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59화 (260/301)

259. 난전 속에서

적비연의 명령에 투왕이 목청을 높였다.

“서둘러라! 이 자식들아!”

거친 말투였지만 얼굴은 웃고 있다.

지금까지는 수황과 수로채의 무대였지만, 이제부터는 녹림채가 빛을 발할 시간이 된 것이다

‘흐흐흐! 수왕, 너는 오늘부로 내게 함부로 까불면 안 될 것이야! 본좌가 너와 수로채의 은인이 될 것이니까!’

기분이 좋아진 투왕이 어깨까지 들먹이며 웃어젖혔다.

“크하하하! 당문이 와서 해독제를 내놓을 때까진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니 천천히 서둘러라!”

“투황, 천천히 서두르라는 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하나만 하자고요.”

미계수가 피식 웃으며 핀잔을 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투왕은 기분이 좋아서 껄껄 웃었다.

한편 투왕이 외친 소리를 들은 무림맹 무인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당황하지 말고 운기하면서 최대한 버텨라! 당문이 도착하면 해독하는 건 식은 죽 먹기가 될 것이다!”

노상국이 노르스름하게 번진 물안개를 보며 내심 코웃음을 쳤다.

‘멍청한 것들. 당문이 해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저리 가벼이 떠들다니.’

만약 투왕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당문이 산공독을 해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산공독에도 종류가 한 가지만 있는 것은 아니니.

하지만 대게의 독이 비슷한 계열일 경우 피독주나 해독제도 하나의 단약으로 통하기도 한다.

쉽게 말해 지금 흩뿌려진 이 산공독은 당문이 가진 피독주나 해독제로 대응할 수 있다는 말.

지금쯤은 무림맹 무인 중 독안개를 벗어난 누군가가 있는 힘을 다해 당문을 부르러 갔으리라.

굳이 그가 당문이 있는 곳까지 갈 필요도 없다.

강랑산 본진까지만 가도 나머지는 가후 총군사가 알아서 해결해 주리라.

그리고 또 한 가지 변수.

‘천림을 우습게 여기는구나. 적어도 총군사가 그리 호언장담을 했다면 이따위 산공독 따위에 당하진 않을 터!’

사실 절정고수라면 주독(酒毒)을 몸 밖으로 몰아낼 수 있고, 초절정고수가 되면 십독불침지체 수준은 된다.

그리고 초절정도 넘어선 절대고수 수준이라면 만독불침지체에 가까워지리라.

이 경우 아예 중독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웬만한 독은 운기행공을 통해 체외로 독기를 몰아내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짐작컨대 천림의 무인들은 만독불침지체에 가까운 능력을 가졌으리라.

‘그들이 천해경에 이르렀다면 산공독 따위는 독도 아니다!’

노상국이 신뢰가 듬뿍 담긴 눈빛으로 노르스름한 물안개 너머를 응시했다.

다만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바로 지금 그가 떠올린 생각을 만통지가 유도했다는 것.

실제로 송화산공독은 여느 산공독과 제조 방식이 다르다.

때문에 해독제나 피독주를 만드는 과정도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투왕이 그렇게 소리친 것은 어디까지나 만통지의 계략이었다.

“송화산공독을 뿌린 다음에는 당문이 오기 전까지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고 소리치게. 그러면 당문을 자연스럽게 끌어들일 수 있으니.”

만통지의 말이었다.

그는 두 가지를 노렸다.

산공독을 당문이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을 자연스럽게 흘림으로써 당문이 섣불리 개입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적어도 당문은 피독주와 해독제를 찾아올 때까지 물안개 속으로 뛰어들지 않을 테니까.

기껏해야 만독불침지체인 당문주나 끼어들 수 있지만, 그 혼자서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할 터였다.

그렇게 대기하고 있던 당문은 쓸모도 없는 피독주와 해독제를 지니고 물안개로 뛰어들 것이다.

그럼 마찬가지로 당문도 산공독에 당해 중독될 수 있다.

산공독은 목숨을 위협할 만큼 치명적인 독이 아니다.

다만 중독된 지 일각 정도가 지나면 온몸의 공력이 흩어져 제대로 힘을 사용하지 못한다.

해독제가 없으면 공력이 회복될 때까지는 최소 이틀이 지나야 한다.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무림맹 무인들 중에는 가까스로 물안개를 벗어나 본진을 향해 헐레벌떡 달려가는 자들도 있었다.

이제 그들이 할 일은 당문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리라.

한편 바닥에 박힌 채 움직이지도 못하는 은황선 갑판에서는 쌍검을 이기어검으로 날렸던 보패인이 가만히 물안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곁으로 또 다른 보패인이 나타나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산공독이라니. 어지간히 우리를 우습게 봤군.”

냉랭한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백룡문의 매소약이었다.

천하용봉대회에서 하천웅에게 치욕을 겪고 멸문지화에 이르는 비극까지 겪었던 그녀.

한데 그녀가 천림의 무인이 되어서 나타날 줄 누가 알았을까?

매소약은 차가운 시선으로 물안개를 응시했다.

벽력적가주.

그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만검세가 하천웅에 대해서는 진저리가 쳐지도록 잘 알고 있다.

바닥에 떨어진 양갈비를 발로 짓밟고 자신에게 억지로 먹도록 강요한 사람.

정말이지 태어나서 그런 치욕은 처음이었다.

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정도다.

어디 그뿐인가?

만검세가 때문에 백룡문은 거의 멸문지화 수준으로 몰락해 버렸다.

한데 그런 그가 은인으로 떠받든다는 벽력적가주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당연히 좋은 감정이 생길 리가 없다.

하천웅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이상, 벽력적가주라도 짓밟아야 속이 시원할 판이다.

“벽력적가주는 내가 맡을 거야.”

담담하게 뇌까린 그녀에게 옆에 선 보패인이 피식 웃었다.

“점 찍어두는 것도 있나? 먼저 죽인 사람이 임자지.”

“닥쳐. 내 먹이를 건드리는 건 용납 못해.”

“그럼 서둘러야 하지 않겠어?”

말을 마친 보패인이 난간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정말이지 아무렇지도 않게 산공독이 퍼진 곳으로 몸을 던진 것이다.

매소약이 어금니를 까득 갈고는 그의 뒤를 이어 물안개로 몸을 던졌다.

잠시 후 끔찍한 비명이 솟구쳐 올랐다.

“크아악!”

“우아악! 보, 보패인……! 커억!”

연이어 터져 나온 비명에 적비연이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보패인이 움직인 건가?’

예상보다 빠르다.

물론 보패인이 산공독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을 거라는 걸 짐작은 했다.

하지만 그래도 잠깐은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느라 시간을 보낼 줄 알았건만.

육각방진 외곽에서 비명 소리가 치솟자 녹림채 무인들이 더욱 서둘렀다.

그들은 저마다 산공독에 공력을 잃은 수귀들을 한둘씩 옆구리에 끼거나 들쳐 메더니 허공에 늘어진 밧줄을 낚아챘다.

적비연과 신성대가 절벽을 타고 내려왔던 그 밧줄이었다.

다음 순간 녹림인들이 수귀들과 함께 빠르게 절벽을 달려 올라갔다.

산채의 무인들답게 밧줄을 잡고 절벽을 달려 오르는 솜씨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물론 녹림인들 중에서도 절벽을 잘 타는 자들로 추린 것이기도 했다.

이 부분은 노상국이 또 하나 잘못 알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는 송화산공독이 퍼진 직후 무림맹 무인들에게 최대한 응집해서 방어 진을 형성하도록 주문했다.

한 치 앞도 구분하기 힘들 만큼 빡빡한 물안개였지만, 어떻게든 모여서 사위를 경계하다 보면 조금이나마 버틸 수 있을 거란 판단이었다.

‘산공독이 퍼진 이상 이놈들이 미친 듯이 살풀이를 하겠지!’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이상하게 공격은커녕 살기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비명은 은황선 가까운 곳에서부터 치솟기 시작했다.

그곳은 아군보다 적이 많은 곳.

누군가 적을 베어가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그 누군가는 필시 천림인들일 테고.

‘어째서 공격을 하지 않고 당하기만 하는 거지? 천림인들에게 전부 몰려간 건가?’

그렇다면 정말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눈앞에 좋은 먹잇감을 두고 공력을 상실하지도 않은 절대고수에게 달려들다니.

그때까지만 해도 노상국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사파 무인들은 지금 공격이 아니라 퇴각 중이라는 사실을.

밧줄을 타고 절벽을 빠르게 올라가 산을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

* * *

천리경을 들어 전장을 살피던 가후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허. 저 상황에서 탈출을?”

적비연이 나타나고 녹림채가 나타나서 합류할 때도 조금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준비된 것 같았기에.

마치 수로채가 저렇게 고립될 거라는 걸 알고나 있었다는 듯 나타났으니까.

하지만 산공독을 뿌리면서 싸울 때가지만 해도 저들이 보패인의 존재를 너무 쉽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다.

맞서 싸웠다면 그렇게 생각했겠지만, 저들은 지금 탈출하고 있다.

그것도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자신이 아무리 지략을 잘 세웠다고 한들, 여기서 녹림채가 육로로 나타나서 절벽을 타고 달아날 거라는 걸 어찌 알았을까?

천재적인 전술은 사고의 틀을 깨는 것이라더니, 만통지는 그 틀이 아예 없는 자 같지 않은가?

그때 전장에서 달려온 수하 하나가 다급히 소리쳤다.

“산공독입니다! 당문이 와야 합니다!”

수하는 자초지종을 빠르게 설명했다.

하지만 가후는 눈을 가늘게 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정말 투왕이 그리 소리쳤단 말이냐?”

“틀림없습니다! 어서 당문을 이동시켜 주십시오!”

“그렇다면 당문을 보내지 않겠다.”

“예?”

수화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가후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인책이 분명할 테니. 적어도 만통지라면 그런 실수를 용납할 자가 아니지. 전략전술은 상대를 이해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법. 어차피 당문이 가도 해결할 수 없는 산공독일 것이야. 대신 당문은 남쪽으로 돌아서 저들을 쫓도록 하지.”

확신에 차서 말을 마친 가후가 먼발치 전장을 보았다.

‘만통지, 과연 무서운 자군.’

하지만…….

“그래도 이번엔 당신이 틀렸소. 보패인은 당신 생각보다도 훨씬 강하거든.”

가후가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 * *

“크아악!”

“으악!”

신성대원과 녹림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집어 갔다.

“미, 미친! 저것들은 괴물이야!”

“막, 막을 수 없다! 피햇!”

녹림인 하나가 진저리를 치며 몸을 돌리고 달려갔다.

하지만 그는 첨벙거리는 물이 도저히 적응되지 않았다.

몸은 무겁고 발걸음은 더뎠다.

비탈진 언덕의 흙더미는 달갑지만, 질척거리는 물은 딱 질색이다.

결국 그는 두 걸음을 채 옮기기도 전에 심장을 뚫고 튀어나온 칼날을 보며 고꾸라졌다.

보패인들은 거침없이 휘몰아쳐 왔고, 녹림인들과 신성대는 빠르게 무너지고 있었다.

가장 피해가 큰 쪽은 인원이 많은 녹림이었다.

신성대는 육각방진을 유지하기 위해 유기적으로 움직이면서 피해를 최소화했지만, 녹림인들은 빠르게 휩쓸어 오는 보패인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신성대! 녹림을 진법 안쪽으로!”

“존명!”

적비연의 명에 신성대원들이 목숨을 걸고 육각방진을 넓혔다.

순간 적비연은 보패인의 기운이 감지되는 곳을 향해 신형을 날렸다.

쩌어엉!

츄아아아아!

검과 검이 부딪치면서 사방으로 물보라가 일어나며 적비연이 튕겨 나갔다.

자욱한 물안개 때문에 마치 바로 앞에 사람이 나타났다가 귀신처럼 사라진 것만 같았다.

그 찰나지간에 적비연은 상대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낯이 익은 얼굴.

‘누구더라……?’

잠깐 기억을 더듬는 사이 저만치에서 다시 비명이 솟구친다.

방금 튕겨 나간 그 보패인이 또 녹림인과 신성대를 도륙하는 것이리라.

육각방진이 빠르게 무너지면서 아군이 쓰러져 가자 수황과 투왕도 분기탱천해서 소리쳤다.

“이 개 같은 것들이! 감히 내 새끼들을 건드려? 전부 죽여 버리마!”

“감히 본좌의 허락 없이 은황선에 오른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파파앙!

두 사람의 신형이 물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적비연은 조금 전 일검을 겨뤘던 보패인을 향해 다시 몸을 날렸다.

정확한 위치를 모르지만 사라진 방향을 대충이나마 가늠할 수 있었다.

쉬이이이잇!

물안개를 빠르게 헤치고 나아가자, 마침 녹림인 한 명의 머리를 베어낸 여인이 보였다.

“……!”

그 순간 생각났다.

“너……!”

쩌어엉!

두 자루의 검이 맞닿으면서 적비연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여인이 적비연을 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잖아도 먼저 찾아가 죽이려고 했는데 이렇게 제 발로 찾아오다니.

“나를 알아? 적 가주.”

알다마다. 그 싸가지를 어찌 잊겠나?

“양갈비.”

이름은 뭐였더라?

기억이 잘 안 난다.

한데 적비연의 말을 들은 매소약의 눈이 허옇게 뒤집혔다.

“네, 네놈이 그걸 어떻게……!”

창졸지간 그녀의 전신에서 어마어마한 강기가 폭사했다.

콰아앙!

츄아아아아아아!

사방으로 물보라가 일어나면서 강기의 태풍이 불어나갔다.

“크억!”

“으아악!”

기운에 휩쓸린 무인들이 저마다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져갔다.

적비연도 뒤로 예닐곱 장이나 떠밀리다가 가까스로 멈췄다.

놀랍게도 튀어 오른 물방울이 각각 강기를 머금으면서 장삼을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적비연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름을 모르는 게 그렇게 화날 일인가?”

하지만 매소약은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표정으로 으르렁거렸다.

“날 능멸했던 그놈은 지금 어디에 있지? 그놈이 네놈에게 말한 것이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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