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49화 (250/301)

249. 손바닥 위에서 춤을

무림맹 남창 주둔지.

무림맹주를 비롯해 대회의실에 모인 무림맹 수뇌부는 충격으로 입을 열지 못했다.

그들 표정 하나하나가 인분이라도 씹은 것처럼 참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수뇌부들이 뿜어내는 기운만 본다면 이곳이 정말 무림맹 주둔지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과격하고 거칠었다.

범인이 이곳에 있었다면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해 질식하고 말았으리라.

그만큼 대회의실 분위기는 흉흉하고 암담했다.

분노와 좌절, 수치와 슬픔, 광기와 절망.

복잡한 감정이 진득한 기운에 뒤섞여 장내에 소용돌이치고 있었지만, 그 어느 것 하나 긍정적인 요소는 없었다.

무림맹에서 정예로 손꼽히는 백룡대가 전멸했다.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다.

어디 그뿐인가?

정협단, 적멸단(寂滅團), 추협단(追俠團), 질풍대(疾風隊), 천기대(天氣隊) 등 무림맹에서 내로라하는 조직이 모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살아남은 자가 전체의 삼 할도 채 되지 않는다.

무림맹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적당히 패해야 분노라도 가지지.

이래서야 싸울 엄두조차 나지 않는 상황이 아닌가?

남창으로 진군할 때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하지만 파양호를 사이에 두고 정사가 본격적으로 대립하자 연이은 패배가 보고되는 상황.

분위기는 완전히 반전되고 말았다.

콰앙!

부맹주 축일공이 탁자를 주먹으로 내려치고는 으르렁거렸다.

“놈들이 우리를 기만하고 속여서 뒤통수를 쳤소! 이대로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무엇보다 무림오절 중 한 분이신 편 회주님마저 당하셨소.”

“옳은 말씀입니다! 사기가 급전직하하고 있으니 어서 반전의 기회를 만들어야 할 겁니다! 벌써 큰 전투에서 삼연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연회를 여는 척하고는 기습을 하다니! 사파 나부랭이들이 생각할 만한 수법입니다!”

“겁쟁이들 같으니라고! 본때를 보여줍시다! 우리가 제대로 반격을 해야 남창으로 속속 모여드는 명문정파들의 사기도 올라갈 것이 아니겠습니까?”

“옳소!”

축일공을 시작으로 수뇌부들이 저마다 안건을 토해내며 격분했다.

그들은 말을 뱉어내면서도 울분을 참지 못해 가슴을 탕탕 치는가 하면, 어떤 이는 눈물마저 그렁거리고 있었다.

한참이나 격론이 오가는 동안에도 총군사 가후는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좌중을 응시하기만 했다.

그렇게 얼마나 떠들어댔을까?

화두를 던진 축일공이 가후를 슬쩍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총군사는 어찌 한마디도 하지 않으시오?”

그제야 모든 수뇌부의 시선이 총군사에게 향했다.

장내가 침묵에 잠겨들자 가후가 피식 웃었다.

그의 웃음에 몇몇 수뇌인사들이 격분하여 소리쳤다.

“총군사!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본 맹은 수많은 무인들을 잃고도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고 있소! 그 넋을 제대로 기리지도 못하는 판국에 웃음이라니!”

“기가 차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겠지만, 그래도 경솔한 행동이셨소.”

저마다 한마디씩 뱉어내는 것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가후가 이번에는 앙천대소를 터뜨리는 것이 아닌가?

“하하하하!”

“저, 저런……!”

“총군사! 어찌 그런……!”

하지만 그들은 이내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은 가후의 표정을 보고는 뒷말을 삼켰다.

가후가 탁자를 거칠게 내려쳤다.

타앙!

공력이 어느 정도 담겨 있었기에 탁자에 잔잔한 울림이 길게도 이어졌다.

지금껏 늘 온화한 태도만 보여 왔던 가후였기에 수뇌부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서로 눈치를 살폈다.

그런 수뇌부들을 칼날같이 쏘아보던 가후가 차갑게 일렀다.

“여러분 말씀대로 죽은 넋을 달래지도 못하고 있소. 해서 여러분은 복수를 한답시고 서둘러 전투를 치르자고 아우성이오. 마치 저잣거리에서 당과를 사달라고 졸라대는 어린애처럼 말이오!”

“총군사! 말씀이 지나치시오!”

“아니! 전혀 지나치지 않소!”

가후가 음성을 더욱 높였다.

그러자 수뇌부들이 다시 수군거리면서 서로를 보았다.

그들은 연이은 패배로 인해 총군사의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였다.

그만큼 총군사의 모습은 낯설었다.

가후가 다시 한번 냉소를 피식 짓더니 말을 이었다.

“복수를 하겠다고? 그래서? 작전은 있소? 제일 먼저 복수를 외친 사람이 누군지 아시오?”

“…….”

“무림오절 고엽풍 궁주님이셨소!”

“……!”

“하지만 고 궁주님이 어찌 되셨는지는 여러분 모두 잘 알고 계실 거요. 비록 사혈곡의 괴물들을 모두 쓸어버리긴 하셨으나 그분도 운명을 달리하셨소. 자, 그래서 나는 여러분께 이리 말했소. 사파에 간교한 계책을 쓰는 만통지라는 늙은이가 있으니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고. 비록 수로채와 녹림채가 이제 막 합류한 당일이라고는 하나, 그들이 곧바로 치고 들어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이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찌 생각했소?”

“…….”

유구무언.

입은 있으나 할 말이 없다.

하나 가후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았다.

그가 탁자를 다시 한번 손바닥으로 거칠게 내려치며 소리쳤다.

“단 한 곳도! 어느 곳 하나 제대로 방비하지 않았소! 단 한 곳도!”

“…….”

“내 아무리 좋은 계책을 세운들, 그걸 행하는 자들이 내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찌 이길 수가 있겠소? 여기 계신 분들은 어떻소? 내가 주의를 줄 때, 여러분은 속으로 어찌 생각하셨소? 내 말대로 경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신 분이 계시다면 손이라도 들어 보시오!”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들 역시 전진 배치된 무인들과 다른 생각이 아니었기에.

연이은 패배로 인해 총군사가 너무 예민해졌다고만 생각했다.

한데 총군사의 말대로 정말 당일에 기습을 가해왔다.

우여곡절 끝에 막기는 했지만…….

“설마 우여곡절은 겪었으나, 막아내긴 했다고 생각하시오?”

“……!”

“천만에 말씀! 그들은 스스로 물러난 것이오.”

“어, 어찌 그렇습니까?”

수뇌부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가후가 그를 힐끔 보고는 다시 좌중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첫째, 그들은 이번 공격으로 우리의 반응을 살펴본 것이오. 둘째, 더 깊이 들어오면 그들 역시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으니 최소한의 피해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고 돌아간 거요.”

수뇌부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번 기습으로 흑천련은 전쟁에서 우위를 점했다.

하지만 만약 무리해서 더 깊숙이 쳐들어왔더라면 그들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을 터다.

전진 배치된 무인들은 기습으로 당했다지만, 그들이 무너져 가고 있을 때쯤엔 이미 남창 주둔지에서도 모든 방비를 끝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이쪽에서 방비를 다지기가 무섭게 그들이 정확히 물러났다는 점이다.

가후가 날카로운 눈으로 좌중을 훑으며 말을 이어갔다.

“저들에게는 만통지가 있소. 그는 천하제일지자라는 소리를 듣소. 나보다 지략이 뛰어나다는 뜻이오. 한데 사파 무인들은 그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고 있소. 반면!”

타앙!

또 탁자를 내리친 가후가 주변을 훑었다.

“본 맹은 어떻소? 내가 만통지보다 부족해서 따르지 않는 것이오? 만약 그렇다면 여러분은 나의 책략 없이 스스로 이길 수 있으시오? 달리 말해봅시다. 만약 여러분이 내 뜻대로 방비를 굳건히 했다면 이렇게까지 밀렸을 것 같소?”

“…….”

“그런데 여러분은 지금 뭐라고 했소? 적의 기만술에 낚였다. 적들이 우리를 속이고 비겁한 기습을 했다. 이게 말이오? 방귀요?”

가후가 전에 없이 거칠게 쏘아붙였다.

수뇌부들은 저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는 입술에 추라도 단 것처럼 침묵했다.

“전쟁에서! 적을 속이고, 허를 찌르는 것은 당연한 병법이고 전략이오! 한데 그걸 비겁하네, 어쩌네 한다는 건 동네 파락호들 싸움에서 두드려 맞고 온 어린아이 투정과 뭐가 다르오?”

가후의 거침없는 폭언에 묵묵히 듣고만 있던 축일공이 헛기침을 하며 나섰다.

“총군사의 뜻은 잘 알겠네. 하나 자네에게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닐세.”

“뭐가 문제란 말입니까? 부맹주.”

가후가 축일공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 눈빛이 짐짓 날카로워서 축일공도 흠칫거리고는 답했다.

“그야 자네가 좀 더 확실하게 주장하고 강조했더라면 전진 기지에서도 좀 더 각별히 주의를 하지 않았겠나? 하지만 자네는 그리 강하게 말하지 않았잖은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끄음.”

“책사의 전략을 어투로 판단하여 따르고 말지 결정하겠다는 겁니까? 그렇다면 제 잘못이 맞군요. 그럼 저는 오늘부로 이 자리에서 내려오겠습니다.”

“……!”

말을 마친 가후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방건(方巾)을 벗어 탁자에 내려놓는 것이 아닌가?

이에 지켜보던 맹주조차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총군사,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죄송합니다. 저는 제 명을 독단적으로 판단하여 선별하며 받아들이는 자들과 함께 일할 수 없습니다. 오늘부로 군사직을 내려놓겠습니다.”

그야말로 파격적인 발언이었다.

일순 장내가 술렁거리기 시작했고, 몇몇 이들의 입에서는 벌써 자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맹주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가 군사가 작심을 했군. 이걸로 그의 입지는 확고해지겠어.’

앞으로는 똥물을 뒤집어쓰라고 해도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단언컨대 가후는 이러한 상황을 노린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지나친 비약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꾸만 그런 생각이 강하게 든다.

그 옛날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이 일부러 관우에게 조조의 마지막을 맡긴 것처럼.

수뇌부의 실수를 빌미로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하려는 수가 아니겠는가?

이쯤 되자 축일공도 더는 고집을 부릴 수 없었다.

그가 고개를 숙이고 들어갔다.

“총군사께서는 오해를 풀어주시오. 내 말뜻은 그게 아니었소. 여러모로 봐서 총군사의 말씀이 옳소. 우리가 경솔했소.”

부맹주가 먼저 고개를 숙이니, 다른 수뇌부들도 절로 고개를 숙였다.

가후가 한 번 더 튕겼다.

“애써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마음으로 따르지 못한다면 결국 오늘 같은 일은 또다시 일어날 겁니다.”

“어찌 그리 섭섭하게 말씀하시오? 내 잘못했소. 그러니 서운한 게 있다면 부디 마음 풀어주시오. 다시 시작합시다. 내 지금 생각하니, 총군사의 지략이 뒷받침된다면 본 맹도 늦지 않았소. 게다가 지방방파들마저 속속 합류하고 있지 않소? 내가 최선을 다해 그들에게 총군사의 뜻을 전하겠소이다.”

부맹주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가후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뭐가 말이오?”

“앞으로 제가 어떠한 책략을 써도 모두 따르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오.”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뛰어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사파 놈들을 박멸하기 위한 것이라면 기꺼이 희생하겠소!”

축일공이 진심을 담아 대꾸했다.

가후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건 당연한 말씀입니다.”

“그럼 하겠소!”

“후우. 좋습니다. 부맹주님의 진심을 저도 받아들이겠습니다. 제가 잠시 감정이 격해진 점 사과드립니다.”

“아니오. 총군사와 내 뜻이 같으니 사과하실 필요 없소. 내가 미안할 따름이오.”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우리가 어찌하면 되겠소?”

가후가 좌중을 둘러보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 누구도 제 지시를 거역해서는 안 됩니다. 전쟁은 상명하복을 철저히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께 한 가지 기밀사항을 말씀드리지요. 본 맹에는 ‘천림’이라는 것이 존재합니다.”

맹주는 말을 이어가는 가후를 보면서 내심 혀를 내둘렀다.

‘가 군사가 물건은 물건이로세.’

* * *

“당최 속을 모르겠군.”

만통지의 중얼거림에 적비연이 눈살을 슬쩍 찌푸리고는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만통지는 대답 대신 탁자에 한가득 펼쳐놓은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총 열세 군데가 표시되어 있었다.

며칠 전 기습을 가했던 장소다.

모두 열 곳을 쳤는데, 그중 세 곳은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서 휘젓고 물러났다.

“이 난리를 쳤는데도 보패인이 나타나지 않았단 말이지.”

“좀 더 상황을 지켜보려고 한 게 아니겠소?”

“아니. 그럼 늦지. 그땐 오히려 보패인이 나타날 필요가 없단 말이야.”

“흐음. 뭔가 짚이는 부분이라도?”

“내 생각엔 마치…… 가후가 우리의 기습을 예견하고도 일부러 당해준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군.”

“설마 그럴 리가.”

“아니야. 그들이 남창에서 방비를 갖추는 속도를 보면 필시 예견을 했던 거야. 한데 왜 전진기지는 쉽게 뚫렸을까? 그만한 희생을 각오하면서.”

“흐음.”

“혹시 가후가 내부 장악력을 위해서 한 짓이라면…… 도대체 가후는 뭘 생각하는 거지?”

만통지가 눈을 가늘게 떴다.

어쩌면 이 전쟁이 자신의 생각과 다른 양상을 띨 수도 있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만통지가 지도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가후. 자네가 생각하는 게 무엇인가? 아니, 자네가 아니라 혹시 그 아이가 구상하고 있는 것이더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