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56화 (257/301)

256. 산궁수진(山窮水盡)

은황선이 가장 먼저 멈췄다.

배의 크기와 무게를 고려하면 당연한 이유였다.

파양호 강랑산 인근.

과거 명태조 주원장이 대승을 거두면서 천하를 삼키는 시발점이 되었던 곳.

하나 당시 주원장이 구사일생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수심 때문이었다.

한데 그 전투와 유사한 상황에 놓이면서 고립되고 말다니!

근 십 년간 이곳은 수심이 얕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방심했다.

제방 때문에 깊은 수심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로 당연하게만 생각했다.

그리고 그 제방을 무너뜨릴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제방은 강랑산 근역에서 꽤 먼 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전략과 전술을 짤 때 거기까지 세심히 살펴보지 않은 게 실수다.

사실 살펴봤다고 하더라도 제방을 무너뜨려 수심을 조절할 거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게다가 이곳은 장강에서 살짝 벗어난 곳이어서 수로채에게 익숙한 곳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이제 와선 핑계일 뿐.

수심은 빠르게 얕아지고 있었다.

은황선에 이어 다른 채주들의 누선도 하나둘 저판이 바닥에 닿으면서 고정되기 시작했다.

수귀들의 표정에 당혹감이 역력해졌다.

“수, 수심이……!”

“젠장! 이놈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구나!”

“우리가 그리 만만하더냐!”

수귀들이 으르렁거리면서 분통을 터뜨렸다.

하지만 배를 띄울 수 없는 곳에서는 그들의 전력이 삼 할 이상 떨어진다는 게 무림통설이다.

그리고 그건 어디까지나 사실.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하는 모든 변수들이 사라진 셈이었다.

배는 바닥에 고정됐고, 물은 흐르지만 수심이 얕아서 익사할 위험이 희박해졌다.

이런 속도로 계속해서 얕아지면 비조선을 타는 의미조차 없어질 듯하다.

당황한 수귀들에게 무림맹 무인들은 거침없이 휘몰아쳐 왔다.

“크하하하! 놈들이 맥을 못 추기 시작했다! 짓밟아라!”

“우와아아!”

무림맹 무인들이 함성을 내지르면서 수귀들을 덮쳐갔다.

“제기랄! 이 개 같은 무림맹 것들!”

카앙! 캉캉! 차아앙!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가 강랑산 근역에 마구 울려 퍼졌다.

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전세는 수로채에게 더욱 불리해지고 있었다.

언제 나타난 것인지 뭍에서 달려온 무인들이 두 배, 세 배 자꾸만 불어나고 있었다.

“사파 나부랭이들은 공동파의 복마검을 받아라!”

“정의를 무시하는 것들에게 청성파가 하늘을 대신하여 벌하노라!”

“북도문이 악인을 처벌하러 왔다!”

여기저기에서 호통 소리가 마구 터져 나오면서 함성이 이어졌다.

정말이지 바닷가 밀물처럼 무인들이 거침없이 밀어닥치고 있었다.

“제길! 장강의 수귀가 누군지 보여주어라!”

마침내 은황선에 타고 있던 선귀단주 장무령이 사자후를 터뜨리며 갑판 아래로 뛰어내렸다.

첨벙!

은황선이 움직이진 못할 정도지만 그래도 아직은 물이 깊어서 성인이 충분히 잠길 정도는 됐다.

문제는 수중 모래 언덕이 높게 형성된 곳은 물길이 허리춤까지만 온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물에서 싸운다면 수귀가 유리하지만, 적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까불지 마라! 나약해 빠진 무림맹 것들아!”

장무령이 호통을 치면서 물 위로 솟구쳐 올랐다.

츄아아아!

곧 그가 수상비를 펼치며 적을 베어갔다.

츄아악! 촤아악!

그의 일검에 무림맹 무인들이 맥을 못 추면서 쓰러져 갔다.

투파파파파앙!

일검을 휘두르면 수면의 물방울들이 춤을 추듯 튀어 올랐다.

그 바람에 그의 검술은 무척 화려해 보였다.

하나 그건 단지 화려함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물보라가 일어나면서 적의 시야를 가리게 되고 그 틈을 이용해 요혈을 공격하는 검식이다.

화려한 효과는 덤이다.

“크아악!”

“으악!”

장무령의 검초에 무림맹 무인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자 수귀들도 기세를 끌어 올리며 맞서기 시작했다.

“우와아! 단주님을 따르자!”

“이 비겁한 놈들을 도륙하자!”

수귀들이 죽기 살기로 검을 휘두르자 다시 전투의 양상이 백중지세로 흐르기 시작했다.

“흥! 가소로운!”

이를 지켜보던 의협당주 노상국이 코웃음을 치더니 순간 경공을 펼쳐 장무령을 향해 날아갔다.

순식간에 다다른 그가 검을 벽력처럼 내려쳤다.

쉬이이잇!

“헛!”

위기의식을 느낀 장무령이 얼른 몸을 휘돌리면서 노상국의 일검을 막아냈다.

쩌어엉!

기파가 사방으로 퍼져 나가자 물결이 거칠게 일어나면서 파문을 만들었다.

쿠파파파파!

그 바람에 주변에서 뒤엉켜 싸우던 수귀들과 무림맹 무인들이 중심이 흐트러지면서 넘어졌다.

“감히 수적 주제에 본 맹을 우습게 보는가!”

쩌정! 쩡! 까앙!

“크읏!”

노상국은 분노에 찬 검을 마구 휘둘러댔다.

확실히 수심이 얕아지고 발이 바닥에 닿으니 노상국의 무위가 올라오고, 반대로 장무령의 무위는 내려갔다.

하나 그래도 아직은 물속이다.

장무령이 수중에서 보법을 밟자, 그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노상국 옆으로 돌아갔다.

쉬이이이잇!

“헛!”

노상국이 헛바람을 삼키면서 물러나려고 했다.

하지만 앞서 장무령이 보법을 밟으면서 이동하는 바람에 물의 흐름이 그의 발걸음을 방해했다.

‘이런……!’

짧은 순간이지만 노상국은 목숨이 위태롭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리고 이들을 괜히 수귀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단 한 번의 수중보법으로 물의 흐름을 바꿨고, 그 작은 변화로 인해 자신의 움직임을 일순 둔감하게 만든 것이다.

아주 미약한 방해 요소에 지나지 않았지만 고수의 영역에 다다를수록 그 작은 변화에 틈이 생기는 법.

‘여기까지구나.’

노상국은 자신의 경거망동을 후회하면서 두 눈을 부릅떴다.

최후의 순간을 피하고 싶지 않았기에.

하지만 뜻밖에도 도움의 손길이 뻗어왔다.

까아앙!

거친 금속성과 함께 그 사이로 한 인영이 바람처럼 흘러 들어왔다.

촤아아앗!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이 멈춰 선 그는 다름 아닌 곤륜파의 일대제자인 한성균(漢城均)이었다.

이제 겨우 서른 중반에 이른 그는 곤륜파에서 백 년 만에 나타난 기재로 추앙받고 있었다.

벌써 곤륜파 장문인보다도 뛰어난 무위로 인정받았으니 말 다한 셈이 아닌가?

그 명성만큼이나 그의 신법은 호쾌하고 날렵했다.

파바밧!

수면을 미끄러졌던 그가 곧장 보법을 밟으면서 장무령의 턱을 걷어찼다.

퍼억!

“크억!”

뻗어냈던 검을 회수하던 장무령이 비명을 내지르며 벌러덩 넘어갔다.

첨벙!

그가 물속에 빠지기가 무섭게 한성균이 몸을 수평으로 눕히더니 그대로 일검을 내질렀다.

정말이지 귀신도 놀랄 정도로 경쾌한 신법이었다.

어째서 경공의 최고 경지로 곤륜파의 운룡대구식을 운운하는지 알게 하는 신법이랄까?

한성균의 검첨이 그대로 물속을 파고들어 장무령의 미간을 뚫으려는 찰나,

“어딜!”

촤라라라라라!

날카로운 고함 소리와 함께 동소유가 날아들었다.

순식간에 뻗어나간 채찍은 강기를 머금고 있었기에 마치 엿가락처럼 늘어났다.

“칫!”

혀를 찬 한성균이 몸을 회전시키면서 얼른 물러났다.

쿠파파파파파앙!

그대로 수면을 때린 채찍이 커다란 물의 장벽을 만들어냈다.

그러는 사이 장무령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단주님, 감사합니다!”

“언제까지 단주야? 이젠 네가 단주야.”

동소유가 쌀쌀맞게 대꾸하자 장무령이 피식 웃었다.

말은 거칠지만 그녀의 속내가 누구보다 따뜻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녀를 악녀라고 손가락질하지만, 그는 다르게 생각했다.

흡정미색공으로 뭇 남성들의 정기를 빨아먹는다곤 하지만, 늘 힘없는 여인들을 유린한 자들만을 대상으로 삼았다.

그녀 나름의 정의가 존재한 셈이다.

어쨌거나 동소유의 등장으로 장무령은 천군만마를 등진 것과 같은 안심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파아아아앙!

고막을 찢을 듯한 파공성을 이끌면서 먼발치에서 화살 세 대가 날아들었다.

츄우우우우우우!

공기를 가르는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그 한참 아래로 흐르는 물살마저 양갈래로 나뉘고 있었다.

화살을 쏜 자는 신궁 축일공이 틀림없으리라.

분명 먼발치에서 날아든 화살이었는데 눈 깜빡할 사이에 코앞까지 날아들었다.

‘위험!’

눈 뜨고도 코 베인다더니.

눈 뜨고 화살을 막지 못해 심장이 뚫릴 판이다.

창졸지간!

쿠파파파파파파앗!

동소유와 장무령 앞으로 거대한 얼음장벽이 순식간에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곧이어,

쿠콰아아앙!

얼음장벽이 폭발하듯 산산조각 나며 터져 나갔다.

동시에 얼음장벽에 부딪친 철시 세 자루가 주변으로 날아가 물에 빠지거나 배에 꽂혔다.

후우우우웅!

츄아아아아아!

기다란 장창을 옆구리에 낀 채 수면에 도도하게 서 있는 은발의 사내.

바로 수황 무자강이었다.

그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주변을 훑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본좌가 우습게 보이는가?”

서릿발 같은 위엄이 서린 목소리로 읊조린 수황.

그의 발밑으로는 살얼음이 엷게 깔려 있었다.

그의 본격적인 등장만으로도 주변의 무인들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꿈쩍하지 못했다.

꿀꺽……!

중원에서 내로라하는 무인들이 가득 모인 전장.

강호명숙들조차도 숨을 죽이고 마른침을 삼키게 만드는 존재.

수황이 마침내 전면에 나선 것이다.

* * *

“드디어 납셨군. 판은 뒤집었으니, 사뿐히 즈려밟을 차례인가?”

천리경을 내린 가후가 빙그레 미소 짓고는 옆에 선 무인을 향해 나직이 읊조렸다.

“무대는 완성이 됐다. 천림을 열어라.”

“존명!”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보인 무인이 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하늘로 쏘아 올렸다.

삐이이이익! 파앙!

허공을 가르며 솟구친 폭죽이 하늘을 수놓았다.

* * *

강랑산 전투 상황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

절벽이나 다름없는 그곳에서 몸을 낮게 숙이고 상황을 지켜보던 신성대는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다.

“저거였군요. 수로채를 일망타진할 수법이.”

묵검의 말에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원래 이곳은 수심이 얕은 곳. 명태조도 진우량 군대와 싸울 때 모래사장에 배가 묻혀 구사일생한 경험이 있다지요.”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어린 적비연은 그런 역사를 자세히 모르고 있었지만, 아상 등의 기억을 가지면서 역사에도 조예가 깊어진 탓이다.

모두들 파양호 전투에서는 화공만 떠올린다.

쇠사슬을 서로 연결한 배를 화공으로 일망타진한 전황.

하나 그 이전에 주원장은 수심 얕은 곳에서 배가 고립되어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었다.

가후는 바로 그 부분을 이용한 것이다.

모든 이가 화공만 신경 쓰고 있을 때, 그 앞서 스치듯 일어났던 사건을 떠올린 것이다.

‘과연 가후다. 하지만 그조차 만통지가 읽었구나.’

전황은 시시때때로 바뀌었다.

수로채가 열세에 처하는가 싶더니, 수황의 개입으로 다시 우세를 차지하고, 다시 강호명숙들이 대거 투입되자 수로채가 위기에 몰렸다.

그 시점에 마침 후방으로 돌아갔던 투왕이 녹림채를 이끌고 당도했다.

다시 전세는 사파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 않았다.

단휘가 바로 옆에서 반대편을 보며 경악으로 소리친 것이다.

“저, 저, 저기……! 엄청난 놈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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