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 대전의 시작
“육지전이라고 했소?”
염능파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반문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대회의장에 모인 강호명숙들 모두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가후를 쳐다보았다.
한때는 흑천련 분타였으나, 이제는 무림맹의 주요 거점이 된 남창.
그곳에는 벌써 수많은 강호명숙들이 모여 있었다.
그리고 대회의장에서 머지않아 치러질 일차 전투에 대해 한창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한데 대회의장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가후의 말에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가후의 입에서 놀라운 말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수중에서만큼은 가히 무적이라고 부를 만한 수황 무자강.
그가 육지전을 펼칠 것이란다.
염능파가 다시 물었다.
“가 군사. 수황도 육지전을 펼치게 되면 불리하다는 점을 잘 알고 있을 거요. 그가 아무리 절대고수의 영역에 올라섰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수중전에 한해서요. 뭍으로 내려서게 되면 그 위력이 삼 할은 반감할 터인데. 과연 무자강이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하겠소?”
그러자 가후가 빙그레 웃었다.
“옳은 말씀입니다. 무자강은 절대로 먼저 뭍으로 내려서지 않을 겁니다.”
“하면 우리가 그를 뭍으로 유인해야 한다는 말이오?”
불쑥 끼어들면서 질문을 던진 사람은 바로 낙양문주 천기림(天基臨)이었다.
그는 특임을 받아 흑천련으로 떠난 애제자 임송화가 생사조차 모를 지경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기탱천하여 이곳으로 달려온 터였다.
그의 곁에 앉은 화산파 장문인인 청호진인(靑湖眞人)도 마찬가지.
그들뿐만 아니라 강호의 수많은 문파들이 문도들을 이끌고 남창으로 모였고, 또 모이는 중이었다.
천기림의 질문에 가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우린 그를 유인하지 않을 겁니다. 그는 알아서 뭍으로 내려서게 될 겁니다.”
“허참, 답답한지고. 도대체 아까부터 무슨 수수께끼 같은 소리만 하는 거요? 분명 무자강이 절대로 먼저 뭍으로 내려서진 않을 거라고 하지 않았소? 한데 이젠 그가 알아서 뭍으로 내려설 거라니.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아직 동도들이 모이려면 시간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자세한 전략을 공개했다간 유출될 위험이 있으니 더 이상의 궁금증은 참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전투가 임박해지면 모든 걸 말씀드리지요.”
“크흠. 일단은 알겠소. 어쨌거나 그럼 우린 수황을 상대로 육지전에 대비하면 된다는 말이군.”
“그렇습니다.”
“잘 알겠소. 또 하나 궁금한 것. 천림은 언제 나설 것이오?”
“마찬가지로 수황이 육지전을 펼칠 때 투입될 예정입니다.”
“수황이 육지전에서는 약하다고는 하나 그래도 절대고수의 영역에 오른 자요. 천림의 무인들이 어지간히 강하지 않고서는 힘든 싸움이 될 거요.”
“본 맹에서 기밀로 취급하는 최신 무공을 익혀 천해경에 오른 자들입니다. 염려놓으시지요.”
가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좌중이 술렁거렸다.
천해경.
말로만 듣던 경지.
물론 천림의 고수가 절대영역에 올랐다는 말을 들은 적은 있다.
하지만 막상 가후에게서 천해경의 경지를 직접 듣고 나니 마음이 동하는 것이 사실이다.
무인이라면 꿈에나 그릴, 아니, 전설에서나 그려볼 경지가 아닌가?
천기림이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하면 그 신무공기법을 어째서 동도들에게 공개하지 않는 거요?”
“커다란 힘에는 그만한 책임이 따르지요. 여러분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에는 사리사욕에 눈이 멀어 실수하는 자들이 종종 생기지 않습니까? 바로 그 벽력적가처럼 말이지요. 그러니 신무공기법을 극비로 둔 걸 너무 서운하게 생각하지 말아주십시오.”
“커흠. 일단 알겠소.”
천기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수염을 쓰다듬었다.
사실 천림의 존재가 무척 궁금하긴 했지만, 아직 확인된 사실이 없다.
기밀 사항이라니 더 따질 수도 없고.
다만 천해경의 경지가 그리 쉽지 않은 만큼, 직접 보기 전까지는 반신반의다.
장내에 모인 강호명숙들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절정의 영역조차 꿈에 그리는 경지가 아닌가?
실제로 강호명숙들 중 상당수는 절정의 수준만으로 명성을 드날렸다.
한데 천해경이라니?
그야말로 초절정을 넘어선 절대고수의 영역.
그게 어디 말처럼 쉽겠나?
직접 보기 전에는 믿을 수가 없다.
하나 가후가 저리 호언장담하니 우선은 넘어가는 것이다.
적어도 초절정에는 다다른 고수들일 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 자들이 대거 나타나서 전투에 투입되면 극적인 효과는 충분히 거둘 수 있을 테니.
좌중의 소란이 조금 잦아들자, 이번에는 화산파 장문인 청호진인이 넌지시 물었다.
“가 군사의 지략이야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적들에게는 만통지라는 지자가 있지 않소? 혹 만통지가 우리의 계책을 꿰뚫고 무자강에게 언질을 준다면 상황이 틀어질 수도 있지 않겠소?”
“전략이란 인간을 이해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죠. 수황을 이해한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 누구보다 자존심이 강한 수황이니까요. 에둘러 조언을 전한다고 해도 수황은 육지전도 거뜬하다고 자만할 게 분명합니다.”
“가 군사가 그리 호언장담하니 더 이상 염려할 필요는 없겠구려.”
“믿고 맡겨주십시오. 적어도 수황은 그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을 겁니다.”
“큰 타격이라면 어느 정도나?”
청호진인의 질문에 가후가 빙그레 미소 짓다가 입을 열었다.
* * *
“은황선을 버리고 도주해야 할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단 말입니까?”
만통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비연이 미간을 좁히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서든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만한 피해라면 너무 심각한 수준입니다.”
“어쩔 수 없네. 애써 수황을 설득시킨다고 해도 문제네.”
“어째섭니까?”
“그럼 보패인들이 나타나지 않을 테니까.”
“아…… 잠깐. 그렇다면 설마 수로채를 미끼로 쓰겠다는 말씀입니까?”
“말은 바로 하세. 수중전의 모든 책략은 수황이 맡는 걸세. 나는 그저 예측만 할 뿐이고.”
“아무리 그래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간섭하지 않으신다는 건 역시…….”
“이용할 건 이용해야 하지 않겠나? 내가 여기서 나름대로 간파한 적들의 전략을 세세히 읊어준다고 한들, 수황이 고분고분 따를 거라고 보나? 따른다고 해도 앞서 말한 문제가 발생할 테고.”
“그게 제일 문제군요.”
“가후가 아군의 실수로 본인의 입지를 다졌듯이, 나 또한 같은 수법을 쓸 필요가 있지. 우린 무림맹보다 결속이 약하니까.”
“그러다가 수로채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지면…….”
“왜? 전멸이라도 당할까 봐 겁이 나는가?”
“전에 말씀하셨지요. 보패인의 능력에 따라 변수가 될 거라고. 만약 보패인의 능력과 그 수가 상상 이상이라면…….”
“그러니 자네가 잘 해줘야겠지.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이 전쟁의 진짜 변수. 그건 바로…… 자네일세.”
“……!”
“보패인은 적의 기밀이지만 우리도 반쯤은 알고 있는 사실. 하나 자네의 존재에 대해서는 적들이 전혀 모르지.”
사실이다.
무림맹은 벽력적가가 흑천련과 붙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실제로 적비연이 어떤 존재인지 전혀 모른다.
무공 수준도 그저 초절정 초입 정도로 파악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남은 기간 자네가 믿을 수 있는 최정예를 선별해서 최선을 다해 훈련시키게. 조만간 강호에 유래 없는 대전이 펼쳐질 테니까.”
“그러지요.”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시선을 먼발치로 던졌다.
* * *
정사의 대치 상태는 꽤나 길게 이어졌다.
파양호를 중심으로 여기저기에서 국지전이 일어나긴 했지만, 큰 사건이라고 할 만한 충돌은 없었다.
서로 간의 피해도 소소한 정도였기에 대략의 전략을 가늠해보 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무림맹은 천하에서 강호명숙들이 점점 더 모여들어 꽤나 세를 부풀렸고, 흑천련도 사파 무인들을 규합하여 무인들을 대폭 보강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파양호에는 거짓말 좀 보태서 칼 좀 잡아봤다는 사람은 죄다 모인 셈.
때아닌 무림전쟁에 남창과 파양현의 분위기는 연일 뒤숭숭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이를 반기는 민초들도 많았다.
중원 각지에서 무림 영웅들이 모이다 보니 골목마다 주름잡던 파락호들이나, 자잘한 범죄를 저지르며 민초들을 괴롭히곤 했던 도적들이 좀처럼 설치지 못한 것이다.
게다가 많은 무인들이 모이니 파양호를 중심으로 인근 도시와 마을에는 늘 활기가 넘쳤고 객점이나 주루, 상점마다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게다가 수일이 지나도록 큰 싸움은 일어나지 않고 딱히 민가에서 피해가 일어나지 않으니, 다수의 사람들은 갑자기 달라진 현재의 분위기를 은근히 즐겼다.
혹자들은 무인을 구경한답시고 일부러 먼 거리를 달려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전쟁의 시계는 계속해서 돌아가고 있었다.
거리를 오가는 무인들의 눈은 자못 비장함으로 번뜩였고, 허리춤에 차고 있는 도검은 언제든 적을 벨 수 있도록 시린 예기를 품었다.
활발함 속에 스며든 긴장감.
뭐라 딱히 표현하기 힘든 이 애매한 상황은 거의 한 달 가까이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되었다.
전 중원에서 내로라하는 문파들은 모두 남창으로 모였고, 가후는 본격적인 지휘를 시작했다.
파양호를 사이에 두고 치러지는 첫 전투.
무림맹은 악랄한 사마외도를 무찌르겠다며 분연히 칼을 갈았고, 흑천련과 사파 무인들은 무림맹의 위선을 벌하겠다며 으르렁거렸다.
가후는 강랑산 인근의 수성으로 무인들을 최대한 집결하면서 근방의 정찰병이나 첩자가 보이진 않는지 세심히 관찰하도록 했다.
하지만 전장에서 첩자를 완전히 색출하는 작업은 무척 어려운 일.
가후의 노력이 무색하게 강랑산에 잠입한 흑천련의 첩자가 꽤나 중요한 정보를 가지고 돌아갔다.
흑천련 파양분타 대회의장.
만통지의 주관으로 전술회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강랑산에서 몸을 빼낸 첩자가 들어와서 보고했다.
“말씀하신 부분을 집중적으로 조사해본 결과 역시나 예측하신 대로 적들이 벽력탄 수만 근을 수송하는 것이 확인됐습니다!”
그의 보고에 좌중이 술렁거렸다.
만통지가 희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투왕이 코웃음을 치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놈들이 화공을 펼칠 작정인 듯하오! 어쩌면 파양호 전투를 모방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소!”
“일리 있는 말이군요.”
교패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투왕 추야성이 뿌듯한 표정으로 턱을 들었다.
그래도 천하사대지자에 속하는 교패가 아니던가?
그런 자가 자신의 의견을 인정하니 괜스레 어깨가 으쓱였다.
“이 사실을 수황에게도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교패의 말에 추야성이 다시 불쑥 끼어들었다.
“교 선생!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소? 수황이 아니라 수왕이라니까!”
교패가 따로 대꾸하지 않는 사이, 만통지가 답했다.
“이미 그쪽에서도 이 정도는 파악했을 걸세.”
“아…… 하긴. 그라면 충분히 화공에도 대비할 수 있겠군요.”
“문제는 화공이 아닐까 봐 그러지.”
“화공이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닐세. 어차피 일어나야 할 일. 수로채가 알아서 잘 대처하리라 믿어보세.”
교패가 찜찜한 표정을 짓다가 수긍하고는 화제를 돌렸다.
“상황을 보니 강랑산 인근에서 수중전과 육지전이 대규모로 일어날 것 같군요. 투왕께서는…….”
“황!”
“예?”
“투왕이 아니라, 투황이오!”
“아, 예. 투황께서는 이쪽 길을 따라 한참을 돌아서 이동하셔야 할 것 같은데 시간에 맞출 수 있으시겠습니까?”
“맞출 수 없어도 맞춰야지.”
그러자 만통지가 끼어들며 말했다.
“수변으로 이동해서는 안 되네.”
“이잉? 수변으로 이동하지 마라니? 수변으로 이동해야 풀숲에 몸이라도 숨길 것 아니오?”
“숨지 않으면 질 것 같은가?”
만통지가 은근히 도발하자 수왕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무슨 소리! 오히려 그놈들이 겁먹겠지!”
“그럼 잘된 일이군. 수변으로 이동하지 말고 최대한 높은 곳으로 이동하게.”
“끄음. 알겠소.”
수왕이 지도를 보며 중얼거렸다.
사실 그가 이동하는 경로에는 높은 땅이라고 해봐야 언덕 수준에도 미치지 않는다.
이동하는 경로를 훤히 들킬 수밖에 없다는 말.
그나마 수변에 수풀이 우거져 있어서 은밀한 이동이 가능한데, 그걸 하지 말라니?
뭐, 그래도 만통지 말이니까 따른다.
‘수왕 그 녀석은 기고만장해서 설치다가 큰코다칠 터. 나는 만통지를 믿는다!’
만통지가 누군가?
악산만살대진을 완성시켜 준 은인이 아니던가?
불구덩이에 섶을 지고 뛰어들라고 해도 믿을 것이다.
이후로도 만통지는 좌중의 무인들에게 몇 가지 지시를 더 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이틀이 지나 전쟁의 날이 밝았다.
* * *
여명을 품은 파양호.
은빛 호수 위에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거선!
은황선 선미의 단상 위에서 수황이 묵직한 저음을 흘렸다.
“전군, 진격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