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41화 (242/301)

241. 그날처럼 눈이 내리고

새벽부터 추적추적 내리던 비는 이제 진눈깨비로 변해 있었다.

예홍은 어둑한 동굴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 지긋지긋한 사혈곡을 벗어나기로 작심했다.

어차피 이 지옥 같은 곳을 탈출하다가 죽으나, 머물러 있다가 누군가의 손에 죽으나 매한가지가 아닌가?

어느 쪽을 선택하든 최악이다.

그렇다면 그간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기적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냥 지겨워졌을 뿐이다.

동혈 입구로 가까이 걸어 나오자 번을 서는 무인 둘이 보였다.

원래 동혈 밖에서 번을 서고 있어야 할 두 사람이 진눈깨비를 피해 동혈 안으로 들어온 듯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최악이다.

어느 쪽이든.

그래서 기척을 죽일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이왕이면 번을 서는 무인들이 오늘만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면 좋았겠지만.

하늘도 버린 자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저벅저벅……!

예홍은 거리낄 것 없이 걸음을 옮겼다.

“으음?”

아니나 다를까, 번을 서던 무인 중 한 명이 뒤를 돌아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넌 뭐냐? 이 시간에 왜 나온 거냐?”

“이년 봐라. 꽤 반반한 계집이잖아?”

다른 무인이 눈을 빛내며 입맛을 다셨다.

그러자 먼저 돌아본 무인이 혀를 찼다.

“자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괜히 저런 년 잘못 건드렸다가 뒷감당을 어찌 하려고. 위에서 가만있지 않을걸?”

“뭐, 얼마나 건드리느냐에 따라 다르지 않겠어? 순결만큼은 지켜주면 되는 거고.”

“하여튼. 생각하는 꼬락서니하곤.”

무인 둘이 예홍을 앞에 두고 음담패설을 일삼으며 낄낄거렸다.

예홍은 일부러 한쪽 옷자락을 팔꿈치까지 흘러내리도록 했다.

꿀꺽.

무인들이 마른침을 삼키고는 그녀를 보았다.

“계집아, 배고프냐?”

“이거라도 주랴?”

무인 하나가 품에서 육포 한 조각을 꺼내 흔들었다.

우습게도 그 육포를 보자 잊었던 배고픔이 생각났다.

꾸르륵.

배 속에서 천둥이 친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큰지 무인들에게도 들렸다.

“크하하! 이년 보게. 진짜 배고픈 모양이네.”

“자, 이리 와라. 너 오늘 운 좋은 줄 알아라. 마침 이 아저씨가 육포를 꽤 가지고 있는 날이니까.”

“대신 육포 말고 다른 것도 줄 테니 같이 먹어라.”

“이 사람도 참. 큭큭큭.”

두 사람의 눈이 욕정으로 번들거렸다.

예홍은 마치 홀린 사람처럼 저벅저벅 다가가서 육포를 쥐려고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무인은 얼른 손을 빼내며 한 걸음 물러났다.

“잠깐. 그 전에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잖아? 꿇어앉아라. 육포가 먹고 싶으면.”

털썩.

예홍이 명령에 복종하듯 무릎을 꿇고 앉았다.

무인 둘이 서로를 마주 보고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럼 날도 추우니 어디 따뜻하게…….”

무인 하나가 주섬주섬 바지의 말기끈을 풀고는 아래로 내렸다.

그 순간 예홍은 품에서 나무 조각을 꺼내는 것과 동시에 재빨리 위로 내질렀다.

박달나무 파편이었는데, 매일같이 갈고 갈아서 칼날처럼 날카로워진 상태였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번을 서는 무인은 박달나무 파편의 절반이 가랑이 사이로 파묻힐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푸욱!

“끄읍! 끄아아아악!”

무인이 그대로 고꾸라지며 데굴데굴 구르자, 옆에 서 있던 다른 무인이 대경실색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무, 무슨!”

차아앙!

하지만 예홍은 이미 비명 지른 사내의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아 들어 내질러가고 있었다.

따앙! 푸우욱!

“커억!”

목이 정확히 꿰뚫린 무인이 선 자세로 피를 한 움큼 토해내고는 쿵 무릎을 꿇었다.

“으그그그……!”

여전히 신음을 흘려대는 무인 위로 다른 무인이 쓰러지자 소리가 어둠에 묻혀 버렸다.

차악!

검신에 묻은 피를 털어낸 예홍이 무감한 시선으로 쓰러진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먼저 쓰러진 사내도 결국 의식을 잃어버렸는지, 마침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동혈 밖으로 나온 예홍은 고개를 들어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진눈깨비가 내리는 날.

저벅저벅……!

예홍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을 죽였지만, 두려움 따위는 느끼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지금껏 저지른 살인보다 가장 상쾌하고 가뿐한 마음이다.

그렇게 사혈곡을 얼마나 이동했을까?

‘기척……!’

누군가 자신의 뒤를 쫓는 것이 느껴졌다.

누굴까?

사혈곡을 지키는 무인들일까?

결국 누군가 비명 소리를 들은 걸까?

예홍은 커다란 바위 위에 올라가서 가만히 기다렸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궁금했다.

누가 자신을 쫓아오는 것인지.

어차피 어느 쪽을 선택하든 최악이니까 상관없었다.

“언니!”

놀랍게도 자신을 쫓아온 사람은 정.

네 살이나 어린 여자아이였다.

“네가 어떻게?”

“비명 소리에 깼어. 그런데 언니가 없어서. 걱정이 돼서 나와 봤어.”

“다른 아이들은?”

“깨어나지 않았어.”

예홍은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단지 누군가의 비명 소리가 특별할 게 없을 뿐이었을 테지.

또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의 손에 죽었나 보다 생각했을 뿐일 테지.

사혈곡은 그런 곳이니까.

언제 누가 누구의 손에 죽을지 알 수 없는.

신체의 오감을 극도로 예민하게 다듬어야만 하는 곳.

달콤한 잠에 빠졌을 때, 절친이 자신의 목숨을 노리진 않을까 의심해야 하는 곳.

오히려 비명 소리를 듣고 나서 더 안심하고 잠들었으리라.

누군가 희생되었을 테니, 자신의 차례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예홍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여기며 걸음을 옮겼다.

“언니!”

“……?”

예홍이 착 가라앉는 눈으로 정을 돌아보았다.

정이 두 손을 모아 쥐고는 물었다.

“어디 가려고?”

“떠날 거야.”

“그러지 마. 우릴 버리지 마.”

“같이 있어도 어차피 너희들은 내 손에 죽어. 난 누군가에게 죽어줄 생각이 없으니까. 알잖아? 장용이 나와 절친했지만, 결국 내 손에 죽었다는 걸.”

“그래도…… 우린 언니가 좋아. 우릴 떠나지 마. 언니마저 그렇게 가버리면 우린 어떡해?”

“여기선 누구도 의지해선 안 돼. 난 너희 부모가 아냐. 너희 부모도 너희들을 지키지 못했는데, 왜 날 의지하니?”

“언니…….”

“막지 마. 날 막으면 너도 죽일 테니까.”

“안 돼! 이러다 언니가 죽을지도 몰라!”

정이 얼른 뛰어와서 예홍의 앞길을 막았다.

예홍이 피식 웃었다.

“어차피 똑같아. 어느 쪽을 선택하든 최악이니까. 비켜.”

“안 돼. 나, 나는 언니를 이대로 보낼 수 없어. 언니는 강하니까 여기 남으면 죽진 않을 거야.”

촤아악!

“아악!”

사선으로 그어진 광휘.

곧이어 정의 비명이 터지는 것과 동시에 옷자락이 대각선으로 잘려 나갔다.

가슴을 가로지르며 대각선으로 새겨진 상처에서 피가 흘렀다.

예홍이 쓰러진 정을 보며 싸늘하게 읊조렸다.

“겨우 그 정도로 날 막으려고? 다음에 만나면 날 죽일 수 있을 만큼 강해지도록 해. 그때까지 네가 살아 있을지 모르겠지만.”

“언니…… 어차피 최악이라며…… 어느 쪽이든…… 그럼 우리와 같이 있자…… 응? 아무도 여길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알잖아? 우린 언니가 필요해. 왜 그렇게 가려는 거야? 죽을 걸 뻔히 알면서!”

“그건…….”

그때였다.

삐이이익!

날카로운 피리 소리가 협곡에 짜랑짜랑 울렸다.

이제는 수다를 떨 시간이 없다.

사혈곡의 무인들이 모두 예홍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리라.

“돌아가기엔 늦었구나.”

예홍은 정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바닥을 차고 몸을 날렸다.

거칠게 휘날리는 눈발이 그녀의 얼굴을 마구 때렸다.

* * *

쩡! 쩌엉! 쩡!

예홍은 눈앞에서 터지는 불꽃을 보며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과거의 생각에 사로잡혀서 움직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떠나려고 하냐고? 그날, 나는 정에게 뭐라고 대답하려고 한 걸까?’

촤촤아아악!

“크읏!”

옆구리와 허벅지가 베이면서 예홍이 신음과 함께 물러났다.

“헉, 헉, 헉……!”

예홍이 숨을 몰아쉬자, 정이 혀로 검신을 핥으며 다가왔다.

“언니, 우리와 함께 있었으면 좋았잖아. 그럼 나한테 이렇게 당하지도 않았을 텐데. 이럴 거면 도대체 왜 떠난 거야?”

탓!

쉬이이이익!

“헉!”

정의 검봉이 예홍의 이마를 찔러왔다.

스팟!

종이 한 장 차이로 예홍이 몸을 젖혔다.

코끝을 스치는 검신.

쉬까앙!

예홍이 검을 휘돌려 치자, 정의 몸이 흠칫거리며 물러났다.

예홍은 다시 매섭게 검을 휘둘러 갔다.

‘나는……!’

쉭쉭쉭쉭!

‘무엇을 위해서……!’

쉬이이이잇!

그녀의 검식이 점점 빨라졌다.

정의 표정에 이채가 서렸다.

‘빨라졌어!’

검이 점점 빨라지자 이내 범인의 눈으로는 좇기도 힘들 지경이 됐다.

예홍은 전신이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베인 상처가 따갑고, 뼈가 욱신거리고, 내공이 혈맥을 따라 미친 듯이 질주하면서 화끈거리는 통증이 일었다.

가슴은 불에 덴 듯 뜨겁다.

‘나도 알고 싶어! 내가 무엇을 위해서 떠난 건지!’

쉬이이이잇!

점점 빨라지는 검.

마침내 의식이 저 먼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렇게 무아지경 속에서 검을 휘두르는 와중에 전신의 솜털마저 곤두서게 만드는 살검이 매섭게 짓쳐들었다.

쉬이이이잇!

정이 내지른 검봉이 정확히 예홍의 목을 노렸다.

‘아, 끝이야.’

이번 공격은 도저히 막을 수 없다.

찰나의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만 느껴진다.

기적처럼 사혈곡을 떠나 아사 직전에 만난 적비연.

그리고 단휘를 만나 티격태격 지내던 기억들과 오늘까지 겪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마침내 정의 검봉이 목선에 닿는 순간,

따아앙!

날카로운 쇳소리에 이어 격한 외침!

“홍! 어떻게든 살아!”

흠칫거리고 돌아보자 어느새 다가온 적비연이 피식 웃는다.

그 순간 예홍의 눈에는 흑천련주가 아니라 적비연의 얼굴이 보였다.

처음 자신을 만났을 때처럼 싱긋 웃어주던 그 얼굴.

그리고 또 한 명의 얼굴이 그 위로 겹쳐진다.

자신이 죽였던 남자.

장용.

그는 죽어가는 순간까지 자신에게 말했다.

어떻게든 살아남으라고!

순간 눈가에 습막이 찼다.

오래전 그날, 자신이 간절히 바라고 찾았던 것이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내가 원한 것. 내가 바라던 것.’

그래, 그건 결코 최악이 아니었다.

그저 희망을 찾아 발버둥 쳤던 거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부정의 화신이라 소리치지만, 그 누구보다도 긍정에 굶주려 있었다.

희망에 굶주렸던 자신은 그날 포기가 아니라, 용기를 내고 있었던 것이리라.

늘 최악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그건 결국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을 지키려던 방어기재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 또한 깨달음인가?

절망의 밑바닥에서 한 줄기 공력이 솟구쳐 오른다.

동시에 보이기 시작한다.

정의 검격에 녹아든 일말의 망설임이!

‘정, 너는 나를 위해 망설이고 있구나.’

그랬다.

정은 여전히…… 그때 그 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말은 표독스럽게 뱉고 있지만, 쏟아내는 살기 이면에는 망설임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 넌 그런 아이였지. 마음이 여려서 누구 하나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아이. 하지만 누구보다도 삶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아이. 너는 너대로 희망을 찾아 발버둥치고 있었구나.’

그리고 지금 너에게 남은 희망은…….

‘설마……!’

순간 눈을 부릅뜬 예홍이 정을 바라보았다.

정의 무감한 표정.

하나 침잠하게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 깊은 곳에서 외치는 소리.

그 오래전, 정이 자신에게 직접 전한 목소리.

“언니, 언젠가 내가 죽게 되면 언니 손에 죽고 싶어. 그럼 웃으며 떠날 수 있을 것 같아.”

아아, 누가 이 아이들에게 그런 비극을 안겼단 말인가?

성인이 되지도 않은 아이들이 하는 말이라곤 상상도 할 수 없는.

“언니, 그만 끝내자.”

현실에서 들려온 정의 목소리다.

찰나, 예홍이 비명 같은 외침을 내지르며 검을 뻗었다.

“으아아아아!”

뚜카앙! 푸욱!

금속성에 이어 섬뜩한 감각이 예홍의 손끝을 타고 전해진다.

이번 일격은 지금까지 그녀의 모습과 확연히 달랐다.

예홍이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들었다.

검신이 정의 가슴을 정확히 관통하고 있었다.

뎅그랑……!

정이 들고 있던 검을 떨어뜨렸다.

검신은 부러져 있었다.

정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우리의 희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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