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48화 (249/301)

248. 소향무적(所向無敵)

콰앙!

편무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탁자를 내려쳤다.

순식간에 탁자 한쪽이 정확히 그의 손바닥 모양으로 부서져 나갔다.

그의 공력이 얼마나 심후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였다.

“경계를 지키던 무인 스무 명이 죽다니! 도대체 벽력적가주가 왜……!”

격분하여 소리치던 편무량이 지끈거리는 이마를 쥐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벽력적가주라면 무림맹에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질 만하지 않은가?

공을 세운 벽력적가를 오히려 장사에 고립시켰으니 무림맹에 호감을 가질 리가 만무하다.

“멍청한 가 군사 같으니라고!”

편무량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른 이가 들었다면 혀를 내두르리라.

천하사대지자 중 한 명으로 알려진 가후가 아닌가?

한데 그런 가후를 보고 멍청하다니.

하지만 편무량은 상황이 이리 된 것에는 가후의 책임이 크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그는 벽력적가를 고립시키는 전략에 대해서는 반대했다.

벽력적가가 갑자기 떠오르긴 했지만, 그를 사파와 엮는다는 것은 증거도 부족하고 무리수가 있다는 판단이었다.

물론 오로지 그런 뜻으로만 반대한 것은 아니다.

가후의 영향력이 점점 커져가는 상황에서 벽력적가가 급부상한다면 적당하게 견제하는 역할을 해주지 않을까 기대한 면도 없지 않다.

어쨌거나 그럼에도 가후는 벽력적가를 철저하게 고립시키고 오히려 사파와 손을 잡은 세력으로 몰아갔다.

그렇잖아도 벽력적가의 갑작스러운 부상이 마음에 들지 않던 명문정파들은 가후의 뜻에 적극 동참했다.

이러니 벽력적가주가 가만히 있겠는가?

‘나라도 화가 나서 뒤통수를 칠…….’

가만.

하지만 이건 달리 해석할 수도 있는 문제가 아닌가?

애초에 벽력적가가 가후의 말처럼 뒤통수를 치기로 작정한 거라면?

가후의 모함이 아니라, 정말로 벽력적가주가 흑천련과 내통한 게 사실이라면?

‘뭐지? 인과관계가 어떻게 된 거지?’

편무량은 한 손으로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생각에 잠겼다.

과연 적비연은 무림맹에 분노해서 흑천련과 손을 잡은 것인가? 아니면 가후의 말대로 애초에 흑천련과 손을 잡고 무림맹을 적으로 삼은 것인가?

‘아니지.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렇다.

지금 중요한 것은 가후의 말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인과관계가 어떻든 간에 벽력적가주가 정말로 흑천련과 손을 잡고 무림맹을 친 상황이다.

그렇다면 가후의 말에 힘이 실릴 수밖에 없다.

게다가 오늘 저녁까지 경계를 강화하라고 했는데도 자신은 가볍게 넘기는 바람에 이 사달이 났다.

“젠장! 상황이 좋지 않군!”

편무량이 저도 모르게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보고를 올린 무인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회주님! 현재 오십 명을 현장으로 급파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할까요?”

“가만있어 봐라! 생각을 좀 정리해야겠다.”

무인이 입을 다물고는 초조한 심정으로 편무량을 응시했다.

지금 벽력적가주가 객점으로 오는 중인데도 생각을 하겠다니?

어찌 저리 태연하단 말인가?

내심 답답했지만 무인은 감히 재촉하지 못했다.

편무량이 누군가?

무림오절 중 한 사람이다.

비록 앞서 무림오절 중 한 사람인 고엽풍이 적의 손에 죽었지만, 홀로 흑천련이 만든 괴물을 전부 쓸어버리고 흑천련주와 맞서다가 장렬히 전사하지 않았던가?

물론 실제 상황은 전혀 달랐지만, 무림맹의 모든 무인들은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 역시 마음 한편으로는 편무량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다.

흑천련주나 수황 무자강이 나타난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벽력적가주가 아닌가?

근래에 그에 관한 소문이 많아졌지만, 어디까지나 소문일 뿐이다.

또한 소문은 부풀어지게 마련.

경계를 지키던 무인 스무 명이 모두 죽었지만 기습에 의한 것이다.

무림오절 편무량이 직접 나선다면 제 아무리 적 가주라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한편 편무량은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 내가 적 가주를 막아야만 한다. 막지 못하면 가 군사의 권위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겠지. 그의 말대로 적의 습격이 일어났고, 적 가주가 흑천련과 손을 잡은 것도 사실이 됐으니.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정의단(正意團)도 데려올 걸 그랬나?”

애초에 가후는 정의단도 함께 끌고 가는 것이 어떻겠냐는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거절한 건 자신이었다.

뭐, 가후도 적극 권장하진 않았던 것이 사실…… 가만!

‘설마 가 군사가 일부러……?’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편무량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하면서도 언뜻 스치듯 떠오른 가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가후는 철두철미한 자다.

곰 같은 표정을 지으며 인자한 척하지만, 그 속에는 여우 수십 마리가 들어찬 자다.

교패와 혈조야귀를 제 손바닥에 놓고 가지고 놀듯이 다루던 자가 아니던가?

한데 이번에는 적이 공격을 해올 수도 있다고 언질하면서도 강하게 주장을 뒷받침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적이 공격해 올 수 있으니 오늘 저녁까지 방비해 두라는 정도였다.

정협단과 정의단을 데리고 가라고 말하면서도 강권하진 않았다.

“일선에서 물러나신 지 오래되신 만큼 감각을 되찾으실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정의단과 정협단을 모두 거느리고 가시지요?”

가후의 말이었다.

말투는 정중했지만 그 뜻을 되짚어보면 명백히 자신을 무시하는 언사였다.

일선에서 물러난 골방 늙은이 취급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거기에서 자신이 덥석 두 단을 모두 거느리겠다고 하면 다른 이들이 보기에 면이 서지 않는 것은 자명한 일.

해서 거절했다.

이백 명의 정협단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아니, 단까지도 필요 없고 대를 이끌고 가도 된다고 말했다.

그래서 결국 정협단만 데리고 온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가 군사…… 설마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자신이 견제하고 있다는 사실은 진즉 알고 있었을 자다.

하면 자신의 실수를 이끌어 내서 장로회의 영향력을 최소화시킬 음모를 꾸밀 만도 하지 않은가?

‘가만, 가만…… 그럼 고 궁주가 죽은 것도 어쩌면…….’

편무량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생각할수록 말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의심은 점점 커져만 간다.

만약 편무량이 평범한 무인이었다면 이렇게까지 의심하지 않았으리라.

하지만 그가 누군가?

길고 긴 인생을 살면서 산전수전을 다 겪은 노인이다.

여든이 훌쩍 넘은 나이에 장로회주의 자리까지 꿰찬 자다.

무림맹에서 칼밥을 먹으며 잔뼈가 굵어진 자.

가후의 내면에 불여우가 수십 마리 있다면, 편무량의 가슴에는 능구렁이가 수십 마리 똬리를 틀고 있다.

그리고 그 능구렁이들이 지금 경고를 내린다.

진정한 적은 내부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후가 슬쩍 봐둔 터에 스스로 땅을 파고들어온 셈이 되었다고.

“제기랄.”

실수다.

잠깐의 자존심을 굽히고 가후의 말대로 방비를 철저히 했어야 했다.

만약 자신이 여기서 적 가주에게 패한다면 가후를 견제할 자는 이제 존재하지 않으리라.

생각은 길었으나,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침내 편무량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가자! 적 가주를 막아야겠다! 무림오절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 줄 때가 됐구나! 전원 대비를…….”

“회주님!”

편무량의 말을 끊으며 또 다른 수하가 열린 문으로 뛰어 들어왔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돌아갔다.

“무슨 일이냐?”

“적, 적 가주가 객점까지 쳐들어왔습니다!”

“뭐야? 대체 몇 명이나 되기에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전혀 제지를 못했단 거냐!”

“그, 그것이…… 열, 열 명입니다.”

“뭣이?”

편무량이 기가 차서 입을 딱 벌렸다.

열 명이라니?

지금 고작 열 명을 막지 못해 이 사달이 났단 말인가?

정협단 오십 명이?

그러는 사이 창밖에서 거친 고함 소리와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마구 울려왔다.

편무량과 정협단주가 재빨리 창가로 달려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과연 관도에는 적비연을 비롯한 몇몇의 무인이 정협단에 둘러싸여 있었다.

장삼이 피에 젖어 얼룩덜룩했지만 상처 하나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그들이 흘린 피는 아닌 게 분명했다.

‘정, 정말로 열 명……!’

보고자의 말대로 적비연은 딱 아홉 명을 대동하고 이곳까지 쳐들어온 것이다.

묵검과 단휘, 엽강호와 한사, 현청과 임송화, 그리고 정예 세 명을 더 데리고 왔다.

편무량이 눈이 뒤집혀 물었다.

“저들이 전부 벽력적가의 무인들이냐?”

“아닙니다. 일부는 흑천련주의 호신위들로 파악됐습니다!”

수하의 보고에 편무량과 정협단주의 표정이 팍 일그러졌다.

정말로 가후의 말대로 적비연이 흑천련과 손을 잡은 것이다.

“흥!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용케도 여기까진 온 모양이다만, 노부를 너무 우습게 봤구나!”

말을 마친 편무량이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창밖으로 몸을 훅 날렸다.

그가 허공을 가로질러 능공허도를 펼치면서 적비연을 향해 곧장 날아가더니 묵직하게 발길질을 했다.

파아앙!

기습적인 공격에 적비연이 손을 뻗어 막아내면서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그 반동으로 훌쩍 물러나며 중심을 잡은 편무량이 눈썹을 추켜세우며 소리쳤다.

“벽력적가주가 어찌 사파 나부랭이들과 손을 잡았다는 건가? 돌아가신 선친이 이를 알면 땅을 치고 통곡할 노릇이로다!”

“누구신가 했더니 장로회주님이셨군요. 이렇게 만나서 반갑습니다.”

적비연이 손을 털고는 포권을 취했다.

편무량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적비연을 보았다.

자신을 알아볼 줄은 몰랐다.

혹시 사전조사를 통해서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안 걸까?

하지만 적비연은 편무량을 잘 알고 있었다.

세간에서는 무림오절이자 맹의 장로회주로 존경받고 있었지만, 그의 사생활은 사실 굉장히 추잡했다.

그가 무림맹 일선에 머물고 있던 시절, 수하의 아내를 겁탈하고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수하를 먼 곳으로 좌천시킨 적도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장로회주가 된 이후로는 맹의 요직을 원하는 이들에게 막대한 뇌물을 받고 월권행위를 심심찮게 행하곤 했다.

그런 이유로 편무량은 종종 가후와 반목하곤 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두 사람의 대립각은 더욱 날카로워질 뿐이었다.

적비연이 이러한 사실을 빤히 알고 있는 이유는 아상의 기억과 그를 호위하던 무사의 기억을 모두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상 역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편무량을 탐탁찮게 여기곤 했다.

마침 정협단주가 경공을 펼쳐 편무량 옆으로 내려섰다.

편무량처럼 매끄러운 움직임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허공답보를 보일 만큼 순후한 내공을 자랑하고 있었다.

적비연이 피식 웃고는 툭 던지듯 물었다.

“정협단주인가? 혹시 그자도 뇌물을 받고 자리에 앉혀준 거요? 나이 들어 아직도 권력욕을 놓지 못하고 있으니, 사람의 욕심이라는 게 참 끝이 없나 보오.”

“뭐, 뭣이? 네놈이 지금 무슨 헛소리를……?”

“왜 그러시오? 회주께서 남의 여인과 재물을 탐낸다는 건 만천하가 아는 사실 아니었소?”

“노오오옴! 뚫린 주둥이라고 함부로 지껄이는구나!”

파앙!

편무량이 격노한 음성으로 소리치며 빛살처럼 날아갔다.

쩌어엉!

순간 적비연과 편무량의 검이 서로 맞부딪치며 고막을 찢을 것만 같은 금속성이 울렸다.

적비연이 검을 맞댄 채 이죽거렸다.

“왜? 정곡을 찔렸나?”

“이, 이 미친……!”

편무량은 두 가지 이유로 놀랐다.

하나는 적비연이 자신의 치부를 낱낱이 알고 있다는 점.

다른 하나는 적비연의 무공 수위가 생각보다 고강하다는 점.

가후를 견제해 줄 세력으로 벽력적가에 힘을 실어줄까 했더니, 이래서야 가후보다 더한 놈이 나타난 격이 아닌가?

‘네놈을 죽여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구나!’

이렇게 된 이상 확실히 적비연을 처리하고 가후의 걱정이 기우였음을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아직도 건재함을 알려서 가후의 코를 납작하게……!

따앙!

서걱!

한 줄기 빛이 눈앞을 스쳤다.

그리고 세상이 기울어졌다.

츄아아아아!

목을 잃은 편무량이 통나무처럼 넘어갔다.

쿠웅!

정협단주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는 이 순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후, 후퇴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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