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42화 (243/301)

242. 그날처럼 눈이 내리고

“정아!”

예홍이 쓰러지는 정을 얼른 받쳐 안았다.

정이 울컥 피를 토해내고는 예홍을 보았다.

생명이 꺼져가는 것을 느꼈다.

그제야 피처럼 붉던 정의 눈동자가 차츰 검은색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언니…….”

“정아. 미안해.”

“풋.”

정이 실소를 터뜨리더니 손을 들어 예홍의 뺨을 쓰다듬었다.

“우리 어때? 많이 강해졌지? 고마워, 지옥을 끝내 줘서.”

정의 눈길이 적비연과 싸우는 백발 무인들에게 향했다.

“다들 기억해? 우린 언니를 기억하는데…….”

“기억하고말고. 너희들 정말 강해졌어.”

“그런데 우린 질 것 같네. 결국 언니가 옳았어.”

“정아, 조금만 참아. 언니가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을…….”

“아냐. 최악을 선택한 건 결국 우리였어. 우리도 언니처럼…… 맞서 싸웠어야 했는데.”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마.”

“어차피 나는 최악이야. 오래전 그날 차라리 언니를 따라나섰더라면…….”

정의 말끝이 흐려졌다.

숨이 점점 가빠져 왔다.

무심히 내리는 함박눈이 정의 얼굴을 자꾸만 가렸다.

정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늘도 눈이 내리네. 헤어질 때가 되었나 봐.”

“정아!”

“기억해 줘. 다음에 눈이 내리면…… 내가 언니를 만나러 온…… 거니까.”

겨우 말을 마친 정의 고개가 힘없이 떨어졌다.

“정아!”

예홍이 절규하듯 외쳤다.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은 정은 금방이라도 두 눈을 뜨고 활짝 웃을 것만 같다.

‘그렇게 오래 지났는데, 어째서 너는 그때의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난 거니?’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아무것도 의지할 수 없던 그 시절.

어쩌면 자신도 정을 의지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차라리 그날 정에게 같이 떠나자고 했더라면.

하지만 시간을 되돌린다고 한들 그럴 수 있을까?

모든 게 불확실한 상황에서.

아니, 보다 죽음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결정일지도 모를 그 상황에서.

자신은 과감하게 죽음으로 함께 걸어가자고 손을 내밀 수 있을까?

벽력적가에 몸을 의탁하면서도 과거는 그저 그녀에게 지우고만 싶은 상처였다.

되찾아가기는커녕 떠올리기도 싫었던 곳.

하지만 정은 지금껏 자신을 기다린 걸까?

그 지옥을 끝내줄 유일한 희망이라 생각하며.

“아아아으.”

깨문 잇새로 신음 같은 울음이 터져 나왔다.

예홍은 정의 시체에 엎드려 울었다.

후회와 원망, 세상을 향한 증오가 가슴 속에서 용암처럼 솟구쳐 올라 뜨거운 눈물이 되었다.

정이 쓰러지자 백발 무인들의 표정에도 변화가 생겼다.

그들은 더욱 사납게 적비연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창창창창!

하나 적비연은 시종 담담한 표정이었다.

천해경의 경지에 오르고 나서 한층 여유가 생긴 그였다.

더욱이 백발 무인들은 앞서 상대해본 연리하와 하기룡에 비하면 한두 수 아래 수준.

초절정의 경지에서도 단 한 단의 차이가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느껴질 정도로 큰 법이다.

하물며 천해경과 초절정의 차이는 더하다.

지금으로선 마치 어른 한 명과 아이 스무 명이 싸우는 것만 같다.

따다다다다앙!

적비연이 흑천검을 휘둘러 백발 무인들을 물러나게 하자, 그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정이 쓰러진 후로 그들은 이미 모종의 결심을 굳힌 듯했다.

구오오오오!

순간 백발 무인들의 전신에서 뜨끈한 공력이 우러나오기 시작했다.

뭔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 적비연이 주변을 향해 소리쳤다.

“전원, 마을을 벗어난다!”

몇 남지 않은 정도인들을 공격하던 사예린이 흠칫거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확실히 백발 무인들의 기도가 변질되고 있었다.

뭐라 콕 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어딘지 위험한 기분이 든다.

남은 정도인은 대략 예닐곱 명.

마음 같아서는 전부 처리하고 싶지만, 련주의 명은 절대적이다.

‘칫, 할 수 없나?’

결국 사예린도 몸을 빼내자, 가까스로 살아남은 정도인들이 허겁지겁 달아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예홍마저 마을에서 벗어나자, 적비연이 남은 백발 무인들을 훑어보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너희들을 동정하지 않아. 홍은 운명에 맞서 싸웠다. 너희들은 운명에 순응했고. 그 차이가 지금의 너희들과 홍을 가른 것이다. 덤벼라. 홍을 생각해서 최대한 편안한 죽음을 선사해 주마.”

백발 무인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들의 눈동자가 점점 붉어지더니 이내 흰자마저 새빨갛게 변해 버렸다.

“으아아아!”

다음 순간, 백발 무인 하나가 포효를 내지르듯 달려들자, 다른 무인들이 일제히 허공을 가로지르며 적비연을 덮쳐 왔다.

적비연이 제일 먼저 달려드는 백발 무인을 향해 몸을 던졌다.

그 순간 시활안이 펼쳐졌다.

흑천검이 허공을 가로지를 때, 적비연은 적의 얼굴과 팔, 손등에 툭툭 불거져 나오는 핏줄을 보았다.

그리고 흑천검이 상대의 심장을 관통하는 순간, 검신을 타고 흘러나오는 폭기를 감지했다.

손끝만 스쳐도 태풍이 휘몰아칠 것만 같은 거친 기운!

-호신강기!

‘알고 있어!’

적비연이 단전에서 선천지기까지 동원하여 호신강기를 펼쳤다.

바로 그 순간,

꽈과과과과과아앙!

그야말로 천지가 격동할 만한 폭발이 일어났다.

마을에서 한참이나 떨어져 있던 사예린과 예홍은 두 눈을 부릅떴다.

마을 중심에서 반경 삼십여 장이 초토화되고 말았다.

백발 무인들이 동귀어진의 수를 쓴 것이다.

그들 스스로의 몸을 폭약으로 만들어 버렸다.

스무 명 정도가 적비연을 덮치며 터져 나가자 마을 중심에서 시커먼 연기가 버섯 모양으로 솟아올랐다.

“사부님!”

사예린이 바닥을 차며 달려갔고, 예홍도 뒤를 이었다.

‘가주님!’

두 여인이 도착했을 때, 마을 중심은 분화구 모양으로 움푹 파여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 옷이 아무렇게나 찢어진 적비연이 우뚝 서 있었다.

“맙소사…….”

사예린이 흔들리는 눈으로 적비연을 보았다.

예홍도 마찬가지.

두 사람은 적비연의 무위에 내심 경탄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얼마나 강하면 그 무시무시한 폭발에서 저리 멀쩡하게 살아남는단 말인가?

“괜찮으십니까?”

사예린이 묻는 말에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예홍을 보았다.

사예린이 지켜보는 관계로 적비연은 흑천련주의 입장으로 넌지시 물었다.

“자네,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배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을. 그보다 성장을 이룬 것 같군.”

“덕분입니다.”

예홍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확실히 예홍은 어딘지 달라진 모습이었다.

정을 비롯해 옛 동료들이 시신도 남지 않을 만큼 처참하게 죽었음에도 표정의 변화가 없다.

예전처럼 세상 끝날 것 같은 부정적인 소리도 하지 않는다.

아마도 내면의 무언가가 변했으리라.

한편 사예린은 한숨을 내쉬고는 주변을 훑어보았다.

열기가 어찌나 뜨거웠던지 백발 무인들의 사체는 남아나지도 않았다.

먼저 쓰러진 사체들도 불에 타 버려 시커멓게 그을려진 상태.

마을은 초토화됐다.

“도대체 이자들 뭐였을까요? 연리하와 관계된 자일까요?”

“그렇겠지. 아마 만통지가 말한 보패인의 한 부류겠지. 다만, 미완성으로 보인다.”

“미완성인데도 이 정도의 경지라니. 연리하 같은 괴물이 이보다 많으면…….”

사예린이 말끝을 흐렸다.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리지 않는가?

적비연이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읊조렸다.

“뭐가 됐든 부딪쳐 나갈 수밖에.”

* * *

옆구리에 자상을 입은 광성대주는 이따금씩 비틀거리면서도 최대한 빠른 속도로 달렸다.

그는 지금의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무림오절인 고엽풍이 그리 간단히 죽어 버리다니?

갑자기 나타난 백발 무인들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처음에는 흑천련의 또 다른 조직이리라 짐작했다.

한데 그들은 흑천련과도 대립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만약 제삼의 조직이 존재하는 거라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맹에 반드시 보고해야만 하는 상황!

하지만 그는 마을을 벗어나 채 십 리도 가지 못해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길목을 막고 선 남자.

팔 하나를 잃었는지 옷자락이 눈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누, 누구요?”

광성대주가 걸음을 멈추고는 경계했다.

그의 뒤를 바짝 따르던 광성대원 여섯 명이 저마다 검파에 손을 얹고는 눈을 날카롭게 치떴다.

“글쎄. 상대의 이름을 물을 때는 본인 소개부터 하는 게 예의가 아닐는지.”

광성대주는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느껴지는 기도는 평범하다.

하지만 상대가 반박귀진의 무위에 오른 자라면 자신이 감지한 기도는 무의미하다.

다행이라면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광성대주가 포권하며 말했다.

“나는 광성대…….”

슈걱!

“어……?”

눈앞의 사내가 어느 틈에 자신의 곁에 선 걸까?

목을 스치고 지나간 서늘한 감각.

한 줄기 소름이 등골을 따라 쫙 퍼져나갔다.

광성대주가 눈을 부릅뜨는데, 옆을 지나친 사내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나는 연리하. 한때 흑천련주의 막내 제자였지. 지금은 아니지만.”

그 목소리를 끝으로,

피츗! 츄아아아!

광성대주의 목에서 피분수가 뿜어지면서 머리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너무나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기에 광성대원들은 입을 딱 벌린 채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연리하가 싱긋 웃었다.

“너희들 모두 알고 있겠지만, 아무도 여기서 살아 돌아가진 못해. 너희들은 흑천련과 사혈곡 아이들을 상대로 용감하게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해야 하니까. 뭐, 얌전히 죽어준다면 나로서도 수고를 덜 테니 고맙고.”

“이, 이 미친……! 죽엿!”

“으와아앗!”

광성대원 여섯 명이 일시에 살기를 뿜어내며 달려들었다.

순간 연리하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불나방이 따로 없네.”

연리하의 신형이 허공으로 솟구쳤다.

* * *

세상이 발칵 뒤집혔다.

파양현 인근 협곡에서 무림맹이 대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만 해도 이 정도까지 충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무림오절과 최정예로 구성된 광성대가 몰살당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전 강호가 꿈틀거렸다.

구파일방은 물론 각 지역마다 이름 좀 떨친다는 방파는 저마다 흑도 타도를 외치며 남창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역사에 남을 만한 대운집이었다.

그만큼 무림오절이라는 이름이 주는 영향력은 컸다.

실제 고엽풍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무림오절이라는 명성이 가지는 자존심의 문제였다.

게다가 사혈곡의 등장.

가후는 흑천련이 사혈곡을 키웠으며, 그곳에서 모종의 반인륜적인 사술을 통해 괴물을 만들어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뿐 아니라 고엽풍은 그런 괴물들마저 모조리 쓸어버리고 장렬하게 전사한 것으로 묘사됐다.

“이걸로 미완성작과 실패작은 흑천련의 소행이 되었고, 천림은 새로운 무공 수련법으로 우화등선을 앞둔 본 맹의 위인들이 되겠군. 확실히 자네는 무서운 자일세. 허허.”

창가에 선 맹주 허위청의 말에 가후가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미천한 재주를 부린 것일 뿐입니다.”

“만통지도 감쪽같이 속았을 터. 사혈곡까지는 그 역시 눈치채지 못했겠지. 이대로 정도인들이 계속 모이면 굳이 천림을 열지 않아도 흑도 세력을 몰아낼 수 있겠어.”

“흑천련을 만만하게 보시면 안 됩니다. 더구나 지금은…….”

가후가 말끝을 흐리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 뜻을 대충이나마 짐작한 맹주가 뒷짐을 지며 물었다.

“벽력적가가 신경 쓰이는 겐가?”

가후가 쓴웃음을 깨물었다.

차마 부정할 수 없는 질문.

확실히 벽력적가주가 신경 쓰인다.

흑천련 권역에 있다는 그가 도대체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

기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강호에서 가장 파란만장한 소문을 퍼뜨린 자가 바로 적비연 아니던가?

한데 이젠 그 소문마저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너무 조용한데…… 자신도 모르게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는 기분이랄까?

하긴, 아무렴 어떤가?

그가 정말로 흑천련과 손을 잡았다고 한들, 자신에게는 최후의 한 수가 준비되어 있지 않던가?

가후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뭐가 됐든 결국 부딪쳐 부수게 될 테니까요.”

“그렇지. 결국 그리될 테지. 흑도의 하늘이 곧 무너지리라.”

허위청이 창밖을 물끄러미 보았다.

* * *

“이제 곧 파양현에서 마중 나오는 배가 도착할 거예요. 흑천련주가 직접 나온다는군요.”

동소유의 말에 수황 무자강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흑천련주가 직접?”

“네, 한 가지 재미있는 말을 들었어요.”

“뭔가?”

동소유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흑천련주가 벽력적가주와 비무를 치르겠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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