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4. 광기의 업화(狂氣) 속에서도
꽈아앙! 꽝!
여기저기에서 백발광인이 메뚜기처럼 튀어 오르면서 온몸이 터져 나갔다.
먼발치에서 보면 그 모습이 마치 화산에서 뿜어내는 불길처럼 보였다.
그렇잖아도 분지 형태로 만들어진 비무장이지 않던가?
그 복판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일어나면서 폭발하니 인육파편은 마치 용암덩어리처럼 보인다.
백발광인들은 그야말로 움직이는 폭약이었다.
때문에 무인들은 그들을 피해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어쩔 줄을 몰랐다.
“크하하하하! 천벌이다! 천벌!”
“으히이익! 저, 저리 가!”
기겁한 무인들이 물러나지만 광기에 휩쓸려 살검을 휘두르는 백발광인을 완전히 피하진 못했다.
백발광인은 모두 초절정을 넘어선 자들.
이류와 일류 무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절정고수들도 그들의 손에 무참히 죽어나갔다.
어쩔 수 없었다.
맞서 싸우자니 너무 강하고, 마냥 피하자니 먹잇감이 될 뿐이었다.
그렇다고 작심하고 협공을 펼치면 호각지세를 벌이다가 결국 궁지에 몰린 백발광인이 폭약처럼 터져 버렸다.
그럴 때면 수십에서 수백 명의 무인들이 한 줌 재가 되어 스러져갔다.
그야말로 비극.
정도인들은 사파의 모략이라고 분개하고, 흑도인들은 정파의 꼼수에 당했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그러다 보니 경계지에서 대립하던 무인들은 백발광인이 아니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죽여 갔다.
“이 비열한 사파 쓰레기들아! 뒈져라!”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똥을 싸고도 더럽다고 손가락질이냐!”
“닥쳐라! 네놈들을 애초에 믿은 게 잘못이다!”
“흥! 네놈들이야말로 쓰레기 중에 쓰레기다! 쓸어 버려라! 한 놈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죽여라!”
“와아아아!”
챙챙챙! 까앙! 퍽! 챙!
아비규환이다.
비명과 고함이 난무하고 피와 육편이 허공을 가른다.
검기와 살기가 뒤섞여서 여차하면 목이 떨어져 나간다.
“치잇!”
단휘는 혀를 차고는 자신을 향해 떨어져 내리는 대부를 막아냈다.
쩌엉!
금속성이 울리면서 불꽃이 튄다.
순간 단휘가 안광을 빛내고는 기합성을 터뜨렸다.
“이여업!”
파파파팟! 쉬이이잇, 서걱!
재빠른 보법에 이어 횡으로 그은 검격에 상대의 머리가 허공으로 튀어올랐다.
촤아아아!
피를 분수처럼 터뜨린 정도인이 무릎을 털썩 꿇더니 고목처럼 쿵 넘어간다.
“헉, 헉, 헉……!”
가쁜 숨을 내쉰 단휘가 주변을 슬쩍 돌아보았다.
몇 명을 베었을까?
갑자기 사람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한 후부터 지금까지 정신없이 베었다.
뭔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을 했지만, 흥분에 미쳐서 칼부터 휘두르는 정도인을 말릴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했다.
흑도인이라고 다를 게 없었다.
그들 역시 광기에 휩싸여 맹목적으로 병장기를 휘두르며 살기를 뿌려대고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살아남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필사적으로 휘두르다 보니 한 사람, 두 사람, 세 사람…….
’그가 휘두른 검에 무인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고, 이후에는 관성처럼 살기를 뿌려대며 공격을 이어갔다.
그리고 지금.
촤아악!
바로 옆에서 칼을 대각선으로 내리치려던 정도인 하나가 손을 번쩍 들어 올린 채로 목석처럼 굳었다.
그의 가슴에서는 검첨이 튀어나와 있었고, 거기에서 뿜어져 나온 뜨끈한 핏방울이 단휘의 얼굴을 적신 것이다.
동시에 단휘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지금……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거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가 새삼스럽게 주변을 훑어보았다.
마치 주술에 당해서 환각에 빠졌다가 서서히 깨어나는 사람처럼 주변의 환경이 느릿한 속도로 보이고 있었다.
늘어지게 비명을 터뜨리며 쓰러져가는 무인, 허공을 가르며 솟구쳐 오르는 핏방울, 강기를 뿌리며 떨어지는 도검창, 고통에 차서 울부짖는 자.
“……시오?”
누군가 부르는 소리.
하지만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던 단휘는 의식하지 못했다.
곧이어,
“단 대주!”
송곳처럼 날카로운 목소리가 모든 환경을 찢어 버릴 듯 들려왔다.
“아! 현청 대협…….”
“괜찮으시오?”
“괜, 괜찮소.”
보아하니 자신을 공격하려던 정도인의 가슴을 뚫은 자가 바로 현청인 듯했다.
현청이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는 다그치듯 물었다.
“혹시 화산파의 제자들을 보지 못했소?”
“예? 아, 아직 못 봤소.”
“끄음. 만약에…… 만약 그들을 본다면 가급적 손을 섞지 말아주시길 부탁드리오. 내 직접 그들을 찾아 설득해 볼 터이니.”
“끄음.”
“어렵다는 것 잘 아오. 하지만 동문들과 검을 맞댈 수는 없소. 날 믿고 맡겨주시오. 부탁드리겠소.”
현청에 전에 없이 간곡한 표정으로 단휘를 보았다.
“알, 알겠소. 부디 뜻이 통하기를.”
“통할 거요. 반드시.”
“무운을 빌겠소. 부디 조심하시오.”
“단 대주도 조심하시길. 그럼…… 아! 운기를 할 때 인당혈과 태양혈에 어느 정도의 공력을 항시 남겨두는 걸 권해드리오.”
“인당혈과 태양혈에?”
현청이 고개를 끄덕였다.
“화산의 내공심법 중 정신을 맑게 해주는 운공법이 있는데, 인당혈과 태양혈에 항시 오 푼 이상의 공력을 남겨두게 되어 있소.”
이해가 될 만하다.
인당혈과 태양혈이라면 주로 상단전에 영향을 주는 곳이 아닌가?
정신적인 고통을 반감시키고, 머리를 맑게 해주는 것에는 확실히 효과가 있으리라.
하나 상단전을 보호하는 내공 운기법은 득보단 실이 많다.
특히 이렇게 난전이 치러지는 중이라면 더욱 그렇다.
상단전 쪽의 혈맥을 보호하는 것은 다른 부위보다도 특히 많은 공력을 소모하기 때문이다.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은 일을 하지 않아도 빨리 지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럼에도 인당혈과 태양혈에 일정량의 공력을 유지하도록 신경 쓰는 것은 단지 현청의 습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 습관이 운 좋게 빛을 발한 격이었다.
현청이 달려드는 적의 옆구리를 깔끔하게 베어내고는 물었다.
“단 형께서는 작금의 상황이 정상으로 보이시오?”
“무슨 말씀이신지……?”
“이상하지 않소? 백발광인들이야 원래 미친 인간들이라고 쳐도, 정사의 무인들이 너무 격해졌단 말이외다. 조금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뭔가 이상하다고 여길 만도 한데.”
“……!”
단휘가 흠칫거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확실히.
자신조차도 뭔가에 홀린 듯 살기를 뿌려대며 검초를 펼치지 않았던가?
돌이켜보면 지금처럼 미친 듯이 살검을 휘두른 적이 있었던가?
무엇이 이렇게 자신을 흥분시켰던 걸까?
“조심하시오.”
현청이 다시 한번 일러주며 손가락으로 미간과 관자놀이 부분을 툭툭 두드렸다.
인당혈과 태양혈 부근.
“알겠소.”
단휘의 대답에 현청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몸을 돌리곤 달려갔다.
달리는 와중에도 그는 검을 휘두르며 자신에게 달려드는 적들을 처리해나갔다.
하지만 먼저 공격을 가하진 않았다.
철저하게 호신을 위한 방어만 할 뿐.
단휘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주변을 경계했다.
현청의 말대로 오 푼 이상의 공력을 인당혈과 태양혈에 항시 머물도록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확실히…… 전부 미쳤어. 죄다 미쳐가고 있어!’
정사를 막론하고 모든 무인들이 광기에 사로잡혀 두 눈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단지 노을과 핏빛을 담아서가 아니다.
정말로 그들 모두 분기를 이기지 못해 미쳐가고 있었다.
머리가 맑아지니 확실히 보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 역시 그러한 자였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해진다.
바로 그때,
따악!
어디선가 들린 소리!
“……!”
단휘가 흠칫거리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맞아! 이 소리다!
처음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소리다.
누군가 딱딱한 돌을 서로 부딪치는 소리 같기도 했고,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 같기도 했다.
한데 이 소리가 묘하게 신경을 자극한다.
놀랍게도 그 소리가 들리자마자 정사의 무인들이 더욱 분기탱천해서 살검을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죽여랏!”
“이 빌어처먹을 새끼들! 다 뒈져!”
살기와 광기가 난무한다.
그때 송곳처럼 날아드는 목소리.
“뭘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느냐, 애송아!”
대도가 허공을 가르며 떨어진다.
단휘가 얼른 피하자 대도가 그대로 바닥을 갈랐다.
콰가가가각!
밭고랑처럼 길게 파인 땅을 보고는 단휘가 얼른 주먹을 뻗었다.
뻐억!
“커억!”
비명을 내지르며 날아가는 정도인.
단휘는 그대로 몸을 돌리면서 검을 사선으로 올려 베었다.
쉬카아앙!
마침 배후를 공격해 오던 또 다른 무인이 금속성과 함께 튕겨 나갔다.
“이 개새끼가!”
악에 받친 정도인이 어금니를 뿌득 갈고는 빠르게 몸을 회전하며 파고든다.
파파파파팡!
장력으로 공격을 튕겨내며 물러났지만 상대의 수준도 만만치가 않다.
하지만 어딘지 격식이 흐트러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성적으로 싸우는 게 아냐.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덮어놓고 움직이는군.’
연이어 물러나던 단휘가 중심을 앞으로 옮기면서 오른발을 뒤로 뻗어 지탱했다.
촤아아악!
반격의 기회!
마침내 일검을 뿌리려는 그 순간,
슈카아악!
빛 한 줄기가 세로로 그어지더니 검을 휘두르던 정도인이 우뚝 멈췄다.
동시에 그의 눈동자가 팔(八)자를 그리며 정수리 쪽으로 올라갔다.
“어어……?”
잠시 후 무인의 좌우가 정확하게 양분되면서 갈라지는 것이 아닌가?
츄아아아아아아아!
피분수가 터져 나오면서 그 뒤에 선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
백발광인!
히죽.
귀신처럼 섬뜩한 웃음을 흘린 백발광인이 목을 우두둑 꺾더니 성큼 걸음을 내딛는다.
쿠웅!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인데 천근추의 수법을 쓴 것처럼 땅이 흔들린다.
“헉……!”
광기를 잊은 단휘는 대신 공포를 느끼고 말았다.
주춤거리며 물러나던 그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만큼 백발광인이 뿜어내는 기도는 무시무시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모든 게 끝났다는 것을.
백발광인은 건드려선 안 될 폭약이지 않던가?
그를 죽이면 폭발해서 반경 십여 장이 초토화되고, 도망치면 어김없이 분골육참 당할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가운데 백발광인이 광소를 지으며 다가온다.
“크흐흐흐.”
마치 맛있는 먹잇감을 앞에 두고 설렌다는 표정.
‘끝, 끝났어. 다 끝났어.’
이곳이야말로 진짜 지옥이다.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
그때 다시 그를 공포로 몰아넣는 소리가 또 한 번 들렸다.
따악!
“크아아아아!”
귀에 또렷하게 박혀드는 그 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는 듯 백발광인이 괴성을 내지르며 몸을 던져왔다.
슈아아아악!
세상을 쪼갤 기세로 떨어지는 백발광인.
한 자가 넘는 도강을 뿌리며 그대로 떨어지는데,
쉬이이잇!
때마침 부는 검은 바람.
그리고 고막을 때리는 쇳소리!
쩌어어어엉!
“크읏!”
지독한 공명과 기파에 단휘가 어금니랄 까득 깨물었다.
힘겹게 고개를 들어 보니 왜소한 체구가 기적처럼 떨어지는 도신을 막아내고 있지 않은가?
연검에 공력을 주입한 채 수호귀처럼 버티고 선 여인.
“예…… 홍?”
“이 멍청아! 가만히 주저앉아서 죽을 셈이야?”
예홍이 까칠하게 소리친다.
“하, 하지만…… 이미 다 끝났어. 방법이 없잖아.”
“다 끝나긴…… 개뿔! 하늘이 무너져도…….”
예홍이 이를 빠득 갈고는 온힘을 다해 검을 휘두른다.
스카아아앙!
놀랍게도 백발광인이 중심을 잃고 주춤 멀어져간다.
동시에,
쒸아아아앙!
예홍의 손에서 강기를 품은 연검이 화살처럼 날아갔다.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야!”
날카롭게 울린 예홍의 외침에 이어 연검이 그대로 백발광인의 심장을 뚫었다.
푸욱!
순간 백발광인은 물론 주변의 모든 무인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몸을 던진다.
동시에 예홍도 몸을 돌려 단휘를 덮치면서 조금 전 갈라진 땅 속으로 몸을 묻었다.
뒤이어,
꽈아아아아아앙!
천지가 격동하면서 백발광인의 전신이 폭약처럼 터졌다.
화르르르르르륵!
육편이 튀어 오르고, 핏방울은 기름처럼 불에 타며 허공에 넘실거린다.
근방에 있던 무인들 대다수가 사상을 당했지만, 다행히 갈라진 땅속으로 몸을 숨겼던 예홍과 단휘는 무사할 수 있었다.
예홍이 몸에 묻은 그을음을 툭툭 털어내며 일어났다.
“절망할 시간에 희망을 보란 말이야, 멍청아. 그래야 발버둥이라도 치지.”
“홍…….”
“뭐야? 그 눈빛은?”
단휘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는 물었다.
“너, 내가 아는 그 예홍 맞아? 다른 인간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