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 소향무적(所向無敵)
“날이 밝는 대로 총공격을 감행할 거라고 했소?”
수황 무자강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적비연을 보며 물었다.
옆에 있던 단휘도 놀라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다그치듯 말했다.
“정말입니까? 가주님. 전 이제 막 도착했는데요?”
“어디 전쟁이 네 사정 봐주면서 일어난다더냐?”
“하, 하지만…… 이건 이쪽에서 먼저 움직인다는 뜻이잖아요?”
“그렇지.”
그러자 듣고 있던 무자강이 다시 물었다.
“그건 만통지의 계략이오?”
“그렇소. 대략의 이야기는 들어서 알고 계실 거요. 아무래도 만통지는 보패인의 움직임을 이번 총공세를 통해 알아보려는 것 같소.”
“그럼 열 군데를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해서 보패인이 어떻게 나올지 보겠다는 거요?”
“아마도. 보패인이 얼마나 되는지, 어느 정도 피해를 입으면 활용할 것인지, 보패인의 무공 수위는 정확히 어느 정도인지. 그 모든 걸 대략이나마 파악하려는 의도로 보이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소? 단 대주가 말했다시피 우리는 이제 막 파양호에 도착한 참인데.”
“거기에 거한 선상 연회까지 열었지요. 그러니 무림맹이 방심하기에 딱 좋은 시기가 아니겠소?”
“그야 그렇지만…….”
“그렇다고 실제로 선상 연회에서 귀 채나 흑천련이 정말 술을 마신 것도 아니고.”
적비연의 시선이 아직까지도 선상에서 술판을 벌이는 사람들에게 향했다.
그랬다.
은황선뿐만 아니라, 인근의 모든 배 갑판에서는 거한 술상이 차려져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술과 푸짐한 음식을 마음껏 즐기고 있었다.
한데 술을 마신 게 아니라니?
누군가 그 말을 들었다면 당연히 이상하게 여겼으리라.
하지만 적비연의 말은 사실이었다.
실제로 갑판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수로채나 흑천련 무인들이 아니었기에.
그들은 대당향 마을 사람들처럼 인근 주민들이었다.
이번 계책을 위해 만통지는 주민들을 모아서 선상에서 연회를 베풀어 준 것이다.
이건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었다.
무림맹이 보기에 정말로 선상에서 연회가 벌어진 것처럼 연출할 수 있었고, 전쟁으로 인해 나빠진 민심을 흑천련에 호의적으로 되돌릴 수도 있었다.
앞서 무림오절인 고엽풍과 별동대 광성대를 섬멸한 것은 덤이었다.
적비연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새벽까지 술판을 벌인다면, 당장은 경계를 삼엄하게 펼친 무림맹도 동이 트는 순간부터 방심할 수밖에 없을 거요.”
당연한 말이다.
적이 밤새도록 술을 마신 게 사실로 확인된 셈이니, 동이 트는 순간 모든 긴장이 풀어지리라.
“그리고 우린 바로 그 순간을 노려서 총공세를 감행하는 거요. 지금쯤 파양현 분타에서도 수로채 환영을 위한 연회가 한창일 거요. 물론, 거기도 인근 주민들을 위한 연회지만.”
단휘가 손뼉을 짝 마주치고는 말했다.
“과연! 적을 교란하고 민심까지 얻는다라. 만통지가 괜히 천재라고 불리는 게 아니로군요.”
“나는 그것보다 당신이 더 놀랍소.”
무자강이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적비연과 단휘가 무슨 소리냐는 듯 돌아보자, 무자강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당신은 지금까지 장사에 있었던 것 아니었소? 그러다가 관에 실려 이곳까지 왔소. 한데 어찌 그 모든 사정을 이렇게 세세히 파악하는 거요?”
“아…… 그건 뭐, 장사로 가기 전에 만통지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기 때문이오.”
적비연이 대충 둘러댔지만, 무자강은 선뜻 납득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로서는 적비연이 도대체 어느 틈에 사파 권역을 종횡무진하고 또 장사까지 돌아갔으며, 왜 이제야 다시 파양호로 온 것인지 하나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다만 수로채의 성격상 그는 더 깊이 따지지는 않았다.
“뭐, 뭍에서 일어나는 일이야 그렇다 치고. 해서 우리는 어딜 맡으면 되겠소?”
“남기향(南矶鄕)으로 가면 정박해 있는 배가 열 척이 있을 거요. 그리고 남쪽으로 약 스무 척의 배들이 두 조로 나뉘어 경계를 맡고 있을 텐데 그들을 모두 맡아주시면 되겠소.”
“모두 서른 척. 전멸시켜도 상관없소?”
“물론이오.”
“별일 아니군. 하면 적 가주와 련주께선?”
“배 두 척을 따로 내어주면 나와 흑천련주가 각각 남기향 북쪽과 남쪽에 상륙해서 다른 길로 치고 들어갈 거요.”
“남은 다섯 곳은 녹림과 파양현 분타에 남은 무인들의 몫이겠군.”
“그렇소.”
무자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그럼 이제 슬슬 준비해야겠군. 보패인이라…… 궁금하군.”
적비연은 방심은 금물이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잠깐 손을 섞어봤지만, 수황은 확실히 강하다.
게다가 꼼꼼한 성격까지.
방심할 사람이 아니다.
과연 수황과 보패인이 선상에서 싸우면 결과는 어떻게 나올까?
일대일의 싸움이라면 수황이 이길 수도 있으리라.
하나 보패인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면…….
‘뭐, 일단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야겠지.’
속내를 갈무리한 적비연이 무자강에게 주의를 주었다.
“이번 공격은 보패인의 동향을 살피는 것이 주목적이오. 그러니 무리해서 적진 깊숙이 들어갈 필요가 없소. 적들이 주둔한 장소를 섬멸하는 것으로 만족하면 되겠소. 단,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언제든 물러서도 좋고.”
“그럴 일은 없을 거요.”
무자강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 * *
날이 밝아오고 있었다.
파양현 분타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전진 배치된 백호대.
막사 밖으로 나와서 번을 서고 있던 무인들이 저마다 팔을 뻗으며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아이고, 삭신이야. 나이가 드니 이젠 날씨가 조금만 추워져도 앓는 소리가 난다.”
“거참, 형님도. 이제 마흔을 넘겼으면서 무슨 약한 소리를 하십니까?”
“이놈아, 너도 마흔 넘겨봐라. 기분부터 다르다.”
“뭐, 기분은 다를 것 같긴 하네요.”
“그나저나 사파 놈들은 밤새 술판을 벌였는데, 우린 오히려 철통같은 경계나 서고 있고. 이게 뭐 하는 짓이라냐?”
“뭐, 별수 있나요? 대주님 지시니까 따를 수밖에요.”
“대주님 지시는 무슨. 총군사님 지시겠지.”
“우리 같은 아랫사람에겐 그거나 그거나죠.”
젊은 무인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이제 나이 마흔 줄에 들어선 무인이 코를 킁킁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냄새가 솔솔 나는 걸 보니 아침 짓나보다. 난 그만 들어가 볼 테니 마무리 잘하고 와라.”
“벌써요? 아직 경계령이 풀리지도 않았잖아요.”
“얀마. 밤새도록 지켰으면 됐지. 사파 놈들이 퍼 마신 술 냄새가 여기까지 진동하는 마당에 미쳤다고 그놈들이 여길 쳐들어오겠어? 내 보기엔 총군사님이 고 궁주님 돌아가시고 나서 지나치게 긴장하셨다니까.”
“쩝, 그건 그런 것 같아요.”
젊은 무인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꾸했다.
자신들이 천하사대지자로 손꼽히는 가후의 뜻을 헤아리기는 어렵겠지만, 이번만큼은 가후가 지나치게 조심한다고 느꼈다.
생각해 보라.
흑천련에 수로채와 녹림채가 어제 합류했다.
한데 합류하자마자 곧바로 무림맹을 칠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나?
먼 길을 달려와서 지쳐 있으니 좀 쉬기도 해야 할 테고, 오랜만에 만나서 뜻을 모았으니 연회도 베풀어야 할 거다.
그런데 경계령을 내리다니.
확실히 이번에는 좀 지나친 면이 없지 않다.
게다가 날이 뜨고 나서도 경계를 유지하라니?
이런 불만은 비록 이 두 사람만 가지는 게 아니었다.
오죽하면 백호대주조차도 탐탁찮은 목소리로 명을 내렸을까?
“그러니 대주님도 이해해 주실 거다. 난 그만 들어갈 테니 너도 대충 마무리하고 좀 쉬어라. 어차피 아무도 안 온다. 걔들이 미쳤다고 밤새 술 퍼 마시고 여길…….”
“네네, 알겠습니다요. 어서 가서 주무십쇼. 사파 놈들보다 형님 잔소리가 더 무섭습니다.”
하지만 그는 곧 그 말을 후회하고 말았다.
“어어?”
막사 안으로 들어가려던 중년의 무인이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는 먼발치를 응시했다.
그 시선을 따라 젊은 무인도 고개를 돌렸다.
“또 왜요? 어서 들어가서 눈이나 붙이시…… 헉!”
젊은 무인이 말을 꺼내다 말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방의 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구름먼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구름 먼지를 이끌며 달려오는 한 사내.
웬만한 어른보다 머리 두어 개는 더 얹어야 할 만큼 커다란 키에 집채만 한 덩치!
“설, 설마…… 저자가 투왕?”
“저, 저 미친 것들이……! 진짜로 술 처먹고 여길……!”
그 순간 막사에 비상종 소리가 격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뎅뎅뎅뎅!
밤새 뜬눈으로 경계를 섰던 무인들이 막 잠에 빠져들다가 부랴부랴 병장기를 챙기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투왕 추야성은 진을 친 막사 바로 앞까지 다다라 사자후를 외치고 있었다.
“크하하하! 이 무림맹 애송이들아! 투황의 주먹을 받아라아!”
“우와아아아아!”
녹림채 무인들이 하늘도 떨쳐 울릴 만큼 거대한 함성을 내지르며 노도처럼 밀려왔다.
* * *
“오늘 저녁까지 경계를 하라고?”
무림오절이자 현 무림맹 장로회주 편무량이 미간을 팍 구기고는 되물었다.
보고를 올린 무인이 고개를 조아리고는 답했다.
“예, 가후 총군사가 그리 말했다고 합니다.”
“허 참,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녹림과 수로채가 어제 저녁 무렵에서야 합류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랬습니다.”
“흑천련은 손님 응대로 연회를 베풀며 시간을 보냈다고 했지?”
“예, 정찰 결과 그렇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우린 밤새도록 경계를 강화했고.”
“그렇습니다.”
“그런데 쉬지도 말고 오늘 저녁까지 계속 경계를 유지하라?”
“…….”
무인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자신이 총군사의 뜻을 전달하긴 했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다.
상황이라는 것을 무시하고 무조건 경계만 강화한다고 될 일인가?
무엇보다 전쟁은 효율적으로 진행해야 하건만.
“총군사가 경험이 적다 보니 무리한 명을 내리는구나.”
편무량은 코웃음을 쳤다.
그렇잖아도 자신이 이곳까지 나와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현재 편무량은 무림맹에서도 정예에 속하는 정협단(正俠團)을 이끌고 파양호가 보이는 호숫가 객점에 머물고 있었다.
일종의 전진 기지인 셈이었다.
객점 두 곳을 통째로 빌려서 총 이백 명이나 머물고 있는 중.
‘이 나이에 내가 여기서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군.’
편무량이 내심 떠오른 불만을 속으로만 삼키고는 손을 휘저었다.
“고 궁주가 죽은 이후로 가 군사가 너무 예민해졌어. 오늘 저녁에는 본진으로 돌아가서 내가 맹주께 직접 건의를 해봐야겠군. 단원들에겐 대충 휴식하라 일러두게.”
“하면 경계를 유지하라는 총군사의 말씀은…….”
“정협단주.”
“예, 회주님.”
“자네는 밤새 선상 연회를 열었던 자들이 술에 찌들어서 이곳에 나타날 거라고 생각하나?”
정협단주가 쓴웃음을 삼켰다.
불가능한 일이다.
설사 그들이 미쳐서 이곳에 오려고 해도 먼저 남기향에 정박한 배들과 정찰선들을 지나쳐야만 한다.
한마디로 수로채가 작정하고 총공격을 동시다발적으로 감행하지 않는 한 이곳으로 적이 상륙할 리는 없다.
정협단주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말했다.
“수하들에게 휴식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그래. 싸움도 충분히 쉬어야 가능한 법일세. 두려움에 떨어 바짝 긴장만 해선 싸울 수가 없는 법이지.”
“옳으신 말씀입니다.”
“그만 가보게.”
“그럼.”
정협단주가 고개를 숙이고는 일어났다.
편무량은 수염을 쓸어내리며 내심 투덜거렸다.
‘가후, 자네가 무림맹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싶어 한다는 건 진즉 알았지만, 세상 모든 것엔 단계라는 게 있는 거라네. 이리 서둘면 실수하게 마련이지.’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가후가 결코 실수한 게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수하 하나가 달려와 급보를 전한 것이다.
“비조선 한 척이 상륙했습니다! 그, 그곳에…… 벽력적가주와 무인들이 타고 있었습니다!”
“벽력적가주? 벽력적가주가 그곳에 나타나? 그래서?”
“그, 그것이…….”
“말하라.”
수하가 새파랗게 질린 안색으로 보고했다.
“경계를 서던 스무 명을 순식간에…… 전멸시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