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70화 (271/301)

270. 결전의 날

사상 최대 크기의 비무장.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 자리에서 질식해 버릴 만큼 밀도 높은 공기!

언덕에 들어찬 수만 명의 무인들이 저마다 기도를 활짝 열어젖힌 채 한가운데에 마련된 비무장을 보았다.

정기와 사기가 뒤섞이는 그 경계부분에서는 연신 돌개바람이 일어난다.

상극의 두 기운이 마주치니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러다 보니 그곳에 위치한 횃불들이 연신 격한 춤을 추며 허공을 핥아댄다.

만약 그곳이 비무장이라는 것을 누군가 말하지 않는다면 그저 아름다운 연못 정원쯤으로 생각했으리라.

대낮임에도 횃불을 밝힌 것은 행사를 위한 것이겠거니 생각했을 터다.

사실 비무장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정갈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곳.

하나 그 비무장을 에워싼 무인들이 내뿜는 기도만큼은 결코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다.

살기, 투기, 혐오, 증오, 원망……!

온갖 살벌한 감정과 기운이 뒤섞인 곳.

그 숨 막히는 분위기를 찢어내듯 정파가 밀집한 서쪽 언덕에서 한 사람이 허공을 날아왔다.

파라라라라!

한 마리 백로처럼 우아하게 날아든 사람은 다름 아닌 무림맹주 허위청!

그가 양손을 활짝 펼친 채 허공에서 미끄러지듯 가운데 섬으로 내려섰다.

후우우웅!

한차례 공력을 발출한 탓인지 사방으로 뜨끈한 기운이 불어나갔다.

그러자 중심으로 몰려들던 기운들이 그 공력을 이기지 못해 튕겨 나가는 듯했다.

“헛!”

“크읏!”

특히 사파 영역에 있던 무인들은 맹주의 막강한 공력에 신음을 삼키며 주춤 물러났다.

웅성거리던 자들이 일시에 입을 다물었다.

그야말로 대단한 존재감이었다.

수만 명이 모인 비무장과 관전 언덕이다.

한 사람이 조용히 한마디만 해도 수만 마디가 된다.

분지 형태인지라 누구라도 떠들면 메아리가 치는 곳.

한데도 누구 하나 입을 벙긋하지 않는다.

그만큼 맹주의 등장은 막강한 존재감을 과시했다.

비단 무공이 강해서만은 아니다.

오랜 기간 무림맹을 이끌며 자연스럽게 쌓인 통솔력 같은 것이다.

공천지권위처럼 완전한 이능의 형태로 발현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눈빛과 동작 하나하나가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건 틀림없었다.

“오늘 나는 강호 동도들 앞에서 정당한 비무를 치르기 위해 나왔소.”

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옆사람에게나 들릴 정도로 조곤조곤 말하는 투였다.

한데 그 목소리가 수만 명의 귓속으로 또렷하게 날아든다.

애초에 무림맹 측에서 누군가 나서면 흑천련 무인들은 야유를 퍼부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옛날에 잊어버렸다.

어느새 빨려들듯이 맹주의 목소리에만 집중하고 있다.

“만약 이번 비무에서 본 맹이 승리한다면 흑천련을 비롯한 사도 문파는 향후 이십 년간 봉문해야 할 것이오!”

이번만큼은 사파 무인들도 참지 않았다.

대번 장내가 술렁이며 거친 욕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흥! 무림맹주라고 좀 다를 줄 알았더니 시건방지기가 하늘을 찌르는군!”

“우리가 이기면 어쩔 텐가? 무림맹과 정도 문파들은 삼십 년간 봉문해라!”

“처발리기 전에 큰 소리라도 쳐보겠다는 심보인가?”

물론 이를 들은 정도 무인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닥쳐라! 이 사악한 무리들아! 네놈들이 이길 일은 절대 없다!”

“네놈들이 맹주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전멸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다 쓰러져 가는 놈들의 단기접전 요구를 들어줬더니 은혜도 모르는구나!”

“하긴 그걸 알면 저놈들이 사파가 아니었겠지!”

장내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저마다 한마디씩만 중얼거려도 천지가 울릴 판에 공력까지 담아서 외쳐대니 정말이지 어지간한 공력을 지닌 자도 거품을 물고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그 순간 사파 무인들 사이에서 우렁찬 고함 소리가 튀어나왔다.

“갈!”

단 한마디.

하지만 그 한마디가 주는 파급효과는 컸다.

정사 무인들이 일시에 입을 닫고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만인의 시선을 사로잡은 사람은 다름 아닌 적비연이었다.

그가 순식간에 허공을 가르면서 맹주 앞으로 날아갔다.

파라라라라!

사뿐하게 착지한 적비연이 포권을 하며 말했다.

“오늘 비무에 나설 적비연이오.”

“본 맹을 배신하고 흑천련과 손을 잡은 벽력적가주로군. 무엇이 자네를 변절시켰나?”

“고리타분한 질문은 묻어둡시다.”

“하면 내 제안은 받아들이는 건가?”

“패배할 시에는 이십 년간 봉문하는 것 말이오?”

“그렇네.”

그러자 다시 한쪽에서 우렁찬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건 내가 답해주지!”

이번에는 흑천련주의 몸을 한 극마가 인파 사이에서 불쑥 날아왔다.

그는 바로 옆의 섬으로 착지하고서는 가슴을 탕탕 치며 외쳤다.

“흑도 동도들이여! 저들의 시건방진 도발에 흥분하지 마라! 본좌가 저들을 모조리 꺾어 버리고 피와 살을 분리하겠다!”

“우오오오오!”

흑천련 무인들과 사파 무인들이 일제히 함성을 내지르며 기도를 끌어 올렸다.

극마가 히죽 웃으며 정도문파들이 모인 언덕 쪽을 훑으며 소리쳤다.

“본좌는 네놈들이 삼십 년을 봉문하든 말든 상관하지 않겠다! 정도 나부랭이들이야 다 똑같이 위선적인 것들 아니더냐? 그냥 네놈들은 오늘의 패배를 인정하지 말고 끝까지 발악하도록 해라! 본좌가 네놈들을 모조리 쓸어 버려주마!”

“우와아아아아!”

광분의 함성이 동쪽 언덕을 가득 메웠다.

반대로 서쪽 언덕에서는 분노의 고함소리가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왔다.

하지만 상대가 흑천련주인 만큼 누구 하나 과감하게 나서서 나무라는 자는 없었다.

단지 거대한 조직의 수장이라고 보기엔 다소 가벼운 언사가 눈살을 찌푸리게 할 뿐이었다.

극마는 아랑곳하지 않고 소리쳤다.

“자, 나와라! 본좌의 칼에 죽어갈 놈은 누구더냐?”

“그 칼은 제가 받아드리지요.”

차분하게 대답을 하는 것과 동시에 무리 앞으로 날아온 사람은 바로 연리하였다.

그는 한쪽 팔이 없기에 소맷자락을 바람결에 휘날리며 내려섰다.

극마가 히죽 웃었다.

“오냐, 네놈은 본좌의 뒤통수를 친 사랑스러운 제자구나. 마구 귀여워해 주마.”

“모쪼록 잘 부탁드리지요.”

연리하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러고도 수황과 투왕, 그리고 교패가 차례대로 나타났고, 무림맹 측에서는 무림오절 중 한 사람인 염능파와 보패인이 된 묘청운과 진도천이었다.

진도천은 일전에 강력한 십이용봉의 후보로 거론되며 삼차 심사까지 통과해서 적비연과 첫 번째로 비무를 치렀던 바로 그자였다.

그 역시 천림의 무인이 된 것이다.

이렇게 양측에서 대표로 다섯 사람이 나타나 섬에서 마주 보고 서 있으니 그야말로 숨 쉬기조차 힘든 중압감이 여실히 느껴졌다.

모든 준비가 끝나자 무림맹 측에서 부맹주 축일공이 나서서 소리쳤다.

“활을 쏘는 순간 비무가 시작된다! 어느 한쪽이 사망하거나 패배를 시인할 때까지 비무를 멈추진 않는다. 각 섬에서 이동이 가능하며, 수중전도 무관하다! 비무 참가자들은 서로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협공이나 합격술을 구사할 수 있으나, 관전자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비무에 개입할 수 없다! 이상, 이의가 있는 자는 지금 말하시오!”

정사 무인들이 침묵으로 일관했다.

축일공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화살촉에 불을 붙인 후 하늘을 향해 시위를 당겼다.

모두가 긴장한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적비연과 맹주 역시 서로를 빤히 바라보면서 마른침을 삼켰다.

이윽고,

패애애애앵!

쒸에에에에엑!

불을 머금은 화살이 창공 높이 솟구쳐 올랐다.

동시에 천지를 떨쳐 울릴 것 같은 함성이 분지를 가득 채웠다.

“우와아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아!”

제일 먼저 맹주 허위청이 적비연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타앗!

쉬이이이이잇!

쩌어어엉!

놀랍게도 맹주의 검첨이 적비연의 검첨과 정확히 마주치면서 요란한 금속성을 울렸다.

파아아아앙!

츄아아아아아!

두 사람의 기운이 사방으로 퍼져 나가면서 수면이 출렁이고 파도가 일어났다.

물보라가 흩날리는 것과 동시에 적비연이 몸을 돌개바람처럼 회전했다.

츄카카카카카캉!

물방울과 불꽃이 동시에 튀면서 화려한 격무를 더욱 눈부시게 만들었다.

촤촤아아앗!

발자국을 길게 끌며 미끄러진 맹주가 두 눈에 힘을 주는 것과 동시에 뛰쳐나갔다.

“어딜!”

쑤아아아아앙!

검강이 일어나면서 적비연의 명치를 곧장 찔러갔다.

파라라라라랑!

적비연이 빠른 속도로 회전하면서 마치 검강을 타고 맹주의 품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듯했다.

타앙!

두 사람이 다시 검신을 부딪치며 한 걸음씩 물러났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까강! 깡깡! 까가가가강!

정말이지 정신없을 정도로 빠른 검격이 오갔다.

정신없이 공방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적비연은 차분한 시선으로 맹주에게 전음으로 일렀다.

[일전에 말씀드린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셨습니까?]

“……!”

맹주는 흠칫거렸지만 별다른 대답 없이 격공을 퍼붓기만 했다.

적비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는 좀 더 과감하게 맹주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쉬이이이잇!

정말 순식간에 적비연의 검이 굽이치면서 맹주의 명치를 찔러 들어왔다.

“헛!”

아차 하는 순간 당할 뻔한 맹주가 급격히 보법을 밟으면서 적비연의 검을 쳐냈다.

따아앙!

‘어림없다!’

맹주는 이번 방어를 통해서 반격의 기회를 잡을 것이라 생각했다.

자신이 검을 쳐냈으니 상대의 자세가 벌어지며 흐트러졌을 것이고, 그 빈틈을 노리면 된다고 여겼기에.

한데 적비연은 그 탄성을 이용해 휘릭 회전하면서 곧장 중심을 잡는 것이 아닌가?

반면 오히려 맹주는 적비연의 검을 강하게 쳐내느라 양팔이 활짝 젖혀져 있는 상태.

오히려 자신이 위험에 빠진 순간이었다.

적비연이 그대로 검을 내질러 오자, 맹주가 급히 왼손을 뻗으며 일장을 날렸다.

퍼어어엉!

촤아아아앗!

촤촤르르륵!

적비연과 맹주가 동시에 멀어졌다.

적비연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맹주님이십니다.”

“자네도 명불허전이로군.”

맹주가 애써 웃음을 지었다.

그는 내심 식은땀을 흘렸다.

이번 공방으로 인해 손해를 본 것은 확실히 맹주 쪽이었다.

급히 일장을 뻗어내면서 공력을 대거 소모해 버렸기에.

만약 그렇게 무리하지 않았더라면 결국 피를 보고 말았으리라.

게다가 이번 검을 장력으로 받아내느라 손바닥이 아직도 저릿하게 울린다.

맹주는 천천히 왼손을 쥐었다가 펼쳤다.

‘확실히 강하군.’

자신의 호신위까지 모두 기절시키고 접근할 정도였기에 무위가 예사롭지 않다고는 생각했다.

한데 이제 보니 자신은 상대도 되지 않는다.

벽력적가주.

그가 이렇게 강해졌을 줄이야.

대체 무슨 기연이라도 얻은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지는데 적비연으로부터 다시 전음이 날아들었다.

[맹주님?]

[지금은 비무에 집중하고 싶네만.]

[맹주님은 제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

[오래전 선택을 후회하시는 걸로 압니다. 이번에는 후회하지 말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비무 중에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가?]

[한 번은 실수가 되지만, 두 번은…… 그 사람의 인품으로 굳어지는 법입니다.]

[자네……!]

[은 원주가 맹주님을 직접 찾아갔던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아마 저였다면 그러지 못했을 겁니다. 지독한 원망 때문에라도.]

[만약…… 만약 자네들 말이 사실이라면…… 그땐 진지하게 생각해 보겠네.]

적비연이 한쪽 입매를 치켜 올리더니 일순 바닥을 박차고 튀어나갔다.

[부디 단단히 각오하시기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