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63화 (264/301)

263. 우리가 천림이다

조신우뿐만 아니라 부단주 역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더듬거렸다.

“화, 화살을 전부……!”

흑궁단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이런 경우는 보지 못했다.

아니, 딱 한 번.

보패인 연리하를 상대할 때 지금처럼 무력감을 느끼긴 했다.

어떠한 공격도 먹히지 않는 느낌.

한데 지금은 그보다 더하다.

그땐 연리하 단 한 명이었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보패인은 대체 몇 명인가?

수십 명이다.

그들이 흑궁단의 화살을 완전 무력화시켰다.

흑천사왕 조신우의 화살을 맨손으로 낚아챘다.

연리하도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저들은 더하지 않은가?

“단, 단주님……!”

부단주가 사색이 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조신우 역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가……?

만통지는 이걸 우려했던 것인가?

그는 저들이 이렇게 빨리 적암곡까지 당도할 거라는 걸 짐작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역시 만통지는 전략의 신이다.

하지만 그가 하나 놓친 게 있다.

궁사로서의 자존심!

조신우와 축일공이 붙는다면 조신우가 그냥 발길을 돌릴 수 없을 거라는 걸 간과했다.

아니, 충분히 짐작했을 거다.

그래서 신신당부했던 거다.

단 두 발만 쏘고 후퇴할 것을.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피해를 입힐 테니 더 이상 욕심 부리지 말라고.

하나 그는 당부가 아니라 명령을 내렸어야 했다.

다만 만통지는 책사 역할을 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임시직에 지나지 않았다.

그에게 사령관의 권한은 없다.

어디까지나 조언의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조신우는 자신을 과신했고, 그의 부탁을 어겼다.

“단주님!”

부단주가 다시 윽박을 지르듯 소리치는 바람에 조신우가 겨우 충격에서 헤어 나왔다.

먼 거리를 단숨에 달려온 보패인들!

과연 지금이라도 달아난다면 무사할 수 있을까?

아니면 아직 거리가 있으니 정면으로 부딪쳐 볼 만할까?

다행히 조신우도 이번만큼은 현실적인 판단을 내렸다.

“퇴각한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부단주가 굳은 표정으로 묻는다.

괜찮을 리가.

눈앞에서 다 잡은 물고기를 놔주게 생겼는데 괜찮을 리가 있겠나?

하지만 몸을 사려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과욕을 부리다간 후회해도 늦다.

아니, 어쩌면 지금도 늦었을지도.

“신속하게 물러난다!”

“존명!”

조신우와 흑궁단이 일제히 몸을 빼내기 시작했다.

한데 가장 아래쪽에 위치한 흑궁단원이 기겁을 하며 비명처럼 소리쳤다.

“어엇! 저, 저자들……!”

“뭐, 뭐야? 뭐가 저렇게 빨라?”

웅성임은 곧 두려움에 찬 비명으로 변해갔다.

“으아아! 빨리! 빨리 달려!”

“제길! 저게 사람이야?”

흑궁단원의 표현은 전혀 과장된 게 아니었다.

갑자기 나타난 수십의 천림인!

한데 그들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길게 먼지를 이끌며 내달리는 천림인들이 순식간에 적암곡 기슭에 다다르더니 거침없이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쏴, 쏴라앗!”

도망만 쳐서는 죽을 판.

아래쪽에 자리 잡은 무인들이 몸을 돌리고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하지만 호신강기로 몸을 감싼 천림인들은 화살이 우습다는 듯 피하거나 막아냈다.

부단주도 아래쪽을 돌아보고는 대경실색했다.

“어, 어찌 저리 빠른……! 모두 저놈들을 겨냥해서……!”

“안 돼!”

“단주님!”

“늦었다! 최대한 빨리 퇴각해라!”

부단주는 충격받은 표정으로 조신우를 보았다.

조신우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차 있다.

이럴 수가!

도대체 저들은……!

부단주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뒤를 돌아보고는 곧 조신우의 뜻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거침이 없다.

화살도 통하지 않는다.

잠시 주춤거리게 만들긴 했지만, 뒤를 쫓는 속도가 너무 빠르다.

이대로 가다간 흑궁단이 머문 지대까지 순식간에 올라올 기세다.

“서둘러라! 최대한 빠른 속도로 퇴각한다!”

부단주의 사자후에 흑궁단원들이 공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이제는 오로지 경공만 펼쳐야 할 때다.

여전히 적암곡 입구에 선 축일공은 언덕 중턱에서 메뚜기처럼 튀어 오르는 흑궁단원들을 보며 혀를 내둘렀다.

정말이지 겁에 질린 곤충 같다고나 할까?

‘저것이 천림인가……?’

문득 가후가 놀랍다기보다는 두렵다는 생각마저 든다.

‘가후, 자네는 대체…… 뭘 만든 건가?’

* * *

“잘 만들어진 전략입니다. 확실히 잘 만들었어요.”

가후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섭선을 살랑거리며 탁자에 펼쳐진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맞은편에 선 맹주 허위청이 가후를 빤히 보다가 물었다.

“적군의 책사를 칭찬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것인가?”

사실 그로서는 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다 잡은 물고기가 아니었던가?

천림을 적절한 순간에 투입시켜서 적비연은 물론 흑천련과 수로채, 녹림채까지 일망타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한데 다 놓쳤다.

물론 이번 전투로 수로채와 녹림채는 큰 손실을 입었을 것이다.

특히 수로채는 치명적이다.

전력이 칠 할 이상 줄어든 셈이니까.

비록 사상자가 절반 정도라고는 하지만, 수로채는 집이나 마찬가지인 은황선을 비롯해 수많은 배를 잃었다.

그러니 남은 전력은 이 할 혹은 많아야 삼 할 수준.

그렇다고 해도…….

“아예 뿌리를 뽑을 수도 있었을 텐데.”

가후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병가지상사 아니겠습니까? 사실 녹림인이 밧줄을 타고 절벽을 탈출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이는 만통지가 수로채가 패할 것을 알고 전략을 짰다는 말이니까요.”

“그럼 만통지가 일부러 수로채를 수렁으로 몰아넣었단 말인가?”

“그럴 리는 없겠죠. 다만 수황이 자존심이 강하니 만통지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겁니다. 어쩌면 일종의 길들이기일 수도 있지요.”

‘자네가 고 궁주를 제거하고 실권을 쥔 것처럼 말인가?’

물론 그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대신 다른 질문을 이어갔다.

“하면 이제 그들을 모두 놓친 셈인데, 천림을 보내서 과연 누굴 잡을 생각인가?”

“조신웁니다.”

“궁귀 조신우?”

“그렇습니다. 그를 잡기 위해서 일부러 부맹주님과 창궁단을 보냈으니까요.”

“당문은?”

“아마 매복한 적군에게 전력 손실을 상당히 입을 겁니다.”

“자네! 그럼 당문도 설마 알고서……!”

“맹주님.”

가후가 고개를 돌리고는 허위청을 빤히 보았다.

허위청이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말해보게.”

“당 문주는 야망이 큰 자입니다. 그는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우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지요. 차기 맹주직을 노리는 자이기도 합니다.”

“……!”

“후일을 생각해서라도 적당히 가지치기를 해두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허위청은 입을 딱 벌리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가후에 대해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이 얼마나 무서운 자인가?

만약 그가 적이었다면?

생각만 해도 골치가 아프다.

가후가 말을 이었다.

“제가 만통지라면 이곳, 적암곡에 조신우와 흑궁단을 배치할 겁니다. 조신우는 부맹주님을 보고 호승심을 가질 테고 퇴각 시기를 놓칠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과연. 하면 천림이 조신우를 잡을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보나?”

가후가 섭선을 살랑이고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변이 없는 한 십중팔구 조신우를 잡을 것입니다.”

* * *

빠른 속도로 산을 내려온 적비연은 물가에 다다르자 수하들을 재촉했다.

“어서 배에 올라라!”

신성대와 녹림, 수로채가 서둘러 비조선에 올라탔다.

각 배마다 공력에 여유가 있는 자들이 나눠서 탑승해 이동속도를 더욱 높이도록 지시했다.

마지막으로 엽강호와 한사까지 배에 태운 적비연이 주의를 주었다.

“곧장 분타로 돌아가도록. 한사는 이동하는 동안 운기조식을 하고.”

“죄송합니다, 주군.”

한사가 면목 없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적비연이 한사의 어깨를 손으로 툭 쳤다.

“그런 말은 죽었을 때나 해라.”

한마디로 죄송하다는 말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

한사가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휘와 예홍이 적비연 곁으로 다가왔다.

“모두 탑승했습니다! 가주님도 배에 오르시지요!”

“아니, 나는 따로 볼일이 있어.”

“예? 그게 무슨……?”

작전에 없던 이야기.

단휘와 예홍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데 적비연이 고개를 돌려 먼발치를 보았다.

저기 어디에선가 사예린과 조신우가 적과 조우해서 싸우고 있을 터였다.

아니, 어쩌면 지금쯤 싸움이 끝나고 퇴각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신우와 축일공이 맞붙었다.’

과연 조신우가 만통지의 뜻에 따랐을까?

그가 과욕을 부리지 않았을까?

궁사로서의 자존심이 누구보다 강한 조신우라는 것을 적비연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조신우의 주군이었으니까.

흑천련주의 기억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적비연이었으니까.

만통지는 그에게 명을 내리지 않고 부탁한다고 했다.

자신이 임시 책사 직을 수용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조언의 수준이라고 못 박았다.

전쟁이 끝나면 미련 없이 떠날 거라는 예고와 함께.

이런 경우 보통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뛰어난 책사가 지나친 권력을 가지는 걸 두려워해 아군이 암살하는 경우를 피하려고.

또 다른 이유로는 전쟁이 끝난 후 토사구팽당하지 않기 위해서.

결국은 권력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 적비연은 만통지가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 전쟁.

녹림과 수로채, 흑천련과 벽력적가의 연합체다.

총사령관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자가 없는 셈이다.

여기서 만통지가 너무 돋보이면 차후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를 만통지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만통지는 어쩌면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것인지도 몰랐다.

만통지.

하늘이 내린 지자.

그의 속내에는 능구렁이 수십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을 거다.

좋은 의미로.

하지만 수많은 경험을 겪은 적비연도 그 못지않은 노회함을 지니고 있었다.

즉, 만통지는 조신우가 순순히 퇴각하지 않을 거라는 걸 짐작했을 터다.

그리고 여기에서 자신에게 선택의 기회를 준 것이다.

만약 조신우를 구하게 되면?

수로채를 구하고 흑천사왕을 구한 자신은 이 연맹의 진정한 수장이 될 수 있다.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적비연이 단휘와 예홍을 보며 말했다.

“나는 조신우를 구하러 가겠다.”

“예엣? 지금요?”

“먼저 가도록.”

그러자 투왕과 수황이 나섰다.

“그렇다면 우리도 가겠소.”

하지만 적비연이 고개를 저었다.

“수로채와 녹림의 피해가 만만치 않소. 두 분은 조직을 재정비해 주시오.”

“끄음.”

그 말도 맞는지라 두 사람이 서로 눈치를 보다가 적비연을 보았다.

“알겠소. 부디 조심하시오.”

“걱정 마시길.”

그렇게 비조선 수십 척이 무인들을 태운 채 떠나고 나자, 적비연은 미련 없이 몸을 돌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과연 돌풍처럼 빠른 속도였다.

비조선에서 멀어져 가는 적비연을 보며 투왕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알 만하군. 투혈권왕이 왜 저자를 그토록 흠모했는지.”

* * *

“크아아악!”

“으아악! 살, 살려…… 아악!”

비명이 난무한다.

적암곡은 그 이름만큼이나 붉은 피로 뒤덮였다.

조신우는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믿을 수가 없었다.

수십 년간 자신과 함께했던 생때같은 수하들이 비명횡사하고 있다.

보패인의 손짓 한 번에 목이 날아가고, 칼짓 한 번에 몸이 양단되어 쓰러져 간다.

살아남은 자들보다 죽은 자들이 많다.

“어, 어찌 이런……!”

너무 놀라서 달아날 생각조차 잊었다.

아니, 달아날 수 있다고 한들 수하들을 버려두고 어찌 홀로 살겠다고 발을 놀리겠나?

“단주님! 단주님이라도 피하십시오! 어서!”

부단주가 등진 채로 소리쳤다.

하지만 조신우는 발에 못이라도 박힌 듯 꿈쩍하지 못했다.

‘이곳이 나의 무덤인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죽음을 피할 수 없으리라.

아, 만통지의 그 한마디를 어긴 대가가 이토록 크단 말인가?

이제 고작 흑궁단원이 스물 남짓 살아남았다.

수하들은 자신을 지키겠다며 등을 진 채 괴물 같은 보패인과 맞섰다.

가장 앞장서서 올라온 보패인, 묘청운이 히죽 웃으며 조신우를 보았다.

“호오, 궁귀가 조무래기들 뒤에 숨었네? 그래도 내 손에 죽을 텐데.”

“그대는 누군가?”

“남해상단의 묘청운이라고 하지.”

묘청운이 이죽거리며 답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그가 흠칫거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조신우도 반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따라 눈길을 옮겼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뭘 본 거지?’

잠시 후.

‘아……!’

뭔가 달려오고 있다.

굉장한 속도!

저 사람은…….

‘벽력적가주……!’

벽력적가주 적비연이 구름먼지를 길게 이끌며 화살 같은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조신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자가…… 나의 기적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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