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0. 난전 속에서
적비연은 차마 말할 수 없었다.
그놈이 ‘나’라고.
적비연이 쓴웃음을 깨물기가 무섭게 매소약이 검을 후려 왔다.
쒸에에엣!
“헛!”
적비연이 화들짝 놀라면서 보법을 펼치고는 훌쩍 물러났다.
쒸이이이잉!
칼바람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머리카락 몇 올이 잘려 나가는 게 느릿한 광경으로 보인다.
“잠, 잠깐! 질문을 던지고 이리 공격하면 답을 할 수가…….”
“답은 됐어. 그놈과 관련이 있는 놈이면 전부 죽인다!”
매소약이 서늘한 소리를 내뱉으며 가차 없이 공격해 왔다.
정말이지 손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맹공.
거기에 자욱한 안개 때문에 그녀의 움직임은 흡사 귀신처럼 보일 지경이다.
범인이었다면 그 현란하고도 빠른 움직임에 속수무책 당하고 말았으리라.
하지만 적비연은 시활안을 펼치고 있다.
자욱한 안개 속에서 그녀가 나타나기가 무섭게 곧바로 대응한다.
창! 깡! 까앙!
묵직하게 울려오는 검공이 예사롭지 않다.
과거 자신에게 치욕을 당하던 매소약이 아니다.
‘이 정도 수준이면 연리하와 비등하거나 조금 더 강하겠어.’
정말이지 놀랍지 않은가?
겉멋만 잔뜩 들어서 설쳐대던 여인이었는데, 어느새 이런 절대고수의 경지에 오른 것일까?
하지만 그녀도 적비연의 적수가 되진 못했다.
천해경을 훌쩍 넘어선 적비연은 어지간한 보패인들 두세 명이 한꺼번에 달려들어야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으니까.
연신 검격을 막아내던 적비연이 휘리릭 몸을 돌리더니 곧바로 발을 내질렀다.
퍼억!
“아악!”
비명을 터뜨린 매소약이 뒤로 열 걸음 정도나 물러났다.
파파파파파!
그녀의 보법에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며 또 다른 안개를 만들어냈다.
두 사람이 내뿜는 뜨끈한 기도가 튀어 오른 물을 빠른 속도로 말려 수증기로 만들었다.
매소약은 적비연보다 더 놀랐다.
‘벽력적가주가 이렇게 강하다고?’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수준이 아닌가?
오래 검을 섞어본 것은 아니지만 자신보다 강할 것 같다.
본능적인 위험 감지.
게다가 등줄기를 타고 서늘하게 흐르는 이 감각은 무엇인가?
마치 맹수를 앞에 두고 바짝 얼어붙은 먹잇감이 된 기분.
스스슷!
물안개가 흔들리면서 인영이 스쳐 지나갔다.
‘어디지?’
매소약이 화들짝 놀라면서 몸을 휙 돌렸다.
동시에 자신의 반응에 또 한 번 흠칫했다.
‘내가 지금…… 긴장한다고?’
어이가 없어서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다.
천림의 무인이 되면서 그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강해졌다.
초절정의 벽을 깨고 절대고수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그 경지가 너무 높고 아득해서 꿈에서조차 그릴 수 없는 천해지경!
천해경에 들어선 자신이 지금 겁을 먹고 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때마침 물안개 한쪽이 흐트러지더니 한 인영이 불쑥 튀어나왔다.
매소약이 앙칼지게 소리치며 검을 후렸다.
“거기냐!”
쒸이이잇! 서걱!
됐다!
파육음에 이어 살결과 뼈마디를 벤 감각이 검신을 타고 전해졌다.
툭, 데굴데굴……!
그녀는 발치까지 굴러온 머리를 내려다보았다.
‘이건……! 칫!’
벽력적가주의 머리가 아니다.
생김새와 옷차림새를 보아서는 녹림인일 듯하다.
언뜻 짜증이 일어난다.
이 미칠 듯한 긴장감.
어째서 천해지경에 이런 자신이 이토록 긴장한단 말인가?
이 두려움은 기분 나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
분명 전신을 옭아매는 듯한 이 감각.
‘그놈과 비슷해!’
자신에게 치욕을 안겼던 하천웅.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그놈과 검을 맞대고 있는 것만 같다.
그녀가 하천웅에게 가진 감정은 두 가지.
하나는 분노였고, 다른 하나는 공포였다.
복수의 대상인 것만은 분명하지만 여전히 자신의 가문을 몰락시킨 그 충격과 공포만큼은 쉽게 극복할 수 없는 상처였다.
한데 그때의 울분과 공포가 지금 적비연에게서 느껴진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당시 하천웅이 곧 적비연이었으니까.
그녀의 무의식이 그걸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러한 내막을 알 리 없는 매소약은 자꾸만 짜증이 솟구쳤다.
“이 쥐새끼 같은……!”
그 순간 그녀 곁으로 그림자 하나가 빠르게 날아들었다.
물론 그녀는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러갔다.
“어딜!”
쒸이이이익!
까앙!
청명한 금속성과 함께 검신이 서로 맞댄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야 상대를 확인한 매소약이 흠칫거리고는 한 걸음 물러났다.
그녀의 검을 받아낸 사람은 다름 아닌 묘청운이었다.
그 역시 매소약과 마찬가지로 보패인이 된 것이다.
묘청운이 희미하게 웃으며 물었다.
“왜 이렇게 날카로워지셨소?”
“아무것도 아니에요.”
매소약이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묘청운이 피식 웃었다.
“반응이 놀란 고양이 같았소만.”
“벽력적가주. 왠지 그자와 비슷한 분위기네요.”
“그자라면?”
“당신과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사람.”
매소약의 말에 묘청운의 입가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하천웅을 말하는 거요?”
“그래요.”
“하천웅과 벽력적가주라…….”
이상할 건 없다.
그 당시 만검세가는 벽력적가와 손을 잡고 있다고 했으니.
자신에게 치욕을 안겼던 하천웅을 떠올리자 묘청운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그간 얼마나 복수의 칼날을 갈았던가?
“그래서 그는 지금 어디 있소?”
“모르겠어요. 내가 상대한 사람은 벽력적가주뿐이에요.”
“흐음. 그렇다면 벽력적가주라도 잡고 봐야겠군.”
“쉽게 보면 안 돼요. 그자…… 어째서인지 강해 보였으니까.”
“하하! 매 소저. 우린 지난날의 우리가 아니오. 감히 누가 천림에 대항할 정도로…….”
그때였다.
후우웅.
등 뒤에서 한 줄기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바로 뒤에서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리는 게 아닌가?
“천림? 그건 뭐지? 너희들은 스스로 천림이라 부르는 건가?”
“뭐, 뭣!”
“노옴!”
매소약과 묘청운이 동시에 기겁을 하며 돌아섰다.
스까아앙!
세 자루의 검이 서로 맞댄 채 듣기 싫은 마찰음을 터뜨렸다.
키기기긱……!
물안개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동시에 적비연의 얼굴이 훤히 드러났다.
순간 묘청운의 표정이 흠칫 떨렸다.
그는 그제야 매소약이 말한 의미를 깨달았다.
벽력적가주!
묘하게 닮았다.
표정이라든지 풍기는 분위기, 눈빛이 그자와 꼭 닮지 않았나?
분명 얼굴은 전혀 다르게 생겼는데, 마치 먼 친척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슷한 느낌이 든다.
“하아앗!”
묘청운이 기합성을 터뜨리고는 공력을 끌어올리자 검강이 물안개를 찢어 버릴 듯 커졌다.
츄아아아아앙!
수면을 훑듯이 횡으로 그어진 검강 때문에 물결이 성난 파도처럼 일어났다.
파파파파파파앙!
적비연이 연신 팽이처럼 회전하면서 물러나다가 곧장 튕기듯 날아들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움직임이었지만 적비연에게는 이 모든 과정이 느릿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마침내 적비연의 검이 묘청운의 미간을 향해 뻗어간다.
헛바람을 삼킨 묘청운이 간발의 차이로 고개를 젖히고는 피한다.
그 틈을 노려 매소약이 적비연의 팔을 자를 기세로 검을 내려친다.
떨어지는 검을 보면서 적비연은 다시 몸을 회전했다.
파파파파파!
회전력에 휩쓸린 물결이 다시 파도처럼 일어나자, 매소약의 균형을 일순 흩트려 버린다.
그 바람에 떨어지던 검신이 적비연의 팔에서 한참이나 멀어지면서 오히려 묘청운을 노려갔다.
“헙!”
헛바람을 삼킨 묘청운이 그대로 물속으로 잠기듯이 훅 꺼졌다.
첨벙!
파파파팟!
매소약이 얼른 검을 회수하자, 수면 아래까지 살짝 잠겼던 검봉이 튕기듯 올라섰다.
천만다행히 묘청운은 목 언저리를 얕게 베이는 수준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아차, 하는 순간에 동료에게 목숨을 잃을 뻔한 것이다.
그가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르는 순간, 적비연이 검을 횡으로 그어왔다.
구천혼선결!
붉은 강기가 폭사하듯 뻗어오자, 화들짝 놀란 매소약과 묘청운이 동시에 검강을 일으키며 맞섰다.
“하아아아앗!”
쩌저어엉!
“크윽”
“아앗!”
묘청운가 매소약의 입에서 비명 같은 신음이 터졌다.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강기가 아닌가?
게다가 어딘지 이질적인 기운.
정공이라고 보기에도 애매하고, 사공으로 보기에도 애매하다.
물론 천림의 무인들이 내뿜는 기도도 그렇지만, 적비연이 지금 뿜어낸 기도는 또 다르다.
이건 마치…….
‘마공?’
두 사람의 머릿속에 같은 생각이 떠올랐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낼 시간도 부족했다.
한 번의 공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적비연이 돌개바람처럼 회전하며 연이어 검을 베어온 것이다.
땅! 땅! 땅! 땅! 따앙!
“크읏!”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세 사람 주위로 거친 파문이 일어나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그럼에도 묘청운과 매소약은 쉴 새 없이 후려치는 적비연의 검을 막아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가!’
‘치잇! 도대체 어떻게 되어 먹은 인간이지?’
묘청운과 매소약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천림의 무인이 된 후로 세상 두려울 게 없을 거라고 여겼다.
한데 이게 뭔가?
어떻게 이렇게 젊은 나이에 천림인을 둘이나 상대하고, 그것도 모자라 자신들을 궁지로 몰아간단 말인가?
설마 이자도 천림인?
너무 어이없어서 엉뚱한 생각마저 든다.
마침내 구천혼선결의 마지막 검격을 받아냈을 때였다.
카차차차아앙!
놀랍게도 묘청운과 매소약이 든 검신이 산산조각 나며 부서지고 말았다.
‘위험!’
두 사람이 본능적으로 보법을 밟으며 훌쩍 물러났다.
검을 들고 협공해도 이기기 힘든 적비연이다.
한데 적수공권으로 상대했다간 필패하고 말리라.
[일단 물러납시다!]
[칫! 할 수 없죠.]
묘청운의 제안에 매소약이 혀를 차고는 어쩔 수 없이 후퇴했다.
두 사람이 물안개 너머로 사라지자 적비연이 혀를 차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보패인 둘을 일시적으로 후퇴시켰지만, 전세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
지금 이 순간도 보패인들은 신성대원들과 녹림인들을 거침없이 베어가고 있었다.
곳곳에서 솟구치는 비명은 보나마나 아군의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황과 투왕이 잘 버텨주면서 어느 정도 저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수귀들을 들쳐 맨 녹림인들이 상당수 밧줄을 타고 절벽 위로 탈출했다는 점이었다.
마침 적비연 곁으로 동소유를 안아 든 미계수가 나타났다.
그가 단번에 적비연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지난 며칠간 줄곧 육각방진과 호흡을 맞춰 훈련했기 때문이다.
“이제 마지막입니다!”
말을 마친 미계수가 얼른 몸을 돌려 달려갔다.
적비연이 육합전성으로 외쳤다.
[수로채주! 녹림채주! 이제 빠질 시간이오!]
그러자 두 곳에서 불만 어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적을 앞두고 후퇴하는 것이 그들의 성격과 맞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계속해서 싸우면 필패하고 만다.
보패인이 생각보다 많다.
벌써 수많은 아군이 전사하지 않았나?
적비연이 밧줄이 늘어진 곳으로 달려가니 육각방진을 구성하고 있던 신성대원들이 죄다 모여들어 밧줄을 타고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피투성이가 되어 나타난 엽강호는 한사를 등에 업고 있었다.
“한사가 당했습니다!”
“부상 정도는?”
“한 식경 안에 운기조식을 하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서둘러라.”
“예!”
엽강호가 밧줄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확실히 신성대는 녹림인들보다 느린 속도로 절벽을 올랐다.
경공을 동시에 펼치면서도 녹림인 보다 배는 느렸다.
그래도 그들이 모두 탈출할 때까지 적비연과 수황, 투왕이 세 방위를 책임지고 지켰다.
마지막 신성대원이 밧줄을 타고 올라가고 나자 적비연이 소리쳤다.
“이제 우리도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