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67화 (268/301)

267. 은하란의 비밀

전각 제일 위층에 오른 은하란은 서녘에 물드는 파양호를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노을을 담은 호수는 마치 피를 머금은 듯 붉었다.

저곳에 수많은 생명이 스러진 것을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아릿한 기분이 든다.

어머니는 이 일을 예견하셨을까?

그녀는 시선을 내려서 분타 한쪽을 보았다.

마침 적비연과 만통지가 나란히 이쪽 건물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마침내 본신을 되찾고 천해경에 오른 적비연.

그를 그렇게 성장시킨 이유도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언 때문이었다.

‘어머니, 나 이 정도면 잘했나요?’

한 시진 전까지만 해도 함박눈이 펄펄 내리던 하늘은 거짓말처럼 맑아져 있었다.

이대로면 곧 별무리도 볼 수 있으리라.

마치 어머니가 하늘에서 화답이라도 하는 듯하다.

애썼다고.

그만하면 할 만큼 했다고.

애초에 적 가주를 찾는 일부터 어려웠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전 신탁을 받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훗날 남쪽으로 가서 그릇을 완전히 비울 수 있는 자를 찾아라. 그리고 내가 남긴 책자에 쓰인 주술대로 행하면 그가 세상을 구할 것이다.”

막연했다.

그릇을 완전히 비울 수 있는 자를 찾으라니.

처음에는 진짜 그릇을 만드는 유기장이를 찾으라는 뜻인 줄 알았다.

하지만 조금 큰 후에는 그것이 정말 그릇을 말하는 게 아니라 비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림맹에 몸을 담고 계셨던 어머니.

그렇다면 강호와 관련된 자가 아닐까?

게다가 어머니가 남겨두신 주술의 맥을 따져보면 분명 그 상대가 무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다가 마침 적비연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벽력적가에서도 쉬쉬하는 정보였기에 그 정보를 입수하는 것이 쉽진 않았다.

개방도 몰랐던 사실이었고, 하오문도 몰랐다.

귀문회도 마찬가지.

다만 무림맹 신의 아상이 주기적으로 벽력적가를 방문한다는 정보만 입수했다.

심상치 않다고 여겼다.

아무리 아상이 벽력적가주에게 신세를 졌다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드나드는 것이 조금 수상쩍었다.

이 부분을 끈질기게 파고들다가 마침내 적비연의 희귀병, 공위증을 알게 된 것이다.

체내의 공력이 점점 고갈되다가 마침내 선천지기까지 증발하여 결국 죽음에 이르는 불치병!

아, 어머니가 말씀하신 그릇을 비우는 자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가?

만약 적비연이 공위증이 아니었다면?

종국에는 그 주술의 신비로움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을 때마다 쌓여만 가는 공력에 점점 미쳐서 주화입마에 걸릴 가능성이 농후했다.

하지만 완전히 빈 그릇이 된 본신으로 돌아간 적비연은 이제 중원에서 절대강자의 자리에 올랐다.

물론 무림맹이 가진 힘, 보패인도 막강하다.

그래서 아직 방심할 수는 없다.

그래도 어머니가 남긴 유언만큼은 확실히 이행한 셈이다.

은하란은 붉게 젖은 눈동자로 서쪽을 보았다.

‘어머니, 후회는 없으신 거죠?’

그때, 그녀의 조용한 대화에 끼어 든 자가 있었으니,

“후회하고 있는가?”

불쑥 들린 목소리에 돌아보니 만통지가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제 핏줄에 칼을 들이밀었으니 후회될 만도 하지.”

“무슨……!”

은하란이 흔들리는 눈빛으로 만통지를 보았다.

만통지가 손을 휘휘 저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말게. 오래 살았고, 또 세상사에 관심이 많은 늙은이라 당연하게 생각하게. 내 별호가 만통지이지 않은가?”

“만통지가 세간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시는군요.”

“클클, 평생 책자만 펼치고 달달 외운들 헛똑똑이가 될 가능성이 크지. 당장 현세에 일어나는 일에 관심이 없다면 진정한 만통지가 아니란다.”

“황실에 관해서도 빠삭하시겠군요?”

“황자가 일주일에 화장실을 몇 번 정도 가는지 알려줄까? 평소 자주 꾸는 꿈이 무엇인지도?”

“정말 그렇게 자세히 아세요?”

“클클, 내가 어찌 그런 것까지 알겠나?”

“뭐예요?”

“그렇게까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강호 중대사는 알 수밖에 없지. 그 정도는 알아야 어딜 가서 똑똑한 척을 할 수 있으니까 말일세.”

“그래서…… 말씀해 보시죠.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자네가 무림맹주의 딸이라는 사실. 혹시 맹주는 그 사실에 대해 알고 있나?”

“……!”

은하란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떻게 그걸 이자가……!

만통지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난간으로 걸어갔다.

“오래전 강호에 소문이 돌았지. 머지않아 강호가 멸망할 거라는. 그리고 그 소문은 무림맹 신녀의 입에서 나왔고.”

“그래서요?”

“무림맹이 건재한 상황인데 강호멸망을 예언하는 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야. 당시 맹의 수뇌부는 신녀가 못마땅했네. 설상가상으로 신녀가 신력도 잃었어.”

“…….”

“당연히 신녀는 무림맹에서 쫓겨났네. 그 신녀는 인적이 닿지 않는 곳으로 숨어들었지. 신력을 잃었지만, 그래도 기문둔갑술에 해박했으니 제 한 몸 숨기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게야. 한편 무림맹은 신녀를 겁간한 무인 세 명을 참수했지. 자네도 알겠지만, 신녀가 신력을 잃는 이유는 수태. 바로, 자네를 임신했기 때문이었네.”

“그, 그렇다고 해도 방금 하신 말씀은…….”

“자네가 맹주의 딸이라는 것 말인가?”

은하란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통지가 툴툴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아무리 나라도 그걸 알 수는 없어. 다만 의아했을 뿐. 당시 신녀를 겁간했다면서 참수된 자들에 대한 기록을 보면 억울한 면이 있거든. 한데도 일사천리로 진행됐어. 마치 뭔가를 덮으려는 듯 말일세.”

“단지 그것만으로 그런 유추를…….”

“물론, 그건 아닐세. 그저 이상하다고만 생각했을 뿐. 자네가 맹주의 딸일 거라고 짐작한 건 누군가 내게 말을 해줬기 때문일세.”

“대체 누가……?”

그때 만통지 뒤에서 그림자가 불쑥 나타났다.

“나요.”

“당신……!”

은하란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바라보자, 적비연이 쓴웃음을 깨물며 말했다.

“놀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잊었소? 내 기억에는 아상 어르신의 경험이 고스란히 들어 있다는 걸.”

“아…… 하지만 아상 어르신은…….”

“맹에 들어간 지 오래되진 않았소. 확실히 그 일이 있을 때는, 아상 어르신이 맹에 계시지 않았지.”

“하지만 어떻게 안 거죠?”

“맹주와 아상 어르신이 꽤나 마음을 터놓고 지내던 사이라는 것을 몰랐나 보구려.”

“아…….”

“두 사람은 자주 술자리를 가졌소. 그때마다 맹주는 신녀에 대한 이야기를 후회하듯이 말하곤 했소. 나는 그 기억을 굳이 찾아보지 않았지만, 만통지와 얘기를 나눈 후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소. 그리고 각자가 가진 정보를 조합해서 당신이 맹주와 신녀 사이에 태어난 딸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었소.”

“물론 확실한 건 아니었다네. 하나 자네의 반응을 보고 이젠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멍한 표정으로 듣던 은하란이 피식 웃었다.

확실히 방심한 부분이 있다.

그 비밀을 아는 자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누구든 맹에서는 제거 대상으로 볼 테니까.

아상 어르신 역시 확실한 단서를 가지진 못했을 것이다.

술에 취한 맹주가 넋두리처럼 주절거리는 말을 대충 주워들었을 뿐일 테니.

“아버지가…… 술을 드시면 어머니 얘기를 하셨다고요?”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 후회하셨소. 당시 신녀를 추방한 것을.”

“가식적이군요.”

“가식인지 아닌지 나는 모르겠소. 다만 술자리에서의 눈빛만큼은 무척이나 쓸쓸해 보였지.”

“그러면서도 저지른 짓은 절대 발설하지 않았나 보죠?”

“그랬소. 단지 신녀를 생각하면 후회된다고만 말했소. 그리고 매우 그리워했소.”

“그리워했다고요? 어머니를 독살했으면서?”

그 말에 적비연은 물론 만통지도 흠칫거리고는 놀랐다.

“독살했다고?”

“그래요. 어머니는 중독으로 돌아가셨어요. 무려 십 년이나 해독하며 버티셨지만 결국 완치하지 못하셨죠.”

“그럴 리가. 맹주는 그런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소.”

“그러니 가식이라는 거예요! 그자는 내 어머니를 보고 욕정을 품고 겁간을 했어요! 이후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게 되자 어머니를 제거한 거죠! 엉뚱한 세 명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그런…….”

이번엔 오히려 적비연이 헷갈린다는 표정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맹주의 표정은 진심을 담은 것처럼 보였기에.

하지만 은하란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더욱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걸로도 모자라 어머니가 입을 열까 두려워 끝까지 우릴 추격했죠. 물론, 끝내 찾아내지 못했지만요.”

“하지만 나와 대화할 때는 정말 그리움을 담은 표정으로…….”

“무림맹이 가식 덩어리라는 걸 모르시나요? 맹주가 되려면 최고의 가식 덩어리가 되어야겠죠.”

“자자, 이쯤에서 정리하세.”

보다 못한 만통지가 끼어들며 두 사람은 진정시켰다.

만통지가 깊은숨을 들이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직접 확인해 보는 게 어떻겠나?”

“뭘요?”

“맹주가 가식 덩어리인지 진심이었는지.”

“확인할 것도 없……!”

“만통지. 다시 말하지만 내 별호일세. 세상만사 돌아가는 일을 누구보다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재능이 있으나, 한 길 사람 속만큼은 가늠하기 어렵더군.”

“영감님 말씀대로 제 아버지입니다. 제가 잘 알아요.”

“그럴까? 어쩌면 가장 가깝기 때문에 가장 모르는 법일세. 자식에 대해서는 부모가 제일 무지한 법이고, 부모에 대해서는 자식이 제일 무지한 법이지.”

“그렇다고 한들 어떻게 확인을 하라는……!”

“방법이야 대화밖에 더 있겠나? 서로 눈을 마주보고 대화하는 것밖에.”

“말도 안 되는 소리. 지금 저보고 무림맹으로 가서 ‘아빠, 저 왔어요’ 하고 인사라도 하라는 건가요? 입이 떨어지기도 전에 목이 떨어질 텐데요?”

“물론 그럴 가능성도 있지. 그래서 몰래 가보라는 걸세.”

“더 말도 안 되는군요? 대체 철통같은 방비를 한 무림맹으로 어떻게 몰래 가라는…….”

“내가 데려다주겠소.”

적비연의 말에 은하란이 입을 다물었다.

만통지가 씨익 웃었다.

“자네가 만들지 않았나? 지상최고의 절대강자. 천해지경에 이른 적 가주일세. 자네를 데리고 맹주의 침소까지 가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걸세. 다만…… 맹주 목이라도 따는 순간에는 일이 복잡해지겠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보패인들이 미쳐 날뛰면 아무리 적 가주가 강해도 혼자서는 막아내기 힘들 테니까.”

“정말 대화만 하고 돌아오란 거군요.”

“그렇네.”

“왜 그렇게 절 보내야 하는 거죠? 이유가 뭐죠?”

“역시 자넨 똑똑하군. 사실 내가 지금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오늘 우연히 어린 여인에게 욕을 먹다가 느낀 거지.”

낮에 임송화와 나눈 대화를 두고 한 말이었다.

다만 그런 일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은하란은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대체 무슨……?”

“그럼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듣게나. 물론 내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자네가 움직이지 않겠다면…… 더 강요할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전쟁이 매우 위험하게 전개될 수도 있겠지만.”

잠시 망설이던 은하란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일단 들어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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