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4. 우리가 천림이다
바람이 쌔앵 불며 초목이 흔들렸다.
인근에서 풀을 뜯던 짐승들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고는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이미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지나간 후.
적비연은 정말이지 바람처럼 달렸다.
멀찍한 곳에서 그 모습을 본 당 문주가 눈을 번쩍 떴다.
‘엄청난 경공술이구나! 가만……! 저자는 벽력적가주인가?’
용모파기를 통해 살펴본 벽력적가주의 얼굴과 상당히 닮았다.
게다가 흑천련이 퇴각한 방향에서 달려오고 있지 않은가?
‘그렇군. 조신우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중이던가?’
당 문주가 고개를 꺾어 들고는 적암곡 위를 바라보았다.
조신우는 지금쯤 천림과 맞서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천림의 막강한 무위로 추측컨대 이미 그의 조직이 일망타진을 당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그의 추측은 정확했다.
현재 조신우는 고작 십여 명의 수하들만을 앞에 둔 채로 가까스로 버티는 중이었으니까.
아니, 버틴다는 표현은 어딘지 어울리지가 않는다.
제대로 맞선 적도 없으니.
그냥 살아남은 상태라고 해두는 게 맞을 것이다.
어쨌거나 보패인 묘청운은 지금 손짓 한 번이면 조신우를 처리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가 피식 웃었다.
“대단한 경공술이지만 아쉽게 됐군. 조금 빨리 출발했어야 했어.”
묘청운이 히죽 웃으며 검을 들어 올렸다.
쑤아아아앙!
순간 검강이 솟구치면서 형형한 빛을 뿜어냈다.
“으음……!”
아직 살아남은 흑궁단원들이 식은땀을 흘리며 주춤 물러났다.
벽력적가주를 발견한 기쁨도 잠시, 그들은 지독한 살기 앞에서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그들 개개인이 일류 이상의 무인들이었음에도 서 있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묘청운의 기도는 강맹했다.
조신우도 안타까운 마음을 속으로 삼켜야 했다.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오는 벽력적가주가 고맙긴 했으나, 도저히 그때까지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다.
묘청운의 말대로 너무 늦은 것이다.
묘청운이 저벅 한 걸음 내디뎠다.
“미안하지만 유언 따위는 들어주지 않겠다.”
말을 마친 그가 바닥을 차려는 순간,
탁!
누군가 그의 팔을 잡았다.
“음?”
묘청운이 돌아보니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매소약이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자를 죽이면 벽력적가주를 잡을 수가 없어요. 이미 죽은 자를 구하려고 달려오진 않을 테니까.”
“오, 그렇군.”
“우선은 인질로 삼아요.”
“알겠소. 그게 좋겠군.”
묘청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본 조신우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천하의 조신우가 아니던가?
궁귀 조신우가 인질 신세로 전락하다니.
발끈한 그가 철시를 시위에 걸며 소리쳤다.
“감히 본좌를 능멸하려는 것인가!”
물론 그가 이런 돌발행동을 한 것은 단순히 분해서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자신이 인질로 잡히면 벽력적가주가 위험해질 테니 목숨을 걸고 도발을 한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창졸지간,
후우우웅!
한 줄기 바람이 조신우의 안면을 훑으며 지나갔다.
조신우가 눈을 부릅떴다.
‘없어?’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화살촉은 묘청운의 심장을 정확히 겨누고 있었다.
초절정의 극에 다다른 자신이다.
손을 놓는 것과 동시에 묘청운의 심장이 꿰뚫릴 터였다.
물론 상대는 천해지경이다.
그렇다면 손을 놓는 그 순간마저 상대에게는 기회로 작용할 터이긴 하다.
그래도 가슴에 생채기 하나는 남기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손을 놓기도 사라져 버렸다!
다음 순간 그의 귓가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히 힘 빼지 말고 구경이나 합시다, 영감.”
턱!
자연스레 어깨에 올려진 손.
우드득!
“끄아아악!”
“단주님!”
부단주가 소리치며 달려들자, 묘청운이 손가락을 튕겼다.
일순간 날아간 지풍이 부단주의 이마를 ‘퍽!’ 하고는 뚫어 버렸다.
즉사였다.
“……!”
그의 죽음에 조신우와 흑궁단원들이 경악했다.
하지만 묘청운의 오른손에 오른쪽 어깨가 부러진 조신우는 전신을 부들부들 떨며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묘청운이 흑궁단원들을 훑으며 으름장을 놓았다.
“누구라도 주제 모르고 설치면 같은 꼴을 당할 것이다. 너희들을 구하기 위해 애써 달려온 저 녀석을 생각해서라도 얌전히 있어야겠지?”
묘청운이 이죽거리고는 시선을 언덕 아래로 돌렸다.
이제 곧 적비연이 당 문주가 있는 곳까지 다다를 터였다.
당 문주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직 만천화우를 한 번 더 사용할 수 있는 암기가 남아 있었다.
그걸 사용하고 나면 그가 쓸 수 있는 암기는 더 이상 남아나지 않는다.
하나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 한 번으로 벽력적가주를 잡을 수만 있다면 무에 아깝겠나?
‘와라! 적 가주!’
마침 적비연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을 때, 당 문주는 품에 양손을 넣고는 뽑아 들었다.
“하아아앗!”
그가 기합성을 터뜨리자 강기를 품은 무수한 암기가 허공을 빼곡하게 채우며 날아올랐다.
촤촤촤촤촤아아앗!
각각의 암기들이 꽃잎처럼 흩날리는가 싶더니 이내 적비연을 향해 무섭게 쇄도하기 시작했다.
쉬쉬쉬쉬쉬쉬이이잇!
일순 적비연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동시에 그의 전신이 빠른 속도로 시커멓게 물들더니 사방으로 기도가 터져 나갔다.
파아아앙!
흑천투권공이 발현된 것이다.
타타타타타타타타타앙!
철판에 콩을 볶는 소리가 전신에서 울려 퍼졌다.
놀랍게도 암기와 사람이 부딪치는데 불꽃이 터지고 있었다.
적비연이 입고 있던 장삼은 이제 걸레조각처럼 너덜너덜 찢어졌다.
언뜻언뜻 검고 탄탄한 근육마저 보인다.
당 문주는 눈앞에 펼쳐지는 현상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럴…… 수가!’
만천화우가 통하지 않다니!
만천화우는 원래 난전에 주효한 암기술이다.
말 그대로 만 개의 꽃잎이 휘날리며 적을 덮치는 무공이다.
한데 그걸 단 한 사람에게 쏟아부었으니 얼마나 대단하겠나?
게다가 이번 일격에는 당문의 자랑인 칠보지독까지 곁들였다.
살갗만 스쳐도 일곱 걸음을 옮기기 전에 죽음에 이르고 만다는 맹독!
한데 지금 저자가 몇 걸음을 걸었지?
분명한 건 일곱 걸음을 훨씬 넘겼다는 것이다.
타닷, 쉬이이잇!
수많은 암기를 온몸으로 튕겨낸 적비연이 한 줄기 바람처럼 날아들더니 그대로 당 문주의 목을 움켜잡았다.
콰악!
“커억! 컥! 네놈이 사공에 손을……!”
당 문주가 가까스로 말을 꺼내는데, 적비연이 그를 그대로 바닥에 메다꽂았다.
꽈다앙!
“끄억!”
일순간 목이 꺾인 당 문주가 그 자리에 쓰러지더니 다신 움직이지 못했다.
즉사.
한때 차기 맹주직을 노렸던 이라기에는 너무나 허무한 죽음.
“으으……!”
당문의 제자들이 충격에 빠져서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적비연이 서슬 퍼런 표정으로 그들을 훑었다.
“당문의 역사를 여기에서 마무리 짓고 싶지 않다면 나를 막지 마라.”
감히 항거를 불능케 하는 목소리!
주춤주춤……!
당문의 무인들이 물러나자, 적비연이 그대로 언덕을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본 묘청운과 매소약은 흔들리는 눈으로 서로를 보았다.
“저자…… 정말 벽력적가주가 맞소?”
“맞아요. 용모파기도 확인했어요.”
묘청운의 물음에 매소약이 고개를 끄덕였다.
묘청운이 마른침을 삼켰다.
“놀랍군.”
그뿐만 아니라 대략 스물 남짓한 보패인들 모두 내심 긴장한 표정으로 적비연을 보았다.
묘청운이 주먹을 불끈 쥐고는 들어 올렸다.
“우리는 천림이다! 천림의 힘을 보여라!”
그의 말에 보패인들이 저마다 기도를 개방하자, 적암곡이 소름 끼치는 기운으로 가득 찼다.
동시에 그들의 머리카락이 서리라도 내려앉은 듯 새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윽고,
파파파파파아앙!
보패인들이 일시에 적비연을 향해 몸을 날려갔다.
스물 남짓한 무인들이었음에도 마치 대군이 거대한 해일처럼 몰려가는 것만 같았다.
묘청운과 매소약도 조신우를 내버려 둔 채로 적비연을 향해 쇄도했다.
적비연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보패인들을 보면서 검을 뽑아 들었다.
차아앙!
진정한 혼연일체.
지금까지 전쟁을 치르면서 지칠 만도 하건만, 신기하게도 시간이 흐를수록 전신에서 힘이 넘친다.
마치 수많은 경험을 통해 축적된 기운들이 이제야 제대로 발휘되는 기분이랄까?
사실 적비연이 그런 기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육신과 혼이 완벽하게 어울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치열한 전투를 치르면서 그의 혼이 완전히 몸에 적응한 것.
적비연이 검을 횡으로 그어갔다.
쏴아아아아앙!
쿠파파파파파파!
강기가 적암곡 비탈길을 휩쓸며 날아오른다.
따다다다다앙!
촤악! 촤촤촤아악!
강기에 튕겨 나간 보패인들이 가까스로 멈춰 섰다.
묘청운과 매소약도 강기를 막아내고는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한낱 평범한 인간 주제에 보패인 스물을 상대한다고?
하지만 그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적비연이 절대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자신들보다 더 기구하고 묘한 운명을 타고났다는 것을.
“쳐!”
묘청운의 이어진 목소리에 보패인들이 한 몸처럼 다시 달려 나갔다.
하지만 그사이에 이미 적비연의 손에서는 검 한 자루가 떠나가고 있었다.
쒸아아아아아앙!
굽이치듯 날아드는 검신!
강기를 품은 검신이 마치 살아 있는 생물처럼 제멋대로 움직인다.
하늘을 나는 것만 같다.
구천혈마검의 제사초, 구천곡류검(九天曲流劍)!
따다다다다다아앙!
스물 남짓한 보패인들이 저마다 검을 휘두르며 이기어검을 막아낸다.
콰콰콰앙! 쾅!
강기가 터지면서 폭음이 적암곡에 진동한다.
쿠르르르! 쿠르르르릉!
부서져 나간 적암곡의 바윗덩이가 골짜기 아래로 굴러떨어지자, 아래쪽에 있던 당문의 무인들이 허겁지겁 몸을 물리며 피했다.
도저히 사람과 사람의 싸움처럼 보이지 않는 광경.
지진이 일어나고, 하늘이 울리며, 바위절벽이 무너진다.
곳곳에서 폭음이 터지고, 수백 년 된 나무가 뿌리째 뽑히며 쓰러진다.
끄그긍…… 쿠우웅!
쓰러진 나무에 몸을 실은 보패인 하나가 적비연을 향해 무섭게 쇄도했다.
“흐아아아앗!”
그야말로 혜성 같은 움직임!
하지만 적비연은 그보다 더 빨랐다.
탓!
순식간에 왼손을 휘둘러 적의 검을 쳐내더니, 오른손을 뻗어 명치를 때렸다.
꽈아앙!
“커어억!”
늑골이 부서진 보패인이 비명을 내지르면서 포탄처럼 날아가더니 한쪽 구석에 쓰러져서는 다신 움직이지 못했다.
보패인들조차 믿을 수 없었다.
“으아아앗!”
분기탱천한 또 다른 보패인이 두 눈에 기광을 휘날리며 적비연을 향해 떨어졌다.
정말이지 세상을 양단할 기세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보다 적비연의 검이 더 빨랐다.
적들 사이를 한차례 누빈 검이 그대로 적비연 앞으로 날아들더니 한 줄기 빛처럼 솟구쳐 오른 것이다.
쉬파아아앗!
아래쪽에서 번쩍 빛이 터져오자 무겁게 떨어져 내리던 보패인이 그 자리에서 좌우가 양단되어 쓰러졌다.
츄아아아아아!
피가 분수처럼 일어난 뒤에야 검이 적비연의 손에 잡혔다.
구천혈마검의 제오초식, 구천역분경(九天逆噴景)!
그리고 그 상태에서 구천혈마검의 제육초, 구천뇌분전(九天雷奔電)!
콰지지지지직!
말 그대로 뇌전이 흐르며 적비연의 신형이 갈지자로 짓쳐들었다.
그 놀라운 신위에 보패인들은 입을 딱 벌렸다.
그렇게 적비연이 묘청운의 가슴에 검을 꽂기 직전,
팟!
순식간에 눈앞에 나타난 상대를 보고 적비연이 눈을 부릅떴다.
쩌어어엉!
콰지지지지지직!
고막을 찢을 듯한 소음에 이어 뇌전을 품은 기파가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쿠구구구구궁……!
특유의 기파를 이기지 못한 바윗덩이가 다시 부서졌고, 몇 그루의 커다란 나무가 시름시름 앓듯이 넘어갔다.
쿵! 쿠쿠웅!
적비연의 검을 막아선 백발의 중년인.
그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조곤조곤 말했다.
“이쯤 하시지요.”
그러자 주변에 있던 보패인들이 일제히 소리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림주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