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 배신자의 최후
무림군웅들이 남창으로 속속 모여들고 있을 때, 장사성에 위치한 벽력적가에서는 조용하고도 은밀한 반란이 기획되고 있었다.
벽력적가 총관 우벽산.
오래도록 벽력적가의 모든 행정을 담당하면서 가문의 위상을 좌지우지했던 자.
하지만 적비연에게 그의 이중면모가 발각된 후로 지옥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그에게도 기회가 왔다.
어찌 된 일인지 묵검은 자신에게 걸린 사활침의 저주를 풀어주고는 퉁명스럽게 한마디를 남기고 떠났다.
“내 생각 같아서는 용서할 수 없으나, 가주님이 마지막으로 당신을 한 번 믿어보겠다고 하셨소. 우리는 볼일이 있어 먼 길을 떠나야 하니 그간 가문을 잘 유지해 주시오.”
정말이지 당장에라도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하지만 우벽산은 경거망동하지 않았다.
우선 정말로 사활침이 풀린 것인지 알 수 있을 때까지 꾹 참고 기다렸다.
그리고 여느 때였다면 발작이 시작되었어야 할 날이 다가왔음에도 몸이 멀쩡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정말 사활침이 풀린 것이다.
우벽산은 남모르게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멍청한 젊은 가주가 자신을 믿으면서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자고로 사람은 고쳐 쓰지 않는다고 했건만.
정말 자신을 두고두고 이용해 먹으려면 사활침을 풀지 말았어야 했다.
‘뭐, 어쨌든 가주가 멍청한 덕분에 내게 생로가 생겼지만.’
우벽산은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때를 기다렸다.
그런데 웬일로 가문에 남아 있던 무인들이 다수가 천상원으로 부름을 받아 이동한 것이 아닌가?
반역을 꾀하기에 이렇게 좋은 기회가 또 있을까?
벽력적가를 감시하던 검영대도 천상원으로 이동한다고 하니 특별한 제재를 가하진 않았다.
대신 여느 때처럼 감시자들이 따라붙기는 했지만, 가문의 무인들도 그마저 내칠 수는 없었다.
어쨌거나 이건 정말 대단한 기회였다.
가장에 남은 사람들은 섬검당주 맹사천과 천우각주 구자헌처럼 예전부터 우벽산과 한배를 탔던 자들뿐이었다.
이상할 것도 없었다.
우벽산의 배신이 밝혀진 후로 그와 그를 추종하던 무리들은 가장 내에서도 알게 모르게 따돌림을 받는 처지였으니까.
오히려 그런 자들만 가장에 오롯이 남게 되니 마음 놓고 반란을 꿈꾸기에 딱 좋은 기회였다.
우벽산은 곧장 맹사천과 구자헌을 불렀다.
“드디어 때가 됐습니다. 우리가 언제까지 이대로 웅크리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우벽산의 말에 맹사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껏 웅크리고 있던 건 우 총관이 아니었소? 한때 만검세가와 진행되던 이야기는 쑥 들어가고 몇 개월째 죽은 사람처럼 지내지 않았소?”
“내 말이 그 말이오. 도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오? 만검세가는 아예 본 가를 은인처럼 대하고 있으니, 우린 말 그대로 닭 쫓다가 지붕 쳐다보는 개 꼬락서니가 아니오?”
우벽산이 쓴웃음을 삼켰다.
“그 점은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도 나름대로 곤욕을 치르느라. 아무튼 사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일어서야 합니다. 작금의 상황을 보십시오. 벽력적가가 반짝 떠오르는 줄 알았더니 역대 최악으로 기울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맞는 말이지. 무림맹의 감시를 받는 처지까지 오다니 말이오.”
“허참, 이럴 거면 차라리 일찌감치 만검세가 밑으로 들어갔어야 하는 건데.”
정말이지 적비연이나 가문에 충성하는 무인이 들었다면 눈이 뒤집히고 욕지거리가 튀어나올 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태연하게도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묘책이 있으신가?”
맹사천의 말에 우벽산이 희미하게 웃었다.
“돌아가는 정세를 보니 만검세가는 이제 물 건너갔습니다. 차라리 검영대주에게 잘 기대어 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무림맹이 본 가를 탐탁찮게 생각하는 건 사실이니까요.”
“호오, 본 가를 맹에 팔아넘기자는 거요?”
“허허, 말씀을 하셔도 너무 그렇게 하시면…… 그냥 가주가 없는 틈에 본 가가 무림맹에 복속하겠다는 약조를 하면 맹에서 특별히 잘 돌봐주지 않겠습니까?”
“과연. 지금처럼 방해꾼도 없는 상황이라면 상관없겠지.”
“그럼 어서 추진합시다. 사실 최근 들어 가장에서 우리가 은근히 따돌려지고 있다는 건 부인할 수 없소. 이럴 바에는 정말 가문을 팔아서라도 맹에서 한 자리 차지하는 게 낫겠소.”
“동감입니다. 벽력적가주는 너무 어립니다. 경험이 일천해서 자기 재능만 믿고 설치는 중이지요. 이렇게 가다간 어차피 망할 터. 우리가 그 전에 맹에 투항하도록 하죠. 우리의 뜻은 가주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리는 겁니다.”
“좋소. 하면 언제가 좋겠소?”
“일단 돌아가는 상황을 한 번 지켜보도록 하지요. 어차피 이래저래 준비를 하려면 사흘 정도의 시간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합시다.”
좌중에 앉은 자들의 눈빛이 야비한 속내로 번뜩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우벽산은 몰랐다.
사흘 후가 아니라, 당장 다음날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차라리 그날 말이 나온 김에 움직여야 했다는 것을.
* * *
짐작대로 벽력적가주가 본 맹을 배신하고 흑천련과 손을 잡고서 무림오절이자 장로회주인 편무량 대협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다. 이에 벽력적가에 책임을 물으려는 바, 검영대주는 서신을 받는 즉시 벽력적가로 가서 책임있는 자들을 모두 처벌하여 만인의 본보기가 되도록 하라.
검영대주 임영식은 서신을 접고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그는 두 가지 이유로 놀랐다.
우선 정말로 벽력적가주가 흑천련과 손을 잡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설마 했는데 정말이라니?
두 번째로 놀란 건 이러한 일을 예견하고 벽력적가를 포위해서 감시하라는 총군사의 선견지명이었다.
‘이런 날이 진짜 올 줄이야.’
장사에 검영대와 함께 남았던 임영식은 내심 불만이 없지 않았다.
강호영웅들이 모두 남창으로 모이는 마당에 자신은 검영대를 이끌고 여전히 장사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왠지 중요한 임무에서 배제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데 이젠 정말 막중한 임무를 지게 된 것이다.
한때 오대세가도 넘봤던 벽력적가가 아니던가?
게다가 최근에는 벽력적가주의 신출귀몰한 움직임으로 세간의 주목을 톡톡히 받았다.
그런데 이제 하루아침에 몰락하게 된 것이다.
그야말로 역사적인 현장이 되었다.
총군사가 직접 서신까지 보내어 책임을 물으라고 한 것은 필시 당주나 각주 급은 참수하라는 암시였다.
다만 맹의 규율상 이 정도로 막중한 임무에는 반드시 타 문파의 참관인이 필요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임영식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참관인으로는 만검세가의 임시 총책인 박효양이 좋을 듯했다.
그가 망설일 것 없다는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총군사님의 명으로 벽력적가로 간다! 참관인으로 만검세가 박효양 대협에게 서신을 보내도록 하라!”
“존명!”
검영대 부대주가 우렁차게 대답하며 곧 물러갔다.
* * *
두 시진 후.
벽력적가로 들이닥친 임영식은 난감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하필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벽력적가에 머물러 있어야 할 대다수의 무인이 전부 천상원의 부름을 받아 이동했다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이틀 전에 벽력적가 무인들 대다수가 천상원으로 가야 한다며 허가 요청을 해왔던 사실이 기억났다.
사실 장사를 벗어나지만 않으면 상관없기에 별생각 없이 허가를 해주었다.
한데 그 무인들이 천상원에 틀어박혀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급히 부대주를 파견했지만 그는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천상원에 들어간 무인들이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점.
문제는 천상원이 중원 최고의 종합 의원이라는 점이다.
또한 원래부터 천상원은 아픈 자라면 정사를 가리지 않겠다고 천명한 곳이었다.
게다가 무공을 익히지 않은 민초들에게도 항시 개방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런 곳에 칼 찬 무인들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다짜고짜 피를 보게 된다면 무림맹이 민심을 잃을 게 불 보듯 뻔했다.
민심은 곧 천심이다.
혹자는 의구심을 드러낸다.
나랏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어찌 민심까지 살피냐고.
하지만 무림의 일이라는 것이 결국 민심과 직결된다.
무인은 칼밥을 먹고 산다.
칼밥이란 무엇인가?
결국 무력을 써서 힘없는 자들을 지켜주거나 대신 복수를 해주면서 그 대가를 받는다는 뜻이다.
표국, 상단, 전장 등 모든 분야에서도 민심이 필요하다.
그들이 등을 돌리면 무인이 관여하는 사업은 망해 버린다.
그러니 천상원을 함부로 건드릴 수가 없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 있을 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이 천상원으로 이동하는 것을 허가했건만…….
‘실수였다.’
임영식이 아랫입술을 꾹 씹는데, 박효양이 옆에 있다가 속삭였다.
“그래도 책임자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니 다행이군요. 무려 총관입니다. 처벌을 진행하신다면 충분히 본보기가 될 겁니다.”
박효양은 며칠 전 전해 받은 서신 대로 임영식을 부추겼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서신에는 그저 임영식이 하려는 일을 부추기라고만 되어 있었기에.
물론 그 또한 만통지의 안배였다.
어쨌거나 박효양의 부추김에 임영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총관은 가장에 남아 있었으니 다행이 아닌가?
그가 차가운 눈길로 총관 우벽산을 쏘아보았다.
한편 우벽산은 갑자기 들이닥친 검영대를 보면서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잖아도 상황을 봐서 찾아가려고 했는데, 이렇게 먼저 찾아올 줄이야.
한데 어째 표정이 썩 좋지 않다.
본능적인 위기의식을 느낀 그가 얼른 사람 좋은 미소를 그리면서 입을 열었다.
“이게 누구십니까? 여러모로 수고가 많으신 검영대주님이 아니십니까? 본 가의 아둔한 행동으로 고생이 많으시지요?”
“흥! 고생하는 걸 알긴 아는 모양이군!”
임영식이 차갑게 힐난하자, 우벽산이 흠칫거리고는 쳐다보았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마당에 나와 있던 맹사천과 구자헌도 움찔거리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우벽산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찌 그리 기분이 언짢으신 것인지요? 혹, 본 가가 서운하게 해드린 점이 있다면 마음을 푸시지요. 그렇잖아도 저희가 검영대주님께 준비한 것이 있습니다.”
우벽산이 슬쩍 돌아보자 구자헌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어디론가 가더니 커다란 상자 두 개를 들고 나왔다.
무인 대여섯 명이 같이 들어야 할 정도로 커다란 상자였는데,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쿵! 쿵!
상자를 바닥에 내려놓자 임영식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보았다.
“이게 뭐지?”
“열어보시지요. 부족하지만 모쪼록 마음에 드시길 바랍니다. 하나는 대주님께, 다른 하나는 고생하는 검영대원들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아, 박효양 대협께서 오실 줄 알았으면 따로 또 준비를 해드렸을 텐데. 대협께는 추후 작은 성의를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자고로 돈에 침 뱉는 사람 없다고 했다.
우벽산은 자신만만했다.
이 정도 자금이면 검영대에서 평생을 썩어도 모을 수 없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벽력적가에서도 전각 두어 채를 팔아야 나올 만한 금액.
어차피 가문을 배신하기로 작정했으니 총관의 자리에서 이 정도 돈을 횡령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한데 돌아오는 반응이 뜻밖이다.
“지금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곳에서 날 공개적으로 욕보이려는 것인가?”
‘아니, 근데 왜 이게 아까부터 계속 반말지거리로 딴죽이야?’
우벽산은 내심 치미는 욕설을 삼키며 싱글싱글 웃었다.
“염려 마십시오. 이곳에 있는 자들은 모두 저와 한뜻입니다.”
그러자 맹사천과 구자헌을 비롯한 무인들이 저마다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검세가 박효양이 지켜보고 있다는 게 좀 걸리긴 했지만, 어차피 그에게도 따로 돈을 쓰면 될 일었다.
‘뭐, 내 돈도 아니니까.’
다만 임영식은 기가 찼다.
그로서는 쥐가 궁지에 몰리자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려는 격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감히 이것들이 내 목에 방울을?
이런 간 큰 놈들을 봤나!
어디서 어떻게 정보가 새어 나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것들이 자신을 매수해서 처벌을 피하고 한배에 올라타려는 작정인 게 분명했다.
임영식으로서는 당연히 떠오른 생각이었다.
검영대 부대주가 상자의 덮개를 열어보자 한가득 담긴 은자가 눈에 들어왔다.
정말이지 입이 절로 딱 벌어질 만큼 막대한 금액.
하나 그것이 그 무엇보다 무서운 독주(毒酒)라는 것을 임영식은 잘 알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우벽산과 달리 임영식의 표정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곧이어,
차아앙!
그가 매섭게 검을 뽑아 들더니 날카롭게 소리쳤다.
“이 개 같은 것들을 당장 포박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