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58화 (259/301)

258. 변수

촤촤촤아악!

섬뜩한 파육음에 이어 피분수가 곳곳에서 솟구쳤다.

일검에 세 명의 적을 베어 버린 적비연이 사자후로 소리쳤다.

“수로채를 엄호하라!”

“존명!”

신성대원들이 일제히 대답하면서 방진을 펼쳤다.

지난 며칠간 만통지가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만든 엄호 진법이었다.

육각방진(六角防陳)이라 이름 붙였는데 철저하게 수중 전투에서 오로지 방어를 위한 진법이었다.

그 이름처럼 신성대는 육망성 모양으로 진을 펼치면서 뻗어나갔다.

육각방진의 크기는 물결만큼이나 자유롭다.

중요한 것은 육망성을 그리는 바깥쪽 무인들이 그 형태를 잃지 않는 것이다.

다소 복잡해 보이는 방진이었기에 한 명이라도 자리를 이탈하거나 사망하게 되면 방진이 순식간에 허물어질 수 있다.

해서 그럴 경우를 대비해 항상 안쪽 진형에 대기한 무인들이 빈자리를 채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쳐라!”

적비연의 명이 떨어지자

진형 바깥쪽에 위치한 육망첨(六芒尖)들이 일제히 산개하며 날아올랐다.

방진이 커지자 내부에 자리 잡은 신성대원들은 곧바로 근거리의 적들을 도륙해갔다.

촤아앗! 츄아앗!

그간 적비연으로부터 고된 훈련을 받은 자들이었다.

수로채가 수중 전투에서는 무적이 되듯이, 신성대는 이 육각방진에서만큼 무적이 된다.

적의 입장에서는 살검을 피해 돌아서면 거짓말같이 또 다른 살검이 나타나니 경악할 노릇이다.

육각방진의 유기적인 움직임은 마치 물의 흐름과도 닮았다.

각기 따로 노는 듯하지만 결국 서로가 영향을 주며 이끌거나 밀어낸다.

점성이 없는 듯하면서도 점성이 있는 물처럼.

몹시 자유분방한 방진 같으면서도 그 안에 유기적인 흐름이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육각방진에 대해 모르는 자들은 그저 거추장스러운 압박이 되거나 물의 저항처럼 귀찮기만 할 뿐이다.

경공을 펼쳐서 이동해야 할 빈자리에는 어느새 신성대원이 살검을 내밀고 있으니 환장하지 않겠나?

한데 수로채에겐 다르다.

육각방진을 직접 겪은 적이 없는 그들이지만, 방진 안에 위치한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육각방진을 구성한 무인들이 아군이어서?

아니다.

육각방진의 유기적인 움직임이 물의 흐름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만통지가 한 달 가까이 파양호의 수면을 보면서 구상한 방진이니 그들에게는 이보다 친숙할 수가 없다.

반면 무림맹 무인들은 물에 빠진 생쥐처럼 허우적거리느라 여념이 없다.

하늘을 날아다닌다는 한성균도, 일검으로 태산을 쪼갤 기세로 호통치던 수양진인도 정신없이 허우적댄다.

그리고 육각방진에서도 위치에 구속되지 않고 자유로이 돌아다니는 한 명.

적비연이 방진 안에서 종횡무진하며 적들을 쓸어갔다.

그는 재빨리 수황과 투왕에게 달려가 소리쳤다.

“두 분은 나와 함께 보패인들을 막읍시다!”

“알겠소.”

“좋아, 가자!”

수황과 투왕이 동시에 대답하며 몸을 날렸다.

그러는 사이 육각방진에 갇혀서 허우적거리던 낙양문주 천기림은 이를 빠득 갈았다.

“벽력적가주가 흑천련과 붙어먹었다더니 사실이었구나! 지금 나타난 놈들은 벽력가의 문도들이다! 변절자를 처단하라!”

그의 노기 서린 음성에 낙약문도들이 기세를 끌어올리며 맞서갔다.

그런데 어느 순간 그가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흠칫거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가만, 저 아이는……?”

천기림의 눈동자가 격하게 떨렸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임송화가 기합성을 내지르며 연신 살검을 뿌려대고 있었다.

단휘와 예홍과 함께 신성대원으로 재회하고 나서는 그녀와 현청이 더 이상 인피면구를 쓰지 않았던 것이다.

마침 임송화도 천기림을 보고는 멈칫거렸다.

살기가 난무하는 전장 속에서 두 사람만이 서로 눈을 정확히 마주치고 있었다.

“너, 너는……!”

천기림이 잠깐 비틀거렸다.

무림맹의 비밀 특임을 맡고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임송화가 아닌가?

한데 벽력적가와 함께 흑천련의 앞잡이가 되어 싸우고 있을 줄이야.

이내 정신을 차린 천기림이 단숨에 경공을 펼쳐 임송화 앞으로 날아갔다.

“화야! 화가 틀림없구나! 네가 어찌 이곳에 있느냐!”

“사부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임송화가 쓴웃음을 깨물며 답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주변에서는 피 튀기는 살육전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모든 살기를 내려두고 대화에만 집중할 수 있는 것은, 육각방진이 임송화를 보호하고, 낙양문도들이 천기림을 엄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혹시 세뇌? 아니지, 그랬다면 날 알아보지도 못했을 터. 내가 모르는 협박이라도 받은 것이더냐?”

천기림이 다그치듯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아는 임송화는 자유분방하긴 해도 사파와 손을 잡을 정도로 어리석은 아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떤 그릇된 사상에 휩쓸릴 아이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계산적이고 손익을 분명히 따지는 아이.

설마 임송화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을 받은 것일까?

아무리 그래도 위험한 걸 본능적으로 기피하는 아이가 그럴 리가.

복잡한 생각으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는 가운데 임송화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사부님. 그간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설마 변절했다고 말하려는 것이냐?”

“변절이 아닙니다. 모르던 것을 깨달았을 뿐이에요.”

“네가 모르던 것이 무엇이더냐? 세상물정을 깨달은 것이더냐?”

잠깐 눈을 동그랗게 떴던 임송화가 이내 피식 웃었다.

우습지 않은가?

수제자를 무림맹에 넘기고 거금을 받은 낙양문주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세상물정에 누구보다 밝았다는 것을 사부님도 잘 아실 텐데요.”

“그랬지. 너는 그런 아이였지. 그래서 그 세상물정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더냐! 흑천련이 네게 무엇을 제안했더냐?”

“풋.”

“어찌 웃느냐!”

“아마 들어보시면 사부님도 혹하실 거예요.”

“뭐라? 감히!”

“협의를 지키고 정의를 수호하려는 겁니다.”

“뭐?”

천기림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눈빛에 임송화가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사부님. 저를 믿으신다면 무림맹을 의심하세요.”

“그 무슨 궤변이냐!”

“전장에서 길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지금 나타난 저 보패인들. 저들이 이 자리에 있기까지 얼마나 끔찍한 일이 있었는지는 아십니까?”

“도대체 무슨 말을…….”

“사혈곡에 대해 들으셨겠지요? 그 사혈곡에서 살아남았던 자가 저희들과 함께 싸우고 있다는 것도 아시는지요?”

“그 무슨……!”

“상황이 상황인 만큼 더는 길게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다치셨는데 부디 존체 보존하시길.”

임송화가 가볍게 목례를 해 보이더니 이내 훌쩍 몸을 날렸다.

그 뒤를 천기림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도대체 저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무림맹이 잘못됐다고?

보패인이라니?

천림이라는 조직원들이 보패인이란 말인가?

‘아무래도 제대로 세뇌라도 당한 모양이군.’

천기림은 탄식을 흘렸다.

하지만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뱉어내는 임송화의 눈빛이 뇌리 속에서 떠나질 쉬이 않았다.

격정이 소용돌이치는 전장에서 특별한 재회를 가진 사람은 그 두 사람만이 아니었다.

까앙! 푹! 팍!

“크아악!”

“아악!”

금속성과 비명성이 연신 난무하는 가운데 현청은 화려한 검무를 추었다.

그의 움직임은 한겨울에도 활짝 핀 매화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풀나풀 휘날리는 꽃잎처럼 자유롭게 검무를 추던 현청의 검신이 어느 순간 상대의 검신과 부딪치며 튕겨 나갔다.

쩌엉!

생각보다 강한 반격에 흠칫 놀란 현청이 주춤거리며 물러나다가 눈을 크게 떴다.

“사부님……!”

“설마, 설마 했더니…… 정녕 너였더냐?”

“사부님,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시끄럽다! 네놈은 본 문의 수치다! 어찌 네가 본분을 잊고 저 악당들과 손을 잡았단 말인가! 적을 꺾으라고 보냈더니, 적에게 꺾여 앞잡이 노릇이나 하고 있다니!”

“그게 아닙니다! 악당은 이들이 아니라 무림맹입니다, 사부님! 눈을 뜨셔야 합니다.”

“무, 무엇이? 네놈이 정녕 정신 줄을 놔버렸구나!”

분기탱천한 청호진인이 현란한 보법을 밟으며 검을 뻗어왔다.

비록 내상을 입긴 했지만, 초절정의 경지에 오른 그가 펼치는 검법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주위로 불그스름한 기운이 퍼지는가 싶더니 짙은 매화향이 번져갔다.

따당! 땅! 땅!

폭사하는 검기가 서로 부딪치면서 연신 금속성을 울렸다.

하지만 이미 깊은 내상을 입은 청호진인은 현청을 상대하기에 역부족이었다.

아니, 현청만을 상대한다면 그래도 호각을 이룰 만했겠지만, 지금 이곳은 육각방진 속이었다.

자칫하다간 현청이 아닌 다른 이의 검에 치명상을 입을 수 있었다.

현청 역시 이를 걱정했다.

비록 지금은 척을 졌지만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부가 아닌가?

임송화와는 다르게 현청은 뼛속까지 도인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여 사부인 청호진인이 위기에 처해 죽을 수도 있는 것을 마냥 무시할 수 없었다.

한참이나 검을 섞던 현청이 착잡한 표정으로 소리쳤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용서를!”

퍼억!

“커억!”

현청이 돌연 몸을 뒤틀면서 일장을 뻗어내자 청호진인이 가슴을 움켜쥐며 부웅 날아갔다.

한쪽 무릎을 꿇은 청호진인이 울컥 검은 피를 토해내자 제자들이 우르르 달려와 부축했다.

“사부님!”

“괜찮으십니까?”

현청은 차마 동문들을 볼 면목이 없어 얼른 고개를 돌려 버리고는 다른 이들과 검을 섞어갔다.

한편 보패인들을 가로막아 선 적비연은 마침내 은황선까지 올라선 적들을 보았다.

수황으로서는 자신의 배를 적에게 빼앗긴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참을 수 없는 치욕을 느끼고 있었다.

적비연이 수황에게 얼른 전음을 보냈다.

그러자 수황이 표정을 꿈틀거리고는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보다시피 은황선도 탈취당한 상황이오. 계속 고집을 부린다면 남는 건 아무것도 없을 거요. 자존심? 그 또한 지키지 못할 터.”

“끄음……!”

수황이 주먹을 콱 말아 쥐고는 부르르 떨었다.

잠시 후 그가 탄식을 흘리며 말했다.

“알겠소.”

“그럼 부탁드리겠소.”

적비연의 말끝에 수황이 여의수룡창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꺾어들었다.

마침 은황선 난간에 우뚝 선 보패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배의 주인인가?”

“그걸 안다면 당장 내려와야 할 것이 아닌가!”

수황이 일갈을 터뜨리더니 여의수룡창을 쥐고는 흐르는 물을 단숨에 갈라 버렸다.

찰나지간 수면 아래에서 수룡이 꿈틀거리며 솟구쳐 올라왔다.

쿠오오오오오!

물줄기가 쏟아지며 일어나는 소리가 마치 수룡의 포효처럼 들렸다.

그 장엄한 광경에 투왕조차 혀를 내둘렀다.

“과연 수왕이군. 하지만 겉만 번지르르한 건 여전하네.”

그의 빈정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십 마리의 수룡이 수면을 뚫으며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지는 광경.

보패인들도 어느 정도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이건 또 무슨 재주지?”

보패인 하나가 눈썹을 구기며 중얼거리자, 사납게 뒤엉키며 솟구치던 수룡들이 순간 바짝 얼어붙는 것이 아닌가?

쩌적……! 쩌저적!

다음 순간, 적비연이 투왕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이오!”

“좋아, 박살 내자고!”

적비연과 투왕이 동시에 몸을 날리더니 그대로 얼어붙은 수룡에 일권을 날렸다.

쩌저어엉!

파스스스스스스!

엄청난 공력이 담긴 권강이 작렬하자 수룡은 산산이 부서져 나가면서 주변으로 자욱한 물안개를 만들며 흩어졌다.

“녹림!”

투왕이 소리치자 녹림인들이 약속이나 한 듯 품으로 손을 넣더니 노란 가루를 한 줌씩 허공에 흩뿌렸다.

푸스스스스!

송화산공독(松花散功毒).

말 그대로 송화 가루처럼 보이는 산공독으로 만통지가 녹림괴의와 머리를 맞대고 만든 녹림의 전유물이었다.

때문에 적아를 가리지 않는다.

주변으로 노르스름한 안개가 자욱하게 번지자 한 치 앞도 구분할 수 없는 일대가 대혼란에 빠졌다.

“크읏! 이게 뭐야?”

“제길! 공력이 빠져나가……! 독이다!”

“숨을 멈춰!”

하지만 숨을 멈춘다고 될 일이 아니다.

송화산공독이 퍼진 물안개 범위 밖으로 벗어나야 하는데 주변이 너무 자욱하다.

송화산공독이 퍼지는 것과 동시에 육각방진도 어지럽게 변하면서 방향을 읽기가 더 어려워졌다.

문제는 그 산공독 때문에 피독주를 복용하지 않았던 수로채 무인들도 공력이 쭉쭉 빠져나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제 다시 판을 비틀어 볼 차례!

적비연이 주변을 한 차례 훑고는 소리쳤다.

“출(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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