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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무적-273화 (274/301)

273. 정화(淨化)!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던가?

어린 아송은 주먹을 꽉 말아 쥐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극한의 공포를 딛고 살아남은 그는 더 이상 두려울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다 죽었어…….”

고개를 푹 숙인 어린 아송은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워낙 작았기에 그 앞에서 서성거리는 무인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마을만 바라보던 무인이 뒤늦게 흠칫거리고 돌아본 것은 아송이 느닷없이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다 죽었단 말이야! 전부 다! 나만 빼고 마을 사람 모두가!”

“끄음. 그래, 상심이 크겠지.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무인이 혀를 차고는 아송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송은 어깨를 떨고 있었다.

지나간 죽음에 대한 공포가 뒤늦게 밀려온 것인지, 슬픔을 온몸으로 감당하기 힘든 것인지, 그도 아니면 분노로 떨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한 건 지금 아송은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하단 것이다.

어찌 그러지 않겠나?

부모와 여동생이 하루아침에 몰살당하고 홀로 살아남았는데.

어디 그뿐인가?

온 마을에 살겁이 휩쓸고 지나갔는데.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이만한 천벌을 받아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내가 뭘 잘못했다고…….”

“으응? 꼬마야, 넌 잘못한 게 없다. 그러니 자책할 필요도 없다.”

무인이 다시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무심히 말을 던졌다.

순간 아송은 소름이 돋았다.

그의 손길에 묻은 무심함에.

철저한 타자를 보는 듯한…… 아니, 그보다도 더 다른 종족을 보는 듯한 눈빛이 아닌가?

마치 어미 잃은 새끼 짐승을 보는 것 같다고나 할까?

왜일까?

그 순간 아송은 그의 손길이 칠혈방의 무인들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사적으로 손을 내저었다.

타악!

아송의 손길에 흠칫 물러난 무인이 미간을 좁히며 짜증 섞인 말투를 흘려냈다.

“이 녀석이…… 널 위로해 주는 사람한테 이게 무슨 버릇이냐?”

위로?

이게 위로라고?

아송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를 대주라고 부르는 무인들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마을을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마치 마을에 일어난 참상이 자신들과는 상관없다는 듯한 표정.

그래, 그게 사실이긴 하지.

하지만 내 앞에선 저런 표정을 지으면 안 되잖아?

어린 아송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울분이 치솟았다.

그때 부대주라고 불리던 남자가 대주에게 찾아와서 귓속말을 전했다.

무슨 말을 들은 건지 대주의 미간이 더욱 찌그러졌다.

“뭐? 확실해?”

부대주가 아송의 눈치를 슬쩍 살피다가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주는 다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사람들에게 물어 물어서 무림맹 지부를 찾아갔을 때, 대주는 지금과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건 자신이 한창 재미있게 놀고 있는데, 엄마의 심부름을 받았을 때 짓는 표정과 꼭 닮아 있었다.

하지만 이젠 엄마의 심부름조차 그리움으로 묻히겠지.

괜히 울컥 올라오는데, 대주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아아, 이 새끼들. 하필 우리 구역에서……!”

“어쩌죠?”

“어쩌긴? 너 앞으로 삼 년간 진급 포기할래?”

“안 되죠. 저 곧 애 아빠 됩니다. 내년에 자리 물려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근데 그건 내가 갈 자리가 있을 때나 이야기지, 인마.”

“그럼…….”

부대주가 은밀한 눈빛으로 대주를 응시했다.

대주의 눈빛이 차갑게 식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덮자.”

“괜찮을까요?”

부대주가 아송을 힐끔 보았다.

“괜찮아. 어차피 맛이 갔다.”

“알겠습니다, 그럼.”

부대주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몸을 돌리더니 무인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했다.

잠시 후 마을 곳곳에서 독한 냄새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순간 아송이 두 눈을 번쩍 뜨고는 달려갔다.

무인들이 숯검정이 되어 쓰러져 있는 아버지의 몸에 무언가를 들이붓자, 타들어가는 소리를 내며 전신이 녹아 버리는 것이 아닌가?

“어어?”

탓!

순간 아송이 바닥을 차고 달려 나가 화골산을 뿌리는 무인을 손으로 떠밀었다.

“우리 아빠한테 무슨 짓이야!”

“엇? 이런 미친놈이! 야, 인마! 이게 얼마나 위험한 약인지 알고 이러냐? 너 이거 한 방울만 닿아도 뼈와 살이 녹는다고!”

“꼬마야, 갑자기 이렇게 끼어들면……!”

“시끄러워! 왜 아빠 몸에 이딴 걸 퍼붓는 거야!”

아송의 말에 무인 둘이 멈칫거리고는 서로를 보았다.

그러자 지켜만 보던 대주가 다가와 아송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꼬마야, 장례를 치러드리려는 거야. 봐라. 아버지가 이렇게 시커멓게 타 버렸는데, 가만히 두고만 볼 거냐? 편하게 떠나시게 명복을 빌어드려야지.”

“거짓말 하지 마! 그냥 아빠의 흔적을 없애는 거잖아!”

대주는 뜻밖에도 또랑또랑 말대꾸하는 아송을 보고는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하지만 그는 피식 웃고는 말을 이었다.

“네가 너무 예민한 모양이구나. 그래, 마을이 갑자기 불타서 사람들이 모두 죽어 버렸으니 슬프기도 할 테지. 하지만…….”

“무슨 소리야?”

“뭐가 말이냐?”

“마을이 불타서 죽은 게 아니야. 악당들이 쳐들어와서 마을 사람들을…… 마을 사람들을 마구……!”

아송이 말을 뱉다 말고 어금니를 부서져라 악물었다.

그러지 않으면 격한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기에.

대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아송의 어깨를 다시 두드렸다.

“그래, 충격이 클 거라는 걸 안다. 그래서 온갖 망상이 널 잡아먹었을 테지. 그러니 이젠 좀 쉬면서…….”

“헛소리하지 마!”

아송이 대주의 손을 다시 쳐냈다.

대주의 이맛살이 꿈틀거린다.

“이 꼬마 놈이…….”

“당신들도 똑같아. 전부 덮으려는 거지?”

“어허, 이놈 보게? 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무슨 큰일 날 소리를.”

대주는 오리 발을 내밀었지만 내심 놀라고 있었다.

아직 한참 어린아이였다.

한데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총명하지 않은가?

그래도 역시 어리기 때문일까?

아송은 결국 울음을 참지 못하고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정말이란 말이야! 마을 사람들이…… 나쁜 놈들한테…… 모두 죽어서…… 끅…… 모두……! 몹쓸 짓을 당하고…… 흐으어억.”

이내 아송의 서러운 울음소리가 텅 빈 마을을 가득 메웠다.

건성으로 마을을 조사하던 무인들조차도 아이의 구슬픈 울음소리에 마음 한편이 아릿해졌다.

마음이 약해진 무인 하나가 아송에게 다가갔다.

화골산을 뿌리던 무인이었다.

“얘야,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고…… 엇!”

차아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아송이 눈 깜빡할 사이에 무인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드는 것이 아닌가?

다행히 무인이 재빨리 보법을 밟으며 물러났지만, 자칫하면 큰 부상을 입을 뻔했다.

대주가 눈을 부라리며 무인을 노려보았다.

“이 멍청한 새끼야! 저런 애새끼한테 검을 빼앗겨?”

“죄, 죄송합니다!”

“어이, 꼬마야. 너 자꾸 선을 넘는구나. 계속 이러면 이 아저씨도 참는 데 한계가…….”

“닥쳐!”

쉬이이잇!

아송이 순간 바닥을 차고 달려 나와 대주의 목을 향해 곧장 뻗어냈다.

타닷!

가볍게 물러난 대주가 몸을 비틀어 아송의 일검을 피해냈다.

하지만 그의 눈빛에는 이채가 서렸다.

분명 무공이라고는 구경도 하지 못한 아이 같은데 손속이 제법 맵지 않은가?

자칫 잘못 자라날 싹이라면 애초에 뿌리를 뽑아줘야 한다.

대주가 그대로 검집째로 휘둘러서 아송의 복부를 때렸다.

퍼억!

“크어억!”

아송의 몸이 활처럼 굽으면서 튕겨 날아갔다.

쿠당탕탕!

한참이나 바닥을 구른 아송이 배를 움켜쥐고는 구역질을 해댔다.

“우웩! 쿠웨엑!”

“이 개망나니 같은 새끼가! 아비어미를 잃어서 불쌍하게 여겨줬더니 감히 내 검을 빼들어? 싹수 노란 새끼!”

검을 빼앗겼던 무인이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달려가 아송을 사정없이 걷어차기 시작했다.

그는 분이 풀릴 때까지 아송을 두드려 팼다.

무공도 익히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검을 빼앗기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다니!

다시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리고 화가 날 일이지 않나?

그렇게 얼마나 분풀이를 했을까?

아송이 의식을 잃고 축 늘어진 걸 본 무인이 어깨를 들먹이며 씨근거렸고, 뒤처리를 모두 끝낸 무인들은 마을 어귀에 모여 입을 맞추고 철수하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 무렵, 아송은 가까스로 의식을 되찾았다.

마을에 남은 사람은 없었다.

산 자도, 죽은 자도.

황량한 폐허가 된 곳에 덩그러니 남은 아송.

문득 폐허를 휩쓰는 바람결에 인기척이 묻은 것을 깨닫고는 고개를 돌렸다.

남루한 차림에 머리가 희끗한 중년인.

행색을 보니 유랑 중인 듯하다.

그는 자신을 보더니 혀를 끌끌 찼다.

“어린 녀석이 제법 영물 같은 눈을 지녔구나. 보아하니 기구한 운명을 타고난 듯한데 나를 따라 가겠느냐?”

“…….”

아송은 멍한 표정으로, 그러나 단단한 눈빛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의 시야에는 여전히 황량한 폐허만 가득 들어왔다.

그런 아송을 한동안 바라보던 중년인이 혀를 끌끌 차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마을을 벗어나던 중년인이 문득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장대처럼 길게 늘어진 자신의 그림자 끝에 찢어진 깃발처럼 내걸린 소년.

폐허를 휩쓰는 바람이 그 소년을 더욱 아프게 보이도록 했다.

중년인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몸을 돌리며 툭 던지듯 물었다.

“돌처럼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더니 어찌 마음이 변했더냐?”

“어르신은 무림인이 아니니까요.”

“…….”

가볍게 넘긴 대답이었다.

이때 만약 조금만 더 이 대답을 신경 썼더라면.

그저 무인을 두려워하는 아이라고 단정하지 않았더라면.

하나 당시의 중년인은 아송의 대답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았다.

말속에 의미를 담기에는 아이의 상태가 너무나 좋지 않았기에.

“사흘 밤낮은 굶주린 몰골이구나. 먹어라.”

중년인이 던진 육포를 낚아챈 아송이 허겁지겁 뜯어먹었다.

그 모습을 보던 중년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놈 참, 눈빛 하나만큼은 살아 있구나.”

“어르신은 누구세요?”

“화공천이라 한다. 지금까지는 네가 박복했더라도, 오늘부터는 복이 터진 줄 알아라.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사람들이 만통지라 부르는…….”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뭐라?”

“어르신 곁에 오래 머물지 않을 거예요.”

“허허, 시간이야 무에 상관이겠느냐? 사제 간의 깊이는 시간이 아니라 마음으로 재어야 하느니라.”

“어느 쪽이든.”

무심히 뱉는 말에 만통지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묘한 아이.

지독한 슬픔을 지닌 것 같은데, 또한 지독하리만치 표현하지 않는 아이.

“아직 내 수양이 한참 부족하구나.”

만통지가 의미 모를 말을 중얼거리고는 아송의 두 눈을 가만히 보았다.

아송도 질긴 육포를 악착같이 짓이겨 가며 그 눈길을 담담히 마주했다.

* * *

“이제는 좀 아시겠습니까? 사부님.”

아송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쪽 어딘가를 응시하는 만통지의 눈을 보았다.

하지만 오래전 그날과 다른 점이 있다.

그날 만통지는 자신의 눈을 보았지만 자신의 속을 보지 못했고, 오늘은 자신의 속내를 보았지만 자신의 눈을 찾지 못한다는 점.

운명은 그렇게 미묘하게 엇갈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운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아송은 작금에 벌어진 상황을 온몸으로 즐겼다.

오래전 그날, 자신이 이루고 싶었던 광경이 눈앞에 찬란하게 펼쳐져 있지 않은가?

정도인들은 흑도인들에게 분개하며 살검을 휘둘렀고, 흑도인들은 정도인들을 향해 비겁하다며 혈겁을 일으키고 있다.

무인들이 온통 넘치는 분노 속에서 서로를 향해 칼부림을 하는 동안, 그가 안배한 백발광인들은 화려한 폭죽이 되어 온몸을 터뜨려 간다.

정화(淨化)!

바로 이 파양호에서 강호는 깨끗하게 씻기리라.

환희에 찬 아송이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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