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 대전의 시작
망루에 올라서 천리경을 들어 보던 무인이 흠칫거리고는 돌아섰다.
“은황선이다!”
순간 옆에 있던 무인이 뒤로 돌아서더니 진영 안쪽을 향해 깃발을 세차게 휘둘렀다.
그 모습을 본 가후가 눈을 가늘게 떴다.
“드디어 오는군요.”
바로 옆에 서 있던 부맹주 축일공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일단은 의협당과 호룡대가 맞서겠군.”
“예, 그들의 역할이 나름 중요하지요. 하지만 무엇보다 부맹주께서 나서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수황도 납득을 할 테니까요.”
“그래야겠지. 궁금하군. 수황이 정말 그 별호를 받을 자격이 되는지.”
“그럴 일은 없으시겠지만 절대로 전면에 나서시면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알고 있네. 궁으로. 아쉬운 부분이지만 어쩔 수 없겠지.”
“받아들여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을. 내 자네에게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이제부터는 자네 역할이 중요하네. 자네가 사지로 뛰어들라 하면 나 역시 거부하지 않을 걸세.”
“듬직합니다. 감사합니다.”
가후가 빙그레 웃으며 대꾸하자 축일공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궁을 둘러맸다.
“그럼 나중에 보세.”
“예, 잘 부탁드립니다.”
축일공은 대충 손을 들어 보이고는 경공을 펼쳐 달려갔다.
그 움직임이 어찌나 민첩하고 빠른지 근처에 있던 무인들이 저마다 입을 딱 벌리고 보았다.
가후도 가볍게 경공을 펼쳐서 망루로 올라섰다.
그가 먼발치에서 다가오는 수로채 배들을 보면서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서 오시오, 수황. 지난날 장강에서 겪은 패전은 오늘 모두 갚아드리겠소.”
후우우웅.
기분 좋은 강바람이 그의 얼굴에 부딪쳐왔다.
이 물비린내는 곧 피비린내로 변하리라.
* * *
바로 아래로 파양호가 내려다보이는 깎아지른 절벽 위.
그 숲에 몸을 숨긴 적비연은 묵검과 단휘, 예홍과 엽강호를 비롯한 호신위들을 대동한 채 민첩하게 이동했다.
소수 정예로 꾸린 이 별동대를 적비연은 신성대(新成隊)라고 이름 붙였다.
신성대주는 묵검.
지금 이 순간 적진에 가장 깊숙이 들어온 별동대였다.
사파의 상징성을 가진 흑천련주는 파양 분타에 머물렀다.
즉, 극마가 참전하지 않는 상황.
물론, 극마는 모처럼 피맛을 보고 싶다며 아우성을 쳤지만 소멸을 걸고 적비연의 지시를 어길 수는 없었다.
낭떠러지에서 몸을 낮춘 적비연은 저만치 아래에서 장엄한 광경을 연출하는 수로채를 보았다.
한 척의 거선이 수많은 선박의 호위를 받으며 이동하고 있었다.
총채주 수황이 타고 있는 은황선이다.
그리고 군데군데 보이는 누선(樓船)은 아마도 수로채주들이 타고 있는 배일 터.
다시 그 주변으로는 이동 속도가 빠른 비조선이 물살을 가르며 빠르게 오갔다.
그야말로 넋을 놓고 볼 정도로 장엄한 풍경.
강호 유사 이래 수로십팔채가 모두 모여서 대규모 전쟁을 벌인 적이 있었던가?
“저렇게 강해 보이는데…… 수황이 대패를 할 수 있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조용히 말을 뇌까린 사람은 단휘였다.
“그래도 만통지가 거기까지 염두에 두고 세운 작전이니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적비연의 말에 단휘가 씩 웃었다.
“천하무적 가주님과 함께 싸우는데 뭐가 두렵겠습니까?”
“지금 내 어깨에 짐 지우는 거냐?”
“짐이 아니라 힘이죠.”
“글쎄, 너는 짐이다.”
“으익! 너무하시는 것 아닙니까!”
단휘의 말에 듣고만 있던 엽강호와 다른 호신위들이 툴툴 웃었다.
적비연은 호신위들 중에서도 현청과 임송화에게 눈길을 두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낯선 눈길.
그들로서는 정신이 없을 만도 하다.
도대체 따르는 사람이 몇 번이나 바뀌었나?
물론 그 모든 사람이 적비연이었지만.
차라리 엽강호와 한사는 자신의 정체를 진작 알았으니 덜 혼란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현청과 임송화는 여태 적비연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자신 곁에 남아 있다.
묘한 일이다.
그만큼 둘의 신념이 자신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리라.
어찌 보면 운명의 사슬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적비연이 두 사람을 물끄러미 보며 입을 열었다.
“만검세가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지. 나와 뜻이 같다고 하더군.”
현청과 임송화가 서로를 잠시 번갈아보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임송화가 먼저 말했다.
“뜻이 달랐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겠죠.”
“고마운 일이군.”
적비연이 희미하게 웃고는 절벽 아래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눈길이 머문 곳에는 무림맹 진영이 위치해 있었다.
“저곳에 너희들의 사문이 존재한다. 화산파와 낙양문이 있지. 장문인들이 직접 문도들을 이끌고 왔다더군.”
“……!”
두 사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예상은 한 바였다.
하지만 장문인까지 직접 와 있을 줄은 몰랐다.
몇몇 장로가 오지 않았을까 짐작만 해보았을 뿐.
적비연의 눈빛이 깊어졌다.
“어쩌면 너희들은 사부에게 도검을 들이밀어야 할지도 모른다. 후회는 없겠나? 아니, 할 수 있겠나?”
“만약 사부님이 무림맹의 비열한 행위를 알고도 침묵한다면 사사로운 정보다는 대의를 따를 생각이에요.”
임송화가 다부진 표정으로 대꾸했다.
현청 역시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누구보다 내가 옳다고 믿는 협의 길을 걸어갈 겁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믿는 협은 바로 무림맹을 저지하는 겁니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두 사람을 다시 보았다.
확실히 두 사람은 성장했다.
사문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 스스로 판단을 내리는 수준까지 이른 것이다.
이젠 후기지수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단 몇 개월 사이에 그들은 어엿한 대협의 면모를 풍기게 된 것이다.
“좋아. 우리가 맡은 일은 기다리고 기다렸다가 보패인이 나타나는 즉시 수로채를 구하는 것이다. 전투 중에 절대 망설이는 일이 없도록.”
“존명!”
두 사람뿐만 아니라 신성대원 모두가 이구동성으로, 그러나 나직이 대답했다.
* * *
촤아아아!
은황선이 수십 척의 배에 둘러싸인 채 수면을 가로지르며 나아갔다.
수많은 배가 바짝 붙어서 진열을 갖춘 채 이동하니 마치 거대한 육지가 통째로 이동하는 것만 같다.
동서남북이 아군의 배로 뒤덮여 있으니, 이곳에만 머문다면 위험할 일이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적이다!”
망루에서 살피던 자가 손가락을 들고는 소리쳤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십여 척의 배가 수로채에 맞서 나타났다.
하나 수로채의 거대한 규모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상황.
수황 무자강이 차분한 음성으로 일렀다.
“방심하지 마라. 적이 열세인 만큼 준비를 단단히 했을 터.”
“존명!”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화공으로 나올 가능성이 크다. 북서풍이 불지 않는 이상 위험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서 배의 간격을 넓히도록.”
“존명!”
수로채는 거침없이 나아갔다.
그렇게 적의 배와 거리가 삼십여 장 정도로 좁혀졌을 때였다.
쒸쒸쒸쒸쒸에에!
저 먼 곳에서 흑조(黑鳥)떼가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먹구름처럼 몰려든 흑조떼는 지척에 이르러서는 검은 소나기가 되어 내려꽂히기 시작했다.
“철패!”
동소유를 비롯해 수로채주들이 일제히 명을 내리자, 선상에서 철패를 든 무인들이 진열을 갖춰 갑판을 뒤덮었다.
그 일사불란한 움직임이 마치 하나의 생명체처럼 보일 정도였다.
곧이어 화살이 떨어지면서 철판에 콩을 볶는 것만 같은 소음이 울렸다.
투타타타타타타타탕!
화살은 연신 철패를 두드렸다.
철패를 든 무인들은 이를 꽉 깨물었다.
한데 이상하다.
불화살이나 폭약이 든 화살이 날아들 줄 알았는데, 의외로 철패가 가볍다.
폭약이 터질 것을 대비해서 최대한의 공력을 끌어올리고 있었는데 아무런 충격도 전해지지 않는다.
폭약이나 불화살을 대비해서 갑판 일부를 군데군데 금속으로 교체하고 정비했는데 무소용이 됐다.
폭약이나 화공을 쓰려면 응당 첫 공격에서 사용했을 텐데.
반면 다락 사령탑에서 이를 지켜보던 동소유는 눈살을 구겼다.
‘독이다!’
폭약이나 화공은 아니지만, 역시 다른 수가 숨어 있었다.
화살촉이 철패에 닿으면서 희뿌연 가루를 흩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확실히 독은 위험하다.
폭약이나 불은 철패로 막아낼 수 있지만, 공기 속에 스며드는 독은 철패로만 막아내기 어렵다.
아니나 다를까, 독기를 흡입한 몇몇 무인들이 픽픽 쓰러지기 시작한다.
그러는 사이 전방에 도열한 스무 척의 배가 점점 가까워졌다.
동소유가 앙칼지게 외쳤다.
“포탄 중지!”
갑판 아래에서 포탄을 준비하던 무인들이 일시에 동작을 멈췄다.
근거리에서 포를 쏘게 되면 배가 흔들린다.
그럼 독기를 제거하기가 어려워진다.
“제독(制毒)!”
이어진 명령에 철패를 든 무인들이 우르르 물러났다.
대신 갑판 아래에서 무인 수십 명이 날렵하게 튀어나오더니 시커먼 가루를 허공에다가 뿌렸다.
초린분(焦燐粉)이다.
수로채가 독자적으로 개발하여 지니고 있는 이 가루는 화접자를 이용해 불을 붙이면 순간적으로 뜨거운 불길을 만들어낸다.
하나 말 그대로 찰나의 순간에 불과하다.
때문에 사람이나 사물에는 어떠한 위협도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수로채는 왜 이런 걸 가지고 있는 걸까?
방어용이다.
수중전에서 가장 까다로운 것이 의외로 독이다.
폭약이든 화마든 강에 차고 넘치는 물을 끼얹으면 어떻게든 해결될 가능성이 있다.
하나 독은?
허공에 풀리면 독기가 되고, 물에 녹으면 독수가 된다.
그러니 태워야 한다.
독이 불에 약하다는 것은 만천하가 아는 진리.
초린분이 갑판 위에 자욱하게 비산하자, 몇몇 무인들이 재빨리 달려 나가며 화접자를 뽑아 불을 붙였다.
촤앗!
화르르르르르륵!
순식간에 거대한 불길이 강렬한 열기와 함께 허공에서 춤을 춘다.
은황선뿐만이 아니라 주변에서도 연신 불길이 치솟는다.
모르는 이가 봤더라면 수많은 배가 화공에 당한 줄로만 알았으리라.
하지만 내막을 알고 있는 동소유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른 배에서도 은황선만큼이나 민첩하게 대응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위기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꽈과과광! 꽝! 꽈아앙!
천지를 떨쳐 울리는 굉음과 함께 배들이 부서지면서 불타올랐다.
여기저기 강물이 폭주하듯 솟구쳐 오르고, 하늘에서 비가 내리는 것처럼 물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촤아아아아!
다행히 은황선은 피해가 없다.
호위하듯이 주변을 에워싼 배들이 대신 맞아준 탓이다.
포탄을 맞고 서서히 침몰하는 배들은 마지막까지 포탄을 쏘아냈다.
꽈과광! 꽈앙!
무림맹 측 배도 서너 척이 부서지면서 침몰하기 시작했다.
부서진 수로채 배에서 무인들이 마구 뛰어내린다.
하나 누구도 그들을 구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수귀다.
배에 탄 수귀가 물에 뛰어들었으니, 이제 물고기가 되었다.
물고기들은 빠른 속도로 헤엄쳐 침몰하는 적들의 배에 올라탄다.
비명이 솟구치고 피가 호수를 적신다.
이십여 척의 배 뒤로 다시 십여 척의 배가 더 나타났다.
은황선을 호위하던 배가 서서히 침몰하면서 좌우로 빠지고 나자 동소유가 다시 소리쳤다.
“충파(衝破)!”
그녀의 목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은황선이 묵직하게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구우우우웅!
섬처럼 거대한 배가 믿기 힘들 정도로 빠른 속력을 내며 거침없이 나아갔다.
마침내 물길을 막아선 세 척의 무림맹 배가 은황선과 정면으로 부딪치면서 종잇장처럼 허망하게 구겨졌다.
콰자자자자작! 콰자작!
“크아악!”
“우아악!”
배에 타고 있던 무인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물로 뛰어내렸다.
하나 이미 물속에 녹아든 수귀들이 그들을 곱게 살려 보내지 않았다.
서걱! 슈아악! 파박!
“커억!”
“살, 살려…… 꾸르륵……!”
호수면 아래에서 살공이 난무했다.
수면이 점점 핏빛으로 물들어갔다.
이제 최전선에 남은 무림맹의 배는 겨우 열 척!
후선에서 지켜보던 무림맹 무인들이 혀를 내둘렀다.
“과연 수귀와 수황이구나.”
정말이지 수중전에서만큼은 수로채를 막을 방도가 아예 없는 듯했다.
한편 은황선 선미 단상에 앉은 수황은 입매를 치켜 올리고는 중얼거렸다.
“자, 이젠 또 뭘 준비했지? 어디 모든 걸 꺼내 보아라. 무림맹 총군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