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 정화(淨化)!
연리하의 목이 거짓말처럼 떨어지고 정도인들이 분개하는 그 순간, 노을로 물든 하늘에 푸른빛의 불꽃이 터졌다.
그 색깔과 모양이 오묘하여 아수라장이 된 와중에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는 충분했다.
게다가 영롱한 불꽃이 하늘에서 파도처럼 넘실거리듯 퍼져 나가니 그 신묘한 광경에 사람들은 아예 넋을 놓을 지경이었다.
오죽하면 비무장에서 사투를 벌이던 절대고수들조차 멈칫거리곤 하늘을 올려다보았을까?
“저게 무슨……?”
무림맹주 허위청이 양 눈썹을 팔자로 그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적비연이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무래도 시작될 모양입니다.”
“설마…….”
맹주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동시에 그는 시선을 내려 얼른 관전자들을 살폈다.
‘정말 만통지의 전언대로라면……!’
믿고 싶지 않지만, 본능이 계속 경고한다.
비무장을 에워싼 수많은 무인들.
강호가 파양호에 비무장에 총집합한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여기서 사달이 벌어진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한편 그 수많은 인파 사이에 섞여 있는 미중년의 사내.
그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의 푸른 불꽃을 물끄러미 보다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손가락을 들어 올려 튕겼다.
따악!
공력이 담긴 것일까?
그가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묘하게 울리면서 수만 명이 운집한 이 분지에 가득 찼다.
그리고 다시 한번.
딱!
그리고 또다시.
딱!
손가락을 튕길 때마다 공간이 비틀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명이 심하다.
비무장에서 싸우던 절대고수들은 본능적으로 공력을 끌어 올리고는 소리의 진원지를 찾았다.
하나 누구도 미중년을 바로 찾아내진 못했다.
마치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육합전성처럼 소리의 발원지를 찾기 어려웠던 탓이다.
더욱 놀라운 일은 그 직후에 일어났다.
촤촤촤아아아악!
섬뜩한 파육음이 사파 무인들이 운집한 동쪽 언덕 복판에서 터져 나왔다.
“크아악!”
“으악!”
“히이익! 뭐, 뭐야! 우아악!”
피에 물든 백귀(百鬼)!
흑도인들이 운집한 언덕에서 백귀가 칼춤을 춘다.
서리라도 맞은 듯 하얗게 물든 백발.
이런 자가 곁에 있었던가?
칼에 맞고 죽어가는 자조차도 믿을 수 없는 눈치다.
도대체 이 백귀가 어디서 나타났단 말인가?
그도 그럴 것이 저토록 새하얀 머리카락을 하고 있었다면 진작 눈에 띄었을 것이다.
한데 도저히 기억에 없다.
두건을 덮어쓰고 있었던 걸까?
모르겠다.
그렇게 쓰러진 무인은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명을 다한 것이다.
그러는 사이에도 백귀는 광기에 찬 칼춤을 추었다.
촤아악! 촤악! 푹!
“으아아악!”
“컥, 커억!”
“저, 저 미친 놈!”
몇몇 흑도 무인이 분기탱천하여 백귀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백귀의 무공 수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쉿! 쉬쉬쉿! 쉬이이잇!
그야말로 새하얀 바람처럼 움직인다.
달려드는 무인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가고, 머리 위로 부는 바람처럼 산뜻하게 멀어져간다.
그렇게 누군가를 지나치면 어김없이 피를 뿜으며 쓰러지는 흑도인들.
배가 갈라져 내장이 쏟아져 나오거나, 목이 떨어져 피분수를 터뜨린다.
“으어어어……!”
“어, 어찌 저런……!”
손속의 잔혹함이 상상을 훌쩍 뛰어넘는다.
분명 흑도인들을 공격하고 있으니 정도인이 틀림없을 텐데 패도적인 칼부림이 가히 사공을 압도할 지경이다.
“다들 정신 차려라!”
“저 비열한 정도 나부랭이들이 우릴 속였다!”
“애초에 정당한 비무 따위는 없었던 거야!”
흑도인들 사이에서 무림맹을 향한 의심이 폭발했다.
그 의심은 분노로 이어졌고, 분노는 다시 폭력으로 변질됐다.
하지만 그 폭력은 백귀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히거나 제압당했다.
갑자기 일어난 일 때문에 그들은 연리하가 죽던 과정도, 노을 속에 퍼져 나간 푸른 불꽃도 잊었다.
그저 눈앞의 백귀를 쳐죽어야 한다는 생각밖엔 없었다.
또한 정도인과 경계를 두고 있던 흑도인들은 곧장 투기를 끌어 올리고는 정도인들을 향해 덤벼들기 시작했다.
“저놈들을 용서하지 마라!”
“비열한 새끼들! 매번 주둥이만 정당을 외치고, 뒤통수 까는 새끼들!”
“이젠 지긋지긋하다! 이 개새끼들아!”
난장이 펼쳐진다.
경계를 두고 마주 보며 참고 참았던 분노가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분노의 용암이 분지를 타고 흐르면서 정도인을 덮쳐간다.
“그게 무슨 개소리냐! 정당하지 않은 건 네놈들이 먼저이지 않았나!”
“애초에 네놈들은 비무에 참가하지 않은 자가 손을 썼다!”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딱 그 짝이구나!”
정도인들의 주장도 일리는 있었다.
하지만 흑도인도 물러나진 않았다.
“닥쳐라! 이 개새끼들아! 그렇다고 위장 잠입을 해서 칼부림을 한 게 정당해지는 것이더냐!”
“애초에 연리하는 흑천련 무인이었으니 이건 그저 내란을 정리한 수준이란 말이다!”
“그렇다! 네놈들이 간자를 심어놓고 이간질을 하더니, 관전자들 사이에도 간자를 심었구나! 이 비열한 쓰레기들!”
말이 통하지 않는다.
이미 논리보다는 감정이 앞서기 시작한 상태.
흑도인들이 노도처럼 쳐들어가며 도검창을 휘두르자, 정도인들도 참지 않고 맞섰다.
수만 명이 운집한 분지.
그들의 분노와 투기가 들불처럼 번지자 그야말로 지옥도가 펼쳐졌다.
그 혼란을 틈타 가만히 지켜만 보던 미중년의 사내.
그는 죽립을 왼손으로 푹 눌러쓰고는 입매를 천천히 치켜 올렸다.
그리고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이번에도 그 소리는 모든 이들의 귀에 또렷하게 박혀들었다.
하나 감정에 휩쓸린 자들은 그 소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게도 그 소리가 그들의 감정을 더욱 자극하고 있었다.
그때 또 다른 백귀가 나타났다.
“크아악!”
“으악!”
“뭐, 뭐야? 이건 또…… 아아악!”
이번엔 정도인들 복판에서 백귀가 검무를 추었다.
순식간에 정도인들 목이 허공으로 솟아오르고 몸이 양단되어 쓰러져 간다.
정도인들의 눈이 뒤집힌다.
“저, 저게 대체……! 이 비열한 새끼들! 역시 사파 나부랭이답구나! 네놈들이 애초에 거짓부렁으로 당한 척한 거구나!”
“백귀는 사실 저놈들의 수작이었어!”
“무슨 개소리냐? 우리가 당한 걸 보지 못했냐?”
“비열한 사기였겠지!”
“네놈들이야말로 누굴 탓하는 거냐! 이 말종 새끼들!”
감정이 더욱 격해진다.
그렇잖아도 서로 죽고 죽이던 싸움이 한층 더 격렬해졌다.
정사가 대립하고 있는 경계지는 벌써 피가 냇물처럼 흐르기 시작했다.
분지 한복판에 만든 인공 연못은 어느새 핏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짧은 시간에 단기접전은 엉망진창이 되었고, 대규모 전쟁으로 변해 버렸다.
이 모든 걸 지켜본 무림맹주는 눈빛이 격하게 흔들렸다.
“이, 이건 대체……!”
“이래도 망설일 겁니까?”
적비연이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맹주는 천천히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른 판단을 내려야 할 때지만 눈앞에 펼쳐진 이 현실이 믿어지지 않았기에 몸이 굳어 버린 듯했다.
그때였다.
따악!
다시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
어디에서 울리는지도 모를 그 소리가 맹주에게는 공포로 다가왔다.
“어떤 식으로든 림주가 혼동을 초래할 거예요.”
은하란이 자신을 찾아와서 전한 말이다.
만통지가 전하라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신녀를 추방한 일로 후회하는 중이라면, 이번엔 딸인 자신의 말을 믿으라고 했다.
가슴이 쿵쾅거린다.
설마 정말로…… 천림주가?
그렇다면 가후는 어디에 있나?
하지만 수만 명이 운집한 이곳에서 가후를 찾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재앙은 외곽에서부터 일어났다.
“저, 저것들은 다 뭐야?”
“으엇! 적, 적이다!”
정사를 막론하고 저마다 비명 섞인 외침을 쏟아냈다.
원형처럼 둘러싸인 분지 언덕 위로 머리카락이 새하얀 무인들이 강기를 난사하며 나타난 것이다.
쒸아앙! 쑤아아앙!
“막, 막아랏!”
“으악!”
“크아악!”
백발의 광인들.
두 눈이 온통 붉은 자들이 침을 흘려대며 맹수처럼 달려든다.
적아를 구분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자타만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타인은 무조건 적이 된다.
서걱! 츄아악!
“커억!”
일도에 목이 날아가고, 일검에 심장이 꿰뚫린다.
“이놈들! 도대체 정체가 뭐냐!”
사파 무인 중에서 대노한 혈왕부주 좌관이 바닥을 차고 부웅 날아갔다.
하나 호기롭게 나선 그의 마지막은 허망할 정도로 참담했다.
퍼억!
단 일 수.
백발광인이 휘두른 일장에 혈왕부주 좌관은 머리가 터져 죽고 말았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강하지 않은가?
백발광인이 히죽 입매를 치켜 올리며 중얼거렸다.
“천벌……!”
그리고 그를 알아본 무인 하나가 신음처럼 목소리를 흘렸다.
“냉혼신검 설규……!”
그랬다.
그는 다름 아닌 냉혼신검 설규였다.
그리고 그의 정체를 정확히 읊은 자는 바로 예홍이었다.
“크하하하! 천벌이다!”
그가 앙천광소를 터뜨리며 소리치자, 약이 바짝 오른 혈왕부 무인들이 일제히 몸을 날리며 그를 덮쳐갔다.
“닥쳐라! 이 미친놈아!”
“감히 부주님을!”
“사부님의 원수를 갚자!”
순식간에 삼백여 명이 벌 떼처럼 새카맣게 달려든다.
하나 그 순간 예홍은 싸늘한 기운을 느꼈다.
물론 일찌감치 적비연으로부터 들은 충고 때문이기도 했다.
그가 곧 비명처럼 외쳤다.
“안 돼! 다들 물러섯!”
하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혈왕부 무인들이 그녀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냉혼신검 설규가 공력을 한껏 끌어 올리더니 몸을 돌개바람처럼 회전시켰다.
따다다다다앙!
거친 쇳소리에 이어 덮쳐가던 무인들이 속수무책으로 튕겨 나갔다.
몇몇 무인은 검자루가 깨지면서 그대로 몸이 베여 쓰러지기도 했다.
냉혼신검 설규는 비록 광인이라곤 하지만 초절정 후단에 이른 고수였다.
어지간한 무인이 덤벼서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그래도 절정고수 수십 명과 일류고수 수백 명이 힘을 합한다면 한 명을 꺾지 못하랴?
한데 이 불안감은 무엇인가?
예홍의 신경을 건드리는 그 불안감의 정체는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밝혀졌다.
“크하하하! 덤벼라 이 불나방들아! 천림이 너희들에게 천벌을 내릴지니!”
광기에 찬 외침에 이어 수백 명이 그를 향해 쇄도하는 순간,
구오오오오오!
번쩍!
냉혼신검의 전신에서 맹렬한 기운이 폭사되는가 싶더니 안광이 눈이 부시도록 빛났다.
창졸지간!
꽈아아아아아앙!
그의 몸이 폭음과 함께 산산조각 나면서 터져 나가는 것이 아닌가?
“크아아악!”
“으아악!”
“내, 내 다리이잇! 아아악!”
아비규환이 펼쳐졌다.
꽤나 멀리 떨어져 있던 예홍에게도 그 폭기가 전해져서 전신이 후끈하게 달아올랐다.
수백 명의 무인들이 사방팔방에 널브러진 채 고통으로 울부짖는다.
“이, 이건……!”
그날과 같다.
대당향 마을에서 사혈곡 무인들과 마주했던 날.
그날 정이 데리고 왔던 아이들은 폭기를 머금고 눈앞에서 터져 나갔다.
한데 그 폭기가 한층 더해졌다.
그야말로 인간 벽력탄이 아닌가?
설마……!
예홍이 고개를 번쩍 들고 다른 곳을 보았다.
언덕을 빼곡하게 둘러싸며 나타난 무인들.
그들이 정사를 가리지 않고 언덕 아래로 뛰어내리며 칼부림을 하는가 싶더니 하나둘 온몸을 터뜨려 나간다.
꽈아아앙!
콰콰아아앙!
“으허억!”
“크아아악!”
“살, 살려줘엇! 아악!”
폭음과 비명이 차오른다.
수만 명의 무인들이 폭발에 휩쓸리며 허우적거리다가 죽어나간다.
지옥도.
대부분의 정사 무인들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죽어가고 있다.
그 와중에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
따악!
그 소리가 울릴 때마다 정사간의 원망과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간다.
칼부림이 이어지고, 죽고 죽이는 살육전이 펼쳐진다.
거기에 곳곳에서 터지는 인간 벽력탄들!
희망이 말살된 곳.
파양호 인근에 만들어진 아름다운 비무장은 순식간에 아수라 지옥으로 변했다.
그리고 그 광경을 꽤나 먼 곳에서 지켜보던 한 사람.
만통지가 착잡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아송(阿宋)…… 역시 너는 이런 걸 원한 것이더냐?”
너무 늦게 깨달았다.
이조차도 만약 임송화가 아니었다면 눈치채지 못했을 터였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뇌리를 스쳤다.
임송화가 자신에게 했던 한마디.
“남자는 다 똑같아요. 오히려 부채질하는 영감님이 더 나빠요!”
그때 떠올랐던 생각.
과연 자신의 제자는 정말 사파 무인들에게만 원한을 품었던 걸까?
그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전 무림인의 말살이 아니었을까!
되짚어보면 지금까지 전쟁의 양상이 그렇지 않은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은 팽팽한 접전.
이것이 공멸의 발판이라면?
우려가 망상으로 끝나길 바랐건만 이대로라면 현실이 되어간다.
이제 믿을 수 있는 건…….
“적 가주, 자네의 능력뿐일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