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 단기접전
“단기접전이라니…… 저들이 받아들이겠소?”
수황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더 없이 싸늘했다.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수로채였다.
물에서의 싸움만큼은 세상에서 자신을 따를 자가 없다고 여겼다.
하여 만통지의 조언은 애초에 듣지도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 패전하면서 그는 많은 것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으로 그는 한층 더 성장하는 계기를 얻었다.
하나 대가가 너무 크다.
수십 척의 배를 잃어버렸고, 수로채 무인 절반이 비명횡사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을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아무 데나 분풀이를 할 수도 없다.
모든 것은 자초한 일.
다시 한번 자신을 갈고닦아야 한다.
마음 같아서는 폐관수련이라도 하고 싶지만, 그럴 시기가 아니다.
게다가 폐관수련을 할 만한 배도 남아 있지 않다.
대신 그는 시간 나는 대로 이 간질간질한 깨달음의 경계를 깨기 위해서 분타의 수련실을 이용하곤 했다.
그런데 육지의 수련실의 뜻밖에도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늘 변화무쌍하고 동적인 상태에서만 수련하던 그가, 시종 움직임 없는 땅에서 수련을 하니 새로운 깨달음이 찾아온 것이다.
물론 그 깨달음의 벽을 완전히 깨지는 못한 기분이었지만, 하루하루 달라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쨌거나 그는 다음 전투에서 설욕전을 치르기 위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투왕도 상황이 다르진 않았다.
비록 그가 수로채의 은인이 된 상황이긴 하지만, 녹림도들의 희생이 상당한 상황이었다.
자신이 애초에 생각해 둔 것보다 훨씬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셈이다.
거기에는 수중 전투라는 점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
비록 몸이 빠질 만큼 깊은 물이 아니었지만, 무릎이나 허벅지까지 차오른 물은 산채 무인들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물론 그들은 산속 계곡에서도 전투 훈련을 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계곡은 그들이 작전상 이용할 경우다.
게다가 급류가 흐르는 계곡의 특성과 완만하게 흐르거나 고인 호수의 특성은 판이하게 다르다.
그러다 보니 몸이 무거워진 녹림도들이 다수 희생당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투왕은 시간만 나면 틈틈이 연못에 몸을 담근 채 수련을 하기도 했다.
그 역시 낯선 환경에서의 실전과 훈련을 반복하다 보니 새로운 깨달음이 찾아오는 중이었다.
어쨌거나 수황과 투왕, 그리고 각지에서 모여든 사도 방파의 장문인들은 삼차대전을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한데 만통지가 뜻밖에도 단기접전을 제안한 것이다.
대표 한 명이 나와서 비무를 치르는 단기접전.
물론 그것으로 전쟁의 승패를 가르기도 하고, 난전이 일어나기 전에 적의 사기를 꺾겠다는 이유로 선제적인 공수전이 될 때도 있다.
문제는 지난 대전에서 대승을 거둔 무림맹이 단기접전을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사기가 치솟아 있는 상황.
한데 굳이 비무를 치러 위험을 자초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만통지의 생각은 달랐다.
“저들에게는 보패인이 있네. 지난 대전에서 겪었듯이 보패인들의 무공 수위는 천해경에 이른 정도일세. 단기접전을 굳이 피할 이유도 없지. 게다가 우리가 공공연하게 단기접전을 제안한다면, 세상의 이목이 집중되는 만큼 쉽사리 거절하진 못할 걸세.”
어느 정도 일리 있는 말이다.
특히 무림맹의 경우 단기접전을 거절하게 되면 겁쟁이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실리를 따져서 제안을 받지 않는다면…….
“아님 말고지. 일단 제안을 해서 우리가 손해 볼 건 없지 않겠나?”
“그렇긴 하지만 패배한다면 확실히 손해겠죠.”
은하란의 말에 모두가 시선을 돌렸다.
눈총이 따갑다.
하필 패배할 수도 있다는 걸 가정할 게 뭐냐는 듯.
하나 은하란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승패는 병가지상사.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어요. 이번 대전에서 본 연맹이 대패한 것처럼. 원래 승리는 준비된 것이지만, 패배는 늘 예고 없이 찾아오는 거니까요.”
“이런 젠장! 그럼 대체 어쩌자는 거야?”
투왕이 성질을 부리며 소리치자, 은하란이 희미하게 웃으며 그를 달랬다.
“흥분하지 마세요. 난 반드시 패배할 거라는 말이 아니에요.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걸 알려 드리는 거죠. 지금 여러분은 마치 단기접전만 치르면 무조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시잖아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말씀드리는 거예요.”
“끄음.”
“우리가 먼저 제안을 하면 방식은 저쪽에서 선택하도록 양보해야 할 거예요. 일대일이 될지, 이 대 이가 될지. 아니면 수십 대 수십이 될지도 모르죠.”
“하면 단기접전의 승패를 전쟁의 결과로 받아들이고 물러나게 하겠단 건가?”
투왕이 다시 질문을 던지자, 만통지가 침음을 흘리다가 말했다.
“그 부분이 가장 어려운 부분이지. 저들은 사파를 궤멸시키고 무림을 정도천하로 만들 생각이야. 현재 역대급 응집력을 보이고 있으니 불가능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게지. 한데 그 상황에서 비무의 결과를 곧 전쟁의 결과로 받아들여 달라고 강요하긴 무리수겠지.”
“그럼 단기접전을 치를 이유는?”
“만약 우리가 이기면 사기가 증폭되고 적의 사기를 꺾을 수는 있겠지. 또한 저들도 일단 정비할 시간을 가질 테니 시간을 벌 수도 있고.”
그러자 듣고만 있던 극마가 끼어들며 물었다.
“저놈들이 뒤통수를 칠 가능성도 있지 않나?”
“이를 테면?”
“단기접전으로 승부를 내자고 해놓고, 저놈들이 패배하니까 갑자기 전면전으로 치고 올 수도 있단 말이지.”
과연 극마가 생각할 만한 부분이었다.
그는 근본적으로 무인들을 믿지 못하는 듯했다.
특히 정도 무인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만통지는 고개를 저었다.
“무림맹은 명분을 중시하는 곳. 우리가 공개적으로 단기접전을 제안한 만큼 그런 꼼수를 사용하진 못할 걸세. 민심을 잃으면 정도천하가 된다고 한들 오래 유지할 수도 없을 테니.”
대회의실에 모인 무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투왕이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탁 내리치며 말했다.
“뭐, 그럼 제안이나 해보는 거지. 놈들이 받아들인다면 얼씨구나 하고 한바탕 놀아주는 거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겁쟁이라고 비난을 퍼부으면 될 일이군.”
“다들 이의는 없는 건가?”
만통지의 질문에 모두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반박할 이유가 없었다.
투왕의 말대로니까.
만통지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물었다.
“하면 이제부터 경우에 따라 단기접전을 치를 때 참여할 사람을 선별해 보세. 누가…….”
“당연히 여기에서 가장 강한 본좌가 나서야 하지 않겠소? 영감!”
투왕이 제 가슴을 팡팡 치며 외쳤다.
그러자 동소유가 빈정거리듯 말했다.
“혼자만의 생각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뭐가 어째? 이봐, 제수씨. 이러면 섭섭해.”
“제, 제수씨라니. 이런 자리에서 그 무슨……!”
당황한 동소유가 낯빛까지 붉히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미계수와 그녀의 관계를 아는 몇몇 무인들이 툴툴거리며 웃었다.
두 사람의 뜬금없는 대화로 분위기가 누그러지자, 이어지는 논의는 좀 더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 * *
차가운 공기가 뺨을 적신다.
오전부터 흩날리던 싸라기눈이 이젠 제법 굵직한 눈발이 되어 휘날리고 있었다.
겨울바람에 목이 움츠러드는 날씨.
하지만 임송화는 추위도 잊은 채 후원 정자에서 턱을 괴고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한 사람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바로 벽력적가주 적비연.
그는 지금 너른 후원 한쪽에서 흑천련 무인들의 수련을 살피면서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는 중이었다.
때론 몸소 시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에게 수련을 받는 사람들은 대체로 대주나 단주 이상의 직급.
상상이나 했을까?
정도문파의 가주가 흑천련으로 넘어와서 대주나 단주들에게 무공을 가르칠 일이 있을 거라고.
가장 치열하고 격렬했던 이차대전에서 그녀는 적비연의 무공 수위를 똑똑히 보고 경험했다.
그야말로 초인의 경지.
누가 뭐라고 해도 절대자의 경지에 다다른 상태.
그가 옆에 있다면 보패인도 두렵지 않을 정도였다.
오죽하면 지금도 이따금씩 수황이나 투왕까지 찾아와 그에게 무공에 대해 물어볼까?
자존심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자들이 적비연에게 무공 조언을 듣다니.
뿐만 아니라 흑천련주가 적비연에게 꼼짝도 하지 못한다.
얼핏 보면 동등한 관계처럼 보이지만, 임송화는 특유의 직감으로 대번 알 수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흑천련주가 적 가주에게 꼼짝도 못한다는 것을.
이대로면 정말이지 적 가주가 흑천련을 집어삼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지난번에 그가 조신우를 구하면서 흑천련 내에서의 평판은 련주 못지않게 대단했다.
정작 련주조차도 그것에 불만이 없으니 흑천련 무인들은 적비연의 말이라면 불길 속이라도 뛰어들 태세였다.
그리고 그를 향해 불나방처럼 마음이 달려가는 한 사람.
“후우우.”
임송화는 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적비연을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현청과 대화를 나누는 하천웅을 슬쩍 보았다.
천진하게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는 하천웅을 보니 괜히 또 한숨이 나온다.
“하아아.”
내가 이렇게 금방 사랑에 빠지는 체질일 줄이야.
정말 꿈에도 몰랐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자신은 몇 명의 남자를 마음에 품은 것일까?
하천웅을 보았을 때는 정말 ‘이 남자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예홍을 신경 쓰긴 했지만, 그녀는 가주님만 생각한다고 했으니 경쟁 상대가 아니었다.
한데 이후에는 반철룡을 보고 반해 버렸다.
‘그래, 사파면 어때? 사람이 바람직하고 진취적인데!’
그렇게 하천웅을 가슴에서 지우고 반철룡을 흠모하기 시작했다.
한데 반철룡이 죽고 나자 가슴 한편이 텅 비어 버린 것 같았다.
우스운 건 그 공허감이 채 열흘도 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자신의 가슴속에 파고든 또 다른 남자, 투혈권왕!
맙소사, 이 짧은 기간 자신은 몇 명의 남자를 가슴에 품었나?
‘나, 바람기가 있는 걸까?’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투혈권왕은 하천웅과 반철룡만큼이나 빠르게 자신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반철룡의 죽음이 기억조차 나지 않을 만큼.
그래서 또 마음먹었다.
‘그래, 흑천련주의 제자면 어때? 사람이 올곧고 강직한 심성인데!’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합리화한 다음 마음껏 흠모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랬던 투혈권왕도 죽었다.
그때부터는 아예 생각을 고쳐먹었다.
다시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노라.
분명 저주가 씌인 것이리라.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면 모두 죽어 버리는.
아, 하천웅만 빼고.
어쨌든 그렇게 굳게 마음을 먹는 동안 흑천련주에게 마음이 살짝 흔들릴 뻔했지만 잘 참았다.
그런데……!
“아아! 도대체 저 남자는 뭐야!”
임송화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짜증을 냈다.
갑자기 자신 앞에 나타난 사람.
정말이지 숨결처럼 자연스럽게 나타난 사람!
벽력적가주 적비연!
그에 대한 소문은 귀가 닳도록 들었는데, 저런 인물일 줄이야!
그는 마치 그간 가슴에 품었던 모든 남자들의 집합체인 것만 같았다.
하천웅의 섬세함, 반철룡의 강직함, 투혈권왕의 호쾌함, 흑천련주의 강함까지!
왜 저렇게 완벽한 거야!
한데 그런 적 가주에게는 예홍이 있다.
물론, 적 가주는 예홍을 그런 상대로 보는 것 같지도 않지만.
어쨌거나 그가 지금 임송화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별빛처럼 다가온 그대. 내 마음에 왜 이런 흠집을 내시나요?’
임송화가 한숨을 내쉬고는 가슴을 꼭 움켜쥐었다.
그때였다.
늙수레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불쑥 들리는 것이 아닌가?
“확 고백이나 해버리지 그러나?”
“헉. 언제 오신 거예요?”
놀라서 돌아보니 만통지가 짓궂은 미소를 짓고 있다.
“쯧쯧. 초절정에 이른 후기지수가 등 뒤에 나타난 보통 늙은이도 눈치를 채지 못하다니. 아주 제대로 빠졌군. 이래서 사랑이 위험한 걸세.”
“영, 영감님이 뭘 안다고 그러세요!”
“나야 다 알지. 내 별호가 만통지 아닌가? 흐흐.”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러지 말고 확 고백해 버리게. 어차피 남자는 다 똑같아.”
“흥! 영감님이야말로 그렇고 그런 똑같은 남자면서. 다 안다는 듯이 말씀하지 마시죠?”
임송화가 씨근거리고는 휙 걸어갔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그녀가 홱 돌아보고는 외쳤다.
“다 그렇고 그런 남자? 영감님이야말로 더한 사람이에요! 그렇게 잘 안다면서 오히려 부채질이나 하시고! 흥!”
토라져서 걷는 그녀를 귀엽게 바라보던 만통지가 피식 웃었다.
“졸지에 이 나이 먹고 욕만 먹었군. 그런데 가만…….”
적비연을 바라보던 만통지의 눈빛이 순간 멈칫하더니 가늘어졌다.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친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거 어쩌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