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6. 삼파전
해가 완전히 저물고 달이 떴다.
달과 별을 담은 호숫가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고, 그 한가운데에 태산처럼 우뚝 솟은 은황선에서는 화려한 연회가 펼쳐졌다.
삐이이이, 파앙!
연신 폭죽이 하늘로 솟구쳐 올라가며 불꽃을 터뜨렸다.
정사가 파양호를 사이에 두고 대립한 상황.
부싯돌에서 일어나는 불꽃조차 조심해야 할 시기에 대놓고 폭죽이라니.
모르는 이가 보았더라면 혀를 내두르며 쌍욕을 했으리라.
하지만 은황선을 한 번이라도 보고 들은 자라면 그런 욕지거리를 함부로 뱉을 수 없다.
수황 무자강이 타고 있는 거선.
누가 감히 파양호로 배를 몰고 들어와 은황선에 접근할 것인가?
단언컨대 호수로 흘러드는 순간 저승강에 발을 담는 것과 마찬가지가 되리라.
때문에 수로채는 오히려 선상 연회를 더욱 화려하게 열었다.
일종의 과시이자 유인책이다.
어디 우리를 칠 수 있으면 도전하라.
하나 강물에 뜬 순간 목숨을 걸어야 하리라.
그렇기에 무림맹 무인들도 은황선에서 거한 술판이 벌어졌다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쉽게 접근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은황선이 선상 연회를 여는 척하고 뒤통수를 치지나 않을까 걱정되어 더욱 철통같은 경계만 다질 뿐이었다.
“정말 꼼짝도 하지 않는군요.”
적비연 옆으로 다가선 단휘가 난간 너머 남서쪽의 먼발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할 필요가 없을 테니까. 어차피 무림맹은 지금 명문정파들을 결집시켜 인해전술까지 생각하고 있는 마당이니.”
“처절한 전쟁이 되겠네요. 역사상 전무후무한.”
“그럴 거다.”
“괜찮을까요? 이러면 곧 가주님이 흑천련과 손을 잡은 게 사실처럼 될 텐데요. 그럼 장사의 본 가가 위험에 빠지는 게 아닌지…….”
“만통지의 계책을 받아들여서 전서를 보내두었으니 괜찮을 거야.”
“그렇군요.”
적비연이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그러고도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마침내 단휘가 적비연을 돌아보고는 씨익 웃었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너무 기쁩니다, 가주님.”
“그리 오래 떨어져 있지도 않았잖아.”
“그래도 가주님의 본신으로 이렇게 뵙고 대화를 나누는 건 정말 오랜만이지요.”
“그렇긴 하지.”
“그럼요. 제가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린 줄 아십니까? 저는 혹시나 가주님이…….”
“홍월루의 기녀 때문이냐?”
“역시 가주님은 잊지 않으셨을 거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이제 본신도 되찾으셨으니, 조만간 홍월루로 가서 제게 약속하신 최고의 기녀를…….”
따악!
“으앗! 왜 때리십니까?”
“넌 맞을 짓을 골라서 하니까. 묵검 반만 닮아라. 네 충심이 고작 홍월루 기녀 수준이라니.”
“쳇! 지금 홍월루 무시하시는 겁니까? 그래도 장사에서 제일 잘나간다고요! 어? 혹시 그럼 서호 주변에는 거기보다 더 물 좋은……?”
“어째서 이야기가 그렇게 흐르는 거야?”
“어어? 한 대 더 때리면 저 난간에서 뛰어 내립니다요! 말리지 마세요! 진짭니다!”
적비연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려버렸다.
사실 알고 있다.
단휘가 왜 이렇게 실없는 소리를 해대는지.
긴장한 것이다.
그럴 수밖에.
단휘는 아직 한참 어리다.
얼마 전 사절단과 첩자의 임무를 맡아서 흑천련에 잠입한 것이 그의 인생에서 최대 임무였으니 말 다한 게 아닌가?
한데 무림 역사 수십, 수백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커다란 전쟁이 눈앞에 도사리고 있다.
긴장이 안 된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래서 농을 던져 분위기를 환전시키는 거다.
다만 적비연은 단휘만큼 긴장되진 않았다.
그의 긴장을 이해하면서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도 생겼다.
이런 전쟁을 겪은 적은 없지만, 그동안 쌓은 무수한 경험 덕분에 삶의 응용력이 높아진 것이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물속에 가라앉은 바위처럼 담담하고 묵묵히 중심을 잡을 수 있는 여유.
그건 특별한 이능이라고 할 수 없는 연륜과 노회함일 뿐이었지만, 그 어떤 능력보다도 중요한 깨달음이기도 했다.
확실히 전쟁의 무게는 일상에서 느끼는 것과 다르기에 두 사람은 금방 다시 침묵에 빠져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죽으리라.
지금 내 옆에서 웃는 사람이 언제 싸늘한 주검이 되어 있을지 알 수 없는 일.
웃음 속에도 가릴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며 있을 수밖에.
그 침묵을 깬 사람은 뜻밖에도 흑천련주 태청강이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태청강의 모습을 한 극마였다.
그는 앞서 치른 격전 때문에 허리와 왼쪽 어깨를 천으로 둘둘 감고 있었다.
그가 부루퉁한 표정이 되어서는 적비연과 단휘 사이에 불쑥 끼어들었다.
“나는 승복할 수 없다, 주인.”
적비연이 극마를 힐끔 돌아보고는 피식 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너는 이제 내 노예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소멸될 수 있는 존재가 된 거지. 물론 내가 죽어도 넌 소멸되는 거고.”
“본좌는 마선의 경지까지 올랐던 몸이란 말이다!”
“세상이 많이 달라졌다는 거겠지. 혹시 알아? 천 년 전에 비해 지금 우화등선의 자격이 많이 높아졌는지.”
“끄응.”
극마가 신음처럼 침음을 흘리고는 난간을 콱 움켜쥐었다.
그러다가 흠칫거리고는 얼른 주변을 살피면서 혹시나 수황이 지켜보고 있진 않은지 경계했다.
자칫 난간을 힘주어 잡다가 부수기라도 하면 그 배에 미친놈이 생난리를 칠 게 뻔했으므로.
긴 한숨을 내쉰 극마가 적비연을 슬쩍 돌아보았다.
확실히 적비연은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실력이 늘었다.
천해경의 경지에서도 한참 앞서가는 수준이 되었다.
인간의 한계를 훌쩍 초월한 시간을 겪은 적비연이었다.
그로 인해 얻은 이능인 공천지권위라든가, 시활안 같은 것들이 적비연을 더욱 높은 수준으로 끌어 올려 주고 있다.
반면 극마는 적비연과 혼이 완전히 분리되면서 시활안 같은 이능을 전혀 사용하지 못했다.
그게 패인의 일부이기도 했다.
한동안 시활안에 익숙해져 있던 그가 갑자기 이능을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아무래도 선뜻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더구나 천해경의 경지에 이른 절대고수들의 싸움이 아니었던가?
바람에 나부끼는 이파리 하나에도 승패가 갈라질 수 있는 팽팽한 접전에서 시활안의 유무는 큰 차이를 만들었다.
어쨌거나 결과는 나왔다.
극마가 승복하지 않는다고 해도 달라질 건 없다.
문제는 시활안이 아니더라도 과연 자신이 적비연을 이길 수 있을지 장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말로는 승복할 수 없다면서도 내심 적비연의 무위를 인정하는 극마였으니까.
“이제부터 어쩔 거냐? 주인.”
“넌 지금부터 흑천련주야. 단, 내 복심이기도 하지. 네가 승복하든 말든 혼의 사슬이 내게 귀속되어 있으니까.”
“하나 마나 한 말은 할 필요도 없다!”
적비연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흑천련주로서 내 지시를 따르도록. 굳이 흑천련 무인들 앞에서 내게 복종하겠다고 공표할 필요는 없어. 오히려 혼란만 일어날 테니.”
“그럼 주인은? 무림맹을 먹겠다는 건가?”
“먹든가, 부수든가. 둘 중 하나가 되겠지.”
적비연이 눈을 빛내며 나직이 읊조렸다.
극마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툴툴 거렸다.
“세상 참 알 수 없다니까. 정파 무인이 정파를 망가뜨리겠다고 이 난리를 치다니.”
“정사가 중요한가? 뜻이 맞지 않으면 함께 길을 갈 수 없는 게 당연한 이치 아닌가?”
“하긴. 나도 무림맹이 하는 짓거리를 보면 신물이 나니까. 주인 뜻에 동참해주지.”
적비연은 피식 웃었다.
어차피 극마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무조건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다.
혼의 사슬이 연결된 이상 적비연이 마음만 한 번 잘못 먹어도 그는 이 세상에서 소멸될 수 있었기에.
그렇다고 굳이 그 사실을 인지시켜줄 필요는 없을 터.
옆에서 듣고 있던 단휘가 재미있다는 듯 극마를 보았다.
“가주님이 이따금씩 말씀하신 극마가 바로 당신이군요?”
“그래서? 설마 애송이 너도 날 무시하려는 거냐?”
극마가 어금니까지 드러내며 으르렁대자, 단휘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물러났다.
“하하. 그럴 리가요. 그냥 이렇게 보니 반가워서…….”
“반갑긴. 개뿔!”
극마가 툴툴거리며 고개를 홱 돌렸다가 오히려 인상을 더욱 찡그렸다.
마침 갑판 저만치에서 하얀 피풍의를 두른 무자강이 저벅저벅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제길, 난 이만 가겠다. 저놈은 왠지 재수가 없다니까. 내가 싸움에서 진 것도 다 저 재수 없는 놈 때문이야. 그리고, 주인. 이 전쟁에서 절대 지면 안 돼. 나는 질 싸움은 안 한다고.”
“걱정 마. 내가 살아 있는 한 현 무림맹은 몰락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살아남으라고!”
“누가 들으면 엄청 날 생각해 주는 줄 알겠군.”
“당연하지! 네놈…… 아니, 주인이 죽으면 나도 죽으니까 별수 없잖냐!”
그렇게 극마가 멀어지고 나니, 무자강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다가왔다.
“무슨 대화를 그리 나눴소?”
무자강의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는 이번 비무를 통해 적비연의 무위에 내심 경탄했다.
지상도 아닌, 선상에서 이 정도의 위력이라면 지상에선 더하리라.
이건 순수하게 무인으로서의 호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별말 아니었소. 그저 이번 비무에서 패배를 받아들일 테니 대외비로 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뿐.”
“후후. 하면 나도 입을 다물어주어야겠군.”
무자강의 말에 적비연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그렇게 해주시면 고맙겠소. 나 또한 시끄러운 걸 원치 않기에.”
“그런 사람이 그리 강호에서 유명해지셨소?”
“어쩌다 보니 그리 됐소.”
“하긴. 나 같아도 적 가주처럼 많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가만있지 못했을 거요.”
무림맹의 만행에 대해 대략이나마 전해 들은 무자강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내 뜻을 이해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오.”
“하나 우리의 비무가 오늘로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오.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모를 사연이 있는 것 같은 데다, 오늘은 여러모로 일이 많으니 그만 물러선 거였소. 때가 되면 반드시 나와 비무를 치러주시오. 적 가주라면 언제든 장강의 귀빈으로 대우할 테니.”
“약속하오.”
적비연이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무자강이 파양호 건너편에 운집한 불빛을 보며 물었다.
“그래서 작전은 있소? 저 무림맹을 상대할 만한. 내 듣기로는 명문정파가 총집결한다고 하던데.”
어디 명문정파뿐인가?
이름 좀 있다 싶은 지방 방파들조차도 남창으로 몰려든다는 소문이 자자하다.
정말이지 사상 유래 없는 대전이 될 터였다.
“만통지께서 책사로 나서줄 것이오. 이쪽에서도 귀 채와 녹림채까지 합류했으니 해볼 만한 싸움은 될 것이오. 단, 어느 한쪽이든 이번에 궤멸당하면 재기가 불가능해질 테지만.”
무자강이 강바람이 일렁이는 하늘을 보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하면 무림의 절반이 사라지는 것인가?”
* * *
“무림의 절반이 사라지지만, 살아남은 절반이 무림을 온전하게 장악할 테지.”
만통지의 말에 추야성이 솥뚜껑만 한 손바닥으로 가슴을 탕탕 때렸다.
“나만 믿으시오! 사라지는 쪽은 필시 무림맹 쪽이 될 테니!”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닐세. 전서를 통해 들었겠지만, 지금 무림맹에는 보패인이 존재해. 그들이 이번 전쟁에서 핵심이 될 걸세. 보패인의 동향을 살피는 게 승패의 요점이 될 테지.”
“해서 어쩔 생각이오? 좋은 계책이 있소? 그 보패인간들의 동향을 어찌 살피시려고?”
“총 열 곳.”
“열 곳?”
“수중 다섯 곳, 지상 다섯 곳. 이렇게 모두 열 곳을 공격할 걸세.”
갑작스러운 습격 작전에 추야성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예홍도 마찬가지.
하지만 추야성은 곧 파안대소를 터뜨리며 말했다.
“좋아, 좋아! 자고로 우리 사파는 먼저 쳐야 제 맛이지! 전쟁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고 했소!”
“열 곳을 동시다발적으로 습격했을 때, 보패인이 어디에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 먼저 알아볼 걸세. 이번 싸움은 당장 무언가를 얻어낼 목적은 아니니 적당히 치고 빠지기만 해도 돼. 어디까지나 보패인의 동향을 살펴볼 생각으로 진행되는 절차니까.”
“알겠소. 하면 흑천련 무인들과 본채가 지상 공격을 감행하게 되겠군. 수로는 그 재수 없는 수왕이 맡을 테니까.”
“그럴 걸세.”
그러자 지금껏 듣고만 있던 예홍이 슬쩍 나서며 물었다.
“그럼 습격은 언제 시작하는 거죠?”
만통지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두 사람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제 날이 밝는 대로 곧장 습격할 것이야. 그러니 다들 지금부터 준비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