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43화 (244/301)

243. 몸은 내가 차지한다!

“벽력적가주와 비무를 치르겠다고?”

“네.”

“흑천련주가 지금 벽력적가주의 상태를 모르는 모양이군.”

무자강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보다 벽력적가주에 대해 궁금했던 그였다.

도대체 어떤 자이기에 흑천련주의 제자들마저 아랫사람으로 거느리게 되었는지.

한데 벽력적가주는 처음 만난 순간부터 언제 깨어날지도 모를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게다가 묵검이 천상원주로부터 전서를 받은 후부터는 관 덮개도 닫아둔 채 부적까지 붙여 놓았다.

이대로라면 흑천련주가 눈앞에 나타나도 벽력적가주가 깨어날지 어떨지 알 수 없었다.

한데 돌아온 동소유의 대답이 가관이다.

“흑천련주가 오면 벽력적가주가 깨어날 거랍니다.”

“무슨 근거로?”

“글쎄요. 어쩌면 천상원주가 깨워주는 게 아닐까요? 현재 천상원주가 흑천련에 몸을 의탁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니까요.”

“과연. 그렇다면 말이 되는군.”

무자강이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벽력적가주가 깨어난다면 첫 비무 상대는 자신이 되어야 하리라.

물론, 적비연이 자신의 생각만큼 강한 자가 아니라면 굳이 비무를 치를 생각도 없다.

하나 투혈권왕이 진심으로 따른다던 이가 아니던가?

자신이 본 투혈권왕은 무위가 초절정의 후단에 오른 자였다.

그런 자가 따른다고 했으니 분명 절대고수의 영역에 오른 자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흑천련주가 일부러 비무를 치르기 위해 마중 나올 리도 없을 테고.

강한 자와 손을 섞어보고 싶은 것은 모든 무인들의 공통된 바람일 것이다.

“가서 전해라. 마중을 나오는 건 상관없지만, 적 가주가 깨어나면 첫 비무 상대는 본좌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아니, 전할 필요도 없겠군. 그 자리에서 본좌가 정하면 될 일.”

“맞는 말씀입니다.”

동소유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자강의 시선이 저만치 한쪽에 놓인 관으로 향했다.

“어쨌든 기대가 되는군. 벽력적가주. 드디어 깨어난 그를 보게 되는 건가? 소유.”

“네, 주군.”

“여의수룡창(如意水龍槍)을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여의수룡창.

물의 기운을 가득 품은 수황의 애병.

떨어지는 폭포의 수압으로 수만 년 세월 동안 갈고 다듬어진 현철로 만든 신병이기다.

수황이 여의수룡창을 꺼내 든다는 것은 전력을 다해보겠다는 뜻.

동소유는 그래도 조심하시라는 말을 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주인이 누군가?

장강의 주인이다.

물 위에서만큼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

설사 흑천련주가 오더라도 물 위에서만큼은 수황에게 한 수 접어야 하리라.

그런데 흑천련주가 마중을 나온다고 했다.

그 말뜻은 물 위에서 비무를 치르겠다는 것.

아마도 다른 이가 그 비무를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리라.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결국 그 바람에 수황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가 되었다.

‘흑천련주. 당신이 아무리 비무를 원한다고 한들, 수황께서 먼저 원하신다면 양보해야 할 거예요.’

동소유는 그렇게 속으로 뇌까렸다.

물론, 그녀가 적비연의 사정을 제대로 알았더라면 그 생각이 전적으로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겠지만.

어쨌거나 이런 이유로 운명의 수레바퀴는 적비연을 비롯한 주변인들의 생각과는 또 다른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 * *

강호에 알려진 소문과 달리 파양현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는 흑천련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이었다.

대당향처럼 마을이 초토화된 곳의 주민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흑천련 무인들을 더욱 신처럼 떠받들었다.

흑천련은 대당향의 마을 사람들에게 충분한 휴식처와 먹거리를 제공했고, 그러는 사이 최대한의 인력을 투입하여 마을 복구에 힘을 쏟았다.

이러한 과정을 지켜본 예홍은 사파의 또 다른 모습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사혈곡을 벗어나 벽력적가에 머물러 지낼 때만 해도 사파 무인들은 악인 그 자체라고만 생각했다.

편법으로 고강한 무공을 익혀서 약자를 괴롭히고, 민초들을 약탈하며 불의를 일삼는 집단들.

하지만 직접 와서 겪어보니 그들 역시 무림맹 무인들과 별로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오히려 앞에서 선한 척하며 뒤에서 호박씨를 까는 무림맹보다 낫다는 생각마저 든다.

게다가 사혈곡.

‘그곳이…… 흑천련 산하에서 관리되는 곳이 아니었다니.’

새롭게 안 사실이다.

물론 흑천련 산하 조직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다.

하지만 분명 어느 사파에서 관리하는 곳이라 여겼다.

그런데 사혈곡이 보패인을 만드는 곳과 연관이 있을 줄이야.

그렇다면 무림맹과도 관련되었단 말이 아닌가?

이쯤 되자 정말이지 치가 떨린다.

세상에서 제일 큰 도둑은 나랏일을 하는 도둑이라더니.

강호에서 가장 악랄한 조직이 무림맹일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정아, 얘들아. 지켜봐. 반드시 너희들의 복수를 해줄 테니!’

정은 주먹을 꽉 말아 쥐고는 부르르 떨었다.

확실히 예전과는 달라졌다.

아니, 엄청난 변화였다.

그녀를 아는 사람이 본다면 눈을 휘둥그레 뜰 것이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복수 따위는 꿈도 꾸지 않은 채 최악을 대비하기만 하던 성격이지 않았던가?

“여기에 있었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리면서 그녀 곁으로 만통지가 다가와 섰다.

예홍은 가볍게 목례했다.

“이것저것 물어봐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만통지는 그녀에게 사혈곡에 관한 정보를 최대한 입수하려고 했다.

그러다 보니 본의 아니게 취조하는 형태가 되었던 것을 두고 사과하는 것이다.

예홍이 만통지를 돌아보며 물었다.

“무림맹은 사혈곡을 흑천련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웠어요. 처음부터 그걸 노린 것이겠죠?”

“그럴 걸세. 이번에는 내가 가후에게 당했군. 사혈곡이란 곳이 존재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데 말일세.”

“무림맹으로서는 치부를 적에게 떠넘기고, 본인들은 명분과 결집을 이끌어냈으니 손해 본 장사는 아니네요.”

“그럴 테지.”

“하지만 어르신도 대단하십니다. 대당향에 어쩌면 보패인이 나타날 수 있다고 예견하셨잖아요?”

그랬다.

만통지는 대당향으로 적을 유인할 때, 가후가 어쩌면 보패인을 보낼 수도 있다고 예견했었다.

그래서 흑천련주인 적비연에게 직접 전투에 참가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만통지의 제안이었으니 적비연도 기꺼이 따랐다.

그런데 정말로 보패인이 나타난 것이다.

다만, 만통지의 말에 따르면 사혈곡 보패인은 미완성인 데다 어디까지나 무림맹이 치부를 가리기 위해서 소모성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소모성이라니…….

‘어떻게 사람의 목숨을……!’

그것도 한참 어린아이들을 납치해서 수년간 가지고 논 셈이 아닌가?

그 하나하나의 운명을 자신들 멋대로 휘두르다니!

다시 생각해도 용서하기가 힘들다.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다 때려 부수고 싶겠지? 하나 참고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하느니라.”

“무림맹이 주둔한 남창 분타로 강호 정도인들이 대거 몰려오고 있어요. 어르신은 그들을 물리칠 묘책이 있으신지요?”

“모르지.”

“어르신이 모르시면……!”

“전장에서는 무수한 변수가 난무하게 마련이다. 전체적인 그림을 그려보되 확신해서는 아니 된다. 내 입으로 자네에게 말하는 순간, 그건 모종의 확신으로 머릿속에 각인될 수 있네. 그래서 마지막까지 말을 아끼는 게 중요하지.”

“아…….”

“지금은 그저 자네 가주가 본신을 되찾길 기도하는 수밖에. 그 첫 단추가 잘 꿰어져야 다음 수순도 밟을 수 있지 않겠나?”

“그러고 보니 지금쯤 가주님은 본신을 되찾았을까요?”

“글쎄. 아마 이제 막 조우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거친 싸움이 벌어질지도 모르겠구나.”

“…….”

“불안한가?”

“솔직히 말씀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지.”

“불안해요.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아요. 하지만…….”

“……?”

예홍이 주먹을 꾹 말아 쥐고는 고개를 들었다.

“믿어보려고 합니다. 가주님을. 그리고 제 믿음을.”

“믿음을 믿는다라.”

만통지가 만면에 가득한 미소를 지으며 예홍을 돌아보았다.

“어려운 한 걸음을 마침내 내디딘 걸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다른 자가 들으면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를 말들.

하지만 두 사람은 서로 통하고 있었다.

만통지가 먼발치를 보며 말했다.

“그럼, 자네는 자네대로 맡은 바 최선을 다해야 할 테지?”

“물론이죠. 손님 접대하고 오겠습니다.”

“부탁하이.”

예홍이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전각을 내려갔다.

만통지는 난간에 서서 먼발치에서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뿌연 먼지 속에서 녹색 깃발을 휘날리며 다가오는 자들.

그들은 바로 투왕 추야성이 이끄는 녹림채 무인들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그들의 머릿수가 어마어마했다.

마침내 녹림채마저 흑천련과 합류하는 순간이었다.

* * *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태양이 파양호를 붉게 물들였다.

노을을 담은 파양호는 마치 피를 가득 머금은 듯했다.

그리고 핏빛 호수면을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배 한 척.

선두에는 적비연과 은하란이 꼿꼿하게 선 자세로 전면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한 척의 거선을 응시했다.

수황이 타고 있는 은황선.

정말이지 웬만한 범선도 우스워 보일만큼 거대한 배.

붉은 노을을 담은 호수 위에서 태산처럼 묵묵히 움직이는 은황선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적비연은 맞바람을 맞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결전을 치르기에 더 없이 좋은 날씨군.”

-클클클. 이 순간을 기다렸다.

“이제 주인이라고 부르지도 않는구나.”

-흥! 네놈이 곧 날 주인이라 부르게 되겠지.

적비연이 쓴웃음을 머금고는 가만히 은황선만 응시했다.

마침내 배가 은황선 가까이에 다가갔을 때, 적비연이 훌쩍 몸을 날려서 갑판 위로 올라섰다.

그 뒤를 이어서 사예린과 은하란, 엽강호를 비롯한 호신위들이 따랐다.

투혈권왕의 호신위들은 이번에 모두 련주의 호신위로 승격되었다.

은황선 갑판은 어지간한 연무장보다도 훨씬 넓었는데, 선미에는 계단 위에 태사의가 놓여 있었고, 수황 무자강이 흰색 피풍의를 두른 채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은빛 수룡이 장대를 휘감아 오르는 형상을 지닌 여의수룡창이 잡혀 있었다.

척 보기에도 함부로 범접하기 힘든 상승의 기운이 물씬 풍겨져 나왔다.

그 아래로는 오랜만에 보는 묵검과 단휘 그리고 동소유도 보였다.

“어서 오시오. 련주.”

마침내 무자강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호의도 악의도 없는 담담한 목소리.

적비연이 희미하게 웃고는 답했다.

무자강은 모르겠지만, 적비연은 벌써 그를 두 번째 대하는 중이었다.

그러다 보니 왠지 모를 반가움마저 느꼈다.

“만나서 반갑소, 총채주.”

“한데 묘한 소리를 들었는데…… 벽력적가주와 비무를 치르시겠다고.”

적비연이 저도 모르게 실소가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어지간히도 궁금했던 모양이군.’

보자마자 본론부터 꺼내다니.

하긴, 수황의 입장에서는 그럴 만도 하리라.

극적으로 손을 맞잡게 된 흑천련과 벽력적가다.

한데 이제 와서 비무를 치르는 게 이해되지 않을 터.

적비연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심각한 건 아니오. 오래전부터 약조가 되어 있던 비무일 뿐이외다.”

“그렇소? 하나, 벽력적가주는 지금 죽은 건지, 잠이 든 건지 며칠째 깨어나지 않고 있소만.”

“곧 깨어날 거요.”

“뭐,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수황께선 비무를 방해하지 말아주시오.”

“일단 적 가주가 깨어나는 걸 확인하는 게 우선 아니겠소?”

수황이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적비연이 은하란에게 눈짓을 하자, 그녀가 귀식검 한 자루를 적비연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다른 한 자루를 들고 적비연이 들어있는 관으로 다가갔다.

자신이 전서를 보내서 지시한 대로 관 덮개에는 부적이 붙어 있었다.

은하란은 관 옆에 귀식검을 거꾸로 박아둔 다음 부적으로 손을 가져갔다.

수황은 궁금한 게 많은 표정이었지만, 묵묵히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기만 했다.

마침내 은하란이 부적을 손으로 잡았다.

그녀가 적비연을 가만히 응시했다.

적비연은 귀식검을 콱 움켜쥐고는 두 눈에 힘을 주었다.

부적을 떼어내는 순간, 둘 중 한 사람의 혼이 본신을 차지하게 되리라.

-이거 살 떨리는구만! 크크크!

‘미안하지만 나는 내 몸을 양보할 생각이 없다.’

-글쎄, 그건 두고 보자고!

적비연과 극마가 서로 말을 주고받는 동안 갑판 위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수황을 비롯한 수로채 무인들은 이 상황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지만, 대략의 분위기로만 보아도 다음에 펼쳐질 상황이 꽤나 중요하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저 여자가 신녀의 딸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흥미로운 상황이군.’

수황이 가만히 지켜보는 가운데, 마침내 은하란이 부적을 낚아채다시피 잡아뗐다.

팟!

찰나, 흑천련주의 몸이 휘청거렸다.

제삼자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지만, 신녀의 피를 이어받은 은하란의 눈에는 본신을 향해 맹렬히 달려오는 적비연과 극마의 혼이 생생하게 보였다.

두 혼이 동시에 소리쳤다.

-몸은 내가 차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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