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 판이 뒤집어지다
태사의에 앉은 수황은 광오한 표정으로 수면 아래로 스러져 가는 무림맹 배들을 보았다.
익숙한 광경.
물에서는 모든 것이 그보다 아래로 가라앉는다.
그것은 자연의 이치만큼이나 당연한 것.
수면에 핏물이 번지면서 분홍빛을 띠기 시작하자, 수황이 희미하게 웃음 지었다.
“아름다운 색이다.”
“물고기들이 모처럼 포식하겠어요.”
동소유가 깔깔거리며 말하자, 수황이 이맛살을 슬쩍 구겼다.
“그 무슨 섬뜩한 소리를.”
동소유는 잠깐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는 피식 웃어 버렸다.
핏물이 번지는 걸 보고 아름답다고 말한 사람이 그 소리는 섬뜩하다니.
하여튼 이해하기 힘든 사람.
하지만 그 어떤 행동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물에서만큼은 그가 하늘이고, 그가 자연이었으니까.
수황 곁에 서 있던 장무령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선귀부단주였던 그는 동소유가 수로채를 이탈했던 날 이후로 선귀단주를 맡고 있었다.
“주군, 아직 적들이 벽력탄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뭘까요? 이젠 자칫하면 저들도 휘말리게 되어서 사용하기엔 늦어 버렸을 텐데요. 설마 때를 놓친 걸까요?”
그 말에 동소유가 침음을 흘리며 생각에 잠겼다.
장무령이 저런 질문을 던지는 건 정말로 그 이유가 궁금해서이기도 하겠지만, 자칫 놓칠 수도 있는 사실을 자연스레 환기시키기 위함이기도 했다.
저런 식으로 질문을 하듯 말을 꺼내면 수황의 체면도 세워주면서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 장점도 있으니까.
잠시 생각하던 수황이 고개를 저었다.
“때를 놓쳤다고 보기에는 가후의 지략을 너무 얕잡아 보는 것이고. 이후에 사용하기에는 네 말대로 무림맹도 위험 부담이 크다. 천하사대지자라는 자의 머릿속에서 나온 계책일 테니 내가 그 속뜻을 헤아리기는 어려울 테지. 하나 분명한 것은 그 어떤 계책을 사용하더라도 물위에서만큼은 무소용이라는 거다. 본좌가 바로 수황이니까.”
그야말로 광오한 말.
하나 그 말 한마디가 묘하게도 모든 수귀들의 심장을 뛰게 만든다.
왠지 모르게 안심이 든 장무령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맞는 말씀입니다. 어쩌면 폭약을 오늘 사용하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이 전쟁이 하루 만에 끝날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을 테니까요.”
“그럴지도.”
“하지만 그렇다면 그야말로 가후의 실책이군요. 적어도 수중전만큼은 오늘 하루 안에 끝나게 될 테니까요.”
“그렇다.”
수황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폭약을 이용한 화공이라.
이제 물길이 좁은 곳으로 들어서긴 했지만, 여전히 배의 간격을 꽤나 띄웠다.
그 어떤 상황이 닥쳐도 수로채는 끄떡없을 터.
그때였다.
쒜에에에에!
남동쪽 하늘에서 다시 시커먼 덩어리가 날아올랐다.
처음에는 까만 점처럼 보이던 것이 점점 주먹만 해졌다.
“폭약인가?”
동소유가 눈살을 찌푸리다가 이내 소리쳤다.
“철패! 석궁!”
그녀의 외침에 다시 수십여 명의 무인들이 은황선 갑판을 빼곡하게 채우며 나타났다.
동소유처럼 남동쪽 하늘의 이물질을 발견한 몇몇 배에서도 같은 명령이 내려졌다.
이내 동소유와 다른 배의 수장들이 명령을 쏟아냈다.
“발사!”
투투투투투투투퉁!
강맹한 기운을 머금은 화살이 떼 지어 날아가면서 그대로 주먹만 한 구체와 부딪쳤다.
무인들이 각기 공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고막을 보호했다.
저 구체가 폭약이라면 천지가 격동할 소리가 울릴 테니.
그런데 이번에도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퍼퍼퍼퍼퍼퍼퍼억!
쩌렁쩌렁한 소리 대신 뭔가 둔탁한 소리가 나더니 구체가 깨지면서 수천 개 바늘이 사방으로 비산하는 게 아닌가?
따다다당! 까가강! 퓨퓩! 푹!
“크아악!”
“아아악!”
뜻밖의 상황에 몇몇 무인들이 몸을 뒤집으며 쓰러져 갔다.
‘암기!’
동소유가 혀를 차고는 호신기공을 끌어올렸다.
티티티티팅!
구체에서 터져 나온 것은 아주 가느다란 세침이었기에 호신기공만으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다만 그 속도가 워낙 빨라 기민하게 반응하지 못한 자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폭약을 대비해서 철패를 들어 올린 바람에 다수의 수귀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는 점.
“부상자 격리하고 놈들을 쓸어 버렷!”
동소유의 외침에 수귀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파파파파파파앗!
조금 전의 암기 공격으로 당황할 만도 하건만 모두들 마치 하나의 물결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과정을 지켜보던 수황이 눈을 가늘게 떴다.
“독에 암기라. 사천당문이 합류했나 보군.”
“하지만 사천의 가장 큰 약점이라면 소모성 전투라는 거죠.”
사천당문은 독과 암기만으로 오대세가의 한자리를 차지한 가문이다.
당가의 여식과 혼인을 하게 되면 남자라도 성을 바꿔야 할 정도의 권세를 자랑하는 가문.
하나 동소유의 말대로 사천당문의 가장 큰 약점은 바로 소모성 전투가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독을 사용하고 암기를 다룬다.
그것은 항시 몸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다.
독과 암기를 다 사용하고 나면 사천당문은 여느 지방 방파 수준으로 전락하고 만다.
애석하게도 사천당문은 조금 전 두 번의 공격으로 상당량의 독과 암기를 소진했을 것이다.
만약 육지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그들의 공격이 꽤나 치명적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긴 선상.
물 위에서 일어나는 싸움은 수귀가 장악한다.
한정된 공간에서 일어날 모든 경우의 수에 맞춰 완벽하게 훈련된 자들!
“이걸로 까다로운 건 다 끝난 셈인가?”
“이제 적을 알았으니, 저들이 혹여나 독과 암기가 남아 있더라도 사용하지 못하게 하면 그만이죠.”
“그렇지. 그럼 그렇게 하도록.”
“존명!”
동소유가 몸을 돌리고 소리쳤다.
“장강의 수귀들! 이제 수면을 화려하게 물들일 시간이다!”
“우와아아아아!”
함성이 일제히 일어나며 수귀들이 물로 뛰어들었다.
은황선 주변을 배회하던 비조선은 더욱 빠른 속도로 적진을 향해 돌진했다.
곧이어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비조선에 탄 수귀들은 적진 후방까지 깊숙이 침투하면서 과감하게 선상전투를 펼쳤다.
적아가 섞이게 되면 무차별로 퍼부어지는 독과 암기는 자연히 사용하기 어려워진다.
그러는 사이 은황선은 고고한 자태로 흘러갔다.
무림맹 누선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의협당주 노상국이 수염을 파르르 떨었다.
“과연 수로채구나. 하나 승리는 결국 본 맹이 쟁취할 터. 당장의 위기는 곧 기회로 바뀔 것이고,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되리라! 본 맹의 전략을 믿어라! 싸워라!”
“우와아아아아!”
무림맹 무인들이 저마다 함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수귀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략?
그게 어쨌다는 건가?
이곳은 물이 흐르는 곳이다.
그리고 선상이다.
너희들이 물결의 흐름을 아는가?
너희들이 물결의 파동을 아는가?
너희들이 수중의 저항을 아는가?
제아무리 대단한 전술을 가져와도 물에서만큼은 수귀를 당할 수 없다.
게다가 머릿수에서도 압도적이지 않나?
까강! 깡! 쩌엉!
“크아아악!”
“우아악!”
금속성과 비명이 차올랐다.
비명의 대부분은 무림맹 무인이 내지르는 소리였다.
그야말로 수중지옥.
그 광경을 묵묵히 지켜보던 수황은 하품을 했다.
“지루하군.”
생각보다 시시한 전투다.
이대로면 압승이다.
자신이 굳이 올 필요도 없지 않았나?
그런데 그때 수황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쉬이이이이잇!
저만치 공기를 찢으며 날아드는 철시!
눈 깜빡할 사이에 철시가 코앞까지 다다랐다.
뒤늦게 동소유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주군!”
따아아아아앙!
날카로운 쇳소리가 일어나더니 사선으로 튕겨나간 철시가 은황선 뒤에 있던 비조선 한 척을 산산조각 냈다.
콰아앙!
철시에 담긴 공력이 어마어마하다.
‘강기!’
수황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돌렸다.
순간 반짝이는 빛에 이어 다시 허공을 찢으며 철시 세 자루가 연환사로 날아들었다.
“흥!”
수황이 코웃음을 치더니 여의수룡창을 들어 튕기듯 달려 나갔다.
순간 그가 허공에서 춤을 추자 거센 충격음이 연이어 들렸다.
따앙! 꽝! 땅!
풍! 콰앙! 풍!
두 자루의 철시는 그대로 호수면에 처박혀 들어갔고, 한 자루의 철시가 적의 배를 때리면서 산산조각 냈다.
그 바람에 무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에 빠졌다.
물론 그들은 수귀들에게 목숨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과연 신궁이로다! 하나 아무리 궁술의 달인이라지만 숨어서 쏘는 것은 비겁하지 않은가? 명색이 신궁이라 이름을 날렸다면 모습을 드러내어도 충분할 터! 본좌에게 겁을 먹은 게 아니라면 신궁 축일공은 당당히 나서라!”
수황의 사자후에 수면이 연신 튀어 오르면서 파도를 만들어냈다.
배가 쉼 없이 출렁거렸고, 중심을 잡지 못한 무림맹 무인들은 사자후에도 내상을 입어 버렸다.
그러자 다음 순간 방향을 알 수 없는 육합전성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하찮은 도발에 노부가 나설 것 같은가?]
“훗. 언제까지 숨어서 구경만 할지 지켜보지.”
조용히 뇌까린 수황이 몸을 휙 돌리고는 태사의로 돌아와 앉았다.
신궁이 노리고 있음을 알면서도 일부러 등을 보여 도발한 것이었다.
* * *
“아까부터 뭘 그리 생각하나?”
극마가 교패를 보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는 전장에 참전할 수 없는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필 흑천련주의 몸에 혼이 머물게 뭐란 말인가?
지도를 내려다보던 교패가 희미하게 웃으며 답했다.
“만통지의 말씀을 되새겨보고 있었습니다.”
“그 영감탱이 말은 왜?”
툭 내뱉는 말투에 교패가 아주 잠깐 눈살을 찌푸렸다.
확실히 최근 흑천련주는 성격이 많이 변했다.
마치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다만 그의 뜻이 자신의 뜻과 다르지 않으니 딱히 캐묻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화공이 아니면 대체 그 폭약을 어디에 쓸까 궁금해서 말이지요.”
“그래서 알아냈나?”
“글쎄요. 신성대의 잠입은 워낙 은밀하게 이루어졌으니 그곳에는 쓰지 못할 테고, 녹림채의 이동 경로에서 사용하기에는 범위가 너무 넓습니다. 또한 월희전 무인들에게 사용하기에도 거리가 애매하지요.”
“그럼 이번 전투가 아니라 다음에 사용하겠지. 궁지에 몰렸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
“흐음. 그리 간단한 문제라면 상관없겠지만…….”
“아니면 역시 수로채에게 퍼부을지도.”
“하나 수로채도 화공에 대한 방비는 해둘 겁니다. 그럼에도 제가 놓친 게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생각에 잠긴 채로 찻잔을 내려놓던 교패는 실수로 찻물을 쏟고 말았다.
그 바람에 지도 한쪽이 흥건하게 젖었다.
“뭐야? 조심 좀 하지.”
“이런, 죄송합니다. 생각에 몰두하다 보니…… 잠깐, 이건……!”
교패가 찻잔을 바라보다가 입을 딱 벌렸다.
극마가 눈썹을 성큼 치켜 올리고는 물었다.
“왜 그러나?”
“어째서 그 생각을 이제야……!”
“아니, 도대체 왜 그러냐니까?”
“제 짐작이 틀림없다면, 이 전쟁에서 수로채는 궤멸 수준의 타격을 입을 수도 있습니다!”
“뭐야?”
극마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 * *
망루에서 전황을 살피던 가후가 천천히 천리경을 내렸다.
“과연 수황이로군. 만약 그가 일찌감치 마음먹고 동정호로 쳐들어왔다면 무림맹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어.”
물론 그렇다고 해도 수로채는 동정호만 차지할 뿐 장강을 잃게 될 것이다.
그 길고 긴 장강을 수황 혼자 지켜낼 수 없을 테니.
무림맹 권역에 고립될 바에는 역시 장강 동쪽에 머무는 게 낫다고 생각했으리라.
어쨌거나 수황은 대단하다.
물위에서만큼은 그를 당해낼 자가 없다는 말이 허언은 아니리라.
이제 슬슬 판을 뒤집어야 할 시간.
가후가 손을 들자, 수하 한 명이 재빨리 망루로 올라왔다.
“폭약은?”
“준비가 끝났습니다!”
“터뜨리도록.”
“존명!”
비장한 표정으로 대답한 수하가 물러가고 나자, 가후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저 멀리 은황선을 보았다.
“이걸로 판을 뒤집을 첫 걸음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