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 은하란의 비밀
“……님?”
누군가 부르는 목소리.
하지만 맹주 허위청은 의식하지 못했다.
오랜만에 창밖을 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밤하늘에 총총히 빛나는 별을 보니 오래전 생각이 절로 떠올랐다.
어쩌면 가장 행복했던 시절.
주변 사람들을 모두 물리고 지금은 사라진 초신궁(招神宮) 후원에서 그녀와 밀회를 가지던 날들.
그녀를 떠올리면 자연스레 밤하늘의 별이 생각났고, 밤하늘의 별을 보면 자연스레 그녀가 떠올랐다.
늘 타인의 눈을 피해 야밤에만 별빛을 밟으며 후원을 거닐었기 때문이리라.
밝은 대낮에도 사적으로 만나보는 것이 소원일 만큼 남몰래 연정을 품었더랬다.
맹주로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을 때였다.
다만 어느 날 그녀가 불쑥 내뱉은 예언은 그를 무척이나 곤욕스럽게 만들었다.
강호멸망.
확실히 쉽게 넘길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강호인들이 술렁거렸고, 무림맹의 위상이 흔들릴 수 있는 문제.
공교롭게도 그즈음에 신녀는 신력을 잃었다.
자신 때문이었다.
문제가 심각해졌다.
결국 맹주는 총군사 가후에게 모든 사실을 알려주었다.
총군사로 임명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가후로서는 맹주의 신임이 반가웠으리라.
동시에 입지가 좁았던 두 사람이 똘똘 뭉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다만, 젊은 가후가 내놓은 대책이 다소 파격적이었다.
신녀 추방.
그리고 평소 행실이 좋지 않았던 대주와 단주 세 명에게 모든 죄를 덮어씌웠다.
돌이켜보면 그 세 사람은 총군사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었다.
그 일로 인해 가후는 무림맹에서도 입지를 탄탄하게 다질 수 있었다.
대책이 마련되고 시행되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신녀는 추방되었고, 문제의 예언도 서서히 잊어져 갔다.
어차피 신력을 잃은 신녀의 망언으로만 여겼다.
그때까진 그게 전부인 줄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야 알았다.
가후가 신녀를 독살하려고 했고, 추격자들을 보내 목숨마저 끊으려고 했다는 것을.
이 사실을 안 맹주가 분기탱천했지만, 가후는 젊은 나이답지 않게 차분했다.
당시 가후는 뱀처럼 차가운 눈으로 맹주를 직시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 울분의 칼날로 제 목을 치실 것인지, 사파인들의 목을 치실 것인지 선택하시지요. 단, 제 목을 치신다면 언젠간 그 칼날이 맹주님의 목도 치게 될 겁니다.”
너무나 냉담한 반응에 맥이 빠질 지경이었다.
결국 맹주는 가후를 처벌하지 못했다.
대신 더 이상 신녀를 추격하지 말 것을 명했다.
가후도 그건 받아들였다.
어차피 중독된 몸이니 머지않아 죽을 거라고 여겼다.
또한 그녀가 진정 맹주를 사랑했다면 어디 가서 함부로 입을 떠벌리진 않을 거라 생각했기에.
뭐, 사실 찾지 못한 것도 있었고.
어쨌거나 그렇게 세월이 흘러 오늘에 이르렀다.
싸늘한 겨울 밤바람이 불어와 맹주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진다.
별빛이 유난히 시리다.
‘오늘따라 그대 생각이 왜 이렇게 나는지 모르겠소.’
차라리 그 옛날 자신이 맹주의 자리를 포기하고서라도 그녀를 지켰더라면.
권위와 명성을 잃되 사랑을 지켰다면 조금은 더 행복한 삶을 살았을까?
신녀의 말에 따르면 모든 현상에는 이유가 있다고 했다.
우연 속에서도 필연의 법칙이 존재한다고 했다.
오늘 이렇게 문득 그녀가 사무치도록 그리운 것은 왜일까?
자신도 모르는 어느 공간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기에 자신은 이런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까?
그때 다시 귓가를 자극하는 음성.
“맹주님?”
그제야 정신을 차린 맹주가 고개를 돌렸다.
총군사 가후.
아까부터 옆에서 자신을 부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 미안하네. 잠시 상념에 빠져 있었네.”
“고민이라도 있으십니까?”
가후의 질문에 맹주가 희미하게 웃었다.
“어찌 웃으십니까?”
“재미있어서.”
“……?”
“만사를 다 꿰뚫어보는 자네가 아닌가? 한데 지금 내 속을 모르니 그게 재미있어서.”
“어찌 사람 속을 다 알겠습니까? 신이 아니고서야.”
가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도 모든 일이 자네 말대로 흘러가는 게 신기하군. 정말 저들이 단기접전을 제안해오지 않았나?”
“피해를 최소화하고 전세를 뒤집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 테니까요.”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했을 텐데.”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격이지요.”
“하지만 그 감을 던져줄 테고?”
“그렇습니다.”
“한데 단기접전을 일대일로 치르지 않겠다는 말인가?”
“예, 저쪽의 핵심 인력을 모두 끌어낼 생각입니다.”
“핵심 인력이라…….”
“적비연 가주, 흑천련주, 수황, 투왕. 교패가 되겠지요.”
“다섯 명.”
“그렇습니다.”
“한데 천림인으로만 싸우지 않겠다는 건가?”
“예, 저쪽의 핵심 인력을 모두 끌어내는 조건인 만큼, 이쪽에서도 명망 높은 강호명숙이 나서주어야 할 것입니다. 천림인들의 무공이 대단하긴 하나 알려진 바가 적으니…….”
“무슨 뜻인지는 알겠네. 이쪽이나 저쪽에나 상징성이 필요하단 말이겠지.”
“그렇습니다. 하여, 단기접전에 맹주님이 나서주신다면 흑천련주를 끌어낼 수 있을 걸로 보입니다. 거기에 천림의 연리하도 함께 내보낸다면 분명 흑천련주가 나서겠지요.”
확실히 연리하까지 나선다면 흑천련주가 가만히 있진 않으리라.
맹주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파의 핵심 인력을 단기접전에서 모두 격파한다면, 이 전쟁의 결말은 뻔하다.
사파인들의 대몰락으로 이어질 터.
“알겠네. 단기접전에 나서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무림맹의 위상을 드높여주시길.”
“오늘은 그만 쉬고 싶군. 먼저 들어가도록 하겠네.”
“예, 살펴 가십시오.”
공손히 허리를 숙인 가후를 뒤로하고 맹주가 걸음을 옮겼다.
그는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낭하를 따라 걷다가 임시로 마련된 맹주실로 들어섰다.
원래는 흑천련의 남창 분타주가 사용하던 방이었다.
각종 장신구로 화려하게 치장된 방.
평소 남창 분타주가 얼마나 사치를 즐겼는지 엿볼 수 있는 광경이었다.
물론, 나중에는 이 방에 사용된 값비싼 장신구들은 모두 맹에서 회수 조치할 예정이었다.
그대로 장삼을 벗으려던 맹주는 흠칫거리고는 가벽 쪽을 돌아보았다.
명백한 기운.
강하다!
일부러 숨기려고 한 기색도 없다.
아예 대놓고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어찌?
임시 맹주실이라고는 하지만 주변을 철통같이 감시하는 호위들이 있다.
게다가 자신을 언제나 밀착 호위하는 무인도 있다.
그런데 지금 맹주실 가벽 너머에서 명백한 존재감을 뿜어내지 않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
호신위들이 모두 당했다는 뜻!
자신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순식간에.
그럴 수가 있나?
천해경을 넘보는 초절정의 극에 이른 자신인데?
‘대체 누가 이 정도로 막강한…….’
떠오르는 인물이 몇 있다.
그중에서 우선 수황은 제외다.
수귀들을 많이 잃어서 이곳에 쳐들어오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겠지만 그렇게 사리분별 못 할 자가 아니다.
더구나 육지에서 그의 실력은 수중의 전투의 칠 할 수준이라고 봐야 한다.
하면 누군가?
흑천련주?
아니, 흑천련주가 그리 가벼이 움직일 리는 만무하다.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역시 벽력적가주다.
가벽 뒤에서 풍겨오는 기운만 보더라도 그렇다.
어딘지 정공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나?
그런데…….
’한 사람이 아니다?
이건 또 뭔가?
미약한 기운이 또 느껴진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했다.
한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운이 점점 명백하게 느껴진다.
다른 한 명은 여인인가?
무공을 거의 익히지 않은 듯하다.
숨결과 기도가 여인 같다.
맹주는 상념을 접어두고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창가로 걸어갔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밝은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여차하는 순간 외부와 접선하기 좋도록 자연스럽게 행동한 것이다.
그가 별무리를 올려다보며 무심한 듯 말을 던졌다.
“어인 일이신가? 본 맹에 등을 돌렸을 때는 독한 마음을 품었을 진데. 이제 와서 후회하는 마음이라도 든 건가? 적 가주.”
맹주는 상대가 적비연일 거라는 걸 지레짐작하고는 물었다.
그의 예측은 틀리지 않았다.
마침 가벽 뒤에서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적비연이 달빛 아래로 모습을 드러냈다.
“과연 맹주님이십니다. 바로 알아보실 줄은 몰랐습니다.”
“자네는…… 흐음.”
맹주가 적비연을 돌아보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강하다.
분명 드러낸 기도가 전부는 아닐 진데 풍기는 분위기가 다르다.
아니, 오히려 절정고수 수준이 본다면 무공도 익히지 않은 햇병아리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초절정의 극에 오른 맹주가 보기에는 적비연의 강함이 여실히 느껴졌다.
말 그대로 느낌.
어떤 근거가 있는 건 아니다.
그저 날카로운 생존 본능 같은 거랄까?
“젊은 나이에 벽을 허물었군.”
“운이 좋았습니다.”
“한데 날 찾아온 이유는? 지금 이 행동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자네라면 모를 리 없을 텐데. 설마 내 목을 노리는 것은 아닐 테고. 게다가 여인과 함께라니.”
맹주의 시선이 가벽 뒤쪽으로 다시 향했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여인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
마침내 달빛이 그녀의 얼굴까지 비추자 맹주는 얼음처럼 굳어서 멈칫거렸다.
물론 그 반응은 아주 잠시간에 지나지 않았기에 다른 사람이 눈치채기는 힘들 정도였다.
“그대는……?”
맹주의 질문에 은하란이 쓴웃음을 물었다.
“은하란이라고 합니다.”
“아아, 말로만 듣던 천상원주가 자네로군. 은하란…….”
맹주는 잠시 초점 잃은 눈빛으로 그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 반응을 가만히 지켜보던 적비연이 넌지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아, 아닐세. 아무것도.”
대충 둘러댄 맹주가 은하란을 다시 한번 보았다.
그의 눈동자가 미약하게 떨렸다.
설마…… 아닐 테지.
하지만…….
‘놀랍도록 닮았구나.’
가슴 한편이 뜨거워진다.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심장이 뛴다.
맹주는 계속해서 은하란의 얼굴을 살폈다.
확실히 닮았다.
이십여 년 전 무림맹에서 추방당했던 그녀와.
하나 아닐 것이다.
분명 유산했다고 듣지 않았나?
독에 당했으니 온전하게 아이를 낳았을 리가 없다.
‘그래도 너무 닮았군.’
애써 생각을 갈무리한 맹주가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해서 날 찾은 이유가 무엇인가? 천상원주까지 데리고.”
“틀렸습니다. 제가 맹주를 찾은 것이 아닙니다. 천상원주가 맹주님을 찾아온 것이지요.”
“자네가?”
맹주의 시선을 받은 은하란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가슴이 뛴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이 여인의 입에서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말이 불쑥 튀어나올 것만 같다.
은하란이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는 맹주를 응시했다.
어째서 이렇게 숨 막힐 듯한 긴장감이 흐르는 것인지.
맹주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침내 은하란의 목소리가 달빛을 타고 미끄러졌다.
“제가 누군지 아십니까?”
* * *
“누구더라……?”
가후는 창밖의 달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벽력적가를 엄벌하는 명을 내렸더니 다수의 무인이 천상원으로 숨어들었다는 보고를 들었다.
천상원.
그곳만큼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그나저나 천상원주…….
’분명 낯이 익은데.
어디서 본 얼굴이라 멈칫거렸던 기억이 난다.
한데 어디서 봤는지 모르겠다.
“어디서 본 얼굴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