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65화 (266/301)

265. 천림주(天林主)

서리가 내려앉은 듯 하얀 백발.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

어딘지 서글픔을 품은 듯한 표정.

정말이지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였다.

그가 어디에서 튀어나온 것인지 적비연은 알 수 없었다.

보패인이 워낙 강한 만큼 모든 신경을 보패인들에게 쏟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천해경에 오른 자신이 누군가 접근한다는 것조차 몰랐다는 것은 쉽게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이자…… 위험하다.’

본능이 경고한다.

보패인과 또 다른 힘을 지닌 자라고.

하늘아래 두려울 것이 없을 보패인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부드러운 인상의 미중년.

하지만 그 존재감만큼은 태산처럼 무겁다.

한순간의 눈빛, 입매, 표정, 손짓, 숨결, 심지어 그를 스치는 바람조차도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들리게 한다.

마치 적비연이 지닌 이능, 공천지권위를 보는 것만 같다.

뭔가에 홀린 듯 넋을 놓게 되는 모습.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매료된다?

그렇다.

우습게도 자신의 검을 막아선 이 미중년에게 매료된다.

만약 적비연이 보통의 사람이었다면 그의 미소 한 번에, 혹은 숨결 한 번에 세뇌라도 당한 것처럼 머리가 정지했을 터다.

하지만 적비연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보패인보다도 독특한.

수많은 경험을 축적한 후 완전하게 다듬어진 빈 그릇으로 돌아온 영혼이다.

자칫 공력이 풀어져 버리고, 몽롱한 정신으로 힘이 빠져나갈 때,

쉬이이이잇!

까아아앙!

미중년의 검을 가까스로 막아낸 적비연이 뒤로 한참이나 미끄러지다가 나무 기둥에 등을 부딪쳤다.

쿠웅!

꾸구우웅…… 콰당!

육중한 나무가 쓰러지자 적암곡이 다시 한번 진동한다.

적비연이 저릿저릿 울리는 팔을 내려다보며 눈을 부릅떴다.

‘큰일 날 뻔했군.’

본능적으로 상대가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그대로 당할 뻔했다.

뭐지?

공천지권위 같은 것인가?

아니면 사술인가?

하긴.

사술이라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보패인을 만드는 방식 자체가 일종의 사술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우습군.

사파인을 경멸한다면서도 결국 사술을 이용해서 사파인을 제거하려 하다니.

어찌 보면 그것이야말로 통렬한 복수처럼 보이겠지만, 달리 해석하면 똑같은 인간이란 뜻이 아닌가?

어쨌거나 중요한 건 눈 빤히 뜨고 목이 베일 뻔했다는 것이다.

한편 미중년인도 적비연의 반응에 뜻밖이라는 듯 눈을 살짝 치떴다.

그가 곧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과연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벽력적가주답습니다.”

“당신은?”

“천림의 주인이지요.”

“당신이 보패인을 만들었나?”

“보패인이라. 확실히 그렇게 부를 수도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제가 이들을 성장시켰습니다.”

“왜 그런 짓을……?”

“절대악을 제거하기 위해서.”

“우습군. 절대악이라니. 당신이 한 짓은 악이 아니란 건가?”

“제 기준에서는 필요악입니다.”

“궤변이야!”

타앗!

순간 적비연이 바닥을 차며 쏘아지듯 날아갔다.

무시할 수 없는 상대를 두고 선공을 양보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

확실히 본신에 온전하게 적응하고 나니 이전에는 사용하기 어려웠던 초식이 자연스럽게 펼쳐진다.

구천혈세공(九天血洗空)!

쉬아아아아악!

적비연의 신형이 순간 수십 명으로 쪼개진다.

주변은 온통 핏빛 안개로 자욱하다.

나무와 잎사귀, 풀잎과 흙바닥이 온통 붉게 변한다.

마치 세상이 피를 뒤집어쓴 듯하다.

적비연이 뿌린 검은 무형지기처럼 변해 사방에서 쇄도한다.

붉은 강기 수십 자루와 진검 한 자루가 빈틈을 주지 않은 채 핏빛 기운을 이끌며 미중년을 노린다.

구천혈마검의 제칠초였다.

지켜보던 보패인들이 입을 쩍 벌렸다.

천외천이 있다던가?

하지만 이렇게 빨리 그것을 볼 수 있을 줄이야.

물론 스물 남짓한 보패인들이 작정을 하고 적비연을 협공한다면 그 결과는 어떨지 알 수 없다.

하나 상대가 단 한 명이라는 점이 놀랍지 않은가?

마침내 강기와 진검이 미중년에게 날아가 작렬했다.

콰콰콰콰콰콰콰아앙!

검을 내지른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굉음이 폭발한다.

먼지 같은 기운이 사방팔방 풀풀 휘날리고, 미중년이 섰던 자리에는 분화구처럼 움푹 파였다.

쉬이이이이……!

마치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붉은 기운이 흩날리며 사라지자 텅 빈 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보패인들조차 놀라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누구보다 빨리 미중년을 찾아낸 사람은 바로 적비연이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는 곳.

그랬다.

미중년은 강기가 폭사한 그 자리에서 대략 삼 장 높이의 허공에 뜬 채로 뒷짐을 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엄청난 경지가 아닌가?

능공허도를 펼쳐도 놀랄 일인데, 몸을 움직이지 않고 허공에 가만히 떠 있다니?

능공허도 보다도 훨씬 많은 공력을 필요로 하는 경지다.

미중년이 천천히 내려왔다.

마치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미끄러지듯이.

바닥에 착지한 그가 주변을 한 차례 훑고는 말했다.

“대단하군요. 정공에 사공. 그리고 마공까지. 할 수만 있었다면 당신을 천림인으로 만들었을 것을.”

“내가 받아들이지 않았을 테지.”

“지금도 대단하지만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나보다도 더.”

“그래서?”

“음?”

“그래서 뭘 얻는 거지? 절대자가 되어서 뭘 하려고?”

“그야 뜻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겠지요.”

적비연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우두둑 꺾었다.

“내가 인생을 살아 보니까 말이야. 아, 혹시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진 마. 이래 봬도 내가 너보다 오랜 세월을 산 셈이거든. 내가 경험한 시간에 비하면 넌 아직 새파란 싹이지.”

“재미있군요. 반로환동이라도 했다는 겁니까?”

“그건 아닌데 설명하자면 복잡해. 어쨌거나 그런 경험자로서 하는 말인데. 결국 인생 별것 없다. 매번 계획을 세우지만 번번이 틀어지지. 늘 성공을 꿈꾸며 시도하지만 실패가 더 많아. 그런데 우습게도 그래서 인생이 살 만하더라고. 뭐든지 할 수 있는 강호 절대자? 만약 내가 그런 인간이 되면 뭘 할 것 같아?”

“글쎄요. 궁금하군요.”

“그땐 아마 나도 쉽게 할 수 없는 걸 찾아다닐 거야. 우습지 않나? 기껏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룰 수 있는 인간이 되었는데, 그 원하는 바가 쉽게 이루기 힘든 목표를 찾아다니는 거라니.”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걸 원한다라. 결국 모순에 빠질 거란 말이군요.”

“그래, 인간이 그런 존재다. 그래서 인간을 완벽하게 이해하기가 어려운 거야. 고로 우린 서로 달라도 다름을 인정하고 살 줄 알아야 하는 게다. 알겠냐? 아이야.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나의 잣대로 타인을 함부로 재단하지 말란 말이다.”

중년인은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이지 새파란 청년이 시건방지게 내뱉는 말인데, 왠지 적비연의 목소리에서는 그만한 세월을 경험한 노회함이 묻어 나온다.

“해서 사파를 용서하란 말입니까?”

“용서? 훗.”

적비연이 다시 피식 웃었다.

미중년인이 그저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사파가 너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더냐?”

“그들은 내게…….”

“아니. 그건 그들이지. 내가 말하는 건 사파야. 자, 저기 있는 조신우만 따져볼까? 그가 너에게 무슨 잘못을 저지른 거지?”

“싸잡아 비판하지 말란 뜻이로군요.”

“그래, 그건 또 하나의 폭력일 뿐이니까.”

“후후. 그것이야말로 궤변. 무릇 악의 뿌리란 그럴 만한 토양에서 자라는 법 아니겠습니까? 이미 망가진 넓디넓은 토양에서 생태계를 망친 잡초만 뽑다 보면 세월이 다 갈 겁니다.”

“그래서 아예 토양을 갈아엎겠다?”

“바로 그겁니다. 악의 뿌리가 자라기 좋은 토양은 한꺼번에 갈아엎는 게 편하지요. 그것이야말로 대의를 위한 작은 희생들. 나는 그 희생들을 기억할 겁니다.”

“하하하! 웃기는군. 아이야. 너는 그럼 그 작은 희생들에게 용서를 받고 시작하는 것이냐? 그 작은 희생들이 너처럼 한을 품을지 어찌 알고?”

“어쩔 수 없지요. 그들 스스로에게도 책임이라는 것이 있으니. 사파가 다 나쁘지 않다고 했습니까? 하지만 사파는 악의 뿌리가 자라기 쉽습니다. 한마디로 사파가 존재하는 그 자체만으로 원죄가 있다는 겁니다.”

나긋나긋하게 말을 내뱉고 있었지만, 미중년의 전신에서는 숨 막힐 듯한 살기가 폭사하고 있었다.

범인이 앞에 있었다면 눈을 까뒤집고 기절할 만큼.

그의 원한이 얼마나 깊은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적비연이 눈을 가늘게 뜨는데, 미중년이 피식 웃어 버리고는 말했다.

“뭐, 나름 즐거운 대화였습니다. 다만 그런 말 몇 마디로 해결될 일 같았다면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터.”

“뭐, 나도 그럴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어. 좀 답답해서 해본 말일 뿐이니까.”

적비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미중년인이 재미있다는 듯 툴툴 웃고는 물었다.

“그럼 이쯤에서 오늘 전투를 마무리 짓는 것이 어떻습니까? 이만하면 양측 모두 희생자가 상당한 것 같습니다만.”

미중년인이 적암곡에 쓰러져 있는 수많은 사상자들을 훑어보았다.

적비연도 착잡한 심정으로 그들을 훑었다.

그리고 아직 살아남은 조신우와 십여 명의 흑궁단원.

확실히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는 더 이상 싸우는 건 불필요하다.

게다가 미중년인의 무공 수위가 보통이 아니다.

만약 저들이 작정하고 달려든다면 조신우를 살리기는커녕 자신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뒤통수를 치진 않겠지?”

“물론입니다.”

말을 마친 미중년인이 손을 한 차례 휘저었다.

그러자 보패인들이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빠른 속도로 되돌아간 그들은 어느새 창궁단원들 옆에 나란히 섰다.

적비연이 조신우에게 다가가서 부축했다.

“괜찮으시오?”

“괜, 괜찮습니다.”

조신우가 가까스로 대답을 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적비연의 무위를 눈앞에서 목도했기 때문인지, 나이가 한참 어린데도 불구하고 함부로 대하기가 어려웠다.

미중년인이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가볍게 목례했다.

“그럼 오늘은 이만. 근시일 내에 또 뵙기를.”

말을 마친 그가 일순 신형을 흩트리는가 싶더니 귀신처럼 사라졌다.

은신술이라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기가 막힌 수법이었고, 경공이라면 천하에 그를 따를 자가 없으리라.

적암곡 입구에 모여든 적들이 마침 몸을 돌렸다.

그들이 멀어지는 것을 본 적비연이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우리도 갑시다.”

조신우가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면목이 없구려.”

“저들이 강했습니다. 보패인은 천해지경이니까요.”

“적 가주께서도 그런 것 같소만.”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겸양을 갖춰 대답하는 소리에 조신우는 내심 깊은 감명을 받았다.

‘정말이지 어린 나이답지 않구나.’

그제야 그는 세간에서 왜 벽력적가주를 그리도 주목하는지 알 수 있었다.

단순히 무공만 강한 것이 아니다.

그의 말과 행동 모든 것이 마음을 울린다.

사실 지금 조신우의 경우는 그 정도가 더했다.

공천지권위 영향 때문이었다.

그는 적비연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

* * *

새벽녘의 급습 다음으로 치러진 이차 대전이었다.

일차 전에서는 사도연맹의 일방적인 승리였다면, 이차전에서는 무림맹의 압승이었다.

수로채는 전력 칠 할을 잃었고, 녹림은 오 할을 잃었다.

어디 그뿐인가?

흑천련이 자랑하는 흑궁단은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고, 조신우는 어깨에 부상을 입어 당장 전쟁에 참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하지만 잃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적비연이 적암곡에서 조신우를 구해온 이야기는 사파 무인들에게 커다란 귀감이 되었다.

사파도 아닌 정도에서 건너온 벽력적가주가 흑천사왕 중 한 명을 목숨 걸고 구한 것이다.

상황이 이리 되자 적비연에 대해 반신반의 하던 사람들도 한 목소리로 그를 떠받들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도 분위기가 밝은 것은 아니다.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만약 조신우가 만통지의 뜻에 잘 따르기만 했어도 이 정도의 피해를 입지는 않았으리라.

그래도 만통지 덕분에 수로채는 전멸을 면했으니 그의 위상이 떨어지지도 않았다.

반면 무림맹은 잔치 분위기였다.

비록 당문이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었지만, 그 외에는 양호한 수준.

조신우를 잡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천림의 존재가 얼마나 막강한지 그들이 직접 겪었기에 무림맹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이제 어떻게 진행할 생각인가?”

맹주 허위청의 물음에 가후가 섭선을 살랑이고는 말했다.

“저들의 피해가 만만치 않습니다. 아마 다음 대전은 단기접전(單騎接戰) 형식을 제안할 가능성이 큽니다.”

단기접전이란 쉽게 말해 양측 대표자 한 명이 나서서 일대일의 비무를 치르는 형식을 말한다.

하나 근래에는 경우에 따라 한 명이 아니라 이 대 이 혹은 삼 대 삼 등의 형식으로 대표자가 늘어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럴 때는 소수로 이뤄진 단체 비무가 치러진다.

“흥! 말도 안 되는 소리. 본 맹이 이 상황에서 단기접전을 받아들일 리가 없…….”

“받아들일 겁니다.”

“뭐라?”

“흑천련이 비무를 제안한다면 어떠한 형식이든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본맹에는 천림이 있지 않습니까?”

* * *

흑천련 파양분타 대회의실.

만통지가 좌중을 살펴보면서 담담히 말했다.

“최후의 전투는…… 단기접전을 제안할 생각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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