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 천하제일궁
“제길! 제길! 제기랄!”
투왕 추야성이 발을 쿵쿵 구르며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송화산공독이 물안개에 섞여 자욱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에 절벽 아래 광경이 정확하게 보이진 않았다.
하지만 저 안개 숲에 얼마나 많은 부하들이 희생당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살아남은 수하들이 거의 절반이었으니까.
물론 녹림채 전부가 이번 전투에 참여한 것이 아니었으니, 전체 인원에 비하면 삼 할 정도가 희생당한 셈이다.
그래도 많다.
하루아침에 전력 삼 할을 잃었으니.
웬만한 방파 서너 개가 소멸된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수로채는 어떤가?
투왕이 고개를 스윽 돌려서 수황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여전히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절벽 아래를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먹은 공기도 부숴 버리겠다는 듯 꽉 말아 쥐고 있다.
이를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턱뼈가 툭 불거져 나와 금방이라도 깨져나갈 것만 같다.
눈시울은 벌겋다 못해 검은빛이 돌 정도다.
추야성처럼 욕설을 쏟아내진 않았지만 누구보다 분노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었다.
그럴 수밖에.
그는 수로채 전체 전력의 육 할을 잃었다.
수귀들이 진짜 수귀가 됐다.
그 슬픔과 분노를 어찌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기가 차서 말도 나오지 않는 것이리라.
투왕은 뭐라고 위로라도 건네야 하나, 생각하다가 곧 입을 다물어 버렸다.
평소처럼 도발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 말을 하든 무소용이리라.
착잡한 심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니 안개 밖으로 벗어나는 무인들이 보였다.
그들 중에는 천림인으로 짐작되는 자들도 있었다.
꿀꺽.
투왕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지난번 투혈권왕과 비무를 한 이후로 폐관수련을 하면서 깨달음을 얻은 바가 있었다.
하여 이번에 절대고수의 영역에 발을 디딘 셈이었다.
세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투혈권왕과 겪은 비무가 그토록 큰 선물이 될 줄도 몰랐다.
한데…….
‘도대체 저 괴물들은……!’
새파랗게 어린 것들이 아닌가?
아무리 보패인에 대해서 대략의 설명을 들었다지만 이건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수준이다.
동시에 의문도 든다.
반강제적으로 인체를 개조하여 만든 절대고수가 정말 온전할 수 있을까?
부작용은 전혀 없는 것일까?
‘쳇! 알 게 뭔가?’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군들이 밧줄을 타고 어느 정도 올랐을 때, 곧장 줄을 끊어 버려서 추격을 피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단숨에 산을 넘은 자신들과 달리 저 보패인들은 한참을 돌아서 추격해야 하리라.
마침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 보니 적비연이 서 있었다.
“갑시다. 넋을 기리는 건 나중으로 미뤄야 하오.”
매정한 말이었지만, 부정할 수 없었다.
투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러지. 한데…….”
“…….”
“자네, 누구 닮았다는 말 못 들어봤나?”
“딱히 듣지 못했소만.”
“아니야. 분명 누군가 떠오르는데 선명하진 않단 말이지. 뭔가 얼굴이 닮았다기보단 분위기나 눈빛이 닮은 것 같은데 말이야.”
“나도 그렇게 느낀다.”
수황의 대꾸에 투왕이 손뼉을 짝 마주치며 말했다.
“역시 그렇지? 수왕, 너도 제대로 볼 때가 있구나. 그런데 그게 누구더라…….”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며 생각하던 투왕이 수황과 동시에 소리쳤다.
“투혈권왕!”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고는 다시 적비연에게 고개를 돌렸다.
투왕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맞아, 분명 투혈권왕과 닮은 구석이 있어. 얼굴이 닮은 건 아닌데 묘하게 풍기는 분위기가 닮았단 말이야. 혹시 먼 친척인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투왕이 혹시 몰라서 물었다.
수황도 팔짱을 낀 채 가만히 쳐다보는 것이 꽤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렇잖아도 투혈권왕이 적비연을 주군으로 모신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쉽게도 그는 배신자 연리하 때문에 죽어버렸지만.
적비연이 가볍게 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저었다.
이들에게 자신의 비밀까지 시시콜콜 말할 필요는 없었다.
“서로 뜻이 통한 바는 있으나, 친척은 아니오.”
“그래? 흐음. 묘하게 분위기가 닮았는데 말이지.”
“그가 나를 흠모해서 많이 본받으려고 했소. 그러다 보니 나의 말투나 행동을 따라했을 수는 있소.”
“아아, 그럴 수도 있겠군.”
투왕과 수황이 동시에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투왕이 걸음을 옮기며 중얼거렸다.
“쩝, 투혈권왕 그자의 일은 안 됐어. 마음에 꽤 들었는데. 그놈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연리하라는 그 썩을 놈을 잡아서 죽여야겠는데 말이야. 그렇지 않나, 수왕?”
“틀렸다. 수황이다.”
“뭐야? 어찌 한 하늘 아래에 두 명의 황제가 있을 수 있겠나! 내가 투황, 자네는 수왕이다!”
“아니. 나는 수황이다.”
“그럼 나는?”
“내가 그거까지 알아야 하나?”
“뭐, 뭐, 뭣이……?”
“내 알 바 아니지.”
무뚝뚝하게 대답한 수황이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자 투왕이 입에 게거품을 물었다.
“야, 야! 거기 안 서? 넌 은혜도 모르냐!”
하지만 수황은 대답 대신 계속 걸음을 옮겼고, 투왕은 끝까지 쫓아가며 욕설을 퍼부어댔다.
그 모습을 보던 미계수가 적비연 곁으로 다가와 중얼거렸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빨리 털어내셔서.”
적비연은 미계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투왕과 수황은 뱃속에서 치미는 분노와 슬픔을 저런 유치한 말장난으로 승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 * *
궁귀 조신우는 비탈진 언덕 사이로 길게 이어진 골짜기를 내려다보았다.
사람들은 이곳을 적암곡(赤巖谷)이라 불렀다.
유독 붉은빛의 돌이 많은 골짜기였기 때문이다.
적암곡 한쪽에는 궁귀 조신우를 비롯한 흑궁단이 진을 치고 있었다.
흑궁단.
원래 그 이름처럼 칠흑처럼 검은 옷을 입지만, 지금은 온통 붉은 옷을 입은 채 위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적암곡 아래쪽을 자세히 보면 언뜻 바위처럼 보이는 것이 조금씩 움직이는 게 보인다.
그들은 바로 사예린이 이끄는 월희계 무인들이었다.
월희계 무인들은 적암곡 양쪽 아래 지대에서 은신을 한 채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궁귀 조신우는 하늘에 솟아오른 태양을 보았다.
중앙쯤에서 떨어지던 겨울 햇살이 이제는 꽤나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저 햇살을 등지고 적이 나타날 차례였다.
[때가 다가온다. 모두 준비하도록!]
궁귀 조신우의 명에 흑궁단이 바짝 긴장한 채 활을 움켜잡았다.
아마 지금쯤 사예린도 같은 명령을 내렸을 터였다.
조신우는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만통지의 조언을 떠올렸다.
“알겠나? 두 가지 경우의 수가 있네. 첫째는 당문이 우리 계책에 당해서 추격을 해오지 못했을 때야. 최고의 경우지. 이때는 축일공이 창궁단(昌弓團)을 이끌고 제일 먼저 나타날 걸세. 그럼 운 좋다면 자네들이 전멸시킬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 가능성은 낮아.”
“어째섭니까?”
“가후 정도면 내 속임수를 눈치챌 가능성이 클 테니까. 그럴 경우에는 창궁단보다 앞서서 당문이 나타날 걸세.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결코 조 단주가 먼저 나서면 안 된다는 것이야. 당문 뒤를 이어서 바로 창궁단이 들이닥칠 테니까.”
“그럼 어찌해야 합니까?”
“월희전주가 수하들을 이끌고 먼저 근접 기습전을 펼치도록 하게나. 당문은 오로지 월희계 몫일세. 그러는 사이 창궁단이 나타날 걸세. 그땐 월희계와 당문이 뒤섞여서 창궁단이 나타나도 손을 쓸 도리가 없어질 걸세. 그들이 당황하는 틈을 타서 흑궁단이 조준사격을 하도록 하게.”
“과연 말씀대로만 된다면 더할 나위 없군요.”
“말한 대로 될 걸세.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반드시 세 번 이상 활을 쏘지 말게. 딱 두 번까지만.”
조신우가 가만히 눈을 떴다.
‘두 번까지만 쏘라니.’
다소 이해하기 어렵지만 만통지의 간곡한 부탁이었으니 받아들였다.
‘만통지의 말대로라면 이제 곧……!’
가슴 한편이 떨려온다.
두려움 따위가 아니다.
묘한 기대감과 흥분이다.
신궁 축일공!
천하제일궁사를 두고 사람들은 두 사람을 놓고 다툰다.
이 자리에서 그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기회가 되리라.
부디 당문이 만통지의 계책에 당해서 축일공이 먼저 나타나길!
그렇게 간절한 바람을 품고 있는데 마침 서쪽 입구에서 아스라이 소리가 들리면서 먼지가 일어났다.
곧 일단의 무리가 등장했다.
눈을 빛내고 쳐다본 조신우의 표정에 아쉬움이 스쳤다.
‘역시…… 가후가 눈치를 챈 모양이군.’
먼저 적암곡 입구에 먼저 나타난 자들은 당문이었다.
그들은 잠깐 멈칫거렸다.
지형상 매복하기 좋은 위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곧 움직이겠지.’
만통지가 그리 말했으니까.
“만약 당문이 적암곡에 나타나면 잠깐 멈칫거릴 수는 있지만 곧 이동할 걸세.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예정에 없던 퇴각을 하는 걸로만 생각할 테니까. 전시 상황에서 가후가 세세한 사정까지 전달하지 못한 채 당문에게 추격 명령만 전달했을 걸세.”
과연 만통지의 예측대로 잠깐 주춤거리던 당문이 곧 빠른 속도로 적암곡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중앙쯤에 다다랐을 때,
“우와아아아아!”
적암곡을 가득 메우는 함성과 함께 월희계 무인들이 앞다투어 튀어나갔다.
곧 칼부림이 어지럽게 펼쳐졌다.
기습을 당한 당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래도 당 문주가 함께 있는 만큼 쉽게 주눅 들진 않았다.
곧 난장이 펼쳐지고 치열한 사투가 벌어졌다.
죽고 죽이는 처절한 전투.
만통지는 사예린에게도 당부를 남겼다.
“흑궁단이 첫 화살을 발사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후퇴하도록.”
흑궁단주 조신우는 다시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창궁단!’
푸른 옷을 갖춰 입은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무림맹이 자랑하는 궁사들로 이루어진 조직, 창궁단!
조신우는 궁술과 흑궁단에 대한 자부심이 유별났다.
사람들은 흑궁단보다 도검을 쓰는 타격대를 더 알아주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조신우는 궁사들로 이루어진 조직이야말로 정예 중에 정예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궁사들로 이루어진 조직은 다른 조직에 비해 훨씬 많은 유지비용이 들어간다.
훈련량도 상당히 많다.
‘축일공! 오늘 천하제일을 가려보자!’
명령은 따로 내릴 필요가 없다.
그간 수많은 훈련과 실전 경험을 쌓았다.
이심전심이다.
빼애애액……!
철시 하나를 시위에 걸어 축일공을 정확히 조준했다.
정말 마음이 통하기라도 한 것인지, 흑궁단원들이 일제히 시위를 걸어 당겼다.
조준은 오래 하지 않는다.
조준하는 순간 살기도 시위에 걸린다.
그리고 무릇 뛰어난 궁수라면 먼 곳에서 자신을 노리는 화살촉과 그 살기를 읽어낼 수도 있는 법.
그 전에 쏴야 한다!
패애애애앵!
조신우의 철시가 가장 먼저 시위를 떠났다.
그러기가 무섭게 흑궁단원들이 일제히 화살을 쏘아냈다.
패패패패패패애애앵!
시위의 울림으로 적암곡이 진동한다.
쒸에에에엣!
쒸쒸쒸쒸쒸쒸에엑!
마치 한 마리의 새가 여러 마리 새떼를 이끌며 날아가듯, 가장 앞선 철시가 수백 자루를 이끌며 하늘을 가른다.
마침 살기를 느꼈던 축일공이 대번 철시 한 자루를 뽑아냈다.
“기습이다!”
사자후를 기합처럼 터뜨리며 그가 철시를 휘두르자 묵직한 충격이 손끝에서부터 팔을 타고 어깨까지 전해진다.
투우우우웅!
꽈아아아아앙!
단순히 철시만 튕겨냈을 뿐인데 어깨는 떨어져나갈 것만 같고, 튕겨 나간 철시는 폭음을 일으키며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었다.
근처에 있던 궁수 서너 명이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그들 외에도 갑자기 날아든 화살 떼에 창궁단 삼 할 정도가 사상을 당했다.
“크아악!”
“으악!”
축일공이 미간을 팍 구겼다.
‘궁귀 조신우!’
그가 어금니를 까득 갈고는 시위에 얼른 철시를 재웠다.
방금 일격을 막아내느라 어깨가 떨어져 나갈 것 같지만 식은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참아냈다.
같은 순간, 조신우 역시 첫 공격에 실패한 것을 깨닫고는 두 번째 시위를 당겼다.
두 사람이 정확히 서로의 심장을 향해 겨누고는 씹어뱉듯 읊조렸다.
“네놈은 반드시 내가 죽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