표정으로 자신에게 살기를 쏘아내고 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어째서 우리의 운명은 이처럼 가혹한 것일까?
하지만 상념에 오래 빠질 순 없었다.
“뭐, 고분고분 죽겠다면 말릴 생각은 없지만!”
앙칼지게 소리친 정이 바닥을 차며 무서운 속도로 치고 들어왔다.
쉬이이잇!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예홍이 반사적으로 몸을 눕혔다.
스팟!
배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면서 검신이 지나치자, 예홍이 몸을 비틀며 검을 사선으로 베어 올렸다.
쒸에엑!
까앙!
검신이 서로 부딪치며 불꽃을 터뜨렸다.
예홍은 무아지경 속에서 적비연으로부터 전음을 들었다.
[누구라도 네 목숨을 노린다면, 진정을 다해 대해라! 그게 적이든, 한때 동료였든! 최소한 나에 대한 예의로!]
찰나 그녀의 심장이 쿵 뛰었다.
죽어가던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적비연.
그래, 가주님을 생각해서라도 허무하게 목숨을 잃을 수는 없으리라.
쒸에에에엑!
무의미하게 휘두르던 검에 의지가 담기기 시작했다.
‘정, 미안하지만…… 고분고분 죽어줄 수는 없겠어!’
따앙!
금속성과 함께 불꽃이 터졌다.
그 순간 예홍은 보았다.
허공에서 새하얀 솜털 같은 것이 나리는 것을.
‘눈인가……?’
하긴 눈이 내릴 계절이 되긴 했다.
하지만 왜 하필 지금일까?
이것 또한 운명일까?
예홍은 그대로 몸을 낮게 숙이며 매섭게 검봉을 내질러갔다.
명백한 살검!
쒸이이잇!
‘들어갔다!’
이번 공격으로 정은 심장이 뚫리리라.
정은 자신을 앞에 두고 방심한 대가를 치르게 되리라.
그런데…….
’탁.
다음 순간 그녀의 눈동자는 찢어질 듯 커졌다.
놀랍게도 그녀의 검신이 정의 손가락에 가볍게 잡힌 게 아닌가?
정이 피식 웃었다.
“그래도 지금은 좀 언니다웠어. 언니는 예전부터 가차 없었으니까. 그 누구든, 언제든 죽일 수 있었지. 가장 의지하고 지냈던 장용 오라버니를 죽일 때처럼.”
“……!”
쿠파아앙!
정의 지풍을 맞은 예홍이 그대로 포탄처럼 날아가면서 쓰러진 집채에 처박혔다.
“쿨럭, 쿠웨엑!”
내상을 입은 탓인지 피가 한 움큼 토해졌다.
자박자박…….
정이 가까이 다가왔다.
예홍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녀 뒤로 펼쳐진 회색빛 하늘에서 하얀 눈발이 흩뿌려지고 있었다.
정이 가녀린 손을 뻗어 하늘에서 떨어지는 하얀 눈을 받았다.
“재미있네. 언니가 우릴 떠난 그날도 이렇게 눈이 내렸는데 말이야. 기억하지? 이제 언니가 영원히 떠날 차례인가 봐. 이렇게 함박눈이 내리는 걸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