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 변수
단휘가 가리킨 방향으로 신성대원들이 시선을 돌렸다가 입을 딱 벌렸다.
그들 모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돌처럼 굳어 버렸다.
“맙소사……!”
예홍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단휘가 가리킨 곳은 파양호가 너르게 펼쳐진 호수 복판이었다.
어디 발 디딜 곳 하나 보이지 않는 수면 위.
그런데 그 위를 새 떼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자들이 있지 않은가?
도대체 저들은 어디에서 나타났단 말인가?
초인적인 공력을 지니지 않고서야 어찌 사람이 저 바다처럼 너른 호수를 가로지르며 달릴 수 있단 말인가?
물론 저들이 반대편 호숫가에서 수상비를 펼치며 달려오기 시작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나룻배나 비조선을 타고 오다가 어디선가부터 달리기 시작했으리라.
한데 그 시발점이 전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는 게 놀랄 일이다.
게다가 엄청난 속도!
“보패인이다!”
엽강호가 딱딱하게 경직된 표정으로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 신성대원들의 표정이 더욱 굳어졌다.
말로만 듣던 보패인이다.
물론 이들 중에는 직접 보고 겪은 자들도 있다.
하지만 제대로 손을 섞어본 적은 없었다.
이번에도 초절정의 극을 넘어선 저들과 손을 섞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야말로 살인병기들이 한꺼번에 들이닥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게다가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도, 도, 도대체 저게 다 몇 명이야?”
단휘가 더듬거리자, 눈살을 찌푸리고 있던 현청이 신음처럼 목소리를 흘려냈다.
“서른 명은 되어 보이는군요.”
“맙소사. 서른 명이라니. 천해경의 경지에 이른 자들이 서른 명이 넘는다고? 그게 말이나 돼?”
신성대원들이 술렁거리면서 소란스러워졌다.
상대할 수 없는 절대고수가 서른 명이라니.
반면 이쪽은 적비연과 흑천련주, 수황 정도가 고작이지 않은가?
범위를 좀 넓히자면 교패와 투왕도 손꼽을 수는 있으리라.
하지만 저쪽은 서른 명이 넘는다.
거기에는 무림맹주나 여타 강호명숙들을 포함시키지도 않았는데!
“저, 저런 자들과 싸울 수 있다고?”
“젠장! 이 전쟁…… 이길 수 있긴 한 거야?”
보패인의 등장은 불굴의 의지를 다진 신성대원들조차 흔들어 버렸다.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들불처럼 번진다.
희망은 서서히 피어오르지만, 절망은 빠르게 전염되는 법.
모두의 안색이 대번에 어두워지는데, 적비연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말을 뱉었다.
“두려운 자는 돌아가도 좋다.”
“……!”
“아니, 당장 돌아가라.”
“주군…….”
“이미 마음에서 패한 자는 함께 싸워봐야 짐만 될 뿐이야. 죽기보다 어려운 게 살아남는 거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죽기가 두려워 희망도 버린 자는 반드시 죽는다. 그러니 차라리 지금이라도 돌아가라. 그게 자신과 동료를 위한 길이니까.”
적비연이 조곤조곤 잇는 말에 잠시나마 흔들렸던 신성대원들의 표정이 차츰 차분해져 갔다.
적비연이 그런 신성대원들을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의 임무는 단 하나다. 이 싸움을 끝내라는 것이 아니야. 만통지가 세운 전술대로 우린 수귀들을 최대한 구하는 것이다. 저들이 진짜 원혼에 찬 물귀신이 되지 않도록. 장강의 수귀라는 이름만으로도 우리에게 지금까지처럼 힘이 될 수 있도록. 적을 섬멸하라는 게 아냐. 하나라도 더 구하는 거다.”
“저희들이 나약한 마음을 먹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한사였다.
그는 불안한 마음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었지만, 내심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동요하고 있었다.
“제길! 정면승부를 하자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든 버티자는 거잖아! 우린 최정예다! 맡은 바 임무만 다하면 되는 거야! 그래 봐야 죽기밖에 더 하겠어?”
“맞아요! 언제는 우리가 이길 싸움만 골라서 했었나요? 불가능하고 어려운 싸움을 계속 해나가는 게 무인이 걸어가는 길이죠.”
임송화도 다부진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몇몇이 호승심을 끌어올리자 분위기는 대번에 반전되었다.
다시금 사기가 충전된 걸 본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절벽 아래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치열한 접전.
하지만 보패인이 들이닥치는 순간 전세는 빠르게 기울 것이다.
“모두 준비!”
적비연의 명을 묵검이 그대로 복창하자, 신성대원들이 일제히 허리에 줄을 묶기 시작했다.
적비연이 돌아보았다.
“그동안 녹림채에게 요령은 확실히 배웠을 테니 믿겠다.”
신성대원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 * *
쩌엉! 쩡!
츄아아아아!
요란한 금속성이 울리면서 물줄기가 춤추듯 튀어 오른다.
그 물줄기를 가르면서 철시가 쉼 없이 날아든다.
따다다앙!
츄아아아앗!
물살을 가르며 수황이 대여섯 장이나 미끄러지듯 물러났다.
동시에 수황은 여의수룡창을 횡으로 그었다.
“흐아아앗!”
촤촤촤촤촤촤촤아앗!
부채꼴로 흩어지며 날아오는 물줄기가 그대로 뾰족한 얼음 가시로 변하며 한기를 풀풀 휘날린다.
“크아악!”
“카악!”
얼 음가시에 몸이 관통당한 무림맹 무인 대여섯 명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츄아아아앙!
얼음 가시는 순식간에 녹아 버리면서 피 섞인 물이 되어 흘러내린다.
“과연 끔찍한 자로군요!”
“저자만큼은 확실히 제거해야 하네!”
한성균과 공동파 문주인 순양진인(純陽眞人)이 각자의 검을 들어 올리며 각오를 다졌다.
하지만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화려한 경공술을 자랑하던 한성균은 이미 허벅지를 깊이 베였고, 순양진인은 내상이 꽤나 심한 상태였다.
게다가 지금 전장 한쪽에서는 녹림채가 갑자기 들이닥쳐서 난리가 난 상황.
녹림채가 이곳까지 밀고 오기 전에 수황을 처리하는 것이 좋다.
마침내 그들 곁으로 화산파 장문인 청호진인이 다가와 검을 보탰다.
곧이어 낙양문주 천기림도 나타나 대도를 뽑아 들고는 도강을 줄기줄기 뿜어냈다.
“수귀들의 우두머리! 이곳이 네가 수장될 장소가 되리라!”
천기림이 기세 좋게 소리치자, 수황이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늙은이 셋과 애송이 하나. 고작 당신들로 본좌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까불지 말고 꽁꽁 숨어 있는 축일공이나 나서라고 해라.”
“노오옴! 건방이 하늘을 찌르는구나!”
파파파앗!
네 사람이 동시에 수상비를 펼치면서 수황을 향해 달려갔다.
그와 동시에 강기를 머금은 철시 한 자루가 섞여들었다.
‘제법!’
수황은 이번만큼은 철시를 정면에서 막을 수 없다는 걸 눈치챘다.
그랬다간 충격을 흡수하는 동안 네 명의 강호명숙들이 합공을 해서 위기에 처할 수 있었다.
수황이 물 위를 미끄러지다시피 달려가면서 여의수룡창을 뻗었다.
키이이이이.
강기를 머금은 철시가 여의수룡창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면서 지나쳤다.
마지막으로 수황의 신형에 이르러서는 호신강기에 빗겨 맞듯 튕겨 나가면서 은황선 옆구리를 때렸다.
콰아앙!
은황선 옆구리가 터져 나갔다.
이제 물은 바짝 말라 버려서 정강이까지만 차오른 상태.
이미 은황선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본좌를 능멸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수황이 사자후를 터뜨리면서 창무를 추었다.
기다란 창이 오로지 수직으로 움직인다.
횡으로 그어진 창은 그대로 직각을 이루며 솟구쳐 올랐다가 다시 수평으로 누우면서 허공을 벤다.
보기에도 무거운 창을 어찌 저렇게 움직일 수 있는지 보고도 믿기 어려울 정도다.
네 명의 무인들이 당황하며 창을 막았다.
따앙! 땅땅! 땅!
정강이까지 차오르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직 물이 있다.
이 작은 변수가 수황에게는 훨씬 유리하다.
절대고수의 경지에 오른 수황이 아닌가?
마침내 여의수룡창이 한 줄기 빛을 이끌면서 사선으로 그어 올려졌다.
처음으로 직각 움직임을 벗어났다.
운룡대구식이 허공에서 예측불허의 움직임을 구사한다면, 지금 수황이 부리는 여의수룡창이 그와 닮았다.
그 예측 불허한 움직임에 천기림이 경악하며 물러나다가 섬뜩한 감각을 느꼈다.
서걱!
츄아아아아!
“크아아악!”
천기림이 몸을 비틀며 비명을 터뜨렸다.
놀랍게도 그의 왼팔 하나가 싹둑 잘려나가 물에 빠진 게 아닌가?
“낙양문주!”
“괜찮으십니까?”
순양진인과 한성균이 동시에 소리쳤다.
“크으으읍!”
팍팍팍!
천기림이 어금니를 꽉 깨물고는 얼른 혈을 점해 지혈했다.
그때,
“……!”
수황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맹한 기운에 눈에 힘을 주고는 파양호가 펼쳐진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건……?”
물 위를 미끄러지듯이 날아오는 무리.
살기와 투기가 마구 뒤 섞인 무인들이 정말이지 무서운 속도로 달려오고 있지 않은가?
수황의 시선을 따라간 다른 무인들도 그들을 보았다.
반응은 극과 극!
“저, 저것들이 대체 뭐야? 사람이야?”
“우리 편은 아닌 것 같은데?”
“도대체 어디서 달려오는 거지?”
수귀들은 아연실색했고, 무림맹 무인들은 환호성을 내지르며 반겼다.
“와아아! 천림이다!”
“저들이 천림!”
“역시 대단하구나!”
그 순간 수황이 흠칫거리고는 고개를 홱 돌렸다.
아뿔싸!
보패인의 등장으로 경악한 그가 잠깐 주의력을 빼앗긴 사이 강기를 머금은 철시가 날아들고 있었다.
신궁 축일공이 그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칠 리가 만무할 터!
수황은 고개를 돌리면서도, 자신이 완전히 돌아섰을 때는 이미 화살이 심장을 뚫을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런데,
투아아아앙!
촤촤촤촤촤촤촤아앗!
뜻밖의 소리가 울리면서 물보라가 마구 일어나더니 묵직한 무언가가 등에 툭 부딪치는 것이 아닌가?
그제야 완전히 돌아선 수황이 찢어질 듯 부릅뜬 눈으로 자신을 등진 투왕 추야성을 보았다.
놀랍게도 몸을 둥글게 만 추야성이 철시를 두 손으로 붙잡은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지 않은가?
피부가 돌처럼 단단해지는 방탄암신공을 펼쳤음에도 손바닥이 찢어지고 화상까지 입어서 피가 흐르고 탄내가 났다.
“네놈……!”
“클클클, 수왕. 너 내가 한 번 살렸다. 새끼가 어디 이런 곳에서 뒈지려고 그래? 넌 나한테 뒈져야지. 안 그래?”
“누가 너 따위에게 도움을…….”
“킥킥킥. 이 와중에 자존심 세우냐? 넌 내가 안 나섰으면 지금쯤 심장에 구멍이 뻥 뚫렸을걸?”
“막을 수 있었다.”
“개소리.”
수황이 어금니만 꽉 깨문 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투왕의 말대로 개소리였으니까.
축일공을 등지고 보패인들에게 시선을 빼앗기다니.
신궁을 너무 우습게 본 것이다.
아니, 우습게 보지 않았다.
단지 보패인들의 기세가 너무 강해서 심지가 잠깐 흔들린 것이다.
“빚은 갚으마.”
수황의 말에 투왕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크하하하하! 그 빚을 죽을 때까지 갚을 일이 있을까 모르겠네. 난 어지간해서는 죽을 일이 없거든!”
“그야말로 개소리군.”
“흥! 개소린지 아닌지는 두고 보면 알 테지!”
그러는 사이 수상비를 펼치며 달린 보패인들이 마침내 근거리까지 당도했다.
찰나, 가장 앞선 보패인이 두 손을 활짝 펼치자, 허리춤에서 쌍검이 뽑혀 나오더니 곧장 수황과 투왕에게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수황과 투왕이 동시에 소리쳤다.
“이기어검이다!”
수상비를 펼치면서 동시에 이기어검이라니.
무슨 저런 괴물 같은 것들이 다 있나?
“주군! 위험합니다!”
마침 다른 곳에서 싸우던 동소유가 얼른 날아와 이기어검을 막아서며 채찍을 휘둘렀다.
촤라라라라랏!
파파아앙!
하지만 채찍은 애꿎은 허공과 수면만 때릴 뿐이었다.
보패인이 날린 검은 그대로 궤적을 바꾸면서 동소유를 향해 쏘아졌다.
말 그대로 기를 이용해 검로를 조종할 수 있는 경지.
“이것들이!”
수황이 사자후를 터뜨리더니 그대로 여의수룡창을 이기어창으로 날렸다.
쉬이이잇, 까아앙!
청명한 금속성과 함께 검 한 자루가 튕겨나갔다.
하지만 나머지 한 자루가 동소유의 목을 향해 곧장 날아들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쿠차앙!
하늘에서 검 한 자루가 벼락처럼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전장의 모든 무인들이 고개를 꺾어들고는 하늘을 보았다.
적비연을 비롯한 신성대원들이 새카맣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 많은 인원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함성이 천지를 격동했다.
“우와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