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 산궁수진(山窮水盡)
교패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제방입니다!”
“제방? 갑자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극마의 질문에 교패가 고개를 번쩍 들고는 지도 한쪽을 가리켰다.
“여깁니다! 바로 여기요!”
“거기 제방이 있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교패가 이맛살까지 구기며 소리치자, 극마가 은근히 부아가 치밀어서 버럭 외쳤다.
“아, 혼자 잘난 척하지 말고 알아듣게 설명을 해! 니미럴, 네놈도 지금까지 몰랐다가 이제 깨우쳤으면서 지금 누굴 바보 취급하는 거야?”
확실히 극마의 말투는 흑천련주 태청강과 확연히 달랐다.
하지만 교패는 지금 너무 놀란 심정이었기에 거기까지 신경 쓰진 못했다.
대신 그는 심각한 표정으로 설명을 이어갔다.
“강랑산이 어떤 곳인지는 잘 알지요?”
“그 정도는 알지. 파양호 남쪽에 위치한…….”
“그렇습니다! 이곳에서는 명태조가 겪은 그 유명한 파양호 전투도 있었지요.”
“음. 그런 일이 있었나?”
“예?”
“아, 아닐세. 아무것도.”
극마는 천 년 이상을 잠들었다가 최근에 깨어난 상태였다.
때문에 명태조 주원장이 겪은 파양호 전투에 대해서는 조금도 아는 바가 없었다.
하지만 역사에 조예가 깊은 교패는 달랐다.
사실 이 정도는 역사에 조예가 깊지 않다고 해도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이야기.
“강랑산 인근은 원래 수심이 얕은 지역입니다. 특히 여름이 되면 물이 많이 증발해서 더 얕아지지요.”
“하지만 지금은 겨울이지. 그리고 수심도 꽤 깊던데?”
“그렇습니다. 십여 년 전에 이곳 물길이 좁은 곳에 제방을 쌓았으니까요.”
“그러니 잘된 일이 아닌가? 제방 덕분에 수심 걱정할 일도 없고, 후방으로 돌아가는 녹림채도 접근하기가 쉬워졌으니. 제방이 무너질 일이 없는 한…… 가만……!”
한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친 극마가 입을 딱 벌렸다.
“설마?”
그의 말꼬리를 교패가 이었다.
“그렇습니다. 가후는 그 폭약으로 여길 무너뜨리려는 겁니다. 그렇다면 두 가지 효과를 동시에 볼 수 있겠지요.”
“이런! 하지만 그랬다간 관에서도 가만히 있진 않을 텐데?”
“무림맹입니다. 관은 이미 포섭을 해두었을 겁니다. 본 련에 비해 무림맹에는 비교적 관이 협조적이니까요.”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로군.”
“자칫하면 수로채가 산궁수진(山窮水盡)의 위기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 * *
“명이 떨어졌다! 터뜨려라!”
말을 타고 제방으로 달려온 무인이 사자후로 외쳤다.
그러자 제방 한쪽 옆에 배치되어 있던 궁수들이 일제히 화살에 불을 붙여 시위를 당겼다.
다음 순간 불화살이 기다란 호선을 그리며 제방으로 날아갔다.
푸푸푸푸푸푹!
화살 떼가 제방 곳곳에 틀어박혔다.
그 직후,
꽈아앙! 꽈과과아앙!
천지가 격동하면서 고막을 찢어 버릴 것만 같은 소음이 쩌렁쩌렁 울렸다.
부서진 제방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올랐고, 근처에 있던 무인들은 저마다 호신기공을 펼쳐 날아드는 파편을 피했다.
츄우우, 츄아아아아!
이윽고 무너진 제방 사이로 물줄기가 뿜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둑을 완전히 무너뜨리면서 거대한 폭포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물줄기가 불어나면서 주변의 수변 잡초들을 무섭게 집어삼켜 갔다.
도도하게 흐르는 물줄기를 보며 무인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들 모두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걸로 판이 뒤집혔다!’
* * *
투왕 추야성은 높은 지대를 따라 이동하면서도 내심 투덜거렸다.
잡풀들이 많이 자란 수변으로 이동한다면 훨씬 은밀하게 접근할 수 있을 터였다.
한데 언덕 위에서 이동하게 되니 그야말로 전신을 다 드러낸 채 공격하는 꼴이 아닌가?
정말이지 녹림채와 어울리지 않는 전투방식이었다.
녹림은 수풀이나 나무에 몸을 숨기는 게 일상이다.
정말 만만한 상대가 아니고서는 언제나 숨어 있다가 기습을 한다.
그런데 이래서야 대놓고 적을 맞이하라고 소리치는 것과 진배없지 않은가?
그래도 어쩌겠나?
천하제일지자라는 만통지의 조언인데.
게다가 그는 악산만살대진을 완성시켜준 은인이지 않은가?
만약 만통지의 그런 재능을 직접 보고 겪지 못했다면, 그 역시 수로채주처럼 만통지의 의견을 대번에 묵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만통지가 얼마나 똑똑한지 잘 알고 있었다.
‘뭐, 이유가 있겠지.’
그렇게 불만을 속으로 삼키고는 쉼 없이 달려가고 있을 때였다.
꾸구구구우웅……!
아스라이 먼 곳에서 무언가 무너지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렸다.
곧이어 지면이 미약하게 떨렸다.
“뭐, 뭐지?”
“지진인가?”
녹림인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단순한 지진일 가능성은 없다.
그들은 야산에서 먹고 자면서 지낸 사람들이다.
지진이 일어날 때면 동물들이 먼저 반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한데 지금은 딱히 동물들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조금 있으니 먼발치에서 무언가 몰려오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제야 곤충과 동물들이 날뛰기 시작한다.
쿠우우우우우……!
걸음을 멈춘 미계수가 투왕을 돌아보았다.
“투황, 아무래도 전장에서 뭔가 일어난 모양입니다.”
“놈들이 폭약을 쓴 모양이군.”
“그런데 어째 조짐이 좀 이상한데…….”
그때 앞서 보낸 정찰병이 나는 듯 경공을 펼치며 달려왔다.
투왕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물었다.
“무슨 일이냐?”
“놈들이 폭약을 썼습니다!”
“역시! 해서 수왕은 어찌 됐고?”
“그것이…… 수왕에게 쓴 것이 아닙니다.”
“뭐? 그럼 어디에? 설마 신성대가 들켰다는 말이냐?”
“그것도 아닙니다.”
“이런 답답한! 그럼 대체 폭약을 누구한테 썼다는 거야?”
“그게…… 누구도 아니라, 제방을 무너뜨렸습니다.”
“뭐야? 제방을 왜…….”
투왕이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딱 벌리고는 먼발치를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을 따라 다른 녹림인들도 고개를 돌렸다.
모두의 표정이 똑같았다.
길게 이어진 완만한 협곡을 따라서 수마(水魔)가 굽이쳐 흘러오고 있었다.
츄아아아아아아아!
마치 성난 수룡이 연신 굵은 몸통을 거칠게 꿈틀대며 지면을 할퀴는 듯하다.
골짜기는 순식간에 물로 채워지고 있었다.
곧 거대한 수마가 골짜기를 가득 메우면서 녹림인들이 서 있는 언덕 아래로 빠르게 지나쳤다.
쿠콰콰콰콰아아아!
투왕뿐만 아니라 다른 무인들 역시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만약 만통지의 말을 듣지 않고 수변 수풀을 헤집으며 이동했더라면?
지금쯤 저 흉포한 물줄기에 휩쓸려 하류까지 순식간에 휩쓸려 떠내려 갔을 터다.
평생 산만 타던 이들이었다.
물론, 불어난 계곡에서 살아남는 법쯤이야 익히고 있지만, 이렇게 폭이 넓은 골짜기에서는 생존 여부가 불투명하다.
투왕이 침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그랬군. 이런 이유였어. 만통지가 수변으로 이동하지 말라고 한 이유가.”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천서채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이지 그 영감님 아니었으면 순식간에 물귀신이 될 뻔했습니다. 가후도 무서운 놈이군요. 우리를 얕잡아 볼 줄 알았는데, 이런 식으로 엿을 먹이려고 할 줄이야. 설마하니 본 채를 수몰시키려고 제방까지 터뜨릴 줄은 몰랐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미계수가 고개를 젓자 이번에는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천서채주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그게 아니라니? 지금 저 물줄기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그놈은 우릴 전멸시키려고 치밀하게 준비…….”
“상대는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덤이겠죠.”
“덤?”
이번엔 투왕 역시 기분이 언짢은 듯 이맛살을 구겼다.
그럼에도 미계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예, 제방을 터뜨려서 우리를 수몰시킬 수 있다는 건 좋은 계책이긴 하지만, 지금처럼 실패할 가능성도 큽니다. 그걸 무릅쓰고 하기에는 판이 너무 커지죠.”
“그럼 대체 왜…….”
“수로채입니다.”
“도대체 뭔 소리야? 물 폭탄을 맞아도 우리가 맞지, 반대편에 있는 수로채가 왜 위험해진다는 거냐?”
그러자 미계수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정말 모르시겠어요? 이러니 우리 녹림이 무식하단 소릴 듣는 거라고요.”
“뭐가 어째? 네놈이 문자 좀 익혔다고 이렇게 날 무시하는……!”
“자자, 생각 좀 해보세요. 저 물줄기가 어디에서 쏟아지는 겁니까? 거슬러 올라가면 어디로 이어지냐고요.”
“그야 당연히 파양호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지. 거슬러 올라가면 강랑산 인근이…… 아!”
그제야 천서채주가 제 허벅지를 탁 치며 입을 딱 벌렸다.
다른 녹림인들도 입을 척 벌리고는 이제야 깨달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계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장강의 수귀들이 더 이상 수귀가 아니게 생겼습니다.”
“흐음. 그건 좀 골치 아프겠군.”
투왕이 진심으로 걱정이 되는 듯 침음을 흘리며 말했다.
수황은 개인적으로 그의 경쟁 상대였다.
하지만 수황이 누군가에게 꺾이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다.
만약 수황이 패한다면 그를 찍어 누르는 누군가는 반드시 자신이 되었어야 했다.
투왕이 주먹을 불끈 쥐고는 말했다.
“가자. 수귀들이 뭍에서 귀신이 되기 전에 구해야 한다.”
“복명!”
이구동성으로 대답한 녹림인들이 속도를 더욱 높여서 달리기 시작했다.
* * *
꾸구구우우웅!
물길 끝에서 아스라이 폭음 소리가 울려왔다.
동시에 먼발치에서 세 떼가 푸드득 날아오는 모습이 보였다.
드넓은 장강을 오가는 수귀들은 누구보다도 시력이 좋다.
그들은 날아오르는 새 떼들을 보면서 뭔가 변고가 생겼음을 눈치챘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변화인지는 알아채지 못했다.
“산적 놈들이 벌써 도착한 건가?”
수황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동소유가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그들에게 폭약까지 쓸 이유가 있을까요?”
“산적 놈들을 무시하는군.”
“녹림채를 ‘산적 놈’이라고 부르시는 주군이 그런 말씀을 하시니 좀 이상한 걸요.”
“후후. 그런가? 어쨌거나 그놈들은 잡초를 닮았지. 하나하나가 뽑으면 뽑히는 잡초에 불과하지만, 절대로 완전히 제거할 수 없는 잡초. 그들이라면 폭약을 쓸 만도 하다.”
하지만 수황은 곧 자신의 짐작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유영을 하며 적의 배에 올라타거나 수중전을 펼치는 수귀들은 상황이 변하고 있음을 빠르게 간파했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하나같이 같은 생각이 떠오르고 있었다.
‘흐름이 달라졌다!’
물살이 다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사실 아직까지는 그 변화가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지만, 수귀들은 그 미세한 흐름까지 파악한 것이다.
그리고 은황선에 올라탄 수황과 동소유도 마찬가지.
“달라졌다.”
“그렇군요.”
수황과 동소유가 말을 주고받았다.
물의 흐름이 달라졌다.
범인이라면 눈치를 채기 어려울 정도지만, 확실히 배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었다.
곧이어 수황의 입에서 믿을 수 없는 명이 떨어졌다.
“후퇴하라.”
“존명!”
동소유는 조금도 반박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물의 흐름이 변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수황의 명이 옳다고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물살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은황선은 보통의 거선보다 훨씬 빠른 움직임을 자랑한다.
하나 그래도 무게가 상당한 거선이다.
뿐만 아니라 화공에 대비해서 배 곳곳에 철판을 덧붙여 방화시공을 하는 바람에 더욱 무거워졌다.
그러다 보니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빠르게 후퇴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은황선뿐만 아니라 모든 수로채 배가 후퇴를 시도했다.
적이 빠져나가려고 하자, 무림맹 무인들이 찰거머리처럼 엉겨붙어 갔다.
“놈들이 달아난다! 붙잡아라!”
“도망치지 못하게 하라!”
무림맹 수뇌부가 일제히 명을 내렸다.
수귀들이 이를 빠득 갈았다.
“누가 도망친단 말인가!”
“작전상 후퇴란 말도 모르냐!”
하지만 후퇴는 후퇴다.
수귀들의 자존심이 구겨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리고 마침내 수황이 가장 우려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제일 먼저 은황선에서 반응이 왔다.
구그그그그긍……!
배가 앓는 소리를 내더니 수면에 박혀 버린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젠장!”
동소유가 욕지거리를 쏟아내며 난간으로 달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곧 주위를 둘러보고는 낭패한 표정으로 수황을 돌아보았다.
“수, 수면이…… 얕아졌습니다! 저판이 바닥에 닿은 것 같습니다!”
“주군! 우선 은황선을 버리고 다른 배로 이동하셔야……!”
“지금 제정신인가?”
수황이 장무령의 말허리를 자르며 정색했다.
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된 이상 제하분주(濟河焚舟)의 각오로 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