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69화 (270/301)

269. 은하란의 비밀

가후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분명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대체로 아름다운 여인들은 서로 닮은 구석이 있는 법이다.

이목구비의 비율이 자로 잰 듯 정확하고, 커다란 눈과 오뚝한 코, 앵두처럼 붉은 입술.

전형적인 절세미녀.

그래서 아마 어디서 본 것처럼 느낀 것이리라.

무림맹 총군사로 지내면서 만고절색의 미녀들을 심심찮게 봐왔으니까.

하지만…….

’가후는 다시 눈을 가늘게 떴다.

이제 와서 왜 천상원주와 마주했던 기억이 자꾸만 되새겨지는지 모르겠다.

묘하게 신경을 잡아끄는 구석이 있다.

단지 그녀의 아름다움 때문에?

아니다.

뭔가 다른 게 있다.

그녀를 봤을 때 마음 한쪽 구석에서 묘한 울림이 있었다.

흔한 미녀를 대할 때와는 다른.

분명 어디서 느낀 듯한.

하지만 그녀는 분명 처음 보는 사이라고 말했다.

당시의 표정을 상기해보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은하란이라고 했던가?’

따지고 보면 그녀가 나타난 후로 강호 정세가 급변했다.

천상원이 세워진 후로 벽력적가는 거짓말처럼 급부상했다.

잊힌 한 시대를 풍미하고 저물어가던 세가가 갑자기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이윽고 모든 강호인들이 벽력적가를 주목할 정도로.

종국에는 벽력적가주의 손에 무림오절이 사망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 은하란이라는 여인에게 귀결되는 느낌이다.

천상원주 은하란.

그녀가 나타나기 전에는 분명 벽력적가는 그저 그런 가문이었다.

모든 이가 벽력적가주를 주목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 변화의 이면에는 그녀가 있지 않은가?

‘확실히 신경이 쓰이는군.’

가후는 섭선을 들고 제 손바닥을 탁탁 내리쳤다.

여느 때 같았으면 머릿속에서 지웠을 것이다.

하지만 큰 전투를 앞두고 있기 때문일까?

작은 것도 놓치지 않게 된다.

사실 그는 운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때문에 지금처럼 괜히 신경이 쓰인다는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여겼다.

다만 인과 관계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당장 그 이유를 알지 못할 뿐.

‘자, 다시 시작해보자. 어디서 봤을까?’

반드시 알아내야 한다.

군사로서의 직감이다.

원인을 알지 못하니 ‘직감’이라고 표현했지만, 이는 상당히 중요한 사안이다.

오랜 경험으로 축적된 그의 본능과 지능이 계속해서 경고하고 있다.

그녀를 조심해야 한다고.

모든 걸 손에 넣었다고 자만하지 말라고.

“은하란. 은하란…….”

이름은 가명일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개명을 했거나.

그러니 의미를 두지 않는다.

다만 그녀의 분위기만 떠올리는 거다.

기억 속의 시간이 계속해서 거슬러 올라간다.

그녀를 만나기 훨씬 전으로.

사고의 한계를 무너뜨려야 한다.

시간의 경계도 허물고 계속해서 기억을 헤집는다.

어디서 어떤 사건이 ‘탁’ 하고 걸릴지 알 수 없다.

그렇게 잠시간 깊은 생각에 잠겼던 가후가 ‘아!’ 하는 탄성을 터뜨리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찾았다!

마침내 알아냈다.

어디서 봤나 싶었더니……!

‘추방된 신녀!’

닮았다.

확실히 그녀와 닮았다.

하지만 왜?

설마 그녀의 아이란 말인가?

독살을 시도했으나 언제 죽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맹주에게는 신녀가 유산했다고 보고했지만, 그 또한 정확하지 않다.

유산했길 바랐다.

만약 은하란이 정말 신녀의 아이라면?

‘설마 그럴 리가…….’

하지만 한 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쉽사리 끊어내기 힘들다.

얼굴만 닮은 것이 아니다.

사실 신녀는 매일같이 얼굴을 면사로 가리고 있었기에 가후도 제대로 본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가 빼닮았다.

‘만약 그 아이가 신녀의 딸이라면…….’

그건 곧 맹주의 딸이라는 뜻이다.

만에 하나 맹주가 은하란과 대면하게 된다면?

자신과 달리 신녀의 얼굴을 자주 본 맹주다.

직감적으로 뭔가를 알아낼 수 있다.

딸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이 전투는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갈 가능성도 있다.

‘맹주와 은하란을 절대 만나지 못하게 해야겠군.’

가후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두 사람이 만난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구상한 전투 내용에 차질이 생길 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작은 문제라도 만들지 않는 쪽이 낫다.

우선 맹주를 만나서 확실히 해두어야 한다.

가후는 몸을 돌리고는 맹주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낭하를 지나 맹주실 앞에 다다른 가후가 멈칫거렸다.

‘기척……?’

하지만 가만히 주의를 기울이니 주변은 적막하기만 했다.

상대적으로 무공이 약한 자신이 누군가의 기척을 느낄 리는 없을 터.

‘너무 예민해졌군.’

가볍게 한숨을 내쉰 가후가 목을 가다듬고는 입을 열었다.

“맹주님, 계십니까?”

“……가 군사인가?”

“예, 접니다. 잠시 들어가도 괜찮으실지요?”

“들어오게.”

맹주의 허락을 받은 가후가 침착하게 문을 열고 실내로 들어섰다.

한 차례 둘러보니 창문이 열려 있다.

“늦은 시간인데 아직 주무시지 않았나 봅니다.”

“단기접전을 앞두고 있으니 여러 가지로 생각을 정리해보았네.”

“혹 부담되시는지요?”

“부담은. 오히려 은근한 기대도 되는군.”

“어떤 부분이…….”

“벽력적가주가 편무량 대협을 꺾지 않았는가? 그의 무공이 궁금하군. 명문정파의 자제로 자라서 가문을 이었으면서 어찌 흑천련과 손을 잡았는지도 궁금하고. 뭐, 비단 그뿐만이 아니라 수황이나 투왕의 실력도 궁금하네. 이번 전투를 통해서 그들의 무위가 상승했다면 더더욱 확인해 보고 싶은 게지. 아무래도 단기접전이 집단전으로 치러지는 만큼 내 무공도 다시 한번 가늠해 보는 계기가 될 테고 말일세.”

가후가 눈을 가늘게 뜨고는 맹주를 물끄러미 보았다.

말이 길다.

평소 그답지 않다.

‘뭔가 달라. 뭐지?’

가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방안을 세세히 살폈다.

맹주가 침소에 들어온 지 꽤 됐음에도 침상에 걸터앉지도 않은 흔적이다.

그렇다고 의자를 빼서 앉지도 않았다.

계속 서 있었다는 말인데…….

가후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가벽 쪽을 돌아가 보았다.

우려와 달리 아무도 없었다.

“가 군사?”

맹주의 부름에 가후가 돌아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예, 맹주님.”

“그러는 자네는 이 늦은 시간에 어인 일인가? 전략적인 이야기는 아까 끝나지 않았던가?”

확실히 맹주의 분위기가 평소와 다르다.

맹주는 느끼지 못하겠지만, 예민한 가후는 그의 목소리와 억양, 말투에서 느낀다.

갑자기 자신을 찾아온 것에 대한 은근한 질책 같은 것이.

원래 그럴 사람이 아님에도.

“혹시 천상원주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습니까?”

밑도 끝도 없이 불쑥 던진 질문.

찰나지간 맹주는 표정이 굳을 뻔했다.

하나 그는 노련하게 대처했다.

그 오랜 기간 맹주의 자리를 유지하면서 몸에 밴 대응력 덕분이었다.

“들어보기만 했지. 이번에 벽력적가의 무인들이 천상원으로 숨어들었다고 들었네.”

“그렇습니다.”

“한데 그 일은 갑자기 왜?”

“아무래도 벽력적가주가 갑자기 이런 행보를 이어가는 것에는 천상원주의 개입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천상원주가? 그러고 보니 자네는 천상원주를 직접 보았겠군.”

맹주의 질문에 이번엔 가후가 오히려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일전에 장사에서 그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자네가 보기엔 어떻던가?”

“무엇이 말씀입니까?”

가후가 맹주를 물끄러미 보았다.

맹주 또한 그런 가후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 수많은 의미를 담은 질문과 대답이 오고 갔다.

‘자네는 그 아이가 내 딸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설마 천상원주가 신녀의 딸일 수도 있다는 걸 아는 건 아니겠지요?’

‘자넨 날 속였어!’

‘맹주님이 그 자리를 유지하시려면 모르는 것이 약일 때도 있는 법이지요.’

‘하지만 나는 모든 걸 알아냈지.’

‘설마 뭔가를 알아낸 건 아니겠지요?’

잠시 뜸을 들인 맹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굉장한 미인이라더군. 실제로 보니 그렇게 미인이던가?”

“예, 소문보다 더 미인이더군요.”

“하면 천상원주가 미인계를 써서 벽력적가주를 농락하고 있다는 말인가?”

“거기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녀의 뜻인지, 벽력적가주의 뜻인지. 다만 그녀가 나타난 이후로 많은 것이 변했지요.”

“그래서 자네가 하고자 하는 말은?”

“이번 전투가 끝나면 천상원을 점차적으로 폐쇄할 단계에 들어갈까 싶습니다.”

“민심이 요동칠 텐데.”

“그래서 천상원주만을 내치는 것도 생각 중입니다.”

“과연.”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천상원에서 인피면구를 만드는 장인이 있다고 합니다. 아직 확인이 더 필요하긴 하지만, 그 인피면구 덕분에 벽력적가주가 사파 영역을 마음껏 드나들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아마 천상원주도 인피면구를 이용해서 외모를 계속 바꿀 가능성이 높습니다. 참고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흐음. 알겠네. 그런데…….”

“말씀하시지요.”

“내가 그걸 왜 참고해야 하나?”

“예?”

“천상원주의 외모가 바뀌는 걸 지금 내가 참고해야 할 이유가 있는가 해서 말일세.”

“그건…… 어떤 정보든 알고 계시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말씀드립니다. 맹원 중 누군가가 그녀에게 홀릴 수도 있는 문제니까요.”

“그렇군. 잘 알겠네.”

“그럼 늦은 시간인데 편히 쉬십시오.”

“할 말은 그게 끝인가?”

“예, 생각난 김에 말씀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수고했네. 내 참고하도록 하지.”

“그럼.”

가후가 공손히 읍을 하고는 돌아섰다.

그가 나간 후 맹주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창가로 다가왔다.

창문을 닫은 그가 침잠해진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가후…… 자네는 날 끝까지 속이려는 것인가?”

갑자기 허망한 생각이 밀려든다.

무얼 위해서 여기까지 온 것일까?

‘난 지금 여기서 무얼 하고 있는 거지?’

이 늦은 나이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이야.

아니다. 이럴 때가 아니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악을 휩쓸어 버릴 절체절명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지 않은가?

‘하란…….’

곱게도 자랐더구나.

그 아이가 딸이라니.

철벽같은 가슴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다.

하나 감상에 젖는 건 여기까지다.

맹주는 은하란이 전한 이야기를 가만히 곱씹으며 몸을 돌렸다.

* * *

강호 역사에 길이 남을 결전.

흑천련의 제안으로 치러지는 단기접전!

하나 여느 단기접전과 달리 집단전으로 펼쳐진다.

오 대 오.

이번 비무를 위해서 무림맹과 흑천련은 상호 합의하에 파양호 인근에 커다란 분지 형태의 비무장을 공사했다.

비무장은 파양호의 물을 끌어와서 수심이 깊은 곳은 성인 키를 훌쩍 넘도록 물을 채웠고, 군데군데 다섯 개의 섬을 만들었다.

기본적으로 그 섬 위에서 비무가 치러지지만, 수중 전투도 무관하다.

이는 수황을 의식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무림맹이 비겁했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

오히려 적의 조건에 유리하게 맞춰준 것이다.

어쨌거나 그렇게 공사한 비무장은 한동안 만인의 관광지가 될 정도로 이목을 끌었다.

하나 비무가 치러지는 날에는 일반인들의 출입을 엄금할 터였다.

대신 비무장을 둘러싼 언덕에는 강호 무인들이 빽빽하게 모여서 관전을 하게 되리라.

승패의 결과에 따라 정사 둘 중 하나의 기세는 완전히 기울게 되리라.

그야말로 전 무림인이 이곳으로 모여들어 그 결과를 지켜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마침내…….

’역사적인 비무의 날이 밝았다.

적비연은 분지 아래로 보이는 비무장을 응시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마침내 결전의 날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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