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 파세공진음(破世共振音)
꽈앙!
“크아악!”
“살, 살려줘! 으아악!”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난무한다.
증오와 혐오, 공포만이 장악한 현장.
비무장 주변의 언덕을 둘러보는 맹주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나?
그야말로 생지옥이 아닌가?
이건 전쟁도 아니다.
그저 광기에 미친 자들이 서로를 향해 살검을 휘두르는 지옥의 현장이다.
“어쩌다가…….”
신음처럼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무인들의 광기가 자신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났다는 걸 직감한 순간 몸에 힘이 풀리면서 주춤거렸다.
아, 총군사 가후!
그는 어디에 있는가?
그라면 뭔가 묘수를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눈앞에 적비연이 거짓말처럼 나타났다.
“누굴 그리 찾으십니까? 설마 총군사를 찾으시는 건 아니겠지요?”
“비키게!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정신 차리십시오! 이미 듣지 않았습니까? 이 상황을 예견한 만통지의 의견을.”
“그런……!”
“어디까지 부정하고 싶으신 겁니까?”
적비연이 차가운 눈길로 응시하자 맹주의 눈빛이 침잠해졌다.
그때 옆에서 바람이 후웅 부는가 싶더니 극마가 나타났다.
“뭐하는 거냐? 이러다가 전멸한다.”
극마의 말에 적비연이 맹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래도 무림맹을 움직일 수 있는 분은 맹주님이십니다. 아직은 말이죠.”
“내가…….”
맹주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때였다.
“이노오옴! 당장 떨어지지 못할까!”
갑자기 고함 소리가 들리더니 허공을 가르면서 염능파가 뚝 떨어져 내리는 것이 아닌가?
쒸아아아아앙!
염능파가 다짜고짜 검강을 일으켜 극마를 노려왔다.
교패를 상대하고 있던 염능파는 극마가 맹주에게 이동하는 것을 보고는 급히 몸을 빼내어 이쪽으로 온 것이다.
만약 맹주가 두 사람을 한꺼번에 상대하다간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했기에.
한편 교패는 더 이상 단기접전이 의미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는 흑도 진영으로 뛰어들어 백발광인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반면 수황과 투왕은 여전히 묘청운과 진도천을 상대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쑤아앙! 쒸앙! 쉬이잇!
분기탱천한 염능파가 쉴 새 없이 맹공을 퍼붓자 극마가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야이 미친 영감탱아! 노망이 난 것이냐? 갑자기 왜 내 모가지를 따지 못해서 안달이냐! 이 찢어죽일 노인네야!”
“시끄럽다! 감히 비무 중에 규칙을 어긴 것도 모자라서 맹주님까지 급습하다니. 그러고도 네놈이 사파의 수장이라더냐? 부끄러운 줄을 알아라!”
“뭐라는 거야? 이 미친 영감탱이가! 내가 언제 급습을……!”
“닥쳐라! 비겁한 변명 따위!”
파파파팟!
“으익! 이 쳐 죽일 노인네가!”
쩌어엉!
참다못한 극마가 반격을 시도하면서 금속성에 허공에 쩌렁쩌렁 울렸다.
촤아아아악!
땅바닥에 깊은 발자국을 새기며 미끄러진 염능파가 가까스로 멈춰 서며 심호흡을 했다.
“흥! 고작 이 정도더냐?”
“뭐가 어쩌고 어째? 내 진심을 다했다면 수수깡 같은 네 몸뚱이는 진작……!”
극마가 마구 말을 쏟아내는데 적비연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 모습을 맹주와 염능파가 이채 서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래도 사파를 호령하는 흑천련주가 아닌가?
한데 적비연이 단지 손을 들어 올리는 것만으로도 분을 삭이고 입을 다물다니.
이래서야 마치 흑천련주가 적비연의 수족 같은 느낌이지 않은가?
적비연이 맹주를 빤히 보며 물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그래도 내공이 심후한 자들은 아직까진 맹주님의 명이 통할 겁니다. 돌이킬 수 없어지기 전에 손을 쓰시죠.”
“그건 또 무슨 말이오? 적 가주!”
염능파가 나름 예의를 차려서 물었다.
적비연이 정중하게 말을 하고 있으니, 그 역시 말을 함부로 뱉진 않은 것이다.
“무슨 말이긴? 이곳에 있는 놈들이 죄다 파세공진음(破世共振音)에 미쳐 날뛰기 전에 손을 쓰자는 거지.”
“파세공진음?”
염능파가 눈살을 잔뜩 찌푸리고 묻자, 극마가 코웃음을 치고는 답했다.
“그렇다. 지금 네놈 눈에는 미쳐 날뛰는 무인들이 보이지도 않느냐? 하긴, 네놈도 미쳐 날뛰는 중이었으니 몰랐을 수도 있지. 그래도 이젠 이성이 좀 돌아온 것 같으니 정신 차리고 살펴보지 그러나?”
“노옴! 아까부터 말투가 무례하기 짝이…….”
이번엔 염능파의 말을 맹주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대신 맹주는 극마를 빤히 보며 물었다.
“파세공진음이라 하면…… 상고시대부터 전설처럼 내려오는 사술이 아니오?”
“뭐, 사술이라면 사술이고. 그것도 무공의 일환이라고 본다면 무공이겠지.”
“하지만 파세공진음은 내공을 필요로 하는 무공이 아니라고 들었소만.”
“나참, 답답하긴! 이래서 정도인들은 짜증 난다니까. 지금 그딴 게 중요해? 어엉?”
극마가 투덜거리며 소리쳤다.
파세공진음.
맹주의 말대로 상고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의 무공이다.
딱히 내공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일종의 기교라고 볼 수 있다.
아무나 할 수 없으니 이능이라고도 볼 수 있겠다.
파세공진음의 원리는 간단하다.
모든 사물에는 고유의 파동이 존재한다.
인간도 마찬가지.
이 파동을 정확히 일치시키면 공명하게 되는데, 인간의 경우 극도의 흥분이나 분노, 또는 우울과 공포 등을 겪게 된다.
한마디로 특정한 파동을 지닌 소리만으로 상대의 정신을 미치게 만들 수 있단 말이다.
통상적으로 무인들이 말하는 음공과 다른 건 이 파세공진음이 바로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즉, 상단전을 보호할 만한 수단이 없다면 파세공진음에 당할 수밖에 없다는 뜻.
대체로 초절정고수에 이르러야 상단전을 이용할 수 있게 되니, 대다수의 무인은 이 파세공진음에 속수무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상단전을 이용할 수 있는 초절정 이상의 고수라도 파세공진음에서 아예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래서인가……?”
맹주가 다시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이성은 적비연의 말을 따라야 한다고 소리치는데, 계속해서 의심과 흑도인들에 대한 모종의 분노와 경계심만 치솟는다.
한데 그 모든 것이 파세공진음 때문이라면?
그때, 지금까지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던 소리가 귓가에 날아들었다.
따악!
순간 맹주는 물론 염능파도 눈을 크게 뜨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소리!
두근! 두근!
역시다.
이번엔 알고 들었는데 묘하게 마음이 동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단전에서부터 공력이 솟구치면서 투기심을 자극한다.
아니나 다를까 다른 무인들은 더욱 격분하여 살기를 뿜어낸다.
“맹주님!”
염능파도 심상찮은 것을 느끼고는 맹주를 돌아보았다.
맹주 허위청이 주먹을 꾹 말아 쥐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본맹 이 흑천련과 손을 잡아야 할 것 같소.”
“예?”
“우리가 총군사에게 당한 것 같소.”
“그 무슨……!”
맹주는 더 이상 길게 말을 잇지 않았다.
대신 발끝으로 땅을 툭 찍어 차고는 허공으로 높이 솟아올랐다.
그가 정점에 다다랐을 때, 공력을 발출하자 마치 보이지 않는 바닥이라도 디딘 것처럼 허공에 멈췄다.
허위청이 사방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무림맹주로서 명한다! 지금부터 본 맹은 흑천련과 손을 잡고 천림을 상대한다!”
“……!”
공력이 담긴 맹주의 목소리는 무림인들을 더욱 혼란하게 만들었다.
“방, 방금 그게 무슨 소리지?”
“글쎄, 우리가 흑천련과 손을 잡는다고?”
“분명히 그랬지?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지?”
몇몇 무인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다수의 무인들은 맹주의 말을 무시했다.
오히려 맹주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욕하는 자들마저 있었다.
그런 자들은 파세공진음에 완전히 장악당한 것이다.
사파 무인들도 혼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뭐야? 지금 저 맹주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우리가 저놈들과 손을 잡는다고?”
“크하하! 너희 맹주가 공포에 떨다가 미쳐 버렸나 보다!”
몇몇 사람들이 동요했지만 전쟁의 양상이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이미 파세공진음에 휩쓸린 사람들은 서로를 향한 분노만 표출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편 그런 군중들 사이에서 이채를 띤 채 맹주를 바라보는 자도 있었다.
바로 파세공진음을 일으킨 천림주, 아송이었다.
그가 죽립을 깊이 눌러쓰며 입매를 치켜 올렸다.
“호오. 생각보다 빨리 반응하시는군. 어째서일까?”
그의 시선이 군중들 사이를 헤집으며 나아가 반대편에 선 죽립인을 보았다.
죽립을 쓴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상대는 바로 무림맹 총군사 가후였다.
아송의 눈빛을 읽은 가후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신도 맹주가 어째서 저토록 빨리 이성을 차린 것인지 모르겠다는 뜻.
분명 이번 싸움에서 맹주의 역할은 중요했다.
때문에 비무가 시작되기 전부터 여러 작업을 해두었다.
맹주가 먹는 음식, 물과 술 심지어 수면 중에 피워두는 향초까지.
모든 게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그래서 파세공진음에 가장 먼저 당할 자는 바로 맹주였다.
한데 어찌 된 것인지 통하지 않았다.
도대체 왜?
가후의 시선이 허공에 뜬 맹주에게 향했다.
한편 맹주는 아수라장이 된 분지를 내려다보면서 내심 혀를 찼다.
‘이번에도 늦은 것인가?’
적비연과 함께 자신을 찾아온 은하란은 만통지의 말을 전하면서 몇 가지 당부를 해왔다.
“이제부터 맹에서 제공되는 음식을 드시지 마세요. 음식에 어떤 짓을 했을지 알 수 없으니까요. 가령 어떤 사술이 잘 통하도록 체질을 개선하는 이물질을 탈 수도 있고요. 향초도 밤마다 전부 갈아두세요.”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딸이 하는 말이라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음식은 모두 시종들에게 나눠주고 비밀리에 준비한 요깃거리로 배를 채웠다.
‘그나마 그 효과를 본 것인가?’
정말로 음식에 뭔가 들어 있었는지 알 수 없다. 향초도 마찬가지.
다만 은하란의 말이 사실이었다면, 자신은 지금쯤 파세공진음의 첫 번째 제물이 되어 재앙을 불러들이고 있었을 터다.
그리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해진다.
맹주는 다시 그날 은하란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하면, 천림은 무림인의 전멸을 노린단 말인가?”
“만통지는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했어요.”
“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오래전, 총군사가 어머니를 독살하려고 한다는 말을 들었다면, 당신은 지금처럼 반응하지 않았을까요?”
“……!”
“믿든 안 믿든 당신 자유입니다. 하나, 분명한 사실은 내가 당신 딸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날 거라는 거죠.”
“아무리 그렇다고 한들…… 앞으로 만들어질 비무장은 철저한 감시 속에서 공사를 진행할 걸세. 그 어떤 폭약도 심어놓을 수 없도록 정사 수뇌부가 합동 감시를 할 거란 말이네. 한데 무슨 수로 무림인 전체를 말살할 수 있단 말인가?”
“모르시겠어요? 천림. 그 자체가 무림을 전멸시킬 수 있는 폭약 그 자체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사혈곡에서 만들어낸 무인들처럼요.”
‘끄음. 그 말 그대로구나.’
은유나 비유가 아니다.
정말 천림에서 만든 백발광인이 폭약이 되지 않았나?
어지간한 벽력탄 뺨칠 정도의 폭기를 품고 있다.
당최 인간에게 어떤 사술과 술법을 걸면 저리 변한단 말인가?
여전히 많은 정도인들이 맹주의 말조차 무시한 채 살기를 뿌려대며 칼을 휘두른다.
그러다가 중간중간 나타나는 백발광인들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장렬히 전사한다.
분지를 에워싸고 백발광인은 밀물처럼 계속해서 밀려들고 있다.
중원 방방곡곡에 사혈곡 같은 곳을 많이도 만든 것이리라.
“끄음!”
맹주가 다시 한번 주먹을 콱 말아 쥐고는 소리쳤다.
“다시 말한다! 본 맹은 지금부터 흑천련과 동맹을 맺고 천림과 맞서 싸운다!”
이번엔 더 강한 공력을 실어 외쳤다.
효과는 있었다.
살검을 펼치던 상당수 무인들이 멈칫했으니까.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맹주의 말을 들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표정이다.
맹주의 시선이 이번엔 적비연에게 향했다.
적비연이 희미하게 웃어 보이고는 바닥을 툭 찍어 차고는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그 역시 허공에 디딤돌이라도 있는 것처럼 꼿꼿하게 서서는 맹주에게 말을 건넸다.
“수고하셨습니다. 이젠 제게 맡기시지요.”
“아무리 자네라도 이 상태로는 손을 쓸 수가…….”
“믿고 맡겨주시죠.”
적비연의 말을 들으면서 공력이 다한 맹주가 서서히 아래로 내려갔다.
한편 맹주에 이어 적비연까지 허공으로 솟아오른 걸 본 아송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또 자넨가? 아무리 자네가 뛰어난 기재라도 이번만큼은 어쩔 수 없을 텐데.”
그 어떤 무공으로도 제압할 수 없는 이능, 그게 바로 파세공진음이니까!
따악!
아송이 손가락을 다시 튕기자 또 한 번 기운이 격동한다.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만 같은 폭기!
동시에 분지에 소용돌이치는 악감정은 더욱 극에 달한다.
분노, 절망, 원망, 비소, 광기……!
꽈아아아앙!
마침내 어디선가 백발광인이 또 폭발했다.
그 폭기에 휩쓸린 무인 백여 명이 순식간에 비명횡사한다.
악순환이다.
폭기를 간신히 피한 정사의 무인들은 더욱 불같은 분노를 뿜어낸다.
“이 비열한 새끼들!”
“비열한 건 네놈들이다!”
챙챙! 푸욱!
“크악!”
난전의 연속이다.
바로 그때 적비연이 벽력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동작 그마아아아안!”